소설리스트

학사신공-748화 (505/2,000)

748화. 흑풍족(黑風族)

*

‘매일 몇 만 명씩이나?’

영계에는 수사들이 굉장히 많을 거라 예상은 했지만 하루에 대형 성을 드나드는 저계 수사의 수가 수만 명이라는 소리에 한립은 입 꼬리를 꿈틀했다.

“제 부질없는 소망이었습니다. 삼경이 이리 넓은데 범인들이 통제하는 구역은 조족지혈(鳥足之血)에 불과하니 선사들께서 안중에 두실 리 없지요.”

방 부인이 가볍게 탄식했다. 그녀의 말투에서 불만을 읽은 금포 사내 등은 쓴웃음을 지을 뿐이었다. 범인과 수사간의 갈등이야 누구나 아는 사실이었으니 겨우 일개 축기기 수사가 함부로 답할 내용이 아니었다.

그때 건물 밖에서 누군가 고해왔다.

“부인께 아룁니다. 조 성주님의 집사를 모셔왔는데 안으로 들게 할까요?”

“그래, 어서 들어오시라 하거라.”

“예!”

문이 열리고 세 사람이 들어왔다. 그 중 하나는 회색 장포 거한이었고 나머지 둘은 맑은 인상을 가진 소녀와 머리가 하얗게 센 노인이었다. 한립의 옷자락을 꽉 쥔 여자아이는 뒤따라 들어온 사람들을 보곤 희색을 드러냈다.

“정말 아가씨입니다. 대아 아가씨, 괜찮으신 거예요? 어디 좀 봐요.”

맑은 인상의 소녀가 아이를 보자마자 달려와 무릎을 땅에 대고 목이 메어 중얼거렸다. 그러자 처음으로 아이는 한립에게서 떨어져 소녀를 안고 훌쩍이기 시작했다.

“저희 아가씨를 찾아 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방 부인! 정말 이 늙은이는 어떻게 어르신께 이 일을 아뢰어야할 지 막막하던 차였습니다.”

노인은 희색이 만연해 방 부인을 향해 감사 인사를 했다.

“제가 아니라 여기 한 부대장께서 아가씨를 구한 것입니다.”

“공자님, 정말 감사드립니다. 늙은이가 어르신께 이 일을 고하면 공자께 꼭 보답을 하실 것입니다.”

“귀 댁 아가씨를 구한 것은 사소한 수고이니 보답까지는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저 아이를 잘 데려가시면 됩니다.”

한립은 노인을 위아래로 훑어 평범한 사람이라는 것을 확인하고는 손을 저었다. 그래도 노인은 수차례 감격해 인사를 하고는 곧 여자아이와 소녀를 데리고 그곳을 떠났다.

대아라는 아이는 더는 한립에게 달라붙어 있지 않았지만 검은 눈동자에 아쉬움이 가득 담겨 문을 나서면서도 계속 뒤를 돌아보았다. 여자아이의 귀여움에 한립은 충동적으로 그녀에게 우스꽝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가 곧 평소의 얼굴로 돌아갔다.

그런 한립의 행동에 여자아이가 재미났는지 까르르 웃음을 터트렸고 즐거운 미소를 머금은 채 건물을 나섰다.

“그간 정이 많이 드셨나 봅니다. 허나 조 성주가 정말 무사하다고 해도 성이 함락되고 수많은 사람들이 괴수 무리에 당했으니 아무리 변명할 거리가 많아도 벌을 피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저 집안도 앞날이 그다지 밝지는 않겠지요.”

금포 사내는 줄곧 한립을 주시하다 입을 열었다.

“그건 제가 신경 쓸 문제가 아닙니다. 조 씨 집안의 앞날이야 그 댁 사람들이 걱정하면 될 일이니까요.”

“하하, 제가 괜한 말을 했습니다. 방 부인, 한 형께서 돌아왔으니 이제 몇 가지 일을 짚고 넘어가야겠지요?”

