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8화. 한립의 거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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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 노괴는 한립을 마뜩찮아 했지만 노마의 물음에 전음으로 답해주었다.
“멸선주를 지니고 있는 것이 맞고 그것도 한 개가 아닙니다. 호 형이 정말 상대하고자 한다면 쉽지는 않을 것이에요.”
그의 말에 호 노마의 안색이 변했고 내심 가슴이 서늘해졌다. 멸선주는 그도 꺼리는 물건이었는데 그것을 여러 개나 지녔다면 상당히 위협적인 적이었다.
호 노마는 이번에는 향지례에게 전음을 보냈다.
“향 형, 저 녀석이 공간접점 자료를 더 갖고 있을 가능성이 있다고 보십니까?”
“그러든 아니든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나라도 전부 내놓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상대가 우리에게 협력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결국엔 알고 있는 전부를 말하게 될 겁니다. 상대와 싸우든 아니든 절대 죽여서는 안 됩니다.”
향지례는 눈도 뜨지 않고 입술만 미세하게 움직여 답했다.
“그럼 저 방자한 태도를 두고 보란 말입니까? 다른 원영기 수사들이 다 지켜보고 있는데요.”
“호 수사. 마궁에 오래 머물더니 신분을 망각한 것 아닙니까? 우리의 수행에 헛된 명성에 집착한다고 뭐가 달라지겠어요. 저 여인이 경국지색인 것은 사실이나 일개 시첩과 영생을 바꾸려는 것입니까? 노부는 못 본 척 할 것이니 알아서 하세요.”
향지례가 담담히 그를 설득했다.
“그럼 내가 악역을 맡지요. 그럼 어디 얼마나 대단한 보물을 지니고 있어 자령과 교환하려는지 봅시다.”
한참 침묵하던 호 노마가 전음을 마쳤다. 그가 다시 한립을 바라보며 냉랭히 입을 열었다.
“향 수사와 풍 수사의 체면을 보아, 방금 한 말을 취소한다면 아무 일도 없었던 것으로 넘어가 주겠네.”
그 말에 전각의 남색 장포 유생과 고죽노인 등이 움찔했다. 천마종 태상 장로가 한립을 조금 꺼리는 눈치였던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원영 후기 수사가 첩을 데려가겠다는데 이 정도로 참을 리 없었다.
“호 수사의 호의에 감사드립니다. 그러나 제가 한 번 뱉은 말을 주워 담는 재주가 없어서요. 그러지 마시고 제 제안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시지요.”
한립은 일말의 고민도 없이 대답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호 노마도 정말 열이 받아 안색이 파랗게 질리더니 번개처럼 자령과 한립을 훑어 강력한 기세로 법력을 뿜어냈다.
당장이라도 호 노마가 손을 쓸 것 같자 한립과 가까이 앉아 있던 화신기 수사 둘은 서로 시선을 마주치고 뒤로 조용히 물러났다.
끼어들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자령은 원영을 응결했으나 화신기 수사의 놀라운 영기의 압력에 안색이 창백해졌고 자기도 몰래 뒷걸음 쳐 한립 앞에 섰다.
그때 따스한 손이 그녀의 어깨를 잡았다.
그러자 정순한 법력이 주입되어 몸이 뜨거워지고 칼로 베는 것만 같던 영기의 압력 속에서 몸이 편안해졌다.
자령이 고개를 돌리자 한립이 손바닥을 그녀의 어깨에 대고 미소 짓고 있었다.
어째서 그렇게 태평한 얼굴을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불안하던 그녀의 마음도 따라서 차분해졌다.
그리곤 이를 드러내며 방긋 미소 지었다.
“그렇게도 그녀를 원한다니 좋네. 노부가 그 소원을 이뤄 주지. 수사가 지닌 영보들로 자령의 자유와 거래 하겠는가?”
