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4화. 다시 만난 향지례
*
사실 화신기 수사의 신분에 만년영액을 지니고 있다고 해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그동안 한립은 상대가 음라종 수사도 아니었기에 방금처럼 수시로 상대를 설득해 추격을 멈추려 했지만 오히려 한립을 지척에 두고도 잡지 못하자 그는 더욱 화를 냈다.
이렇게 둘의 추격은 몇 날 며칠 계속되었고 드디어 이곳까지 이른 것이다.
그때 한립은 드디어 화신기 수사와 부딪쳐 보기로 마음을 먹었다.
‘어디 화신기 수사와 내 격차가 얼마나 되는지 보자!’
풍뢰시를 계속 사용하면 벽사신뢰의 양이 아무리 많더라도 언젠가는 떨어지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한립은 모르고 있었지만 사실 그와 마주한 풍 노괴도 추격을 계속해야 할지 머뭇거리고 있는 중이었다.
한립은 그가 알던 원영 후기 수사와는 달리 배에 달하는 법력을 지니고 있었고 풍뢰시라는 괴이한 둔술은 화신기 수사의 눈앞에서 빠져나갈 수 있을 정도로 비범했다.
이제 긴 얼굴의 노인도 진퇴양난의 상황에 처해있었다. 솔직히 살해당한 음라종 장로와 혈연관계이기는 했지만 그의 수명에 그런 자손들이 한 둘이겠는가?
그런데 누군가 음라종 장로들에게 손을 쓰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다른 화신기 수사의 짓이라 여겨 풍 노괴를 찾아와 간절히 보호해 줄 것을 청했는데 상대의 간곡한 청에 마음이 약해져 그러겠다고 약조하고 말았다.
대진에 화신기 수사가 몇 되지 않았으니 그들의 소행이라면 자신의 체면을 보아 조카뻘인 음라종 수사는 건들지 않을 거라 여겼다.
그래서 미리 자신의 독문 비술을 조카의 몸에 걸어놔 대진의 다른 화신기 수사가 잘 알아볼 수 있게 손을 써두었었다.
후손이 안전하게 종문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 그 뒤로 음라종 따위야 망하든 말든 그가 무슨 상관이겠는가?
그런데 도중에 한립이 나타나 그의 코앞에서 자신의 후손인 음라종 장로를 참살할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다른 화신기 수사의 소행이었다면 자신이 반드시 이긴다는 보장이 없었으니 참았을 것이다.
하지만 한립은 겨우 원영 후기의 수행을 지녔으니 화가 나지 않고 배길 수가 없었다.
그런데 한립의 둔술과 신통이 그의 예상을 훨씬 초월하여 한 달 동안이나 쫓고도 잡는데 실패해 어렵게 얻은 만년영액만 낭비하고 말았다.
이제 와서 포기하자니 너무 분했고 또 한립이 잠깐잠깐 교전하며 보인 보물들이 상당히 위력적이라 욕심이 생기기도 했다.
거머리처럼 달라붙는 풍 노괴를 보며 한립도 화가 치밀었다.
원영 후기에 이르고 나서는 통천령보 2개를 아직 전력으로 발동해 본 적도 없었고 경정을 첨가한 비검을 제련한 후 대경검진이 얼마나 위력적으로 변했는지도 아직 몰랐다.
그리하여 화신기 수사와 전투를 벌이더라도 멀쩡히 몸을 빼낼 수 있으리라는 자신이 반쯤은 있었다.
게다가 새로 얻은 멸선주 두 알의 용도를 확실히 알았으니 요긴하게 쓸 수도 있을 것이다.
생각을 정리한 한립은 한 번 상대와 붙어볼만 하다고 결정을 내렸다.
그래서 노란 거대 손이 자신을 향해 날아들자 풍뢰시를 이용해 피하고 한 손을 들어 눈부신 금빛을 번뜩였다.
쉐액!
검빛이 거대 손을 갈라 두 동강을 내자 풍 노괴의 노란 거대 손이 허물어졌다. 한립의 반격에 풍 노괴는 잠시 멈칫했으나 곧 두 눈을 가늘게 뜨고 한립을 쳐다보았다.
하지만 모든 것이 예상한 대로였다. 시험 삼아 공격했는데 반격했다는 것은 원영 후기 수사가 자신과 정식으로 교전해 볼 마음을 먹었다는 것이다.
풍 노괴는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았지만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상대가 줄곧 달아나기만 했다면 계속 쫓을지 망설였을 텐데 이번에야 말로 상대를 멸살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풍 노괴는 길게 숨을 토해내며 자신의 뒷머리를 쓸었다. 그러자 남색빛이 번뜩였고 육각형의 옥쟁반이 나타났는데 고풍스런 양식에 오묘한 주술들이 흘러 다니는 모습이 아주 신비로웠다.
보물을 꺼낸 노인의 얼굴에 교활한 웃음이 감돌았다. 어차피 상대를 처리하기로 마음먹었으니 일격으로 끝내는 것이 옳았다.
