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신공-738화 (495/2,000)
  • 738화. 안원성(安遠城)

    *

    남색 장삼 소녀도 핏빛 호랑이 괴수를 데리고 무사히 귀환했다. 두 사람은 남기자 등이 한립을 둘러싸고 서 있는 것을 보고 조금 놀란 듯했다.

    그때 수비병 하나가 나서서 두 사람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했고 흉터 거한이 호탕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제 눈썰미가 틀리지 않았습니다. 한 형제를 영입하자마자 전아를 구하다니 말입니다. 안 좋은 일이 있었다면 부인께 면목이 없었을 것입니다.”

    남색 장삼 소녀도 사정을 듣고 한립을 보는 눈빛이 한결 따뜻해졌다.

    사충수들을 격퇴한 무리는 대오를 정비하고 반나절 간 휴식을 취하다 다시 출발했다. 이후의 일정은 비교적 평탄해서 사흘 후에는 청라사막을 벗어날 수 있었고 그들 눈앞에는 다시 끝없는 대초원이 펼쳐졌다.

    운송 행렬은 속도가 배로 빨라졌고 거대 거북은 성큼성큼 다리를 움직이며 거의 날듯이 질주했다.

    ‘흠?’

    그러나 객실에 누워 있던 한립은 운송 행렬에서 들려오던 시끌벅적한 소리가 초원에 들어서자마자 뚝 끊겨 들려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또한 같은 객실에 타고 있는 소녀들도 창밖으로 푸른 초원을 보며 불안한 기색을 드러냈다.

    한립은 객실 벽에 기대고 앉아 맞은편 소녀들의 불안한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도 바깥을 여러 번 살폈지만 이상한 점은 찾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는 내색하거나 묻지 않았다. 영계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이 없어 괜히 다른 사람들의 의심을 살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요 며칠간 소녀들은 그를 훨씬 상냥하게 대했고 특히 그가 구해준 전아라는 붉은 장삼 소녀는 ‘한 형’, ‘한 형’ 하며 살갑게 대했다.

    한립은 적응이 되지 않았지만 어린 소녀를 상대로 냉담할 수 없었기에 그동안 적잖은 대화를 주고받게 되었다. 그는 영계에 대해 대놓고 묻지는 못했지만 천동상호에 대해서는 자주 물어봤다.

    이를 통해 그녀들이 부인이라고 부르는 사람은 사실 천동상호에서 열댓 개 구역을 맡고 있는 책임자이자 천동상호 주인의 며느리 중 한 명이라는 사실과 다들 그녀를 존중하는 의미로 방 부인이라 부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천동상호의 주인은 아들이 셋 있었는데, 방 부인은 둘째 아들이 정식으로 얻은 처였다.

    그들은 일남일녀를 두었고 서로 무척 은혜 했지만 사내 쪽이 스물 몇 해 전 사고로 세상을 떠나 그녀가 천동상호의 구역 책임자가 되었다.

    그리고 네 명의 소녀들은 방 부인이 어렸을 때부터 맡아서 키운 시녀들로 부인이 아끼고 총애했기에 거의 의붓딸이나 마찬가지였다.

    이번에 방 부인이 직접 안원성이라는 시골구석까지 온 것은 그곳에서 고액의 거래가 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어린 시절 영근이 발견되어 수도 종문에 들어간 어린 아들이 안원성에서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그는 아무래도 방 부인의 도움이 필요한 듯했다.

    방 부인은 아들이 보고 싶어 운송 행렬에 직접 나섰는데 출발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몇몇 인원을 따로 꾸려 먼저 안원성으로 가있었다.

    운송 행렬에는 인원도 많고 수도자들도 있으니 별탈이 없을 것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립은 천동상호 주인의 배경에 대해서도 물었다.

    이렇게 커다란 자산을 지닌 자라면 보통 사람은 아닐 것이라 생각했다. 이야기를 듣고 한립은 깜짝 놀랐다.

    상호의 주인은 놀랍게도 범인으로 영근은커녕 연체술도 익히지 않은 정말 평범한 사람이었다.

    ‘그런 자가 어떻게 천동상호를 운영한단 말이지?’

    의문이 가득했으나 붉은 장삼 소녀는 자세한 사정은 잘 모르는 눈치였다. 이에 한립도 캐묻지 않고 화제를 돌렸으나 여전히 궁금증은 남아 있었다. 그는 이렇게 주변 상황을 이해하면 할수록 더 많은 의혹이 생겨 울적해졌다.

    대초원은 청라사막 보다 더 광활해서 운송 행렬이 장장 한 달을 달려가고 있는데도 아직도 그곳을 빠져 나가지 못했다.

    그동안 수비병이나 기병들도 다들 전전긍긍하며 주위를 경계했고 줄곧 객실에 머물던 수사들도 일정 시간 마다 돌아가며 마차에 올라 주변을 순찰했다.

    구로산 수사들이라 불리는 이들은 그때마다 긴장을 늦추지 못하는 얼굴이었다.