호 노마가 그 모습을 보고 냉소하더니 기세를 거두고 탐욕을 드러냈다. 무리한 요구를 하는 것으로 보아 호 노마는 진심으로 자령을 풀어 줄 마음이 없는 듯 보였다.
통천령보는 보물 중의 보물이었고 한 번 세상에 나오면 수도계를 피바다로 만드는 존재였다.
그런데 시첩과 통천령보 두 개를 바꾸자고 하는 것은 거래할 마음이 없다는 뜻이었다.
상황을 지켜보는 원영기 수사들은 그저 할 말을 잃었다.
“통천령보로 교환하는 것은 무리가 있겠습니다. 제안을 수락하지 못함을 양해 바랍니다.”
가볍게 한숨을 내쉰 한립은 제안을 거절했다.
“그럼 멸선주로 교환하는 것도 가능하다.”
“멸선주도 안 되겠군요. 그것을 내드리고 공격당하면 어찌합니까?”
“통천령보와 멸선주를 제외하면 또 뭐가 있단 말인가. 노부는 천 년 넘게 살아왔기에 인계에 마음에 찰만한 물건이 거의 없는데.”
“그렇습니까? 그렇게 오래 사셨다면 호 수사의 남은 수명이 얼마나 되지요?”
“노부의 수명은 아무리 짧아도 3, 4백 년은 남았다. 그건 왜 묻는 거지?”
“호 수사에게 수명을 4, 5백년 정도 더 늘릴 수 있는 기회를 드린다면 어떻습니까.”
한립은 그 말에 바로 대답하지 않고 그에게 전음을 보냈다.
“4, 5백 년? 설마 회양수(回陽水)를 말하는 것인가!”
서늘한 표정을 유지하던 호 노마가 순간 참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곁에서 구경하고 있던 풍 노괴는 호 노마의 격렬한 반응에 놀라 둘을 주시했고, 향지례도 눈을 뜨고 의혹 어린 시선을 보냈다.
수사들의 시선을 받은 호 노마는 언제 그랬냐는 듯 평정을 회복해 한립을 향해 전음을 보냈다.
“인계에서 그렇게 많은 수명을 늘려줄 영약은 전설 속의 회양수 뿐이지! 수사의 수중에 그런 성약(聖藥)이 있다면 자령은 물론이고 더 큰 보상도 해주겠네!”
호 노마의 적극적인 태도는 이전과 딴판이었다.
“회양수는 없습니다. 그저 회양수를 제련하는 주재료인 한수가 약간 있을 뿐이지요.”
“그저 한수 뿐이라고?”
노마는 크게 실망했다.
“정말 회양수가 있었으면 어찌 수사와 거래를 하겠습니까. 향 사형이나 풍 수사에게 내드리고 자령 소저를 도와 달라 청하면 그만인걸요. 어차피 수사께서도 회양수의 제련법은 아시지 않습니까? 태양정화가 찾기 어렵다지만 이미 한수가 있는데 천마종의 세력으로 언젠가는 구해내겠지요. 어떠십니까? 이 정도면 제가 자령 수사를 데리고 떠나도 수사가 손해 보는 거래는 아닐 텐데요.”
화신기 수사들에게는 수명을 연장하는 영약이 웬만한 통천령보 보다 귀했다. 한립은 상대가 이 조건을 거절할 거라 생각하지는 않았다.
다른 보물들도 거래할 만한 것들이 꽤 있었지만 이곳을 안전하게 나서려면 되도록 보이지 않는 편이 나았다.
전음을 듣고도 한동안 말이 없던 호 노마는 생각에 잠겼다.
이에 풍 노괴와 향 수사는 한립이 대체 무엇을 가지고 거래하기에 열 받아 날뛰던 호 노마가 잠잠해졌는지 궁금해 했다.
