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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728화 (485/2,000)
  • 728화. 해무(海霧)

    *

    “지나던 길이었다고요?”

    범 수사는 움찔하며 믿지 못하겠다는 얼굴을 했다.

    “물론 인근 해역 지도를 얻을 수 있다면 더 좋겠지요. 그런데 뇌경수 요단이 보기에는 멀쩡해 보이지만 요력이 대부분 흩어진 상태군요. 아마 이것으로 단약을 제련했다가는 좋은 물건을 얻지는 못할 것입니다.”

    한립은 힐끗 노인이 들고 있는 목함을 보고는 웃으며 말했다.

    “그게 사실입니까?”

    “그 무슨 헛소리십니까!”

    노인은 깜짝 놀랐고 범 수사는 안색이 급변해 화를 냈다.

    “믿고 안 믿고는 여러분의 자유입니다. 그보다 인근 해역 지도를 내 주시고 몇 가지 질문에 답해주신다면 저도 마침 뇌경수 요단이 있으니 하나 내어드리지요. 등급이 높지는 않지만 단약을 제련하기에는 충분할 겁니다.”

    한립이 손바닥을 뒤집자 요단이 나타났다. 남색으로 빛나는 요단은 분명 이전 것보다 훨씬 동그랗고 완전해 보였다.

    오룡해 수사들은 표정이 시시각각 달라졌다. 누군가는 눈을 반짝였고 또 누군가는 불신 혹은 적의를 드러냈다.

    “누구시기에 이런 장난을 치는 것 입니까?”

    범 수사가 한립이 들고 있는 요단에서 시선을 떼며 사납게 일갈했다.

    “장난이라니요? 겨우 6급 요단을 가지고 그럴 필요가 있을까요?”

    눈썹을 끌어올린 한립이 웃는 듯 마는 듯 물었다.

    “흥! 다른 요수의 6급 요단이었다면 모르겠지만 뇌경수의 요단은 다르지 않습니까. 갑자기 나타나서는 범 형의 요단에 문제가 있다고 이상한 말씀을 하시는 저의가 무엇입니까?”

    시종일관 말이 없던 무서운 인상을 지닌 손 수사가 냉랭히 입을 열었다.

    “아마 뇌경수를 죽이면서 시간을 꽤나 끌었을 겁니다. 요수가 그렇게 오래 버틴 건 요단 내에 있던 대량의 요력을 끌어다 썼기 때문이겠죠. 게다가 죽은 후에는 요단의 요력으로 보충할 수도 없었을 테니 그 품질이 좋을 리가 있겠습니까? 보아하니 두 분은 고계 요수를 죽여 본 경험이 별로 없어 그 사실을 몰랐나 봅니다.”

    한립은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그 말을 들은 범 수사와 손 수사는 시선을 교환하며 어찌 해야 할지 머뭇거렸다.

    “요단에 관한 것은 사실이라고 칩시다. 그런데 이곳에 나타난 목적이 대체 무엇입니까? 범 수사가 환술 금제를 펼쳐 놓은 것으로 아는데 일부러 찾아내 온 이유 말입니다.”

    하얗게 수염을 기른 노인이 경계심을 드러냈다.

    “겨우 이 정도 환영진에 구애받을 이유가 없지요. 게다가 이곳에는 처음 와본 것이니 일부러 수사들을 찾아왔을 리가 있겠습니까? 오늘 기분이 좋아 조언해준 것뿐이니 조금 전 말한 거래를 할 것인지나 답하시지요. 이곳에서 오래 머물 마음이 없으니!”

    갑자기 한립의 안색이 달라지자 정자 안에 있던 수사들은 내심 흠칫 놀랐다. 그가 원영기 수사들을 앞에 두고도 거리낌 없이 행동하는 것을 보고 함부로 입을 놀리기 어려웠던 것이다.

    그때 초록색 장삼을 걸친 여인이 눈을 반짝이며 이렇게 물었다.

    “보아하니 오룡해 수사 분이 아니시군요. 혹시 대진에서 오신 분이라면 향지례 선배님을 아십니까?’’

    한립은 멈칫하며 눈을 가늘게 뜨고 그녀를 보았다.

    “……향 수사를 알더냐?”

    “향 선배님께서 일전에 제가 머물던 섬에 자리 잡으시고 수련에 관해 지도를 해주신 적이 있습니다. 그 덕을 크게 보았지요! 향 선배님을 아시는 것을 보니 혹시 화신기 선배님이십니까?”

    여인이 벌떡 몸을 일으키며 더없이 공손히 물었다.

    “화신기 선배님!”

    “화, 화신기!”

    다른 수사들도 다들 앉아서 정자 밖을 내다보다 화들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특히 방금 상대를 냉대하며 불손한 말을 일삼았던 범 수사나 사나운 인상의 노인은 두려움을 드러냈다.

    “기왕 들켰으니 숨길 것도 없겠지. 너는 언제 향 수사를 만나 뵌 것이더냐?”

    한립은 다른 수사에게는 시선도 주지 않고 미간을 좁히며 여인을 바라보았다.

