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6화. 사충수(沙蟲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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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서른 살도 되지 않은 것 같은데 벌써 금강결을 3성까지 익혔다니, 장 대장님이 눈여겨 보실 만 하네요.”
“과찬이십니다! 류아 소저. 그런데 제가 혈주문서는 작성했으나 천동상호에 대해 아는 바가 거의 없습니다. 괜찮으시면 소개를 부탁드려도 될까요?”
남색 장삼 소녀의 말에 한립이 미소 지으며 물었다.
“한 형께서는 정말 저희 천원경(天元境) 사람이 아니시군요. 그렇지 않고서야 그런 질문을 할 리 없을 테니까요.”
류아가 눈을 반짝이며 입을 가리고 웃었다.
“천동상호가 인근에서 그렇게 유명합니까?”
“저희 상호는 천원경 내에서도 세 손가락 안에 드는 곳이에요. 수백 개의 크고 작은 성에 분점이 있고 총단은 심지어 천원성성(天元聖城) 안에 있고요.”
남색 장삼 소녀가 입 꼬리를 끌어 올리며 자부심을 드러냈다. 그러나 막 영계에 온 한립에게는 전혀 알 수 없는 설명이었다.
여인이 자랑하는 것을 보면 유명한 곳은 분명했으나 영계의 사정을 전혀 모르는 그로써는 어느 정도인지 가늠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한립은 이상하게 생각했지만 겉으로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럼 상호의 규모가 꽤 된다는 뜻이군요. 그런데 소저들의 이야기를 들으니 지금은 안원성으로 향하는 것 같던데 그곳은 어디이며, 얼마나 더 가야합니까?”
“어머, 뭐예요. 우리들이 하는 소리를 엿들은 거예요?”
제일 나이 어린 붉은 장삼 소녀가 갑자기 웃음을 흘리며 끼어들었다. 한립은 헛기침을 하며 할 말을 잃었다.
그렇게 큰 소리로 떠들어놓고 안 들리길 바라다니.
“전아야, 무례하게 굴면 못 써! 한 형, 전아가 아직 어려서 예를 모를 뿐 악의는 없으니 나무라지 말아주세요.”
붉은 장삼 소녀의 말에 남색 장삼 소녀는 한립에게 미안하다는 기색을 보였다.
한립은 방금 천동상호에 들어온 신입이었지만 이렇게 어린 나이에 고명한 연체술을 익히고 있어 앞으로 크게 쓰일 인재라고 보았던 것이다.
그녀는 자신뿐 아니라 동생들과 한립이 잘 지내기를 바랐다. 한립이 웃으며 입을 열려고 하는데 돌연 객실이 흔들리며 거대 거북이 우뚝 멈춰 섰다.
남색 장삼 소녀가 놀라 바깥을 향해 소리쳤다.
“왕 백부님! 무슨 일이 생긴 것입니까?”
“적령작(赤靈雀)이 전방에서 사충수(沙蟲獸) 무리를 발견했습니다. 아무래도 운송 인원을 노리는 듯합니다.”
객실 밖에서 마부 노인이 답했다.
“겨우 사충수들이라면 본능에 따라 움직일 텐데 사람들을 보내 쫓으면 그만 아닌가요? 여정이 지체된 마당에 어째서 멈춰선 것이죠?”
“짐승들 중 한 마리가 지능이 발달한 저계 요수인 듯합니다. 죽이지 않고 지나간다면 나중에 문제가 될 수도 있어서 말입니다.”
“저계 요수라고요? 그렇다면 문제네요. 그래도 장 대장님의 호패결(虎覇決)이 이미 5성에 이르렀으니 부인께서 하사하신 금영검 영구를 쓰면 요수를 상대할 수 있을 거예요.”
“류아 소저의 말씀 대로입니다. 하지만 저계 요수 곁에 변이 사충수들이 있어 장 대장님이 상대하기에 조금 위험합니다.”
류아의 말을 들은 마부 노인이 조금 머뭇거리며 말했다.
“변이 사충수요? 그럼 정말 위험하겠네요. 무리 중에 남기자 도장님을 비롯한 수도자들이 계시죠. 그분들에게 나서 달라하시지요.”
“장 대장님께서 이미 나서달라 청하셨지만 거절하셨습니다. 도장님을 비롯해 다들 구로산(岣嶸山) 출신이라 사충수가 먼저 공격해 살상을 하지 않는 한 나서기 꺼리신다 합니다.”
“정말요? 그러니까 제가 말했잖아요. 구로산 출신 수사를 고용하면 제약이 많다고요.”
붉은 장삼 소녀가 코끝을 찡그리며 투덜거렸다.
“전아야, 도장님과 그분들을 탓할 일은 아니지. 구로산은 본래 곤충을 부리는 신통으로 유명하잖아. 우리가 운이 나빴을 뿐이야! 그럼 이렇게 하지요. 부인께서 떠나시기 전에 제게 맡기신 물건들이 있습니다. 그것들을 써서 장 대장님을 돕도록 하지요. 제가 바로 간다고 연락해주세요.”
