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2화. 푸른 늑대, 붉은 구렁이 그리고 표금수(豹禽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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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금포 사내는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고 방 부인이 조용히 한립과 대화를 주고받았다. 그녀는 에둘러 그의 배경을 물어왔지만 한립은 모호하게 답하며 대충 넘어갔다.
방 부인은 굳이 이전의 출신을 캐묻지 않았고 도리어 몇 가지 사실을 알려 주었다. 금포 사내와 반청을 포함한 수사들은 사문의 명을 받아 안원성이 요수의 난을 이겨내는 것을 돕기 위해 온 것이었다.
첫째는 안원성 고위층과 금옥문이 다소 친분이 있었고, 둘째는 요수의 난이 일어날 때마다 저계 수사들이 고비를 넘기고 한 단계 높은 경지로 들어서곤 했기 때문이었다.
안원성에 제자를 파견한 곳은 금옥문 뿐만 아니라 열댓 개의 작은 종문들도 있었다. 이제 천동상호의 사람들도 안원성에 들어왔으니 관례대로 이번 요수의 난에서 징발을 피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래서 방 부인은 한립이 장규의 보좌를 맡아 호위병들을 통솔하는 일을 돕도록 명했고 한립은 고개를 끄덕여 이에 동의했다. 방 부인이 그것을 보고 흡족해하면서 곧 그에게 물러가 쉴 것을 권했다.
그녀의 말에 따르면 요수의 난은 언제라도 터질 수 있었고 이번에는 여러 짐승 무리가 연합한 요수대란이라 항시 힘을 비축해 둬야 한다고 했다.
한립이 빙그레 웃으며 별채를 떠났다. 문이 닫히자, 방 부인은 얼굴에 미소를 지우고 고민이 가득한 표정을 했다.
“어찌 부인께서는 인재가 아까워 생각을 바꾸신 것입니까?”
금포 사내가 털을 쓸어내리며 물었다.
“그렇기는 합니다. 어린 나이에 저 정도 수행을 지녔다면 몇 년 더 육성하면 화 어르신 같은 존재가 될지도 모를 일 아닙니까. 그러지 말고 원래 계획대로 요수의 난이 지나고 장규나 류 씨 형제에게 따라나서라 하면 안 되겠는지요.”
방 부인이 허심탄회하게 물었다.
“장 대장과 류 씨 형제는 이미 만나 보았습니다. 만일 금강결에 정통한 저 자가 나타나지 않았다면 그럭저럭 쓸 만했겠지요. 하지만 더 적당한 인물이 나타났으니 그 물건을 얻을 가능성도 커지지 않았겠습니까. 금강결 3성을 익힌 후에는 중계나 저계 영기(靈器)에 당할 리 없고 괴력을 발휘하니 훨씬 도움이 될 것입니다. 일단 그것을 지키는 요수들을 놀라게 하면 앞으로 두 번 다시는 기회가 없을 것입니다. 부인, 반 사제가 결단하기를 원치 않으십니까?”
금포 사내가 고개를 저었다.
“진 선사의 말씀이 일리가 있습니다. 아무리 저 자가 제2의 화 어르신이 될 잠재력이 있다 해도 아들 녀석의 결단보다 중요하지 않지요.”
“현명한 결정이십니다! 요수의 난이 일어났을 때가 가장 좋은 기회입니다. 그 물건을 지키는 요수들도 동요하지 않을 수 없을 테니 달아날 기회가 아예 없는 것도 아니고요. 이번 일에 연체사가 위험을 감수해야 하기는 하지만 반드시 잘못된다는 보장도 없습니다. 일이 성사 되면 진 모가 그를 섭섭지 않게 대우할 것이니 부인께 원한을 품을 일도 없을 것입니다.”
금포 사내는 마음이 조금 편해져 미소를 지었다.
