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9화. 겨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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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립은 의자에 앉아 흥미롭다는 눈빛으로 승려를 살폈다.
승려는 염죽처럼 소년의 모습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30대 문인의 외양을 하고 있어 다 죽어가는 노쇠한 목소리와는 어울리지 않았다.
그러나 원지라는 이름은 그도 들어 본 적이 있었다. 그는 사대 불종(佛宗) 가운데 뇌음종(雷音宗)의 세 명의 대수사 중 하나였다.
다른 불문의 대수사들과 달리 원지 대사는 대진에서 명성이 남달랐고 동시에 보기 드문 금강호법(金剛護法)의 직위까지 맡고 있었다.
그 외에는 도문 종파와 유문 종파를 눈에 거슬려 한다는 사실을 제외하면 그다지 아는 바가 많지 않았다.
“뇌음종의 원지 대사께서 천기각의 객경장로를 맡고 계신 줄 몰랐습니다. 제가 실례를 범할 뻔 했군요.”
한참 은색 장포 승려를 살피던 한립이 미소를 지으며 의자에 앉아 포권을 했다.
“한 수사께서는 어느 종문 출신이신지 모르겠습니다. 빈도가 처음 뵙는 분 같은데요?”
한립의 방자한 태도에 원지 대사가 두 눈을 번뜩이며 물었다.
“모르시는 것이 당연합니다. 저도 뇌음종 고승은 처음 만나 뵙는 것이니까요.”
“원지 사형께서 한 시주를 만나 본 것은 처음이겠으나 아마 그 이름은 여러 번 들어보셨을 겁니다.”
소년의 얼굴을 한 염죽이 가볍게 소리 내 웃으며 예상치 못한 말을 꺼냈다. 한립의 안색이 미미하게 변해 고개를 돌려 염죽을 바라보았다.
찬고는 옴찔하며 바로 생각에 잠겼다.
“염죽 사제, 그게 무슨 말인가?”
원지 대사가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2백 년도 훨씬 전에 곤오산의 고마의 난과 소극궁에서 벌어진 요수들의 난동을 기억하실 겁니다. 사제의 추측대로라면 이 두 가지 소란을 직접 겪은 분이 바로 한 수사이실 겁니다.”
“곤오산에다 소극궁? 설마 그 음라종과 소극궁에서 줄곧 추적하던 그 자란 말인가?”
원지 대사는 흠칫 놀라 새로운 눈빛으로 한립을 훑어보았다.
“그리 오래 전 일까지 기억하고 계실 줄은 몰랐습니다. 어찌 저를 잡아다 그곳에 데려가시기라도 하시렵니까?”
“허허, 한 형 그 무슨 말씀이십니까! 음라종과 소극궁 세력이 꽤 규모가 있다지만 우리 천기각과는 아무런 연관도 없습니다. 본 각이 그런 쓸 데 없는 일에 힘을 뺄 일이 없지요.
그나저나 한 형의 손에 음라종 건 노마와 소극궁의 한려상인이 목숨을 잃었다던데 정말입니까?”
찬고 각주는 한립이 모든 것을 인정하자 내심 가슴이 서늘해졌다.
“당시 그런 일이 벌어진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와서 건 노마와 한려상인의 일을 제가 부인한다고 해서 믿을 사람은 없겠지요.”
한립은 입 꼬리를 끌어올리며 냉소했다.
“듣자니 당시 한 형은 원영 중기의 수행이었다지요? 외부에 전해진 대로라면 그 상태로 대수사를 둘이나 멸살한 것이니 후기에 이른 지금은 신통이 엄청나겠습니다. 빈승 더더욱 수사와 한 번 실력을 겨루어 보고 싶군요.”
원지 대사가 표정이 변하며 신중히 말했다.
“원지 대사, 굳이 그러실 것 있습니까? 한 형께서 진심으로 개자공간 제련법을 구입하고 싶으시다면 차분히 앉아 상의해도 될 텐데요.”
찬고 각주는 상대가 누군지 알고는 승려를 말렸다. 보아하니 그는 한립과 천기각 객경장로가 맞붙기를 원치 않는 모양이었다.