류아가 잠시 침묵하다 신중하게 결정을 내렸다.
“그렇다면 안심입니다.”
객실 밖 노인은 남색 장삼 소녀의 말에 한결 마음이 편해졌다.
“언니, 정말 그것들을 쓰려고요? 만일 무슨 일이 벌어지면 부인께 꾸지람을 들을 거라고요.”
향아가 걱정스레 물었다.
“걱정 마. 이미 부인께서 오랜 시간 길들여 놓으신 것들이라 영성이 생긴 물건들이야. 저계 요수에게도 밀리지 않는데 변이 사충수 몇 마리 때문에 문제가 생기겠어?”
“그래도 안심이 안 돼서 직접 봐야겠어요.”
남색 장삼 소녀가 웃으며 객실 문을 열고 나가자 붉은 장삼의 소녀가 재빨리 그 뒤를 따라 나갔다. 뒤이어 향아와 하얀 장삼 소녀가 서로 시선을 마주치고는 역시 객실을 나섰다.
이제 객실 안에는 한립만 남았고 그는 의자에 앉아 반쯤 열린 문을 응시하며 생각에 잠겼다.
곧 피를 갈구하는 요수의 처절한 괴성이 들려왔다. 이에 한립은 천천히 일어나 문을 열고 나가 거대 거북 위에 서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하늘 위에는 7개의 밝은 달이 떠 있었기에 주변을 또렷하게 살필 수 있었다.
운송 행렬이 길게 이어져 1리 가까이 늘어졌고 중간 중간 거대 거북처럼 생긴 요수들이 족히 서른 마리는 넘게 있었다.
거대 거북 위에는 요수의 몸집과 비등한 무언가가 가득 실려 있었는데 그 위로는 갑옷을 걸치고 병장기를 들고 있는 건장한 청년 네다섯이 올라타 있었다. 그리고 양쪽에는 거대 늑대에 올라탄 기병들이 순찰을 돌고 있어 경비가 삼엄했다.
그러나 한립의 주의를 끈 것은 다른 것이었다.
한 거대 거북 곁에 사람들이 둘러 싸여 있었는데 그 중에는 남기자, 흉터를 가진 거한 그리고 류아 등 네 명의 소녀도 함께였다.
무리 앞에는 두 장 높이의 네모난 물체가 검은 천에 뒤덮여 있었는데 그 안에서 희미하게 요수의 포효소리 같은 것이 들려왔다. 검은 천은 표면에 주술이 반짝이는 것이 놀랍게도 저계 법기였다.
요수의 울음소리가 길어지자 남색 장삼 소녀가 영패를 들어 올려 남색 기운을 방출했고 모종의 술법을 시행하려는 듯 보였다.
한립이 명청령안으로 보니 소녀의 손목에서 영석이 박힌 청록색 팔찌가 보였다. 그것을 본 한립의 표정이 묘해졌다. 보아하니 영구라는 것은 반드시 다른 물건으로 발동시켜야 부릴 수 있고, 영석이 박혀 있으니 그 안에 든 영기를 소모하면 효력을 잃는 듯했다.
검은 천이 남색 기운을 흡수하자 안에서 정교하게 세공된 은백색 짐승의 우리가 나타났다. 그리고 그 안에는 검붉은 색의 호랑이처럼 생긴 괴수가 엎드려 있었다.
호랑이 괴수는 겉으로 볼 때는 가죽이 피처럼 붉어 호랑이와 별 차이가 없어 보였지만 주위의 사람들이 괴수를 보는 눈빛에는 약간의 두려움이 어려 있었다.
괴수는 우리 밖에 사람들이 모여 있는 것을 보더니 갑자기 풀썩 뛰어 올라 거세게 몸을 부딪쳐 왔다. 그러자 은백색 우리가 요수로 인해 불안정하게 반짝였다.
이를 지켜보던 이들은 안색이 변해 물러났고 남색 장삼 소녀는 길게 숨을 내쉬며 손에 들고 있는 영패를 들고 검붉은 핏빛을 번뜩였다.
이상하게도 호랑이 요수는 붉은빛을 보더니 포악한 모습은 온데간데 없이 얌전해졌다. 그것을 확인한 장규와 사람들은 한시름을 놓았다.
바로 그때 허공에서 새가 지저귀는 맑은 울음소리가 들렸고 조급한 기운으로 보아 어떤 소식을 전하는 듯 했다.
“사충수들의 속도가 빨라 이미 이곳으로 몰려오고 있다! 모두 전투 준비에 들어간다! 화물을 한곳으로 모으고 공격하지 않는 한 먼저 움직이지 않는다. 일단 저계 요수를 죽이면 사충수들은 바로 흩어질 것이다.”
장규가 긴장한 기색으로 급히 소리쳤다. 그의 말이 떨어지자 운송 행렬이 요란스럽게 움직였다.