“진 선사의 법력이 고강하니 그것만 얻는다면 앞으로 결단은 문제없을 겁니다. 제 아들 녀석을 잘 좀 봐주십시오.”
“하하, 반 사제의 자질도 저만큼 뛰어납니다. 그러니 제가 성공한다면 사제도 그것을 갖고 분명 결단을 할 수 있을 겁니다. 부인께서는 마음 푹 놓으시지요.”
금포 사내가 남색 장포 청년을 보며 온화하게 말했다. 그러자 반청이 눈치있게 자신의 사형에게 예를 올리며 감사를 표했다. 그리고 금포 청년 곁의 남녀도 서로 시선을 마주치며 회심의 미소를 지어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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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한립은 영계에서 처음 만난 자들이 자신을 가지고 이런 계략을 꾸미고 있을 줄은 생각도 하지 못했다. 그가 분명 이 일을 알았다면 쓴 웃음을 금치 못했을 것이다.
겨우 일개 범인들과 축기기 수사들이 감히 화신기 수사를 이용하려 들다니 죽고 싶어 환장한 것이 아닌가. 그가 법력을 쓰지 못해도 그들을 세상에서 지워버릴 수단은 많았다.
그러나 이런 사실을 모르는 한립은 한동안 천동상호에 남기로 마음먹고 별채를 벗어나 흉터 거한을 만나러 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한립은 부대장으로 임명되어 다른 호위병들의 질투를 샀다. 하지만 한립은 그들 앞에서 약간의 실력을 발휘해 모두의 입을 다물게 만들었다.
이렇게 그는 단체 공간이 아닌 조용한 개인 공간에서 머물게 되었다. 그 후 며칠 동안 그는 방에만 머물며 금강결 5성 법결을 반복해서 외웠다.
이제 금강결을 익히려면 반드시 주변 영기를 체내에 주입해야 했다. 낯선 수련 방식에 일단 익숙해진 후에야 진정으로 수련을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사흘 후 한립이 객잔을 나섰다가 반나절 만에 돌아왔다. 몇몇 자들 외에는 대부분이 그가 나갔다 온 지도 몰랐다.
댕! 댕!
이레째 되는 날. 방안에서 가부좌를 하고 침상에 앉아 있는데 방 밖에서 종소리가 크게 울려 퍼졌다. 그 소리가 어찌나 큰지 객잔이 진동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한립이 눈을 번쩍 떴다.
종소리가 연달아 울렸고 이에 호각 부는 소리가 화답하듯 들려와 성 안에 있는 자라면 듣지 못할 리가 없었다. 미간을 좁힌 그가 바로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서쪽 별관은 이미 혼란스러워 호위병들이 병장기를 들고 나와 두려운 기색으로 웅성거렸다.
“다들 그리 긴장할 것 없다! 요수의 난이 시작되어도 우리가 나설 차례가 되려면 아직 멀었다. 그러니 방으로 돌아가 휴식을 취해라. 우리가 나설 차례가 되면 휴식은 꿈도 꾸지 못할 테니!”
장규가 굵은 목소리로 말하며 호위병들을 훑자 다들 얌전히 방으로 돌아갔다.
“한 형제는 일단 나와 함께 가서 요수의 난의 규모를 파악합시다. 요수 대란이라고 해도 짐승들의 종류에 따라 차이가 큽니다.”
장규가 한립을 발견하고 다가왔다.
“장 형의 말씀대로 따르겠습니다.”
한립이 일순 멈칫하다 바로 응답했다. 솔직히 일반 짐승들과 저계 요수가 무리를 이룬 ‘요수의 난’이란 것에 별 관심은 없었지만 그래도 조금은 궁금했기 때문이다.
두 사람은 객잔을 나와 거리로 나섰는데 분위기가 이전과 확연히 달라져 있었다. 사람들로 가득 차 있던 거리는 한적해졌고 몇몇은 황급히 어딘가로 향했다.
