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4화. 혈주문서(血呪文書)와 영구(靈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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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에 흉터가 있는 사내는 한립이 구슬을 흡수한 후 태연히 기다리다가 놀란 얼굴을 하며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이제 제 말을 알아듣겠습니까? 당신은 누구고 어째서 이곳에 쓰러져 있었던 겁니까? 보통 사람은 청라사막(靑羅沙漠)까지 오지도 못했을 텐데요?”
“청라사막이라니 처음 들어봅니다. 사실 이곳에는 우연히 오게 된 것이라 어디인지 전혀 모르고 있었습니다. 신분이랄 것도 없는 보통 사람으로 이름은 한립이라 합니다.”
한립이 쓴웃음을 지으며 답했다.
“……당신도 공간균열을 통해 이곳에 떨어진 모양이군요. 놀랄 것 없습니다. 워낙 공간균열이 빈번하게 나타나는 곳이라 천만 리 밖에서도 낯선 사람들이 휩쓸려 날라 오기도 하니까요.”
거한은 이상할 것도 없다는 듯 말했다. 그 말에 한립은 할 말을 잃었고 미리 준비했던 거짓말들을 모두 삼켰다.
“뭐, 보통 사람은 아닌 것 같지만……. 인간이 아닌 이종족이 변신한 것만 아니면 아무래도 상관없습니다. 그런데 상황이 좋지 않아 보입니다. 며칠 지나면 청라사막에 ‘전갈의 난’이 일어날 때라 아무리 대단한 능력을 지녔어도 죽은 목숨일 텐데요. 원한다면 우리 천동상호(天東商號)와 계약을 맺는 것이 어떠십니까? 우리가 당신을 이곳에서 데리고 나가는 조건으로 본 상호에서 10 년간 일을 해주는 겁니다. 20년을 채운 후에는 자유롭게 떠날 수도 있고요.”
거한은 약삭빠른 웃음을 지었다.
“20년이요? 그러지요. 약조하겠습니다.”
“좋습니다. 그럼 약조한 김에 혈주(血呪)나 한 부 작성합시다.”
거한이 웃으며 등 뒤의 기병 한 명에게 손짓했다. 그러자 기병이 품에서 두툼한 종이 뭉치를 꺼내 그 중 하나를 빼들더니 손끝을 깨물어 그 위에 무언가를 쓰고 다가왔다.
종이를 한립에게 보여주고 내용을 확인시키기 위해서였다. 한립은 미간을 좁히고 종이를 올려다보며 한 동안 말이 없었다.
“설마 혈주문서도 처음 보는 것은 아니겠지요?”
“예, 혈주문서라는 것은 처음 봅니다. 어떻게 쓰이는 것인지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한립은 종이에 적힌 주술들을 보며 솔직히 말했다. 이건 종이라기보다는 부적에 가까웠다. 위에 쓰인 부적용 문자는 그도 알아보았는데 인계에서 굉장히 오래된 종류의 주술 문자였다.
문제는 그 배열이 생전 처음 보는 형태로 이루어져 있고 희미하게 피비린내가 나는 것이 굉장히 꺼림칙하다는 것이었다.
“혈주문서도 처음 보다니 설마 동쪽에서 온 겁니까? 하아, 됐습니다. 설명해 드리리다. 위에 적힌 내용에 문제가 없으면 자발적으로 피를 한 방울을 떨궈 계약을 맺는 겁니다. 만일 위반하면 혈주의 위력으로 혼백의 일부를 앗아가 죽느니만 못하게 만들 수 있지요. 이건 혈주문(血呪門)에서 제작된 물건이라 신선과 같은 능력을 지니지 않는 한 꼼짝없이 구속당하고 맙니다.”
거한은 인내심을 가지고 몇 마디 설명해 주었다. 그 말을 듣고 한립은 침음했다.
혈주문서를 찬찬히 보니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주술의 깊이는 대충 파악한 차였다. 그다지 복잡한 부적도 아니었다.
조금만 시간을 들이면 주술이 어떤 원리로 이루어져 있는지 파악할 수 있어 주술을 푸는 것도 어렵지 않을 것이다.
또한 대충 봐도 축기기 정도의 수사까지 구속할 수 있는 물건이라 결단기 이상의 수사들에게는 소용도 없는 부적이었다.
그는 법력은 없었지만 원영이 변화한 정원(精元)이 온 몸에 퍼져 있어 이 정도 혈주에 당할 일은 없었다.
생각해 보면 인계 구유종 부 노인이 꺼내 놓았던 사기(邪器) 명하혈(冥河頁)과도 비슷했다.
물론 명하혈에는 원영기 수사들조차 어느 정도 구속을 당했지만 혈주 문서는 주로 범인들이 서로 약조를 지키게 만들기 위한 물건인 듯했다.
또한 거한의 어투로 보아 이곳에서 흔히 쓰이는 물건 같았다. 한립은 생각을 정리하며 문서에 적힌 사항을 확인했다.
이곳에서 자신을 구해주면 상대를 위해 20년 간 일해 준다는 내용이었다.
