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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724화 (481/2,000)

724화. 매복

*

한립은 손바닥 위의 빛덩이를 허공에 던져놓고 한손으로 허리춤을 스쳐 작은 깃발을 꺼내들었다.

적홍색의 깃발은 핏빛을 은은히 발산했고 안에서는 귀곡성이 흘러나왔다. 릉옥령은 그것을 보고 움찔하며 힐끗 한립을 살폈다.

그러나 그는 설명해줄 생각이 없는 듯 곧바로 주술을 외우며 깃발을 머리 위로 던졌다. 빛을 머금고 미친 듯이 불어난 깃발은 한 장 크기로 커졌고 짙은 핏물에 젖은 것처럼 핏빛 기운이 뚝뚝 떨어져 내렸다.

한립이 그것을 가리키자 거대한 깃발이 펄럭이며 핏빛 안개가 흘러나와 원자산으로 날아들었다.

핏빛 안개는 작은 산의 꼭대기에서 우뚝 멈추었다. 그리고 잠시 후 요동치며 곳곳으로 퍼져나갔고 산 정상을 시작으로 대부분을 감싸며 진한 피비린내를 풍겼다.

릉옥령은 그 안에서 느껴지는 엄청난 혼백의 기운에 깜짝 놀라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때 한립이 성큼성큼 원자산으로 걸어가 허공의 빛덩이를 향해 손짓했다. 빛덩이는 그의 손짓에 따라 작은 산으로 튀어나가더니 그 속으로 사라졌다.

쿠르릉!

그가 한 손을 들어 작은 산을 향해 허공을 쥐자, 산 표면에 오색 빛이 반짝이며 진동했다. 그리고 결국에는 작은 산이 천천히 핏빛 안개가 있는 곳으로 떠올랐다.

그 모습에 릉옥령은 입을 다물지 못했고 거대한 원자산이 핏빛 안개 속으로 사라지는 것을 말없이 지켜보았다. 그제야 한립은 법결을 던져 넣었다.

핏빛이 한동안 꿈틀거리다가 수축하더니 수 촌 가량의 붉은 깃발로 변해 한립의 수중에 떨어져 내렸다.

이제 동굴은 텅텅 비었고 원자산은 처음부터 그곳에 없었던 것처럼 흔적 없이 사라졌다.

“공간 보물!”

정신을 차린 릉옥령이 놀라 중얼거렸다.

“아주 약간의 공간 신통을 지닌 보물일 뿐입니다.”

한립이 미소 지으며 의식으로 적혼번을 훑고는 만족해했다.

“원자산을 담을 수 있는 공간 보물이라면, 인계를 전부 뒤져도 몇 개 되지 않을 것입니다. 한 형께서 그 중 하나를 찾아내시다니 대단하십니다.”

릉옥령은 경탄했지만 내심 쓴웃음을 지었다.

천성쌍성이 한립을 굴복시키기 위해 남겨 놓은 방법은 반드시 그가 성궁에 남아 원자신광을 익혀야 통하는 것이었다. 여인은 속으로 한숨을 쉬면서 더는 그를 성궁에 붙들어 둘 생각을 하지 못했다.

핏빛이 반짝이며 깃발이 사라지자 한립이 잠시 침묵하다 그녀를 향해 말했다.

“성궁에 잠시 남아 수사와 수련상의 깨달음을 나누려 합니다. 그 김에 수사의 수련에 어떤 문제가 있는 지도 함께 살펴보도록 하지요. 그런데 한 가지 성궁의 힘을 빌릴 일이 있습니다.”

“본 궁의 은인이신데 무엇이든 도와드려야지요! 제게 그리 예를 차리 실 것 없습니다.”

릉옥령은 멈칫하다 가볍게 웃으며 답했다.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닙니다. 외성해 금교왕의 최근 행적이나 머물고 있는 위치를 알아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는 별일 아니라는 듯 말했지만 ‘금교왕’이라는 소리에 릉옥령은 멈칫하며 눈을 반짝였다.