대신 거리를 돌아다니는 요수 마차는 늘어났는데 한 마리 혹은 몇 마리의 괴수들이 끄는 마차들이 질주하는 것이 보였다.
그 외에도 거대 늑대를 탄 이들이 안원성 수비병의 복장을 하고 큰 소리로 요수의 난이 임박했으니 성을 봉쇄하고 경계를 삼엄하게 하라는 명령을 선포하고 다녔다.
연체사들과 성의 병사들을 제외한 평범한 거주민들은 반드시 거주지에 머물며 성문을 나서 요수의 난을 방해하는 자는 신분을 막론하고 죽인다는 내용도 포함되어 있었다.
한립과 장규가 각각 뿔 달린 거대 늑대를 타고 가장 가까운 성벽을 향해 내달리고 있을 때, 안원성 남부의 거대한 탑처럼 생긴 건물에서는 보라색 장포를 입은 거한이 뒷짐을 지고 묵묵히 먼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방문이 열리며 갑옷을 입은 병사가 빠른 걸음으로 다가와 한쪽 무릎을 꿇고 보고했다.
“성주님께 아룁니다! 이번에 몰려온 짐승 무리는 총 세 종류로 비취초원(翡翠草原)의 청랑수(靑狼獸), 흑릉산맥(黑陵山脈)의 적망수(赤蟒獸), 표금수(豹禽獸)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과연 세 무리나 몰려들었구나! 다른 것들은 몰라도 청랑수와 적망수는 이미 300년 넘게 요수의 난을 일으키지 않았거늘, 이렇게 엄청난 수라니! 공중전에 강한 표금수도 성가시고. 보통 화살로는 큰 상처를 입히기 어려울 텐데…….”
보라색 장포 거한이 한숨을 내쉬며 초조한 기색을 드러냈다.
“대인, 천동상호에서 폭정전(爆晶箭)을 구입하시지 않으셨습니까? 특제 화살이 있으니 공중전도 막아낼 수 있을 것입니다. 게다가 수사들이 비행을 할 수 있으니 큰 도움이 될 것이고요. 그들이 협력한다면 표금수는 문제될 것 없습니다.”
“일단 그렇게 믿어야지 도리가 없구나. 수사들을 한 곳으로 모아 표금수를 감시하고 청랑수와 적망수는 연체사들과 일반 병사들에게 상대하게 하거라. 아, 모집한 인력들을 잘 정비해 수비병들이 번을 도는데 합류하게 하는 것도 잊지 말고.”
“예, 대인!”
병사가 대답을 하고 급히 명을 집행하러 나갔다. 안원성 성주는 다시 어두운 얼굴로 창밖으로 내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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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원성 성벽 위에 선 한립은 저 멀리 응시하며 내심 크게 놀랐다.
성벽 수십 리 밖의 노란 땅이 갑자기 푸른 망망대해처럼 보였는데, 자세히 보니 그것들은 각각 크기가 다른 푸른 늑대들이었다.
청록색 눈에 전신이 푸른 늑대들은 날카로운 송곳니가 삐져나와 흉악해 보였다. 그리고 늑대의 수가 어찌나 많은지 셀 수가 없었다. 푸른 늑대는 수시로 울어대며 서로 신호를 주고받는 듯했다.
“그나마 청랑수라 다행입니다. 홍랑 혹은 황랑 심지어 보기 드문 은랑이 밀려들었으면 안원성은 절대 버티지 못했을 테니까요.”
한립 곁의 장규도 안색이 어두워져 중얼거렸다.
“은랑…….”
흉터 거한의 말에 한립이 정신을 차렸다.
“이전에 은랑수를 본 적이 없습니까? 늑대 중에서 가장 상대하기 까다로운 녀석들이지요. 아마 한 마리가 일반적인 청랑수 열댓 마리에 맞먹을 겁니다. 일전에 어떤 요수의 난에서 우연히 본 적이 있는데 어찌나 살벌하던지 아직도 그 기억이 선명하게 남아 있습니다.”
