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신공-735화 (492/2,000)
  • 735화. 남기자와 부 어르신

    *

    거대 거북이 다시 고개를 들고 달리기 시작했는데 속도가 느리지도 않으면서 상당히 안정적이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거대 거북이 멈추었다. 다양한 소리가 들려오는 것을 보니 거대 거북이 다시 마차 무리로 합류한 것 같았다.

    이후 흉터 거한의 목소리가 들려오고 무리 전체가 앞으로 전진했다.

    한립은 누워만 있어 직접 볼 수는 없었지만 들려오는 소리로 보았을 때 족히 2, 3백 명은 되는 것 같았다. 소녀들은 한참 떠들다가 한립이 아무런 반응이 없자 흥미가 식었는지 다른 이야기를 시작했다.

    이번에는 한립을 꺼리지도 않고 목소리도 훨씬 커져 있었다.

    “이번에 천동상호가 운반하는 물건들에 안원성(安遠城)의 안위가 달렸다던데요? 그래서 안원성 성주가 막대한 영석을 내놓고 우리 상호를 고용해 저 멀리서 이곳까지 화물 호송을 맡긴 것이고요. 그렇지 않고서야 안원성 같은 시골구석의 작은 성까지 우리 천동상호가 움직일 리 없잖아요.”

    “그런데 부인께서 먼저 안원성에 가신 게 이상해. 우리도 데리고 가시지 않고 말이야.”

    “너희는 모르겠구나. 이번에 부인께서 직접 가신 건 이번 호송 건이 중요해서도 있지만 직접 다섯째 도련님을 모셔오기 위해서야.”

    “다섯째 도련님이요? 십 년 전에 수련을 위해 외지로 떠났다는 부인의 친 아드님? 영근을 지녀서 어떤 수선사의 문하에 들었다고 들었는데 왜 안원성에 계시데요?”

    놀라서 묻는 이는 ‘향아’라고 불리던 소녀였다.

    “그건 잘 모르겠어. 나도 부인께서 혼잣말 하시는 것을 얼핏 들은 거거든.”

    “다섯째 도련님이 영근을 지녀서 어릴 적부터 부인과 어르신의 사랑을 독차지했다고 들었어요. 어쩐지 부인께서 한달음에 달려가실 만하네요.”

    소녀들은 이야기를 하는 와중에 잠깐 한립을 살폈지만 평온하고 그의 가슴이 고르게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을 보고 잠이 든 것이라 생각했다.

    “밖에 누구십니까?”

    객실에서 가장 나이가 많고 말수가 적던 남색 장삼 소녀가 순간 얼굴을 굳히며 문밖을 향해 쏘아붙였다.

    다른 소녀들도 그 말을 듣고 안색이 달라졌는데 밖에서 차분한 사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류아 소저, 빈도 남기자입니다. 장 시주의 부탁으로 한 시주라는 분을 살피러 왔습니다.”

    “장기자 도장님이셨군요. 제가 실례를 했습니다. 어서 들어오시지요!”

    남색 장삼 소녀가 표정을 풀며 무의식중에게 객실 한쪽을 쳐다보았다가 깜짝 놀랐다.

    자고 있다고 생각했던 한립이 이미 눈을 뜨고 보일 듯 말 듯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와 눈을 마주쳤던 것이다.

    그때 향아라 불린 비취색 장삼 소녀가 먼저 객실 문을 열었고 밖에서 노란 장포를 입은 도사와 하얀 장포를 입은 노인을 맞이했다.

    도사는 삼십 대의 얼굴에 푸른 기운이 반짝여 법력이 어느 정도 경지에 이른 것처럼 보였고 하얀 장포 노인은 회백색 백발에 얼굴에 주름이 그득해 아주 연로해보였다.

    “아, 부 어르신! 어르신이 어떻게 여기까지 오셨습니까?”

    하얀 장포 노인을 본 비취색 장삼 소녀가 놀라며 물었다.

    “방법이 있나. 장 가 녀석이 새로 들인 사람이 보기 드문 기재라며 어린 나이에 금강결을 3성까지 익혔다고 봐 달라 하니 이 늙은이가 와 볼 수밖에.”

    노인이 헛기침을 하자 얼굴의 주름이 더욱 짙어졌다.

    “금강결 3성이요? 저 분이요?”

    비취색 장삼을 입은 소녀가 화들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향아, 어서 도장님과 어르신을 안으로 모시지 않고 뭐하는 거야.”

    남색 장삼 소녀가 눈을 빛내며 향아란 소녀에게 말했다.

    “참! 제가 실례를 할 뻔했습니다.”

    향아가 남색 소녀의 말에 정신이 들어 서둘러 비켜서며 도장과 노인을 안으로 들였다.

    남기자라 불린 도사가 미소 지으며 안으로 들어섰고 부 노인은 짧게 한숨을 쉰 후에야 유유히 뒤따라갔다.

    “시주께서 장 대장이 말씀하신 그 분이겠군요.”

    도사가 바로 한립을 보며 말했다.