    행렬은 보름을 더 달려 무사히 대초원을 벗어났고 평범한 구릉지대로 진입하기 직전이었다. 사람들은 이제 다들 긴장이 풀렸는지 객실로 돌아갔으며 다시 이곳저곳에서 웃고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한립이 탄 객실의 소녀들도 초원을 떠나는 순간 길게 한숨을 토해냈다. 비취색 장삼을 입은 소녀가 가슴을 두드리며 맑은 웃음을 터트렸다.

    “이제야 초원의 늑대 괴수들을 걱정할 필요가 없어졌네요. 처음 와보는 것도 아닌데 올 때마다 벌벌 떨게 된다니까요.”

    “우리뿐만 아니라 이곳에 있는 전공이 혁혁한 사내들도 다들 그럴 걸? 늑대 괴수 무리를 마주치면 그야말로 재난의 시작이니까. 흔히 있는 일은 아니지만 매년 한 곳씩 그런 일을 당했잖아.”

    “그런데 이상하지 않아요? 안원성이 새로 지어진 성도 아닌데 어째서 이렇게 많은 장비를 구입하는 걸까요? 영구를 대량으로 구입하는 곳은 대부분 중급 이상의 성들이잖아요.”

    류아의 탄식에 백의 소녀가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이상할 게 뭐 있어. 아마 최근에 강력한 요수 무리가 성 주변으로 서식지를 옮겼거나 천 년에 한 번 있는 ‘요수 대란’이 다가오는 것이겠지. 주변의 모든 요수들이 연합해서 공격해오는 때 말이야.”

    류아가 고개를 저으며 별 일 아니라는 듯 답했다.

    “맞아요, 아마 그걸 거예요.”

    전아도 입 꼬리를 끌어올리며 동의했다. 한립은 가부좌를 하고 운기조식을 하는 척 했지만 사실은 그녀들의 이야기를 전부 귀담아 듣고 있었다.

    ‘요수 대란이라…….’

    순간 청라사막에 묻혀 있을 때 흉터 거한 장규가 언급했던 ‘전갈의 난’이 떠올랐다.

    이어 소녀들이 재잘거리며 다른 화제로 넘어가자 그는 금강결 심법을 운용해 경맥을 회복하는데 집중했다. 심법을 운용해 요양하며 거기에 목생주의 불멸체 신통이 더해져 경맥이 회복되는 속도가 상상을 초월했다.

    이미 몸은 거의 정상으로 돌아와서 앞으로 보름 정도만 휴식을 취하면 완전히 회복될 것 같았다.

    이미 금강결 4성을 익힌 데다 수사들의 중계 법술도 훤하니 축기 후기의 수사라도 그에게는 당해내지 못할 것이다. 물론 결단기 수사의 경우 직접 겨뤄봐야 결과를 알 수 있을 테지만!

    초원을 나선 운송 행렬은 이틀을 더 달려가 이번 원행의 목적지에 도착했다.

    창문을 통해 보니 석성의 높이가 서른 장이 넘었고 백여 장 마다 열댓 장 높이의 작은 성루가 솟아 있어 웅장하기 그지없었다.

    게다가 옆으로 끝없이 펼쳐져 얼마나 넓은 지 가늠하기 어려웠다. 한립은 할 말을 잃고 성을 바라보았다. 아니 이게 어떻게 작은 성이란 말인가?

    인계에서 크다고 불리는 것들도 이것에 비교하면 작아 보일 정도였다.

    한립은 높은 성벽 위에 철갑옷을 입은 병사들이 돌아다니는 것과 성루에 놀라울 만큼 거대한 노(弩)가 설치되어 있고 금속으로 만든 쇠화살이 걸려 있는 것도 확인할 수 있었다.

    금속 화살은 서너 장은 되었고 하얀 빛을 반짝여서 저계 법기로 보였다. 정말 법기라면 축기기 수사라도 맞으면 반쯤 죽어나갈 것이다.

    그가 눈을 가늘게 뜨고 관찰하는 동안 운송 행렬이 성문 아래 도착했다. 그러나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고, 새까만 대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성문 위로 결집한 병사들은 행렬을 내려다보며 경계심을 드러냈다. 이에 장규가 거대 늑대를 움직여 앞으로 나서 무언가를 성문 위로 던져 주었다.

    황금색 영패였다. 그러자 성문 위쪽이 잠시 시끄러워졌고 은색 갑옷을 입은 중년인이 영패를 받아들고 살펴보더니 이내 명을 내렸다.

    “성문을 열고 확인한다! 이들은 천동상호에서 온 사람들이다.”

    중년인의 말이 떨어지자 병사들 중 하나가 성벽 아래로 내려가 대문을 개방했다.

    잠시 후, 강철 같은 대문이 천천히 열리며 안에서 수십 명의 완전 무장한 병사들이 두 줄로 뛰어나왔다.

    그리고 은색 갑옷을 입은 중년인이 마지막에 걸어 나와 거대 늑대에 탄 장규 앞으로 다가가 의심스럽게 훑으며 물었다.