“금 노요의 행적을 알고자 하신다니! 한 형, 설마…….”

“금교왕을 찾을 만한 이유가 있어서 묻는 것입니다. 정보만 알려주시면 성궁에는 피해가 가지 않도록 할 것이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가 너무 어려운 부탁을 드린 겁니까?”

한립이 슬쩍 그녀를 쳐다보며 눈썹을 끌어올렸다.

“아무리 어려운 일이라도 성궁이 큰 은혜를 입었는데 거절할 수 없지요. 다만 본 궁이 외성해에서 수사들을 철수한 상태라 10급 요수인 금교왕을 찾는 데는 시일이 좀 걸릴 것 같습니다.”

릉옥령이 고개를 저으며 진중하게 해명했다.

“시일이 문제라면, 몇 년이라도 기다릴 수 있습니다.”

“그러시다면 바로 수사들을 파견해 소식을 알아보겠습니다. 안심하시고 기다리시지요.”

릉옥령도 머뭇거리지 않고 곧바로 대답했다. 둘은 잠시 한담을 나누다 동굴을 나섰고 옥문을 지나 그곳을 떠났다.

*     *     *

2년 후, 난성해의 무인도에 사내와 여인이 나타났다.

사내는 평범한 외모에 맑은 눈을 지니고 있었고, 여인은 청초한 외모에 작은 체구를 지니고 있었다. 둘은 모두 굉장히 어려서 동년배처럼 보였지만 여인은 그를 더없이 공손하게 대했다.

사내는 담담한 얼굴로 여인에게 물었다.

“금교왕이 곧 이곳으로 올 것이란 말이렷다. 중간에 마음을 바꿔 다른 곳으로 가는 것은 아니겠지?”

“한 장로님, 안심하셔도 됩니다. 이미 여러 차례 확인했고 고계 요수를 한 마리 잡아 추혼술을 해보았으니 정확한 소식임이 틀림없습니다. 이 곳 해저에 희귀한 영과(靈果)가 열리는데 인간 수사들에게는 쓸모가 없지만 교룡 일족은 즐겨 먹는 과실이라 합니다.

금교왕은 10년에 한 번씩 영과가 익을 때쯤 이곳에 온다고 하는데 어떤 일이 있어도 거르지 않는다고 합니다. 영과를 다른 곳으로 옮겨 심으면 말라 죽어 교룡 일족도 어쩔 수 없다더군요. 이제 영과가 익을 시기가 되었으니 곧 금교왕이 찾아 올 것입니다.”

젊은 여인은 교룡 일족에 대해 잘 아는 듯 자신 있게 설명했다.

“그럼 며칠 기다려 보자꾸나.”

사내가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사내는 당연히 한립이었고 그 옆의 여인은 릉옥령이 보낸 제자였다. 성궁이 2년 간 전력을 기울여 추적한 결과 금교왕의 행적을 포착한 것이다.

한립은 여인을 데리고 천성성을 떠나 성궁이 은밀히 숨겨둔 전송진을 통해 외성해로 넘어왔고 이곳에서 매복하며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벌써 몇 개월이 지났지만 금교왕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조금 조급해 하고 있었는데 성궁 여인의 말을 들으니 마음이 조금 편해졌다.

이때, 한립이 헛기침을 하며 안색이 달라져 홱 하고 고개를 돌렸다.

“드디어 왔구나! 기운으로 보건대 금교왕이 확실하다. 위험할 수 있으니 너는 즉시 이곳을 떠나거라.”

여인은 한립의 말에 서둘러 기운을 숨기고 곧바로 하얀 빛줄기로 변해 반대 방향으로 튀어나갔다.

한립은 그녀가 떠나자 소매를 털어 검은 병을 방출했다. 그러자 회백색 마기가 흘러나와 다섯 구의 백골들이 유유히 모습을 드러냈다.

“가라.”