“내용에는 문제없습니다. 그런데 제가 꼼짝할 수 없어서 이건 나중에나…….”
한립은 제안을 수락했지만 혈주문서 작성은 내키지 않는다는 티를 팍팍 냈다. 얼굴에 흉터가 있는 사내가 냉소하더니 혈주문서를 들고 온 기병을 향해 말했다.
“일곱째야, 네가 도와주거라.”
기병은 바로 종이를 한립의 가슴 위에 올려두었고 한 손으로는 그의 손목을 들어 다른 한 손을 번뜩였다. 그리고 손끝에서 날카로운 비수가 나타나 거침없이 한립의 손목을 그었다.
탱!
그러나 금속성의 마찰음이 울리고 한립의 손목에 피는커녕 자국도 남기지 못했다. 거한과 다른 이들이 모두 놀라 쳐다봤고 비수를 든 기병도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현감공을 수련한 거요? 아니면 금강결? 이미 2성을 익힌 겁니까?”
흉터 있는 거한이 정신을 치리고 조금 숙연히 물어왔다.
“……금강결을 3성까지 익혔습니다.”
그 물음에 침묵하던 한립이 찬찬히 대답하며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이제야 이곳이 천란수의 분신이 지칭하던 영계라는 확신이 섰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금강결 같은 특수한 공법을 범인들이 알겠는가?
“금강결 3성이라……! 적어도 저계 요수와는 맞먹겠습니다. 보아하니 이번에 사막에서 아주 귀한 보물을 주워갑니다. 일곱째의 무기가 먹히지 않는 것이 이상한 일도 아니군요. 그래도 이 금영검(金瑩劍)은 통할 겁니다. 저계라지만 영구(靈具)이니 당신이 법결을 발동해 막지만 않는다면 작은 상처는 낼 수 있을 테니까요.”
흉터가 있는 거한이 탄식하다 원래 표정을 되찾더니 칼집에 꽂힌 단검 하나를 일곱째에게 던져 주었다.
‘영구?’
한립은 괴상한 단어에 흥미로워했다. 그때 일곱째가 단검을 들어 칼을 빼니 금빛이 사방으로 뻗어나갔다. 한립은 눈을 가늘게 뜨고 그것을 관찰했는데 소위 ‘영구’라는 것은 법기와 별로 달라 보이지 않았다.
‘영계에서는 범인들도 법기를 부릴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자세히 보니 다른 점이 있었다. 단검 칼자루 부분에 오목하게 들어간 부분이 있었고 거기에 빛을 반짝이는 금색 영석이 박혀 있다는 것이었다.
또한 급도 꽤 높아 놀랍게도 중급의 금속 속성 영석이었는데 인계의 영석에 비해 5분의 1정도로 작았다.
그가 의아해 하는 동안 ‘일곱째’가 품에서 가죽 장갑을 꺼내 한 손에 끼더니 그제야 단검을 쥐었다.
가죽 장갑은 표면에 주술이 반짝였고 뜻밖에도 콩알 크기의 작은 영석 여러 개가 박혀 있었다.
가죽 장갑을 낀 손으로 금영검을 쥐자 검날이 더욱 날카롭게 번뜩였다. 한립은 무표정하게 그것을 지켜보았지만 속으로는 적잖이 놀랐다.
기병은 가죽 장갑을 끼자 영구라는 것을 부릴 수 있게 되었다. 그의 상식을 뒤엎는 일이었다.
천란수의 분신이 영계에서는 범인들 중 걸출한 인물들은 수도자와 대적할 수 있다고 했는데 눈앞의 영구를 보고 있자니 놀랄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되면 확실히 평범한 범인이라 할지라도 저계 수사를 멸살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사이 기병이 단검을 휘둘러 다시 한 번 한립의 손목을 그었다. 이번에는 훨씬 묵직한 공격이었다.
한립은 미간을 좁히며 속으로 법결을 발동했다. 이번에는 몸을 강화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일부러 약하게 만들기 위해서였다.
명왕결과 금강결은 동일한 공법이었지만 사용하는 방식이 달랐다. 전자는 체내의 법력을 이용해 수련하는 것이었고 후자는 외부 영력을 강제로 몸에 주입하는 형식이었다.
한립은 그간 명왕결의 방식으로 수련해 왔지만 이미 체내의 법력이 남지 않았기에 이번에는 금강결의 심법을 운용한 것이다.
그는 명왕결을 3성이 아니라 쉬골결과 용린과의 보조 하에 4성까지 익혔기에 그대로 두면 아무리 영구라도 손목에 상처를 내지 못할 것이다.
단검이 한립의 손목에 닿자 결국 실금 같은 상처를 내고 피가 흘러내렸다.
기병이 서둘러 한립의 다른 손을 쥐고 손끝으로 피를 찍어 혈주문서 위에 주술을 적어 내려갔다. 그러자 핏물이 형태를 잡으며 괴이하게 종이 속으로 흡수되었다.
그제야 기병이 웃으며 한립을 향해 말했다.