    “당신이 천동상호 운송을 담당한 대장입니까?”

    “장규라고 합니다! 귀 성의 성주께서 내린 명은 들으셨겠지요. 뒤쪽의 화물들은 전부 저희 상호가 귀 성에 판매하기로 약속된 물건들입니다.”

    “명은 받았습니다. 다만 워낙 중요한 시기인지라 몇몇 수도자 대인들을 모셔 행렬을 점검한 후에야 짐을 풀 수 있을 겁니다.”

    “요수가 섞여 들어가기라도 할까봐 그러시죠? 마음대로 점검하셔도 됩니다.”

    장규는 상대의 요구에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고 바로 응했다.

    “좋습니다. 이 선생님! 황 대사님! 행렬을 좀 살펴봐 주시지요.”

    중년인이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고개를 돌려 성문 안쪽을 향해 소리쳤다.

    “성주께서 조 통령을 도우라 명하셨으니 당연히 그리해야지요.”

    성문 안에서 차분한 사내의 목소리가 들려왔고 하얀 장포를 입은 유생과 푸른 가사를 걸친 승려가 걸어 나왔다.

    대답을 한 이는 하얀 장포를 입은 유생이었다. 조 통령은 그들에게 예를 다하며 웃는 얼굴로 연달아 감사를 표했다.

    유생과 승려는 각각 거울과 구리사발을 꺼내 들었고 주술을 외며 수결을 맺은 뒤 수중의 법기를 허공에 날렸다.

    그러자 두 법기가 빙글빙글 돌며 거울에서는 푸른 기운이 구리 사발에서는 노란 기운이 나와 각각 거북 마차와 거대 늑대 쪽을 훑었다. 두 명의 수사들은 꼼꼼하게 행렬을 점검하며 단 한 사람도 빼놓지 않았다.

    기운들은 순식간에 서른 대가 넘는 거북 마차와 200명을 스쳤으나 아무 문제가 없었다.

    “들어가셔도 좋습니다. 방 부인께서 이미 성 서쪽의 여운객잔(如雲客棧)을 통째로 빌려 놓으셨으니 짐을 푼 후에 그곳에서 만나시면 됩니다.”

    조 통령의 안색이 한결 편안해지며 더는 그들을 막지 않고 보내주었다. 흉터 장한은 포권을 한 후 무리를 이끌고 성 안으로 진입했다.

    안으로 들어가니 석성 내부의 면적은 한립의 예상을 훨씬 뛰어넘어 대충 보아도 각양각색의 건물이 끝없이 이어져 끝이 보이지 않았다.

    건물의 규모나 사용한 자재는 다 달랐지만 구획이 잘 되어 있어 넓은 청석 도로를 사이에 두고 가지런히 늘어서 있었다.

    거대한 성이 행인들로 가득했는데, 한립이 자세히 살펴보니 거리를 돌아다니는 사람들의 대다수가 도검류의 병장기를 들고 있었다.

    객실 안 류아가 그것을 보고 한숨을 쉬며 중얼거렸다.

    “정말 요수의 난을 앞둔 모양이구나. 그렇지 않고서야 이런 시골에 사람들이 이렇게 북적일 리 없지. 안원성 사람들도 걱정이 많겠어.”

    그 말은 들은 한립도 무슨 일인지 알 것 같았다.

    사람이 너무 많아 통행이 불편했지만 조 통령은 병사 몇을 보내 길을 터 그들이 지나갈 수 있도록 해주었다.

    그러나 거북 마차들은 빨리 움직일 수 없어 거의 반 시진이 지난 후에야 열댓 개의 거리를 가로질러 비교적 인적이 드문 길로 들어섰다.

    그들은 곧 기둥과 높은 지붕이 있을 뿐 문짝은 달리지 않은 커다란 패루(牌樓) 앞에 도착했다.

    패루 뒤로는 경계가 삼엄한 창고 형태의 건물이 보였고 각종 무기를 든 수비병들이 근처를 지키고 있었다.

    그 후의 일은 간단했다.

    천동상호 사람들은 화물을 일일이 대조하며 창고 관원에게 넘겼고 장규는 일을 마치고 크게 안심하더니 조 통령이 말해준 성 서쪽으로 향했다.

    이제 완전히 몸을 회복한 한립은 그들과 반절쯤 동행하다 장규를 향해 성을 좀 돌아보다 나중에 여운객잔으로 가 합류하겠다고 말했다.

    장규는 미간을 좁히며 곰곰이 생각하다 허락했다.

    “한 형제는 아직 부인을 만나 뵙지 못했으니 아직 정식으로 우리 상호 사람이 아닙니다. 그래서 막지는 않겠으나 안원성은 지금 치안이 매우 좋지 못합니다. 시골구석의 작은 성이라 구경할 것도 없고요. 할 일을 빠르게 처리하고 일찍 객잔으로 돌아오는 것이 나을 겁니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