옥쟁반이 빙글빙글 허공을 돌며 웅웅거리는 소리가 크게 퍼져나갔고 몇 장 크기의 육중한 물체로 변해 한립을 바라보고 수직으로 섰다.
눈을 찌를 듯한 남색빛이 뿜어져 나오는 것을 보니 그 안에서 무언가를 분출하려는 것 같았다.
이에 한립도 흠칫 놀라 두 소매를 털었고 수십 개의 금빛 검들이 줄줄이 빠져나와 72개의 금빛 비검들로 변해 머리 위를 맴돌았다.
그가 수결을 맺자 비검들이 번뜩이며 수백 개의 검빛들로 불어났다.
검빛들은 춤을 추듯 움직이며 대량의 금빛 기운을 내뿜었는데 그 기세가 대단했다.
풍 노괴는 한립이 단번에 수많은 비검들을 불러내자 조금 놀라다가 바로 입 꼬리를 끌어올렸다.
“아무리 많아도 내 비도들보다 많겠느냐? 노부의 만인반(萬刃盤) 맛을 보거라.”
‘만인반?’
한립이 눈을 빛내며 육각형 옥쟁반을 쳐다보았다.
옥쟁반의 주술들이 번뜩이며 남색 빛기둥을 뿜어내자 순식간에 무수히 많은 남색 빛으로 흩어졌다.
남색 빛들은 깜빡거리다 수촌의 비도로 변해 노인의 머리 위를 날아 다녔다.
누구라도 그 앞에 서면 간담이 서늘할 광경이었다.
그 모습에 한립의 표정이 달라졌다. 만인반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비도들의 수가 못해도 3, 4천 개는 될 것 같아서였다. 이때 노인이 한립을 향해 외쳤다.
“베어라!”
풍 노괴의 외침에 남색 비도들이 동시에 영기의 빛을 발산하며 하늘을 뒤덮었다.
한립의 머리 위에 금색 기운을 뿜어대는 검빛들도 대단했지만 밀려드는 도검들에 비해서는 그 수가 턱없이 모자랐다.
“어디 한 번 두고 봅시다.”
숨을 길게 들이 마시며 한립은 평정을 회복했고 머리 위의 검빛들이 아니라 한 손을 뒤집어 비취색 무언가를 쏘아 보냈다.
녹색 기운이 감도는 나무 자, 팔령척 영보였다.
나무 자는 그의 손을 떠나며 은색의 연꽃을 피워냈고 법력을 미친 듯이 빨아들이며 점점 크고 찬란한 은빛을 뿜어냈다. 그리고 열댓 장으로 거대해져 철저히 한립을 감쌌다.
“팔령척! 네가 곤오산의 한 가 녀석이었구나!”
노인은 연꽃을 보고 한 눈에 팔령척을 알아보았다. 그리고 뜻밖에도 산처럼 쌓인 남색 비도들이 거대한 연꽃 바로 위에서 우뚝 멈춰버렸다.
“저를 아십니까?”
“안다고 볼 수는 없지만 향 수사가 언급하는 것을 들었네! 정말 영계의 령롱 요비와 아는 사이인 겐가?”
“어느 정도 안면이 있는 사이입니다. 향 수사라면 향지례 수사를 일컫는 것인지요?”
상대가 익숙한 두 인물을 언급하자 한립도 관심을 보였다.
“그 향 수사가 아니면 누구겠는가? 일단 다른 일은 되었고 물을 것이 있네. 령롱 요비가 영계로 돌아가기 전 공간접점에 대해 따로 남겨준 것이 있는가?”
“무슨 뜻이십니까? 령롱 수사는 분명 향 형과 만요곡의 웅사에게 관련 정보를 넘긴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풍 수사께서 향 형과 잘 아는 사이시라면 모를 리 없으실 텐데요.”
뜻밖의 질문에 한립은 깜짝 놀랐지만 겉으로는 티내지 않고 답했다.
“못들은 척 하지 말게! 령롱 요비와의 관계를 생각하면 그녀가 영계로 돌아가기 전 수사에게 따로 무언가를 남기지 않았을 리 없네. 그것만 내놓는다면 노부가 일전의 일은 따지지 않겠네.”
“자신 있으신가 본데 겨우 만인반으로 저를 어쩌실 수는 없을 겁니다.”
세살 어린 아이도 아니고 손에 쥔 것을 이렇게 쉽게 내줄 리 없었다. 이 일을 인정하면 이번 재난은 넘어 가겠으나 다른 화신기 수사들이 그를 노릴 것이 분명했다.
그의 말에 노인의 눈빛이 흉악해졌고 당장이라도 산처럼 쌓인 비도들이 쏟아져 내릴 기세였다.
이에 한립도 의식을 움직여 거대한 은색 연꽃을 서서히 회전하게 했다.
그 순간, 풍 노괴와 한립의 귓가에 누군가의 여유로운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풍 형, 한 수사! 그만 두시는 게 좋겠습니다.”
익숙한 목소리에 한립은 멈칫하며 표정이 묘해졌다. 그리고 말상 노인도 수결을 맺으려던 손짓을 멈추고 의외라는 얼굴을 했고 고개를 돌려 하늘 저편을 향해 콧방귀를 뀌었다.