금포 사내가 웃음을 흘리더니 고개를 돌려 방 부인을 바라보았다.

“아, 그래야지요. 한 공자께 도움을 청할 일이 있습니다. 아무래도 이번에 진 선사와 같이 어딜 다녀와 주셔야겠습니다.”

“대단한 일이 아니고 제 능력 범위 내에서라면 말씀 해보십시오. 부인과 진 선사의 일이 저 때문에 지체 되어서는 안 될 테니 말입니다.”

“그게 사실은, 제가 이끌고 있는 무리 중 하나가 우연히 결단의 확률을 크게 높일 수 있는 물건을…….”

방 부인은 생각을 정리하며 천천히 이야기를 풀어나갔다. 그러나 한립은 묵묵히 그것을 듣고만 있어 아무도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짐작할 수 없었다.

*     *     *

그 시각, 만 리 밖 수풀 위에서 보라색 빛이 쾌속으로 질주하고 있었고 그 뒤를 크고 작은 표금수가 쫓고 있었다.

큰 표금수는 체형이 엄청났고 작은 것은 남색 빛으로 반짝여 며칠 전 안원성에 나타났던 우두머리 격의 요수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들 앞에서 보라색 빛이 번뜩이면서 누군가 법기를 타고 날아가는 모습이 언뜻언뜻 보였다. 곧 보라색 빛이 흩어지고 보라색 장포를 입은 거한이 나타났다.

그는 네모난 물건을 밟은 채 급격히 아래로 추락하고 있었는데 보아하니 통제를 잃은 듯했다.

그 모습을 보고 뒤쪽의 표금수들은 크게 기뻐하며 그 뒤를 쫓았고 그 중 큰 것은 날개를 펄럭여 무수히 많은 노란 빛을 뿜어냈고 작은 것은 입을 벌려 천둥소리를 내며 남색 뇌전을 분출했다.

보라색 장포 거한이 그것을 보고 다급히 발을 구르며 추락하는 속도를 높였다. 그는 유성우처럼 쏟아지는 공격들을 간신히 피하며 아래쪽 수풀 속으로 자취를 감추었다.

요수들은 수풀 속으로 들어간 그를 급히 쫓아 내려가지 않고 수풀 위를 선회하며 기괴하게 지저귀며 울어댔다.

그리고 잠시 후 희미한 붉은 빛이 하늘 끝에서 날아와 두 표금수 옆에 멈추더니 빛이 가시고 눈꼬리가 길고 짙은 눈썹을 지닌 궁장 여인이 나타났다.

“이제야 저 자의 영석이 다해 영구를 쓰지 못하게 된 것이냐? 쓸모없는 것들! 겨우 연체사 하나를 잡는데 이리 오래 걸리다니. 본 궁이 법력 파동을 억제해야 하지만 않았다면 진작 잡았을 텐데.”

궁장 여인은 흉흉한 기세를 드러내며 아래쪽을 훑더니 불쾌한 낯으로 두 요수들을 바라보았다. 사나운 표금수들은 여인의 눈빛에 겁을 먹고 날개를 파닥거리며 끙끙댔다.

“흥! 본족 혈맥을 어찌 인간들의 수중에 둘 수 있겠느냐. 어떤 대가를 치르든 반드시 아이를 데리고 돌아갈 것이야. 조 성주를 잡았으니 아이의 행방을 알 수 있겠지. 내 직접 여기까지 온 것이 헛되지 않았구나.”

여인의 얼굴에 이상하다는 표정이 스쳤고 직접 아래쪽으로 움직이지 않고 무언가를 기다렸다.

곧 수풀 속에서 굉음이 들리며 짐승이 울부짖는 소리와 주먹이 훅훅 내리 꽂히는 소리 등이 울렸다.

궁장 여인은 표금수 두 마리와 허공에 떠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잠시 후, 소란이 가라앉고 검은 기운 세 개와 노란 기운 한 덩이가 솟아올랐다. 바로 뱀 요수 세 마리와 체격이 네다섯 장은 되는 거대 사충수였다.