    “이백 년도 더 된 일입니다. 당시 향 선배님이 아니었다면 아직도 결단기를 배회하고 있었을 겁니다.”

    단아한 여인이 희색을 드러내며 답했다. 이백여 년 전이면 향지례 등이 오룡해에서 공간접점을 발견했을 때였다.

    ‘사실인 것 같구나.’

    한립은 그녀가 사실대로 고하고 있다고 판단해 안색을 풀었다.

    “향 수사를 알고 있다니 잘 되었다. 이 요단을 가져가고 인근 해역 지도를 가져 오거라.”

    한립이 손을 뻗어 진귀한 요단을 여인에게 던져주었다.

    여인은 기뻐하며 요단을 받고는 허리를 굽혀 감사 인사를 올리고 저물대에서 녹색 옥간을 꺼내 사뿐사뿐 다가와 건넸다.

    옥간에 의식을 불어넣은 그는 향지례가 일전에 남긴 정보와 비교하며 순식간에 공간접점의 위치를 찾아냈다.

    이곳에서 멀지 않은 곳으로 한 달이면 도착할 듯했다. 한립이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제 몇 가지 물을 것이 있으니 잘 듣고 답하거라.”

    화신기 수사의 신분을 드러낸 한립은 기운을 감추지 않고 거침없이 분부를 내렸다.

    그러자 초록색 장삼을 걸친 여인은 서둘러 그러겠다고 답했다.

    한립은 입술을 달싹이며 목소리를 내지 않았고 단아한 여인은 조용히 눈을 빛내다 전음으로 일일이 물음에 답하였다.

    대답을 들은 한립은 턱을 쓰다듬으며 고개를 숙이고 생각에 잠겼다.

    그때 다른 수사들은 감히 숨소리도 크게 내지 못하고 그 자리에 서 있었는데 혹시나 화신기 선배의 기분을 상하게 할까 긴장하는 눈치였다.

    “궁금하던 것을 모두 알았으니 그만 가보마. 너희는 하던 것을 계속 하거라!”

    한립은 결론을 내렸는지 소매를 펄럭이며 초록빛으로 사라졌다. 그러나 그가 어떻게 이곳을 떠났는지 정확히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에 전전긍긍하던 범 수사 등은 한시름 놓았고 단아한 여인이 들고 있는 뇌경수의 요단을 보며 부러워했다. 겨우 지도 한 장과 말 몇 마디에 진귀한 요단을 얻었으니 운이 좋아도 너무 좋았다.

    초록색 장삼을 입은 여인은 그들이 바라보는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차분히 요단을 챙겨 넣고 말했다.

    “한 선배님도 이제 가셨으니 교역회를 계속 진행하시지요?”

    “벽 선자, 그게 급한 일이 아닙니다. 선자께서 이전에 화신기 수사와 친분이 있었다니 그간 몰라 뵙고 실례가 많았습니다.”

    남색 장포 유생이 쓴웃음을 지으며 탄식했다.

    “오래 전 일이고 저는 겨우 결단기 수사였는데 친분이라니요. 그저 향 선배님이 몇 가지 잘못된 점을 짚어 주셨을 뿐입니다.”

    “그렇다고 해도 화신기 수사와의 인연이라니 다들 꿈에라도 그리는 일이 아닙니까. 그런데 이상한 일이긴 합니다. 어찌 대진의 최상급 수사들이 우리 오룡해까지 모여든 것일까요? 엄청난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 아닙니까?”

    범 수사가 중얼거리다 미간을 좁히며 의혹을 제기했다.

    “가능성이 없지는 않지요. 허나 화신기 수사들이 나선 일에 우리가 끼어들 수나 있겠습니까. 잘못했다가는 상대의 손짓 한 번에 뭉개질 수도 있는 일인데요. 이런 일은 말도 꺼내지 않는 것이 제일입니다. 괜히 화신기 수사의 심기를 건드렸다는…….”

    하얀 수염 노인이 의미심장하게 말끝을 흐렸다. 나머지 수사들은 안색이 변해 다들 알아들었다고 답했다.

    오룡해 수사들이 남몰래 한립의 목적지를 추측하고 있을 때 그는 이미 푸른 빛줄기로 변해 만 리 밖 바다 위를 날아가고 있었다.

    여인에게서 최근 인근 해역에 화신기 수사가 나타나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는 거리낌 없이 공간접점이 있는 곳으로 날아가는 중이었다.

    화신기 수행에 전력으로 날아간다면 금방 도착할 테지만 그렇게 되면 천지원기를 건드려 수명이 깎일 터였다.

    그래서 시간이 조금 걸리더라도 평범한 둔술을 유지하고 날아가고 있었다.

    *     *     *

    한 달 후, 한립은 끝없이 펼쳐진 어느 바다 앞에 도착했다.

    눈앞은 온통 새하얀 안개로 뒤덮여 있었지만 그는 지체 없이 안으로 들어섰다.

    해무 속을 반 시진 정도 날아가고서 그는 우뚝 멈추었다. 사방을 여러 차례 살핀 그가 두 손을 비볐다 폈다.

    “터져라.”

