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3화. 낯선 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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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달이 지난 후에도 공간접점 입구에는 아무런 반응이 없자 남궁완은 전금아를 시켜 다시 봉인 진법을 발동하고 몇몇 제자들을 남겨 둔 채 섬을 떠나 난성해로 돌아갔다.
한립은 원신등을 남겨놓지 않았기에 남궁완과 제자들은 그가 무사히 영계로 갔는지 아니면 다른 화신기 수사들처럼 공간 폭풍과 경계 간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절명했는지 전혀 알 수 없었다.
이것이 한립이 원신등을 남기지 않은 이유 중 하나였다. 한 줄기 희망이라도 남겨 놓는 것이 절망보다는 낫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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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립은 땅에 쓰러져 꼼짝도 하지 못했다.
뜨겁고 건조한 대지를 온몸으로 느끼며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따져 볼 뿐이었다.
그의 기억이 틀리지 않고 인계의 낮과 밤의 반복을 하루로 치면 이곳에 엎어져 있은 지도 벌써 세 달이 넘어가고 있었다.
그가 누워있는 하늘 위로는 놀랍게도 세 개의 작렬하는 태양과 네 개의 흐리멍덩한 달빛이 드리워 있었기 때문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완전히 밤이 되면 저 태양들은 다시 달빛을 뿜어낼 것이다.
다시 한낮이 찾아오고 달빛이 전부 태양으로 바뀌면 일곱 개의 태양이 뜰 것이다. 그것으로 보아 이곳 하늘에는 언제나 일곱 개의 천체가 떠 있다는 뜻이었다.
그의 감각대로라면 이곳의 낮과 밤은 모두 기이하게 길어서 인계의 세 배는 되는 것 같았다. 또한 낮과 밤의 온도차도 굉장해서 그의 특수한 체질이 아니었다면 벌써 죽고 말았을 것이다.
‘이곳은 당연히 인계가 아니겠지. 허나 영계인지도…….’
한립은 그저 의혹을 품을 뿐 아무 것도 확신할 수 없었다.
첫째, 이곳의 영기는 그다지 농밀하지 않았다. 그저 인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영맥이 흐르는 곳 정도였다.
둘째, 그가 이곳에 온 방식은 아주 특이해서 모든 것이 예상 밖의 일이었다. 그러니 그가 영계에 무사히 온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공간접점에서 겪은 일을 생각하자 한립의 안색이 어두워졌고 솔직히 후회막심이기도 했다.
하지만 공간접점의 마지막 기로에서 그 일을 겪지 않았다면 계속 이어지는 공간폭풍을 견디지 못했을 것이다.
그가 준비한 방어용 보물들은 대부분 망가진 후였고 팔령척과 같은 영보들도 마찬가지였다. 심지어 화령부는 효과를 보지 못하고 공간폭풍 속으로 사라졌다.
그러나 지금 상황도 썩 좋지는 않았다.
그가 막 공간접점을 벗어나 이곳으로 왔을 때 빙봉과 억지로 떨어져 그녀가 걸어둔 금제가 발동했기 때문이다.
갖가지 비술을 익힌 덕분에 금제의 발작을 억누르지 않았더라면 벌써 법력의 반서를 당해 숨이 끊어졌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금제의 남은 힘이 그의 체내를 돌아다니며 경맥을 터트려서 목생주(木生珠)의 불멸체의 신통을 발휘해 겨우 온 몸이 엉망진창이 되는 것을 막아냈다.
처음 이곳에 떨어졌을 당시 그는 끊임없이 몸을 파괴하고 다니는 힘과 계속해서 몸을 회복시키는 힘이 전신을 돌며 그를 끝없이 고통스럽게 하고 있었다.
게다가 파괴하는 힘이 회복하려는 힘보다 빠르게 작용해 법력을 쓸 수도 몸을 움직일 수도 없었다.
그대로 두면 결국 몸이 붕괴할 게 뻔하다는 소리였다. 한립은 급한 마음에 극통을 참아내며 원영으로 하여금 모든 보물들을 몸 밖으로 밀어내 저물대에 담았고, 원영이 스스로 흩어지게 만들어 그 강대한 힘을 강제로 육체에 밀어 넣었다.
이렇게 몸의 붕괴를 막은 대가로 그는 백 년 간은 법력이 없는 몸으로 영력을 흡수하거나 의식을 퍼트릴 수도 없이 살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제 고계 수사가 그의 몸을 의식으로 훑는다면 그를 범인이라 여길 것이다. 물론 죽다 살아난 덕에 효과는 보았다.
3개월 간 금제의 힘이 거의 사라졌고 경맥도 대부분 회복되었다. 예상대로라면 아마 한 달 만 더 지나면 움직일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이런 생각을 하며 고개를 돌렸는데 풀 한 포기 없이 끝없이 펼쳐진 청회색 모래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는 황량한 대지 위에 홀로 누워 모래자갈에 묻힌 채 꼼짝도 못하고 있었다.