뱀 요수의 손에는 거의 반죽음이 된 인간이 들려 있었는데 이곳에서 달아난 지 얼마 되지 않은 보라색 장포 거한이었다.

그의 몸은 피로 얼룩져 있었고 팔 한쪽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네 요수는 조심스럽게 보라색 장포 거한을 궁장 여인 앞에 두고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이번 일은 잘 처리했다. 이후 큰 상을 내릴 것이야.”

여인은 인간 사내가 아직 숨이 붙어 있는 것을 보고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뱀 요수들과 거대한 사충수는 괴상한 소리를 내며 기뻐했다.

“말도 안 돼. 어찌 8급 화형기 요수가 천원경에!”

보라색 장포 거한이 문득 정신을 차리고 궁장 여인을 발견하고는 기겁했다.

“8급 요수? 대충 그렇다고 치자꾸나. 허나 지금은 내가 네게 물을 때이지 네가 입을 열 차례는 아니다. 본 궁은 겨우 범인의 말에 대답해줄 생각이 없거든. 내 말을 잘 듣고, 본 궁이 찾는 이의 행방을 말해준다면 깔끔하게 널 죽여줄 것이다. 그렇지 않고 내 심기를 상하게 하면 혼백을 뽑아 고문해야겠지. 그러면 어떻게 될 지는 네가 더 잘 알 것이다.”

여인의 자태는 우아했지만 하는 말은 더없이 냉혹했다. 그녀의 말을 듣고 보라색 장포 거한의 안색은 더욱 일그러졌다.

“선배님께서는 요족의 거물이시면서 겨우 범인인 연체사에게 무슨 볼 일이 있다는 것입니까? 아무래도 사람을 잘못 보신 것 같습니다.”

그 말에 궁중 여인은 한기를 번뜩이며 손가락을 튕겼다.

푹!

손가락 굵기의 붉은 빛이 날아가 거한의 어깨를 꿰뚫었다. 거한은 악! 하고 비명을 질렀고 타는 냄새가 코를 찌르더니 어깨에 거무튀튀한 구멍이 뚫렸다.

“질문은 내가 한다고 말했을 텐데? 다시 이런 실수를 하면 네 사지를 잘라낼 것이야.”

“알겠습니다. 무엇이든 하문하시지요.”

“대아라고 불리는 어린 아이의 행방을 찾고 있다. 유일한 손녀의 행방을 모른다고는 하지 않겠지?”

“대아! 당신은 흑풍족(黑風族)에서 왔군!”

보라색 장포 거한은 화들짝 놀라 소리를 높였다.

“그렇다. 보아하니 너는 아이의 몸에 우리 흑풍족의 피가 흐른다는 것을 진작 알고 있었구나! 네가 손녀를 데리고 성에서 두문불출하지만 않았어도 어찌 본궁이 이런 괴수 따위들을 시켜 안원성을 공격하게 했겠느냐. 이제 성도 함락되어 네 손녀를 찾을 길이 없으니 너를 찾아 온 것이다.”

“내 이럴 줄 알았지. 흑풍요왕의 신통에 어찌 평생 이 일을 숨길 수 있으리라 여긴 것인가…….”

보라색 장포의 거한은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혼자 중얼거렸다.

“너희 인간들의 담은 여간 큰 것이 아니더구나. 감히 우리 흑풍족 소주를 유혹하고 거기다 성족 혈맥을 품고 달아나다니 말이야! 설마 삼경으로 돌아가 숨으면 우리 흑풍족에서 찾아내지 못할 것이라 여긴 것이더냐?”

궁장 여인이 눈썹을 치켜세우며 목소리도 점차 음산해졌다.

“딸아이는 이미 대아 때문에 목숨을 잃었소! 더 어쩌란 말이오!”