    “예, 제가 맞습니다. 장 형께서 부탁하신 것 같은데, 제 몸은 어쩔 수 없으실 겁니다. 그저 몇 달 쉬면 자연히 나을 것이니 그때까지 기다려 봐야지요.”

    “금강결을 이미 3성까지 익혔다니 실력이 빈도와 엇비슷하시겠습니다. 그러나 수도자와 연체사(煉體士)는 가는 길이 다르니 빈도가 혹시 방법이 있을 지도 모르지 않겠습니까? 그럼 시주께서 몇 달이나 누워있을 필요도 없겠지요.”

    남기자는 전혀 불쾌한 내색 없이 편하게 이야기했다. 이에 한립의 표정이 묘해졌다.

    의식을 몸 밖으로 방출할 수는 없어도 가까이에 다가오니 대충 느껴졌다. 그는 아마 축기기 수사일 것이다.

    인계에서는 일단 수도계에 들어온 수사는 범인들을 벌레로 취급했고 연기기 수사들도 범인과는 교류하지 않았다.

    그런데 영계에 오니 축기기 도사가 범인을 상대로 이렇게 예의를 갖춰주니 적응이 안 되었다. 이런 생각을 하며 한립이 미소 지었다.

    “그럼 도장의 말씀대로 따르겠습니다. 번거로우시겠지만 살펴주시지요.”

    남기자가 한립의 말에 역시 웃음 지으며 한 손을 들어 희미한 푸른 팔찌를 드러냈다. 다른 손으로 팔찌를 문지르자 노란 구리거울이 나타났다.

    한립은 조금 놀랐다.

    상대의 팔찌는 물건을 보관하는 용도의 법기로 보였는데 저물대보다 훨씬 고명했던 것이다.

    축기기 수사도 이런 물건을 지니고 있는 것을 보면 영계에서는 보편적인 법기일 터였다.

    저물대 같은 물건은 영계 수사들이 잘 사용하지 않는다는 소리였다.

    그의 저물대는 원영을 흩어버릴 때 멸선주 두 개를 품에 넣은 것을 제외하면 다른 보물들은 전부 영수대 몇 개와 함께 모래사막 열댓 장 밑에 묻어두었다.

    신중을 기하려고 특별히 영수대는 입구를 풀어놓았고 서금충과 육익상공 그리고 제혼에게 명을 내려 저물대를 지키라고 해놓았다.

    그러나 토갑룡은 영계로 데려 오지 않고 남궁완에게 남겨 주었다. 이제 그에게는 화령부와 파멸법목 밖에 남아 있지 않았고 심지어 허천정과 72개의 청죽봉운검들도 사막에 있었다.

    어차피 법력이 없어 부릴 수도 없는데 그런 귀한 보물들을 지니고 있으면 화를 부를 수도 있었다.

    사막이 외지고 영충들이 지키고 있으니 법력을 회복하는 대로 돌아가 되찾으면 될 일이었다.

    다만 신비한 초록 병만은 한참을 고민한 끝에 몸에 지니고 있었다.

    어차피 평소에는 이상한 점을 전혀 찾을 수 없어 아주 평범한 병으로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동안 남기자는 눈앞의 청년이 실은 화신기 고계 수사인 것도 모르고 거울을 비추고 있었다. 그 결과 푸른빛이 거울에서 빠져 나와 한립의 몸을 대부분 감쌌다.

    남기자는 두 눈을 감고 무언가를 확인하다가 한참 후에야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눈을 뜨고 이상하다는 눈빛을 보냈다.

    “무슨 문제라도 있는 것입니까?”

    “시주께서는 몸을 좀 아껴야겠습니다. 체내의 경맥이 대부분 터져있군요. 아마 금강결을 익히며 영기를 충분히 체내에 불어넣지 못했거나 보조 영단이 부족한 탓이었을 텐데, 우리 인간들은 요족에 비해 태생적으로 약하니 몸을 단련할 때도 무리하다 보면 몸이 스스로 붕괴할 수 있습니다. 그래도 시주께서 아직 어리고 심하게 터진 것은 아닌지 스스로 회복 중인 듯합니다. 이런 부상은 확실히 치료하기는 어렵고 아쉽지만 청심부(淸心符)나 몇 장 드려 고통을 경감시켜 드리는 선에서 마쳐야겠습니다.”

    남기자가 길게 탄식하며 안타까워했다.

    “감사합니다.”

    “기왕 남기자께서 보셨으니 살펴보지 않아도 되겠지만, 장 가 녀석에게 그냥 돌아가면 할 말도 없고 하니 한 번 보겠습니다.”

    하얀 장포의 노인이 옆에서 담담히 말했다.

    “부 시주께서는 너무 겸손하십니다. 부 형께서 가전되는 현천구룡금침술(玄天九龍金針術)로 많은 이들을 살린 것을 알고 있습니다. 심지어 동료 수도자들도 큰 덕을 보지 않았습니까.”

    도사가 예의 바르게 말하며 노인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부 씨 가문에서 파문당한 제자일 뿐인데 어찌 가전되는 현천금침술(玄天金針術)을 제대로 익히기나 했겠습니까? 도장께서 너무 늙은이를 추켜세우십니다.”