“이제 계약 내용을 속으로 읽고 동의한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한립은 슬쩍 눈썹을 끌어올렸지만 그가 시키는 대로 했다. 그러자 혈주문서에서 핏빛이 크게 번지며 주술 문자들이 튀어나와 한립과 기병의 몸속으로 사라졌다.
푸확.
혈주문서에 갑자기 청록색 불이 붙더니 재가 되어 사라졌다.
“하하! 좋습니다, 한 형제! 이제 우리 천동상호의 일원이 된 겁니다. 한 형제가 지금은 몸이 불편해 산랑수(狻狼獸)를 탈 수 없으니 마차를 타고 오십시오. 일곱째는 마차를 끌고 오거라.”
얼굴에 흉터가 있는 기병이 미소 지으며 한립을 향해 살갑게 대했다.
일곱째라 불린 청년은 바로 타고 있는 거대한 늑대를 움직여 한립의 뒤쪽으로 돌아갔다.
그동안 거한은 미소를 머금고 한립과 대화를 나누며 자신을 소개해주었다. 한립은 그제야 상대의 이름이 ‘장규’이며 천동상호의 호위대 대장 중 하나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들의 일은 귀중한 물품들을 호송하며 청라사막을 건너는 길이었는데 사막의 면적이 꽤 넓어 서둘러 이동해도 한 달은 걸린다고 했다.
두 사람이 한 마디씩 질문을 주고받으며 대화를 나누는데 멀리서 뿌연 먼지를 일으키며 무언가가 다가왔다. 그것은 네다섯 장은 되는 거대 거북이었다.
거대 거북의 등에는 푸른 나무로 만든 객실과 짐칸이 있었는데 그 앞에 의자가 있어 마르고 새까만 얼굴의 회색 장포 노인이 마부처럼 앉아 있었다.
거대 거북들은 몇몇 기병 앞에서 멈추었고 푸른 나무로 만들어진 객실 문이 열리며 가냘픈 인영이 걸어 나왔다.
뜻밖에도 열대여섯 살 먹은 비취색 장삼 차림의 소녀였는데 동그란 얼굴이 굉장히 귀엽고 깜찍했다.
“장 숙부님! 이분은 누구시죠?”
소녀가 모래 바닥 위에 누워있는 한립을 보곤 배시시 웃으며 물었다.
“향아 소저! 한 형제는 이제 저희 상호 사람이 되기로 한 분입니다. 지금 몸이 조금 불편한데 짐칸에 있으라 할 수도 없고……. 소저들이 조금 양해를 해주십시오.”
흉터가 있는 거한은 소녀를 향해 공손히 답했다.
“천동상호의 일원이 되었다면 다 한 식구죠! 안으로 들이세요.”
소녀가 빙긋 웃으니 아직 어리지만 제법 여인의 매력이 풍겼다. 흉터 거한이 감사를 표하고 손을 흔들자 두 명의 기병이 거대 늑대에서 내려 한립을 모래에서 뽑아냈다.
한 명은 그의 머리를, 나머지 한 명은 다리를 잡고 줄사다리를 타고 거대 거북 위로 올라갔다. 위로 올라간 한립은 객실 안을 훑었다.
내부 공간은 넓어서 열댓 명이 앉아도 충분해 보였지만 먼저 얼굴을 보인 비취색 장삼 소녀를 제외하고는 세 명의 소녀가 더 앉아 있을 뿐이었다.
소녀들은 하나같이 미색이 빼어났고 평범한 신분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마차 안에는 중간에 놓인 탁자와 사방에 설치된 기다란 의자들을 제외하면 아무 것도 없어 빈자리가 넉넉했다. 한립은 마차 한쪽의 기다란 의자 위에 눕혀졌는데 노란 요수가죽이 깔려 있어 꽤나 편안했다.
두 기병들은 얌전히 돌아나가며 곁눈질로도 소녀들을 훔쳐보지 않았다.
한립은 이상하게 생각했지만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았고, 객실 내부의 여인들에게 미소를 지어 보인 후 눈을 감고 휴식을 취했다.
사막에 누워 몇 개월을 보내며 낮에는 작렬하는 태양에 밤에는 뼈 속을 스며드는 추위에까지 시달리다 보니 몸과 마음이 상당히 피로했다.
네 명의 소녀는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한립을 살피며 자기들끼리 속삭였는데 누가 보아도 그를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소녀들은 목소리를 낮춰 이야기했지만 한립에게 들리지 않을 리 없었다.
“얼마나 심한 상처를 입었기에 움직이지도 못하는 거야?”
“모르겠어요. 장 숙부님이 말하는 것을 들으니 일행 중 수선사(修仙士) 한 분을 모셔 살펴보게 한데요.”
“장 숙부께서 그렇게까지 하신다고? 수선사들은 아무 때나 청할 수 있는 분들이 아닐 텐데.”
“그러니까요! 아무튼 장 숙부님 말씀으로는 잠재력이 큰 인재라고 하더라고요. 그러니 우리들이 있는 마차에까지 들였겠죠.”
“인재요? 전혀 그렇게 안 보이는데요?”
한립은 그들의 대화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는다는 듯 평온히 누워 꼼짝도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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