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0화. 팔령척과 제혼
*
천 장 높이의 산은 여덟 마리의 영수 환영에 완전히 봉쇄되어 오도가도 못했지만 창백한 얼굴의 한립은 더욱 강력한 보물을 꺼내 그것을 완전히 부숴버려야 할까 고민 중이었다.
그때 이를 지켜보던 향 수사가 갑자기 웃음을 터트리며 말했다.
“한 수사와 호 수사의 신통이 과연 대단합니다. 이만 하면 되겠지요? 더 시간을 끌다가는 괜히 단합만 깨지겠습니다.”
그가 신형을 번뜩이며 소리 없이 사라지더니 다음 순간 한립과 호 노마 사이에 나타나 한 손으로 허공을 쥐었다.
쾅!
허공에 검은 기운으로 휩싸인 악귀의 손톱이 나타나 엄청난 크기의 산봉우리 꼭대기를 잡아 들어올렸다.
한립은 향지례의 신통에 표정이 달라졌고 호 노마 역시 난색을 표했다.
“향 수사의 거령조(巨靈爪)가 이런 경지에 이른 줄은 몰랐습니다. 지금 내 앞에서 위세를 뽐내는 것입니까?”
호 노마가 냉랭히 향지례를 바라보았다.
“거령조야 사소한 잔기술에 불과하지요! 그저 호 수사가 너무 몰입한 나머지 원래 약조를 잊은 것 아닌가 해서 말입니다. 이 정도면 한 사제가 일격을 막아낸 것 아닙니까?”
“마궁 궁주인 내가 겨우 원영기 수사에게 한 약조를 어길 리 있습니까. 한 수사가 내 일격을 받아낸 셈 치지요!”
호 노마가 잠시 표정이 어두워졌다가 향지례를 향해 고개를 끄덕이고는 큰 산을 향해 손짓했다. 그러자 산 전체가 진동하며 비취색 빛을 번뜩였다.
그리고 거대한 산봉우리 정상을 쥐고 있던 향지례의 악귀의 손톱도 그대로 사라졌다.
이어 천 장 높이의 산도 8개로 갈라져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작아져 족자 안으로 되돌아갔다. 그리고 다시 고풍스런 산수화의 모습으로 변하더니 호 노마의 품으로 사라졌다.
“……비록 자령은 첩으로 들이지 못했지만 아직 다른 여인들이 남아 있습니다. 사흘 후 다시 의식을 거행할 것이니 향 형도 이대로 가지 말고 술이나 한 잔 더 하고 가시지요!”
호 노마는 한립과 향지례 등을 훑다가 갑자기 빙그레 웃어 보였다. 마치 한립, 향지례 등과 반목했던 일 따위는 없었던 듯 했다.
“물론 그래야죠! 선물도 이미 주었는데 축하주를 거를 수는 없지요.”
“한 수사도 본 궁에 며칠 더 머물다 의식이 끝나면 출발하도록 하게.”
고개를 끄덕이던 호 노마가 태연한 얼굴로 한립에게도 이렇게 말했다.
“예, 그러겠습니다. 향 사형과 풍 수사께서 남아계시는데 저만 떠날 수야 없지요.”
“잘 되었군. 그럼 모두 다시 전각으로 돌아가 술이나 마음껏 마십시다.”
호 노마가 웃음을 터트리고 먼저 검은 빛줄기로 변해 전각으로 돌아갔다.
밑에서 지켜보던 수사들은 한립과 호 노마가 보여준 신위에 간담이 서늘해 졌지만 그 소리를 듣고 서둘러 뒤따라갔다. 풍 노괴까지 웃음 지으며 돌아가자 이제 아래쪽에 남은 것 은 희색이 가득한 자령뿐이었다.
“한 사제 우리도 그만 가지! 호 수사는 걱정 말게. 이미 약조한 대로 일격을 버텼으니 이 일로 또 뭐라 할 위인은 아니네. 안심하고 저 아이와 마궁에서 며칠 머물다 가면 될 걸세.”
향지례가 한립을 향해 말하고는 곧장 전각을 향해 날아갔다. 한립은 쓴웃음을 짓다 고개를 저으며 천천히 아래로 내려갔다.
“한 형, 괜찮으신 거죠?”
자령이 더는 참지 못하고 먼저 다가가 걱정과 고마움이 섞인 기색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그저 원기를 조금 상한 것이니 괜찮습니다. 그보다 자령 소저는 바로 떠날 생각입니까? 아니면 호 노마가 첩을 들이는 것을 보고 떠날 것입니까?”
“한 형이 떠날 때 같이 가겠습니다.”
“그렇다면 며칠 더 머물다 움직여야겠군요.”