    하얀 장포 노인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러나 그러든 말든 남기자는 빙그레 웃으며 자리를 비켜주었다.

    곧 하얀 장포 노인이 한걸음 다가와 한립 앞에 섰다. 그가 한 손을 들어 그의 손목을 쥐고 다른 손을 펼치자 파공음이 들리며 금빛 여러 개가 날아갔다.

    푸푹!

    한립의 몸에 은색 침들이 절반 가까이 박혀 들어갔다. 꼼짝 못하던 한립이 갑자기 몸을 일으켜 앉았는데 마치 나무토막처럼 뻣뻣한 몸짓이었다.

    “류아야, 바로 앉을 수 있게 등에 뭔가를 받쳐 주어야겠다.”

    노인이 서두르지 않고 남색 장삼을 걸친 소녀에게 일렀다.

    “예, 어르신! 향아, 네가 가서 우리 이불을 한 채 가져와 한 공자께서 기대실 수 있게 해.”

    남색 소녀가 얌전히 답하고 고개를 돌려 말했다. 소녀는 잠시 머뭇거리다 결국 객실을 나섰다.

    이제 하얀 장포를 입은 노인은 한립 옆에 앉아 그의 맥을 느끼며 두 눈을 감고 고개를 저어댔다. 그러나 한립은 그런 노인을 바라보며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는 아주 미세한 기운이 몸을 타고 돌아다니는 것을 알고 있었다. 몸 곳곳을 꿰고 있지 않다면 느끼지 못했을 미약한 기운이었다.

    노인은 한립이 자신을 지켜보는 것을 느끼자 시선을 주었다가 다시 웃는 듯 마는 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때 향아가 비단 이불 하나를 들고 와 잘 접은 다음 한립의 등 뒤에 넣어주었다.

    이에 한립은 이불에 기대며 고맙다고 말했다.

    비취색 소녀는 담담히 알았다고 답했을 뿐 살갑지도 냉랭하지도 않은 태도를 보였다,

    한립은 계속 하얀 장포 노인의 행동을 주시했는데, 그는 허공에 손을 펼쳐 가느다란 침을 하나 꺼냈다.

    두 손으로 숙련되게 침을 쥔 노인의 손이 갑자기 모호해지며 팔을 수레바퀴처럼 돌리자 무수히 많은 금빛들이 나타나 한립을 감쌌다.

    그러자 한립은 수많은 혈자리에서 서늘한 느낌을 받았고, 놀랍게도 동시에 금침이 찔러 들어왔다. 이어 팔과 다리가 저릿하더니 한립이 손가락을 꿈틀하며 천천히 두 팔을 들어올렸다.

    놀라 침을 삼키거나 감탄하는 소리가 객실 안에 울려 퍼졌고 네 명의 소녀들 뿐 아니라 남기자도 감탄한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대단하십니다. 부 형의 침술이 이렇게 절묘할 줄은 몰랐습니다.”

    도사가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그저 잔기술이지요. 사지를 잠시 움직일 수 있게 만들었으니 무리하게 힘을 써서는 안 될 것이다. 그렇지 않았다가는 경맥이 다시 찢겨나가 심하게 부상을 당할 테니.”

    하얀 장포 노인이 한립을 향해 당부했다.

    “감사합니다, 어르신!”

    한립은 열 손가락을 움직이며 놀라기도 했고 기분도 한결 좋아졌다.

    금침으로 혈도를 찌르는 술법은 그도 인계에서 익혔고 나름 정통하다고 자부했지만 부 노인의 기술에 비하면 천지차이였다.

    금침을 놓는 것만으로 이렇게 기적적인 효과를 볼 수 있었다.

    하얀 장포 노인은 한립이 움직이는데 무리가 없어보이자 그의 몸을 가볍게 내리쳤다.

    그러자 금빛이 번뜩이며 금침들이 동시에서 그의 몸에서 빠져나와 펄럭이는 노인의 소매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한립은 두 다리를 천천히 펴고 기다란 의자에서 내려와 조심스럽게 몇 걸음을 걸어 보았다.

    “앞으로 경맥이 어찌 회복될 지는 네 운에 맡겨야 할게다.”

    하얀 장포 노인이 바로 몸을 일으켜 걸어갔다. 이에 남기자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품에서 부적 몇 장을 꺼내 손을 펼쳤다.

    푸른빛이 날아가 한립의 몸속으로 사라졌고, 축기기 도사도 마찬가지로 객실을 나섰다. 소녀 네 명은 그들을 배웅하고 다시 문을 닫았다.

    이때 한립은 의자에 앉아 두 눈을 내리깔고 부적의 효과를 확인하고 있었다.

    “한 형께서는 금강결을 벌써 3성까지 익히셨다면서요?”

    객실로 돌아온 소녀들 중 류아라 불리는 남색 장삼의 소녀가 방긋 웃으며 말을 걸어왔다.

    “운이 좋아 그렇게 되었습니다.”

    한립이 눈꺼풀을 들어 올려 그녀를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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