“찬고 수사, 말리지 마십시오. 개자 공간에 관한 일이 아니라도 빈승은 꼭 한 번 한 수사와 대련해 보고 싶으니까요! 원영 후기에 오래 머물러 있으면서 답답하던 차에 동급 수사와 교류를 하며 깨달음을 얻을 기회가 아닙니까. 한 수사께서 듣던 대로 그리 실력이 출중하시다면 더욱 기회를 놓칠 수 없지요.”
원지 대사는 말을 하면서도 오직 한립 만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 말을 들은 찬고가 얼굴이 어두워져 염죽을 향해 눈짓했다.
“찬 시주, 걱정 마세요. 그냥 실력을 겨루어 보는 일인데 원지 사형이나 한 수사 모두 큰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게다가 빈승도 천남의 대수사께서는 어떤 신통을 부리시는지 견문을 쌓고 싶군요!”
염죽 승려마저 미소 지으며 이렇게 말하자 각주는 할 말을 잃었다.
“제 출신을 다 아십니까?”
염죽이 천남을 언급하자 한립은 내심 마음이 무거워졌다.
“놀라실 것 없습니다, 한 형! 수사의 정체가 일반 수사들 사이에서는 비밀에 휩싸여 있지만 우리 정마십종(正魔十宗)까지 추적하지 못할 리 있겠습니까. 설마 음라종이나 소극궁이 아직까지 수사의 출신을 모른다고 여기지는 않으시겠지요? 그저 수사의 신통이 두려워 알면서도 모르는 척 했을 뿐입니다. 당시 두 세력 모두 대수사와 여러 원영기 장로들을 잃어 호시탐탐 그들을 노리는 현지 세력도 만만치 않았고요. 그렇지 않았다면 수사의 천남 생활이 지금까지처럼 평온할 수는 없었을 겁니다.”
염죽은 한립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예상하고 차분히 설명했다.
“그도 그렇군요! 다른 종문은 모르겠지만 음라종에서는 확실히 내 신분을 알고 있겠지요. 허나 개자공간 때문이 아니고서는 동급 수사와 손속을 겨룰 마음이 없습니다. 제가 이기면 제련법을 내주겠다고 천고 수사께서 약조해 주시겠는지요.”
설명을 들은 한립의 표정이 한결 풀렸다. 그 말에 원지 대사는 각주를 쳐다보았다.
안색이 좋지 않던 각주는 결론을 내렸는지 다시 활짝 웃으며 답했다.
“한 수사께서 자신이 있으시다면 저도 어쩔 수 없군요. 원지 대사와 겨루어 우위를 점하신다면 개자공간의 제련법을 내어드리겠습니다.”
“찬고 수사께서 그리 말씀해 주시니 안심이 됩니다. 그럼 원지 대사께 가르침을 좀 받아볼까요? 사실 저도 불문 비술에 상당히 관심이 많아서 말입니다.”
한립은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대수사 간의 대련이 성사되자 양쪽에 나뉘어 서 있던 결단기 수사들이 잠시 웅성거렸고 몇몇은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원지 대사가 한립의 도발에 냉소하며 고운 얼굴에 흉흉한 기세를 드러냈다.
“두 분의 신통에 천기각 내에서 실력을 겨루면 안 될 것 같고, 그럼 바깥으로 나서시는 것이 어떨지요? 어차피 금공금제에 구애받을 분들이 아니시지 않습니까.”
찬고 각주가 상황을 고려해 건의했다.
“그래야지요. 빈승은 이견이 없습니다.”
“각주의 말씀대로 하지요.”
원지 대사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고 한립도 아무 상관없다는 태도였다. 이렇게 그들은 전각 바깥으로 나와 다시 전각 입구에 이르렀다.
다른 이들은 그 자리에서 꼼짝하지 않았고 한립과 원지 대사만이 움직였는데 한 명은 온몸에서 푸른빛을 내며 빛줄기로 솟구쳤고 다른 한 명은 발밑에서 하얀 연꽃을 피우며 서서히 떠올랐다.