한립의 명령에 다섯 구의 백골들은 마기의 바람을 타고 흩어졌다.

한립은 이에 멈추지 않고 영수대를 건드리니 12마리의 지네들이 날개를 펄럭이며 나타났다. 지네들은 한립의 조종에 따라 아래쪽 섬으로 파고들어 종적을 감추었다.

다시 멀리 바다를 바라보던 한립은 피식 웃고는 별안간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모든 것이 순식간에 벌어졌고 섬 위에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바람만 불었다.

한식경 후 하늘 저 끝에서 영기의 빛이 반짝이며 금색과 푸른색 빛줄기가 날아들었다.

곧 눈부신 빛을 거둔 이들이 모습을 드러냈는데 한 명은 금색 장포에 체구가 우람하고 구불구불한 머리와 수염을 지닌 자였고, 또 한 명은 깡마른 몸에 은색 관모를 쓰고 푸른 장포를 입은 자였다.

금색 장포 거한이 의아한 눈빛으로 주변을 살피고 있었다.

“금 수사 왜 그러십니까? 이상한 점이라도 있는지요.”

푸른 장포 수사는 그것을 보고 이상하다는 듯 물었다.

“누군가 멀리서 의식으로 우리를 찾아낸 것 같아서 말입니다. 그런데 그 의식이 너무 미약해서 착각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 일이 정말 있었다면 상대의 의식이 금 형보다 훨씬 강하다는 소리 아닙니까? 설마 그런 일이 있으려고요.”

푸른 장포 사내가 실소하며 고개를 저었다.

“풍 형이 저를 너무 높게 봐주십니다. 노부 비록 금교왕이라 불리지만 이 주변 해역에서나 알아주지 이곳을 벗어나면 별 것 아닌 존재에 불과할 겁니다.”

금포 거한은 다시 의식으로 섬 주변을 살살이 훑고서야 마음을 놓았다. 그러나 오자동심마는 벌써 아주 높은 상공에 포진해 있었고 육익상공들은 수백 장 아래 지하에 몸을 묻고 있었다.

심지어 한립은 은닉술을 펼치고 있었지만 상대보다 훨씬 강대한 의식을 지니고 있었기에 전혀 감지되지 않았다.

“겸손도 하십니다. 천하에 화신기 수사를 제외하고 누가 금 형을 해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이렇게 구석진 곳까지 올 줄은 몰랐습니다. 수사께서 알려주시지 않았다면 이런 곳에 용린과(龍鱗果)가 있을 줄 누가 알겠습니까!”

푸른 장포의 풍수사는 금교왕이 조심스럽게 구는 것을 개의치 않고 상대를 치켜세웠다.

“노부도 오래 전에 우연히 발견한 것입니다. 그 후 십여 년이 지날 때 마다 한 번씩 과실을 채취했지요! 인간들의 경전에는 효과가 대단해서 이것을 복용하면 별안간 승천할 수 있다고 적혀 있는 과실입니다. 그러나 고계 수사들도 알아보지 못하더군요. 그저 우리 교룡 일족이 맛이 좋아 즐겨 먹는다고만 알려져 있습니다. 이것을 자주 복용하면 환골탈태하여 힘이 강해진다는 것을 누가 알겠습니까? 자주 먹어야 효과를 알아낼 텐데 구하기는 또 얼마나 어려운지요. 그런데 풍 수사가 용린과의 비밀과 옮겨 심는 방법을 안다는 것은 정말 놀라운 일입니다.”

금교왕이 푸른 장포의 풍 수사를 응시했다.

“저도 우연히 상고요족의 유물에서 남겨진 서책을 보고 용린과의 효과와 옮겨 심는 법을 알게 된 것입니다. 적혀 있기로는 복용할 때마다 아주 미세하게 몸이 변화해 진룡과도 비견할 만한 강인한 육체를 지닐 수 있다더군요! 그 말이 사실입니까?”