“지금 당장 떠나 봐야 괜히 호 노마와 다른 수사들의 심기를 거스를 뿐이지요. 그들이 한 형을 쉽게 보지는 않는 것 같으니 이곳에 머문다면 호 노마도 딴 소리를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자령이 잠시 고민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자유의 몸이 된 그녀는 다시 총명하고 슬기로운 자령선자의 모습을 되찾았다.
그녀가 기운을 되찾자 한립이 싱긋 웃으며 전각을 향해 걸어갔다.
“…….”
그의 뒷모습을 지켜보던 자령은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두 뺨에 붉은 기운이 감돌았다. 그녀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한립의 뒤를 쫓았다.
* * *
사흘 후 마궁은 호 노마의 시첩을 맞이하는 의식을 다시 진행했다. 그 때는 축하하기 위해 찾아온 수사들이 늘어서 2, 30명 정도 되었는데 수행이 가장 낮은 이들도 원영 중기였다.
이에 한립은 천남과 비교할 수 없는 대진 수도계의 실력을 실감했다. 그리고 새로 합류한 수사들은 세 명의 화신기 선배들과 한립이 대등하게 교류하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그들은 미리 와있던 수사들을 통해 한립이 음라종을 그렇게 만든 자라는 것과 호 노마의 손에서 시첩을 빼앗았고 상대의 일격을 맞고도 멀쩡했다는 소식을 연달아 접하고는 그를 대하는 태도가 더없이 공손해졌다.
그 후로 호 노마는 한립을 편안하게 대하며 자령에 대해서는 일체 언급하지 않았다.
다행스런 일이었지만 한립은 경계를 풀지 않았고 자령 또한 한시도 그의 곁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의식이 끝나자 한립은 향지례 등에게 인사를 하고 여인을 데리고 마궁을 떠나 마타산을 내려갔다.
* * *
세달 후, 수려한 풍경을 지닌 이름 모를 산 정상.
푸른 장삼을 입은 한립이 조용히 서서 먼 곳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의 눈빛에 복잡한 감정과 약간의 머뭇거림이 느껴졌는데 갑자기 두 손을 들어 묵묵히 주시했다.
하루 전까지만 해도 이 손은 자령의 매끄러운 몸에서 뜨겁게 움직였고 그 옥같이 부드러우면서도 따뜻한 촉감에 얼이 빠져 있었다.
그런데 이제 그녀는 가고 그만 홀로 남았다.
한립은 자령을 데리고 천마종 세력을 벗어나 추마골에서 헤어진 후의 일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서로의 이야기는 흥미진진했고 연달아 웃음이 터져 나왔다.
결국 둘 사이에 기묘한 기류가 흐르기 시작했고, 몇 달을 함께 지내며 교류하자 감정을 자제하지 못하고 말았다.
그러나 그 일이 있은 후 자령은 입장을 분명히 했다. 그녀는 한립이 그녀와 혼인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고 그의 시첩이 될 생각도 없었다.
또한 앞으로 한립 이외의 사내에게 마음이 흔들릴 것 같지 않았고 다른 이에게 시집갈 생각은 더더욱 없으니 이대로 수련에 매진해 평생 대도를 이루는 데만 전력을 다하겠다는 것이었다.
결국 그녀는 차분히 마음을 정리하고 그의 곁을 떠났다.
그녀를 잡을 수도 있었지만 한립은 그녀의 결연한 모습에 그녀가 떠나는 것을 지켜보았다.
이제 산봉우리에 홀로 남아 자령과 함께 보냈던 몇 개월을 떠올리자니 표현하기 어려운 허전함이 들어 마음이 아파왔다.
마음이 안정되지 않아 벌어지는 현상이기에 그는 술법을 펼쳐 억지로 평정을 찾지 않고 조용히 고통을 느끼며 기다리는 중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흐릿한 표정이 맑아졌고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인연은 있으되 연분은 없었던 것이겠지!”
한립이 중얼거리다 푸른빛을 번뜩이며 빛줄기로 날아올랐다. 잠시 후 그는 저 멀리 하늘 끝으로 종적을 감추었다.
* * *
대진 칠대금지(七大禁地) 중에 하나인 화옥(火獄)은 상고시대부터 대진의 남서쪽에 존재해왔다.
이 화염지대는 검은색과 붉은색을 제외하면 아무런 색을 찾을 수 없었고 무수히 많은 화산을 품고 있는 곳이었다.
어떤 것은 높이가 만 장에 이르렀고 어떤 것은 백여 장 밖에 안 되는 구릉 같은 것도 있었다.
화산들은 새빨간 붉은 빛을 뿜어내는 것, 새까맣게 변해 죽어 있는 것, 쉼 없이 증기를 뿜는 것 등 종류도 다양했다.
높은 허공은 검붉은 불 구름이 가득했기에 주변은 늘 어둑했고 대량의 화산재가 날렸으며, 화산과 가까운 곳은 코를 찌르는 유황 냄새와 열기로 꽉 차 있었다.