“한수는 소극궁만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이전에는 화신기 수사가 있어서 차지하지 못했고 나중에는 한수가 사라져 찾지 못했지. 노부가 친히 소극궁에 잠입해 보았지만 아무 소득이 없었네. 설마 잃어버린 한수를 가져간 자가 수사였던가?”
호 노마가 어두운 얼굴로 전음을 보냈다.
“아닙니다. 실종된 한수가 운 좋게 제 손에 들어올 리가 있겠습니까? 그저 소극궁 현옥동에서 만년현옥을 통해 조금 채취했을 뿐입니다. 그래서 수사에게 전부 내드릴 수는 없고 약간만 내어 드릴 생각이고요. 그 정도면 회양수를 두 번은 제련할 수 있을 겁니다.”
이미 예상한 물음이었기에 한립은 안색 하나 바뀌지 않고 답했다.
“어떻게 얻었는지는 크게 상관없네. 어차피 여러 번 복용한다고 좋은 것도 없으니 노부가 쓸 만큼만 있으면 될 것이야. 만일 이대로 거래하겠다면 조건이 있네. 그것만 약조하면 자령을 데리고 마타산을 떠나게 해주지.”
호 노마가 눈을 굴리다가 돌연 전음을 멈추고 입을 열었다.
“조건이 무엇입니까?”
“아주 간단하네! 그것을 주는 것 외에 반드시 노부의 일격을 맞는 것이지. 피하지 않고 멸선주를 사용하지도 않고 말이야. 이번 일격만 버틴다면 앞으로 절대 수사를 곤란하게 하지 않겠네.”
호 노마는 서늘한 눈빛으로 자령을 훑으며 말했다.
“일격을 맞되 피하지 말라는 뜻입니까?”
“노부도 체면이 있지. 거래를 한다하더라도 앞으로 마궁 궁주를 누구나 얕잡아 보게 둘 수는 없지 않겠는가!”
음산한 노마의 목소리를 들은 수사들은 다들 생각에 잠겨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다.
‘호 노마가 이번 거래를 통해 상대를 일격에 죽이려는 것은 아닐까?’
원영기 수사들도 비슷한 생각을 했다. 화신기 수사와 원영기 수사의 격차를 생각했을 때 일격으로도 무사할 수는 없을 것이다.
모두의 시선이 한립에게 쏠렸고 자령의 얼굴은 하얗다 못해 투명해질 것 같았다. 잠시 침묵하던 그녀가 다시 이를 악물었다.
“한 형, 그런 거래에 응할 것 없습니다. 제가 마음을 바꾸지요. 마궁을 떠나지 않을 것이니 한 형은 돌아가세요.”
씁쓸한 목소리에 한립이 귀 기울이다가 그녀의 의도를 알고 미소 지었다. 그러나 그가 입을 열기 전에 호 노마가 먼저 냉랭히 읊조렸다.
“마궁이 남고 싶다고 남고, 떠나고 싶다고 떠날 수 있는 곳인 줄 아느냐? 노부가 이미 거래를 한다고 했으니 너는 남고 싶어도 떠나야한다. 한 수사도 거래를 번복하지는 않겠지?”
“그럴 리가요. 그 일격 한 번 맞아 보겠습니다.”
자령을 향해 고개를 저은 한립이 더는 고민하지 않고 답했다. 노마는 웃음을 흘리며 손을 들어 자령을 가리켰다.
그러자 여인의 단전에서 기묘한 느낌이 들면서 검은 실들이 빠져나와 호 노마의 손끝으로 빨려 들어갔다.
자령이 다시 몸을 폈을 때는 법력을 자유롭게 운용할 수 있게 되어 희색이 만연했다.
그것을 본 한립이 의식으로 자령의 몸을 살피고는 곧 만족스런 얼굴을 했다.
“물건은?”
호 노마가 거침없이 외치자 한립의 소매 속에서 하얀빛이 빠져나왔다. 호 노마가 눈을 반짝이며 그것을 빨아들이니 우윳빛의 옥병이었다.