앞쪽과 뒤쪽에 있는 거대 거북들은 재빨리 중간으로 몰려들었고, 늑대에 탄 기병들도 중간을 향해 집결했다. 또한 호위병들은 병장기를 꺼내 들고 대기했다.
남색 장삼 소녀의 명에 따라 누군가 우리를 열어 호랑이 괴수를 풀어 주었다.
“한 형제, 아직 몸도 불편할 텐데 객실로 돌아가 쉬시지요! 객실은 침철목(沈鐵木)으로 만들어져 있는데다 사충수들은 높이뛰기를 잘 못하니 밖보다는 안이 훨씬 안전할 겁니다.”
거대 거북을 부리는 노인이 한립을 보고는 웃으며 말했다.
“배려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지만 사충수를 본 적이 없어 어떤 모습인지 알고 싶군요. 위험한 상황이 오면 곧바로 객실로 돌아가겠습니다.”
한립은 미소 지으며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그럼, 한 형제 편할 대로 하세요.”
한립의 말에 노인은 빙긋 웃으며 더는 권하지 않았다. 한립이 다시 시선을 거둬 거대 거북을 바라보는 데 그가 타고 있는 것이 중심에 있었던 것인지 다른 거북들이 그 주위로 몰려들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서른 몇 마리의 거북 마차들이 겹겹이 둘러싸 간단한 방어 전선을 형성했고, 거대 늑대에 탄 기병들도 한 곳에 모이니 5, 60명은 되었다.
그들은 방어전선 밖을 둘러싸고 흉터 거한의 명을 기다렸다. 그런데 뜻밖에도 남색 장삼 소녀가 그곳에 끼어 있었고 곁에는 핏빛의 호랑이 괴수가 엎드려 있었다.
멀리서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가 가까워지자 서너 마리의 검붉은 작은 새들이 나타나 고공에서 쉼 없이 빙글빙글 돌며 신호를 보내왔다.
“전투 준비! 육행구(陸行龜)들은 전부 엎드려 방어태세를 갖춘다!”
장규의 명이 떨어지자 거대 거북을 부리는 노인들은 채찍으로 거북의 머리를 내리쳐 엎드리게 했다. 그러자 거대 거북은 머리와 네 다리를 커다란 등딱지 안에 넣고는 암석 모양으로 길게 늘어섰다.
그 순간, 멀리서 쿠릉! 하며 땅이 진동하기 시작했고 누런 모래 먼지가 일어나 이쪽으로 다가왔는데 그 안에 무엇이 있는지는 정확히 보이지 않았다.
흉터 사내가 신중한 얼굴로 한 손을 흔들자 곁의 기병들이 소리 없이 낭아봉을 집어 들었다. 이에 한립은 조금 의외라는 듯 지켜보고 있었는데 잠시 후 어안이 벙벙해질 일이 벌어졌다.
흉터 거한이 갑자기 청록색 단환을 입속에 집어넣자 노란 광채가 온몸에 흐르며, 얼굴과 팔뚝에 가느다란 누런 털들이 자라났고 눈동자 색이 어두운 청록색으로 변한 것이다!
그가 타고 있던 짐승의 배를 발로 치니 거대 늑대가 낮게 으르렁 거리며 화살처럼 튀어나갔다. 이에 다른 기병들도 공법을 운용하더니 다양한 빛을 내며 그 뒤를 따라 내달렸다.
‘어떻게 된 거지? 저 기병들은 전부 요족이 변신한 것이란 말인가? 그럴 리가. 인간의 모습을 만들어 내려면 적어도 화형기 요수는 돼야 할 텐데……. 게다가 다른 이들은 놀라지 않는 것을 보니 영계에서는 흔한 일인 것 같군. 시간을 들여 이곳에 대해 알아둬야겠어. 거한의 변화나 영구라고 부르는 것들도 인계에서는 들어본 일이 없으니 말이야.’
그때 흉터 거한이 이끄는 기병 무리들이 드디어 수백 장 밖의 모래먼지 속으로 뛰어들었고, 함성과 함께 교전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나 노란 먼지는 잠시 주춤했을 뿐 다시 운송행렬을 향해 달려들었다.
“쳐라!”
순식간에 모래 먼지가 행렬에 가까워지자 거한이 크게 소리 질렀고 활 등의 병기를 든 수비병들이 원거리에서 공격을 가했다.
화살이 비처럼 쏟아져 내렸다.
파팟!
누런 모래 먼지의 기세가 한층 가라앉자 그 안에서 몇 개의 검은 그림자가 세차게 달려 나왔는데 놀랍게도 한 장 크기의 노란 벌레였다. 납작한 몸에 머리에는 커다란 입과 더듬이가 달려 있었다.
‘저게 바로 사충수라는 것이구나.’
한립은 사충수를 보고도 안색이 변하지 않았다. 난성해에서 그가 죽인 수많은 요수들과 비교하면 사충수는 흉악한 축에 끼지도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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