“향 수사, 때를 참 잘 맞춰서 나타나십니다.”
“우연히 인근에 머물고 있다 수사의 비검전서를 받자마자 남겨 놓은 표식을 따라 온 것이지요. 그런데 풍 수사가 함께 대적하자던 상대가 한 수사일 줄이야. 상상도 못했습니다. 이거 난감하게 되었습니다 그려!”
웃음을 터트리며 하늘 저편에서 노란빛이 번뜩이며 번개처럼 누군가가 한립과 풍 노괴 사이에 나타났다.
빛이 가시고 드러난 얼굴은 눈이 작고 약삭빨라 보이는 노인이었는데 바로 향지례였다.
“향 사형!”
가볍게 탄식한 한립이 두 손으로 포권을 취하며 인사했다.
“황풍곡에 있을 때 사형제 간이었으니 그리 부르는 것도 도리에 어긋나지는 않겠지. 그러나 한 사제! 겨우 연기기였던 수사가 오늘날 이런 경지에까지 이를 줄 누가 알았겠는가. 노부가 눈이 삐었었지……. 곤오산에서 만났을 때도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지만 사정이 여의치 않아 그러지 못했네.”
향지례는 한립을 향해 더없이 친근하게 화답했다.
“저도 이곳에서 다시 향 사형과 만날 줄은 몰랐습니다.”
“풍 수사, 노부의 체면을 보아 큰 원한이 아니라면 사소한 오해라고 생각해주시지요. 목숨을 걸고 한 사제와 싸울 일은 아니지 않습니까? 만인반이 영보의 모조품이지만 진정한 통천령보와는 격차가 크다는 것을 아실 텐데요?”
향지례는 한립과 안부 인사를 마치고 바로 고개를 돌려 풍 노괴를 향해 미소 지었다.
“겨우 원영기 수사가 통천령보를 지니고 있어봤자 2성의 위력이나 발휘할 텐데 노부가 겨우 그런 것에 당할 성 싶습니까?”
“물론 하나라면 그렇지요. 그런데 한 사제의 수중에 통천령보 2개와 영보의 모조품이 몇 개나 있다면 어떻겠습니까?”
향지례가 고개를 저으며 반문했다. 그러자 대번에 풍 노괴의 안색이 변했다.
한립도 미세하게 안색이 굳었다.
‘향지례가 팔령척 외에도 허천정의 존재까지 알고 있었다니!’
재빨리 머리를 굴리자 대충 파악이 됐다.
소극궁에서 흘러나온 정보일 것이다. 한려상인은 진작 그가 허천정을 지니고 있다고 알고 있었으니 다른 수사들에게도 언급했을 것이다. 또는 향지례가 난성해에서 직접 알아낸 것일 수도 있었다.
신출귀몰한 상대의 행적으로 볼 때 난성해를 드나든다고 해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한립은 여러 가능성들을 고려하며 향지례를 향한 경계심을 높였다.
“한 사제, 걱정하지 말게! 통천령보가 일반 수사들에게는 더없이 진귀한 보물이지만 화신기 수사들은 그런 것 없이도 인계에 두려울 것이 없지 않은가? 우리 같이 죽지 못해 사는 늙은이들은 인계에 오래 머물다 보면 영보의 모조품 한두 점쯤은 이미 지니고 있기도 하고 말이야. 게다가 괜히 영보 같은 법력 소모가 심한 보물을 썼다가는 생명이 위험할 수도 있고.”
향지례가 그의 생각을 읽고 대수롭지 않게 설명했다.
“그랬군요. 제가 괜한 걱정을 했습니다.”
그 말에 겉으로는 한립의 표정이 한결 풀어졌다. 물론 일리가 있는 말이었지만 어찌 향지례의 말을 전부 믿겠는가!
아무리 화신기 수사라도 손쉽게 영보급의 보물을 얻을 기회가 있다면 절대 놓치지 않을 것이다. 방금 팔령척을 본 풍 노괴의 눈빛만 봐도 알 수 있었다.
“향 형, 그게 무슨 말입니까? 한 가 녀석의 편을 들다니요? 아무리 영보가 2개나 있어도 노부가 수명을 조금 소모한다면 포획하는 것도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닙니다.”
“조금이라, 한 사제를 너무 얕보시는 것 같습니다. 풍 형께서 굳이 싸움을 이어간다면 한 사제를 죽일 수 있을 지도 모르지요. 그러나 힘든 전투가 될 것이며 수 십 년 내지 혹은 백 년 이상의 수명이 깎일 지도 모릅니다. 겨우 이런 사소한 일로 그런 손해를 감수하지는 않겠지요?”
“향 수사, 저 녀석을 그리 높게 쳐 주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건 가 녀석과 한려 그리고 최근에 실종된 음라종 종주는 모두 사제의 손에 죽은 것이겠지?”
향지례가 가볍게 미소 지으며 한립을 향해 물었다.
“……그러합니다.”
한립이 순간 서늘하게 눈을 빛냈지만 곧 담담히 답했다. 그 말에 풍 노괴의 미간이 좁아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