보라색 거한은 이미 죽음이 두렵지 않은 듯 이를 갈며 소리쳤다.

“어쩌기는 당연히 아이를 흑풍궁(黑風宮)으로 데리고 가야지. 비록 반인반요이지만 우리 성족의 혈맥이니 어찌 인간들 사이에서 자라게 둘 수 있겠느냐. 네 딸은 일찍 죽은 것이 다행인 줄이나 알거라. 됐고, 슬슬 귀찮아지기 시작하니 본론만 말해라. 아이는 어디 있지?”

궁장 여인이 거한을 보는 시선이 점점 서늘해졌다.

“나는 모르오!”

표정이 시시각각 변하던 보라색 장포 거한이 힘들게 입을 열었다. 궁장 여인은 그의 대답을 예상했다는 듯 한손을 들어 허공을 쥐었다.

그러자 거한의 몸이 훅 하고 여인의 손바닥으로 빨려 들어가 상대에게 머리통을 잡혔다.

“잘 봐두거라. 이 세상에서 보는 마지막 풍경일 테니.”

냉랭한 여인의 말과 함께 손가락에서 남색 빛이 번뜩였다. 보라색 장포 거한은 눈을 뒤집으며 정신을 잃고 말았다.

얼마 후 완전히 말라비틀어져 줄어든 시체가 허공에서 떨어져 수풀 속으로 사라졌다.

“성가시게 되었구나. 늙은이가 이렇게 꽉 막혀서야! 심복들에게 자신이 열흘 후까지 나타나지 않으면 손녀를 죽이라고 명해놓다니. 아무리 잔인한 짐승도 제 자식은 잡아먹지 못한다는데 인간이란! 가문의 대가 끊기더라도 흑풍족에 고계수사가 더 느는 것을 막으려 들다니. 겨우 연체사였기에 망정이지 수사였다면 아주 걸출한 인물이 되었겠구나. 성이 함락당할 때 수하들과 함께 아이를 달아나게 하였다는데……. 너희는 정말 그날 내가 찾는 아이를 본 적이 없더냐?”

궁장 여인이 중얼거리다 곁의 요수들을 훑으며 물었다. 그러나 요수들은 서로 시선을 마주치며 한동안 괴상한 소리를 내며 공손한 표정을 지었다.

여인은 미간을 좁히더니 손바닥을 뒤집어 피처럼 붉은 구슬을 꺼냈다.

한 손으로 법결을 날리며 묵묵히 주술을 읊조린 그녀가 입에서 핏물을 뱉어 구슬을 감쌌다.

그러자 검붉은 구슬의 표면에 기이한 광채가 흐르기 시작했다. 잠시 그것을 응시하던 여인은 피곤한 기색으로 눈을 감았다 떴다.

“내가 찾는 아이는 아직 살아있고 이 근방을 벗어나지 못했다. 무슨 수를 쓰던 간에 3일 안에 아이를 찾아내야 한다! 만일 실패한다면 너희는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허나 본 궁은 항상 상벌이 분명하니 안원성을 함락한 공로로 상을 내리겠다. 이 단약들은 수백 년의 수련을 대신 해줄 터이니 삼키거라. 아이의 행방만 찾아낸다면 더한 보상이라도 할 것이야.”

궁장 여인이 손가락을 퉁기자 그윽한 향이 풍기는 바람이 하얀 단약을 품고 요수들에게 날아갔다.

저계 요수들은 기뻐하며 서둘러 단약을 삼켰고 잠시 즐겁게 재잘대다가 요기 덩어리로 변해 날아갔다.

“의식과 법력을 쓰기만 했다면 저런 멍청한 것들을 부릴 일도 없을 텐데. 허나 더는 시간을 끌 수 없으니 어서 일을 해결하고 떠나야 한다.”

궁장 여인은 탄식하듯 말했다.

그녀는 손을 저어 붉은 기운을 번뜩였고 손수건 모양의 보물로 온몸을 감싸 푸른 연기처럼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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