머리 위의 태양은 다시 두 개로 변했다가 마지막에는 하나만 남았고 점점 어두워졌다.
그러나 한립은 두 눈을 감기는커녕 더욱 크게 뜨고 남색이 일렁이는 눈으로 주변을 살펴보았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허공에서 스산한 울음소리가 들려왔고 하늘 저편에서 검은 점들이 나타났다. 못 해도 스무 마리는 넘을 것 같은 점들이 하늘을 빙빙 돌다 그대로 미끄러져 내린 것이다.
그것은 뜻밖에도 매의 머리에 독수리의 몸을 가진 괴상한 새들이었는데 각각이 네다섯 척은 될 법했고 날카로운 발톱과 새까만 날개 등이 아주 흉흉해 보였다.
괴조들의 속도는 굉장히 빨라서 순식간에 지상에서 서른 장 위까지 도달했고 그 사냥 목표는 보나마다 땅에 죽은 듯 누워있는 한립이 분명했다.
한립이 서늘하게 눈을 번뜩였지만 몸은 전혀 움직이지 않았고 그저 고개를 돌려 가슴 가득 숨을 들이킬 뿐이었다.
청회색 모래자갈 한 덩이가 괴이하게 뭉쳐 한립을 향해 날아왔다.
막 그것이 입 안으로 빨려 들어가려 할 때, 한립이 다시 숨을 내뱉으니 가벼운 바람이 모래자갈 덩어리를 빙빙 돌게 만들었다.
그때 한립의 시선은 이미 열댓 장 가까이 날아든 괴조들에게 가 있었다. 괴조들은 입을 쩍 벌리고 있었는데 구역질나는 피비린내가 물씬 풍겨왔다.
그는 괴조가 더 가까이 다가오자 모래자갈 덩어리를 입가에서 빙빙 돌게 만들어 숨을 훅! 뿜었다. 그러자 입안에서 하얀 강풍이 불어나가 모래자갈 뭉치로 새들을 공격했다.
푸푸푸푸푹!
파공음이 울리며 모래자갈들이 몇 마리 괴조의 몸에 비처럼 쏟아졌다. 금속이 마찰하는 듯한 날카로운 비명을 지른 괴조들이 동시에 곳곳으로 흩어졌는데 무수히 많은 핏줄기가 떨어져 내리는 것이 큰 부상을 입은 듯 했다.
그런데 기겁할 일이 벌어졌다.
뒤따르던 나머지 괴조들이 한립을 공격하지 않고 땅에 떨어진 동류들을 공격한 것이다.
상처입고 피 흘리던 괴조들은 금세 갈가리 찢겨나갔고 녹색 피가 뚝뚝 흐르는 살점을 문 다른 요수들은 흡족한 기색으로 다시 날아올라 종적을 감추었다.
그리하여 청회색 모래사막 위에는 또 다시 한립만 남게 되었다…….
한립의 안색은 무덤덤했고 이런 일은 진작 익숙해졌다는 듯 눈을 반짝이며 다른 생각에 잠겨 있었다.
다시 얼마의 시간이 흘렀다.
허공에 하나 남은 태양마저 점점 암담해지더니 모양이 변해갔다. 이곳에 누워 수없이 본 광경이지만 일곱 개의 초승달이 휘영청 떠오르는 아름다운 모습은 볼 때마다 가슴을 뒤흔들었다.
“……!”
갑자기 그의 표정이 달라졌고 고개를 돌리려 했으나 기껏해야 약간 턱을 움직였을 뿐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한참이 지나 어디선가 희미하게 말발굽 소리와 마차가 굴러가는 잡다한 소리들이 들려왔다. 사람들이 마차를 끌고 주변을 지나는 듯했다.
한립은 미간을 좁히며 머뭇거렸다. 저들의 주의를 끌어 불러야 할지 아닐지 결정을 내리지 못한 것이다.
만일 먼저 소리를 쳐 부르지 않는다면 몸의 절반이 모래에 묻힌 그를 발견하기란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이런 고민은 오래 가지 못 했다.
온 몸이 새빨간 작은 새가 괴이하게 나타나 서너 장 거리를 두고 빙글빙글 돌며 울어댄 것이다.
그다지 크지 않은 울음소리였지만 그윽하게 퍼져나가 주변 몇 리까지 또렷하고 울려 퍼졌다. 분명 마차를 끌고 있는 무리에게 소식을 전하는 것일 터였다.
한립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에 와서 작은 새를 아까처럼 쫓아내려 하는 것은 쓸데없는 짓이라 가만히 기다리기로 한 것이다. 과연 얼마 지나지 않아 땅이 미세하게 울리며 누군가 이쪽으로 질주해 왔다.
히힝!
괴수를 탄 기수 몇 명이 한립 쪽으로 다가와 멀리서 모래에 파묻힌 한립을 싸늘하게 쳐다보고 있었다. 한립은 고개를 돌려 그 사람들을 힐끗 쳐다봤다.