이곳은 범인들은 아예 접근이 불가능했고 수사들도 법기를 타고 이곳을 지나다가는 추락하거나 고꾸라져 사라지기 십상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곳을 지나는 이들은 대부분 수행이 높은 고계 수사들이었다.
화옥은 악명이 자자한 곳이지만 불 속성 재료들을 구하기에는 더없이 좋은 장소이기도 했다.
그리고 진정한 의미의 칠대금지는 지면에 솟은 화산들이 아니라 화옥 중심부에 위치한 거대한 산맥지대였다.
그곳은 끝도 없이 펼쳐진 붉은 안개로 완전히 뒤덮여 있어 살아 돌아오는 이가 손에 꼽혔다.
그런데 어느 날 하늘 어딘가에서 빛이 번뜩이며 푸른 빛줄기가 날아들어 붉은 안개 상공 백여 장 위에 멈추었다. 빛이 가시고 나타난 이는 바로 한립이었다.
마음을 추스르고 몇 달 동안 이곳으로 날아온 그는 도처를 살피다 머지않은 곳에서 안개의 바다를 발견했다.
대량의 붉은 안개는 그가 그간 보아왔던 안개와는 전혀 달랐고 죽음의 기운이 물씬 풍겼다. 뒷짐을 진 그가 한동안 그것을 응시하다가 그대로 푸른 빛줄기로 변해 안으로 파고들었다.
츠츠츳!
붉은 안개의 바다 속으로 빠져들자 그의 보호막인 푸른빛과 붉은 안개 사이에서 폭음이 터져 나왔다. 붉은색과 푸른색 영기의 교전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치열해졌다.
“…….”
미간을 좁힌 한립이 백여 장을 날아가다 한 손으로 저물대를 스쳤다. 붉은빛이 반짝였고 열댓 개의 새빨간 빛이 빠져나와 수정으로 만든 원 기둥처럼 변했다. 한 장 길이에 새빨간 기둥들에는 붉은 교룡들이 조각되어 있었다.
바로 곤오산에서 뽑아온 보물 화룡주(火龍株)였다. 그는 천천히 주술을 외며 한 손으로 기둥을 가리켰다. 그러자 즉시 기둥들이 회전하며 날아올랐고 한 장 밖에서 멈춰 섰다.
붉은빛이 번뜩이며 붉은 교룡들이 입을 벌렸고 새빨간 빛의 장막을 뿜어내 한립을 휘감았다.
이상한 일은 붉은 안개가 불 속성 방어막이 펼쳐지자 더는 폭발하지 않았고 지나가도 전혀 방해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한립은 무척 만족했고 속도를 더 높여 날아갔다.
불안개의 바다는 의식을 제한하는지 그의 강대한 의식으로도 넓은 지역은 확인할 수 없었다. 대수사가 이르기 전에 왔다면 더욱 더 고생했을 것이다.
‘원영 후기에 이르고 이곳을 찾은 것이 현명한 행동이었군.’
한립이 이곳에 온 것은 회양수를 제련하는데 필요한 태양정화를 찾기 위해서였다. 소극궁 한려상인의 원영을 통해 태양정화가 이 화옥 금지 속에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기 때문이다.
그러나 워낙 위험한 곳이었기 때문에 원영 후기를 대성하고서야 겨우 찾아온 것이다.
회양수는 수명을 연장하는데 특효가 있었기에 무척 귀하고도 중요한 물건이었다.
비록 마궁에서 호 노마에게 약간의 한수를 내주었지만 남은 양으로도 대여섯 명 분의 회양수는 만들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곳은 오래 버틸 수 있는 곳이 아니었기에 태양정화를 쉽게 찾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미 원영 후기에 이르렀던 한려상인이 찾지 못했을 리 없었다. 다만 한립은 태음진화를 지니고 있어 태양정화를 찾아낼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해 이곳까지 온 것이다.
이곳이 대진의 금지 중 하나로 불리는 것은 불 속성 영기로 이루어진 뇌화(雷火)의 힘 때문만은 아니었다.
상상하기도 힘든 불 속성 6, 7급의 고계 요수들이 심심치 않게 출몰하여 자칫하면 원영기 수사라도 목숨을 잃을 수 있었다.
‘게다가 붉은 안개 속 위험 요소가 그 뿐만도 아니고.’
한립이 생각을 정리하며 손가락을 튕기자 금빛이 번뜩이며 검기가 붉은 안개를 뚫고 사라졌다.
쿠에엑!
기괴한 울음소리가 들리고 검은 그림자가 안개 속에서 튀어나왔다.
몇 척 크기의 새빨간 조류형 요수는 머리에 보라색 벼슬을 세우고 남색 눈동자를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조류가 날개를 펼치자 핏빛 얼룩이 보였고 주먹만한 구멍이 뚫려 피를 흘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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