옥병을 받아든 호 노마가 다시 소매를 털자 옥병의 저절로 열리며 검은 기운이 삽시간에 몰려들어 그의 주변을 차단했다.
호 노인의 신중한 태도에 호기심을 느낀 수사들은 할 말을 잃고 그를 기다렸다.
잠시 후, 호 노마가 웃음기 어린 얼굴로 옥병을 거두고는 매서운 얼굴로 한립을 쳐다보았다.
그리곤 갑자기 검은 빛을 번뜩이며 전각 밖으로 튀어나갔고 동시에 서늘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밖에서 기다릴 테니 본 존을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하지 말거라.”
한립은 유유히 술잔을 채워 한 입에 털어 넣고는 가만히 몸을 일으켰다.
“한 형, 정말 저 자의 일격을 맞을 생각이십니까? 노마는 화신기 수사입니다.”
자령이 초초해하며 걱정스레 물었다.
“걱정 마시오. 일격 정도라면 막아 낼 자신이 어느 정도 있으니.”
“그럼 저와 같이 나가시지요. 옆에서 지켜봐야겠습니다.”
자령은 눈을 빛내며 결연히 말했다. 한립은 그녀의 빛나는 눈동자를 보며 주저하다가 결국에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몸에서 영기의 빛이 번뜩이며 자령까지 휘감아 푸른 빛줄기로 날아올랐다. 한립이 전각 밖으로 나가자 남색 장포 유생 등도 분분히 둔광을 일으켜 그 뒤를 쫓았다.
이런 좋은 구경을 왜 놓치겠는가!
심지어 자령과 같이 시첩이 되려던 두 여인들도 머뭇거리다 마궁 시녀들을 대동하고 걸음을 옮겼다. 순식간에 전각 안에는 향지례와 풍 노괴만 남아 있었다.
“향 형, 어찌 보십니까?”
“뭘 말입니까.”
“한 가 녀석이 무엇으로 호 노마의 시첩을 거래했을지 말입니다. 이 세상에 노마의 마음을 움직일 만한 물건이 몇 안 될 텐데요.”
“많지는 않아도 없는 것은 아니지요.”
향지레는 시종일관 태연했다.
“향 형은 그게 무엇인지 알고 싶지도 않으십니까? 그렇게 반기는 기색을 보면 우리에게도 큰 쓸모가 있을 텐데요.”
“경지를 높여줄 보물 혹은 수명을 1, 2백 년 연장해줄 성약이지 또 뭐겠습니까. 풍 수사는 수명이 1, 2백 년 는다고 단번에 화신 후기에 이를 줄 아십니까? 어차피 그러지 못할 바에야 공간접점을 찾는 일에 집중합시다. 그것만이 진정한 대도를 이루고 영생을 얻게 되는 유일한 길입니다.”
향지레가 탄식하듯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향 형의 말씀이 일리가 있습니다. 아무래도 내 잠시 헛생각을 했나 봅니다. 호 노마의 모습을 보니 우리에게 무엇인지 절대 알려주지 않을 텐데 말이에요. 그런데 한 가 녀석에게 일격을 가하겠다니 양심이 없는 것 아닙니까? 설마 이 일로 그 녀석이 죽는 것은 아니겠지요?”
풍 노괴도 마음을 다잡고 쓴웃음을 지었다.
“그런 일은 없을 겁니다. 미리 언질을 해놓았으니까요. 또한 한 사제가 제안을 수락할 때는 자신이 있다는 뜻 아니겠습니까. 그래도 호 노마의 성질이 괴팍하니 만일을 위해 우리도 나가 봅시다. 한 순간의 노기로 큰일을 그르칠 수도 있으니까요.”
향지례가 문득 걱정스러워졌는지 바로 자리에서 일어났고 풍 노괴도 곧바로 몸을 일으켰다. 둘은 신형이 흐릿해져 그대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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