장규의 말을 들은 한립은 순간 마음이 요동쳤다. 은랑(銀狼)이라는 말에 자연스럽게 은월이 떠오른 것이다.
은월은 은색 늑대였고, 은월랑족이라고 불렸으니 은랑이라는 짐승들과 동족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게 사실이든 아니든 지금 그의 처지에 당장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평범한 늑대 괴수들이라면 그 수가 많아도 인간들이 높은 성을 쌓아 지키면 두려울 것이 없을 것입니다.
문제는 그들이 이미 지능이 높아진 저계 요수들의 명을 따른다는 것이죠! 게다가 보통 괴수와 요수의 중간쯤 되는 변이괴수들도 적잖이 섞여있는데 보통 이런 괴수들은 변이 요수와 마찬가지로 불가사의한 신통을 부려 훨씬 상대하기 어렵습니다. 체형, 근력, 속도 등이 월등히 동족을 초월하니까요. 적어도 일반 저계 연체사들은 일대일로 상대하기 어려울 겁니다.”
흉터 거한이 진지한 얼굴로 설명해 주었다.
“그럼 변이 요수들은 저 중에 얼마나 됩니까?”
“알려지기로는 천 마리 당 한 마리 꼴로 출현하다고 합니다.”
잠시 생각하던 장규가 확실하지 않다는 듯 말했다.
“천 마리 당 한 마리요?”
한립은 파도처럼 밀려드는 푸른 괴수들의 무리를 훑으며 쓴웃음을 지었다. 청랑수들은 적어도 수백만 마리 이상은 될 것이다. 그렇다면 변이요수의 수도 수천 마리는 된다는 이야기였다.
이렇게 많은 변이요수들이 몰려들면 결단기급 수사를 보유하지 못한 성의 안전은 위태로울 수밖에 없었다.
“이제 다른 곳으로 이동하죠. 다른 요수 무리의 상황도 봐야하지 않겠습니까?”
잠시 아래쪽을 내려다보던 장규가 탄식했다. 그가 보기에도 이번 요수의 난은 상황이 썩 좋지 못한 것이다.
“장 형께서도 이번에 성을 지킬 수 있을지 확신하지 못하시는 겁니까?”
“조금 염려되기는 합니다. 이전에 무너진 성들도 안원성처럼 세워진지 만 년도 안 된 성이었는데 우연히 요수 대란을 마주쳐 그리 되었지요. 그런데 이번 요수의 난에는 표금수까지 나타났다고 하지 뭡니까. 수가 많지는 않아도 한 마리 한 마리가 태어날 때부터 1급 요수라 공중전을 충분히 대비하지 않는다면 위험할 겁니다.”
“표금수가 그렇게 두려운 존재인가요?”
근심이 가득한 장규를 보며 한립은 믿기지 않는다는 듯 눈을 반짝였다.
“표금수의 체력은 다른 조류형 괴수들보다 못하지만 천성적으로 지닌 극독으로 사람들을 죽입니다. 가까이에서 공격할 방법은 없고 오직 멀리서 공격해 격추시켜야 하는데 지능도 뛰어나고 속도도 꽤 빠른 편이라 대응하기 어렵지요. 거기다 안원성은 공중전에 가장 취약하기도 하고요.”
“공중전에 취약하다는 것을 안원성 성주도 알고 있을 것 아닙니까?”
“알면 뭐하겠습니까? 듣자니 이전의 요수의 난에서 워낙 많은 사람이 죽어나간 데다 지금 수준의 방어력을 회복하는데도 적잖은 재물이 들어가 성주가 꽤나 안간힘을 썼다고 합니다. 주변의 다른 성에서 약간의 병기와 병사들을 빌려왔다고 하는데 그렇다고 해도 공중전을 얼마나 대비하고 있는지는 모르지요.”
장규의 말에 한립은 할 말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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