    두 줄기 굵은 금빛 뇌전이 튀어나가 허공을 강타했다.

    쿠쾅!

    그러자 그곳 주변으로 몇 리에 달하는 해무가 사라지더니 아래쪽으로 건물이 하나 세워져 있는 작은 섬이 보였다.

    한립이 반가운 얼굴로 중얼거렸다.

    “향 노괴 등이 나를 속인 것은 아니구나. 과연 문하의 제자들을 시켜 공간접점을 지키게 하고 있었어! 허나 이미 이백 년도 넘게 지났으니 아직 그들이 남아 있을지는 알 수 없겠군.”

    그런데 작은 섬에서 세 줄기의 둔광이 날아올라 한립을 향해 다가왔다. 한립은 그 모습을 보고 조용히 기다렸다.

    둔광이 가시고 나타난 것은 여인 하나와 사내 둘로 이루어진 중년의 결단기 수사들이었다.

    그들은 한립의 얼굴을 훑고는 놀람과 기쁨에 가득 차 서둘러 예를 올렸다.

    “한 선배님을 뵙습니다. 향 사조님의 명을 받고 이곳에서 기다린 지 정말 오래입니다.”

    “향 수사 문하의 제자들이라고? 이 전에 나를 본 일이 있더냐?”

    “그것은 아니옵고, 사조님께서 한 선배님의 초상을 남겨 주셔서 알아본 것입니다.”

    “그랬구나. 그간 고생 많았으니 내 너희를 푸대접하지는 않을 것이다. 또한 앞으로는 내 문하의 제자들을 시켜 지키게 할 것이니, 이곳에 갇혀 있을 필요 없다.”

    고개를 끄덕인 한립이 그들에게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 말에 세 중년 수사들은 기뻐하며 한립을 섬에 있는 건물로 안내했다.

    그러나 한립은 우선 공간접점을 보러 가겠다고 말했고 수사들이 즉시 그를 다른 방향으로 이끌었다.

    십여 리를 날아가자 세 수사가 설명하지 않아도 한립은 전방의 허공이 이상하다는 것을 감지할 수 있었다.

    그는 속도를 높였고 잠시 후 한립과 결단기 수사들의 둔광이 멈추었다.

    한립이 눈도 깜짝이지 않고 회색 기운이 도는 거대한 빛덩이를 보고는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빛덩이는 동그랗고 직경이 1리는 되어 보였는데 조금 암담하기는 했지만 사람의 의식을 빨아들이는 기묘한 느낌을 풍겼다.

    “이곳이 공간접점이더냐?”

    “예, 선배님! 이곳이 바로 사조님과 다른 선배님들이 들어가신 공간 접점입니다. 입구를 안정시키느라 사조님과 선배님들이 꽤나 고생하셨지요. 특수한 봉인을 이용해 겨우 진정시켰고 공간 파동을 최소화해 다른 오룡해 수사들의 이목을 끌지 않게 해두셨습니다.”

    세 결단기 수사 중 중년 여인이 대답했다. 그러나 그녀도 향지례를 언급할 때는 표정이 어두워졌다.

    세 수사 모두 사조의 원신등이 꺼졌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어쩐지 이곳의 공간파동이 미약하다 했다. 향 수사 등이 적잖이 신경을 써두셨구나.”

    허공의 빛덩이를 바라보며 한립도 잠시 할 말을 잃었다. 그때 세 결단기 수사가 서로 시선을 교환했다.

    “선배님께 보고드릴 사항이 있습니다.”

    그 중 한 사내가 머뭇거리다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이지?”

    “저희가 이곳을 이백 년 넘게 지키다 보니 알게 된 사실입니다. 향 사조님의 봉인이 있다지만 공간접점의 입구가 백 년 전부터 잠깐씩 요동치기 시작했습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동요가 빈번해졌고 처음에는 몇 년에 한 번이었던 것이 지금은 1년에 한 번 그것도 보름 정도 지속되고 있습니다.”

    “그런 일이. 네 말은 봉인만으로 공간접점의 입구를 유지할 수 없어졌다는 뜻이로구나!”

    한립은 놀라 미세하게 안색이 달라졌다.

    “아무래도 그런 것 같습니다. 이런 추세라면 길어야 백 년 이내 공간접점이 붕괴되거나 불안정해지겠지요. 그때가 되면 선배님께서 향 사조님과 다른 분들처럼 쉽게 안으로 들어가실 수는 없을 것입니다.”

    또 다른 사내가 공손히 설명했다.

    “백 년이라, 그것 밖에 안 남았단 말이더냐.”

    “이건 저희의 추측일 뿐입니다. 저희 걱정이 지나친 것일지도 모르지요.”

    한립이 난색을 표하자 여인이 서둘러 미소를 머금고 말했다.

    “추측인지 아닌지는 내 직접 머물다 보면 알게 되겠지. 어차피 공간 접점을 살펴봐야 하니 한동안 이곳을 떠나지 않을 것이다.”

    잠시 고민하던 한립이 차분하게 일렀다. 이후 그가 손을 저으며 세 수사를 작은 섬으로 돌려보냈고 홀로 이곳에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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