“이론상으로는 가능한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불가능하지요! 온 세상의 용린과를 다 모아도 한 명이 그런 경지에 이를 때까지 복용 할 수는 없을 테니까요. 그만큼 용린과는 한 그루 한 그루가 우리 교룡 일족에게는 더없이 진귀한 보물입니다. 풍 수사가 그것을 옮겨 심을 방법이 있다 호언장담하지 않았다면 본 왕이 이곳으로 안내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제가 교룡족의 많은 수사들과 친분이 있다는 것을 아시지 않습니까? 이런 일로 금 형을 속일 리 없지요. 그보다 약속하셨던 일은…….”

푸른 장포 요수는 놀랍게도 한립을 죽일 뻔 했던 9급 열풍수 풍희였고 금포 거한은 금교왕이었다. 그는 이제 반인반수의 모습이 아니라 거의 인간 수사와 똑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풍 수사께서 알고 있는 방법이 통하기만 한다면 본 왕이 약속을 어길 일은 없을 겁니다. 필요한 영초들을 내어 드리지요.”

금교왕이 한쪽 소매를 털며 말했다. 그 말에 풍희가 희색을 드러내며 포권을 했다.

“제게 꼭 필요한 것들이니 미리 감사 인사를 하겠습니다.”

“굳이 그럴 것 없습니다. 모든 것이 용린과를 옮겨 심을 수 있느냐 없느냐에 달려있으니까요.”

“그건 걱정 마십시오. 저도 자신이 없었으면 금 형과 여기까지 오지는 않았을 겁니다. 이 방법은 그 상고수사가 일생에 걸쳐 연구해낸 것이라 용린과 나무뿐만 아니라 다른 영초나 영목에도 똑같이 효과가 있지요!”

“그러길 바랍시다.”

금교왕은 말과 달리 풍희를 꽤 신뢰하는 눈치였다. 이에 풍희가 미소 짓고는 푸른빛을 반짝이며 아래쪽으로 내려가려 했다.

“잠깐!”

금교왕이 소리치며 풍희를 막았다.

“아무래도 예감이 좋지 않습니다. 괜히 가슴이 떨리고 소름이 돋는 것이 비술을 사용해 주변을 살살이 살펴봐야겠어요.”

금교왕은 뜻밖에도 어두운 얼굴로 이렇게 말했다. 그 말에 풍희는 조금 불쾌했지만 딱히 말릴 이유도 없었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금교왕이 입을 크게 벌려 금빛 구슬을 분출했고 그것을 쥐고 이마에 가져다 댄 다음 두 눈을 감았다.

시간이 흐를수록 구슬의 빛은 더욱 강해졌고 금교왕도 온 힘을 다하는 것 같았다. 구슬은 아주 보기 드문 보조형 보물로 수사의 의식을 일시적으로 몇 배로 강하게 해주는 효과가 있었다.

구슬의 도움으로 금교왕의 의식은 이전에 비해 훨씬 강해졌고 수색의 범위도 넓어졌다.

잠시 후 금교왕이 대번에 표정이 달라져 두 눈을 부릅뜨며 일갈했다.

“누가 감히 본 왕을 해치려 하는 것이냐! 당장 나오거라!”

천둥소리 같은 고함이 사방팔방으로 퍼져나갔다. 그 말에 풍희도 깜짝 놀라 의식을 퍼트렸다. 금교왕은 섬 위의 어딘가를 서늘한 눈빛으로 노려보고 있었다.

“그런 보물을 지니고 있을 줄은 몰랐습니다.”

금교왕이 노려보던 곳에서 차분한 사내의 음성이 들리더니 푸른 빛줄기가 튀어나와 두 요수의 수십 장 앞에서 멈추었다.

“너는!”

“려 가 녀석!”

금교왕과 풍희가 동시에 한립을 알아보고 소리를 높였지만 둘의 표정은 확연히 달랐다. 풍희는 희희낙락이었고 금교왕은 상대를 경계하는 기색이 확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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