복색이 조금 이상하기는 했지만 확실히 사람이었다.
한립은 그나마 조금 안심했다.
괴수를 탄 이들은 전부 스물에서 마흔 사이의 청년이나 중년 사내들이었지만 복색은 다 달랐다.
어떤 이들은 반질반질 윤이 나는 갑옷을 입고 있었고 또 어떤 이들은 뼈 조각으로 만든 엉성한 갑옷으로 중요한 부분만을 가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 모두 묵직해 보이는 방망이 형태의 무기를 들고 있었는데 절반은 굵직하고 끝으로 갈수록 뾰족해 이리의 이빨을 닮은 낭아봉(狼牙棒)을 연상케 했다.
그러나 한립의 주의를 끈 것은 사람들이 아니라 그들이 타고 있는 괴수들이었다.
놀랍게도 푸른색 괴수는 새까만 머리에 곧은 뿔이 솟아 있었으며 등과 배 그리고 굵은 네 다리에 두꺼운 갑옷을 입고 있었다.
한립이 그들을 살피는 동안 괴수에 탄 기병들도 한립이 평범해 보인다고 여겼는지 긴장감이 조금 풀어졌다. 하지만 함부로 접근하지는 않았다.
그 중 얼굴에 깊은 흉터가 있는 장한이 고개를 돌려 옆에 있는 청년에게 무어라 말했다.
그러자 단발 청년은 한참 품을 뒤지더니 하얀 원반 같은 것을 꺼내고는 요수를 움직여 한립을 향해 천천히 다가왔다.
청년이 한립과 몇 장 떨어진 곳에서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하더니 그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자 그를 내려다보다가 결국 손을 들어 원반에서 빛을 뿜어냈다.
사발 굵기의 푸른 빛기둥이 원반 중심에서 뻗어 나와 한립의 몸에 닿았다.
한립은 차분히 빛기둥이 몸에 닿아 반짝이도록 놔두었다. 일단 움직일 힘도 없었고, 한 눈에도 빛기둥이 공격용이 아니라 측정이나 다른 용도로 쓰이는 것이란 걸 알아봤기 때문이다.
빛기둥이 사라진 후에 원반이 반짝였다. 청년은 고개를 숙이고 원반을 살피다가 갑자기 놀란 얼굴로 뒤를 향해 소리쳤다.
그러자 뒤에서 기다리던 기병들이 놀라 한동안 웅성거렸다. 이어 얼굴에 흉이 있는 거한이 큰 소리로 청년에게 무언가를 물었고, 그 대답을 듣고는 모래 바닥에 누워있는 한립을 놀란 눈으로 쳐다봤다.
그는 거대 늑대를 움직여 청년이 있는 곳으로 다가왔다. 그는 한립에게 무어라 말했지만, 한립은 눈만 껌뻑일 뿐 단 한 마디도 알아듣지 못했다.
턱을 긁적이던 중년 사내가 갑자기 다른 언어로 이야기를 했다.
그 말을 들은 한립의 표정이 살짝 달라졌다. 비록 아직도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훨씬 익숙한 것이 인계의 상고 언어 중 하나와 닮은 것 같았기 때문이다.
사내는 한립의 표정을 보고 기뻐하며 서둘러 몇 마디를 더 했지만 한립은 안간힘을 써서 고개를 저어 보였다.
거한은 조금 골치가 아픈지 노란 목함을 꺼내 뚜껑을 열었다. 그 안에는 담황색의 손톱만 한 구슬이 담겨 있었고 영기의 빛이 희미하게 반짝였다.
중년 사내는 아까워 죽겠다는 얼굴로 고개를 숙여 한참을 망설이다 이를 악물고 구슬을 집어 들었다.
그가 다른 손을 뒤집자 이번에는 특이한 형태의 반지가 나타났다. 표면에 몇 가지 주술이 새겨져 있고 콩알만 한 비취색 수정이 박혀 있는 반지였다.
거한이 구슬을 반지에 가져다 대자 곧 빛이 크게 번지며 구슬이 밝게 빛났다.
그리고 주저하지 않고 구슬을 한립의 몸 위로 던졌다. 그것은 한립의 몸에 닿자마자 신비하게 녹아들어 사라졌다.
‘뭐지?’
한립은 서늘한 기운이 구슬에서 뻗어 나와 머릿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느끼고 내심 긴장했다.
법력을 움직일 수 있었다면 바로 구슬을 밀어냈겠지만 지금은 손끝 하나 까딱할 수 없으니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앞에선 사내의 행동에 악의가 느껴지지 않아 한립은 당황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서늘한 기운이 그의 머릿속을 한 바퀴 돌더니 사라졌고 갑자기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파왔다.
무언가 강제로 머릿속에 밀어 넣는 기분이었다.
한립은 의식을 밖으로 방출할 수는 없었지만 체내에 지니고 있는 의식은 무척 강대해 지식을 깔끔히 흡수했고 낯선 언어를 익히게 되었다.
바로 사내가 말하던 그 언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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