잠시 후 그들은 천기각 상공에 떠올라 수십 장 거리를 두고 마주했다.
원지 대사는 진지한 얼굴로 한립을 보며 불호를 외웠고 얼굴에 은은한 금빛이 드리웠다.
한립이 그것을 보고 유유자적하던 얼굴이 달라졌다.
“원지 대사께서 불문의 금강호법을 맡고 계시다는 이야기는 들어 알고 있습니다. 혹시 수련하신 공법이 명왕결입니까?”
“오, 한 수사께서 불문 공법에 대해 그리 정통하신 줄은 몰랐습니다. 노승, 명왕결을 수련한 것이 맞습니다. 수사에게 많은 가르침 부탁드리겠습니다.”
원지 대사는 한립이 단번에 자신의 공법을 알아맞히자 잠시 말이 없다가 우직하게 답했다.
이어 그는 두 손을 합장하며 입으로 불경을 읊었고 은색 주술들이 은색 장포를 맴돌며 전신을 금빛으로 물들였다. 마치 석가모니의 금불상이 나타난 것만 같았다.
이에 한립의 표정은 그대로였지만 내심 깜짝 놀랐다.
‘명왕결이 이미 4성에 이르렀구나!’
상대의 신체는 일반적인 법보보다 강해 평범한 방법으로는 벨 수 없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상대가 보여주는 것이 이게 다라면 당연히 그의 적수가 될 수 없었다.
한립도 소매를 털어 맑은 울음소리가 들리는 수십 개의 금빛 비검을 불러냈다. 비검은 한 척 길이의 장검으로 변해 그 주변을 날아다녔다.
이어 그가 비검들을 가볍게 손짓했다.
웅!
비검들이 진동하며 금빛이 크게 일었고 순식간에 각각이 7개로 불어나 수백 개의 검빛이 하늘을 뒤덮었다.
아래에서 지켜보던 각주와 결단기 수사들은 마치 금빛 물결과 같은 검 빛들의 기세에 표정이 급변했다.
아직 아무런 일도 벌어지지 않았지만 한립이 만들어낸 금빛 물결만으로도 웬만한 원영기 수사는 버티지 못할 것이다.
원지 대사가 그것을 보고 수결을 맺었고 붉은 색과 초록색 빛이 번뜩이며 각각 새빨간 선장(禪杖)과 비취색 염주로 바뀌었다.
이때 한립도 두 손으로 수결을 맺어 수백 개의 검빛들이 윙윙거리며 날아드는 중이었다.
“어디 한 번 해봅시다.”
원지 대사가 일갈하고는 맹렬히 손을 털었다.
그러자 새빨간 선장이 붉은 교룡으로 변해 날아갔고 비취색 염불은 초록빛을 반짝이며 그의 주변에 보호막을 쳤다.
이어 불문의 대수사는 두 눈을 감고 두 손의 수결을 바꿔가며 현묘한 신통을 준비했다.
그러더니 새빨간 교룡이 머리부터 꼬리까지 바르르 떨더니 그대로 청죽봉운검들로 이뤄진 금빛 물결로 뛰어들었다.
선장의 재료가 무엇인지 수백 개의 비검들이 동시에 베어 대는데도 경정이 첨가된 검빛에 잘려나가지 않고 붉은 교룡이 날카로운 이빨과 발톱으로 검빛들을 할퀴고 물어뜯어댔다.
“만년화산호(萬年火珊瑚)!”
한립이 그것을 보며 이채를 띠었다.
경정이 비검을 날카롭게 만들어 주는 것은 사실이었지만 그렇다고 인계에 이에 대등한 재료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만년화산호도 그들 중 하나였다.
다만 이런 재료들은 경정보다 더욱 구하기 어려웠는데 원지 대사의 선장은 놀랍게도 만년화산호를 제련해 만들어졌기에 청죽봉운검에 밀리지 않는 것이다.
한립은 조금 놀라기는 했지만 청죽 봉운검의 진정한 위력은 그저 날카로움에서만 나오는 것이 아니었기에 걱정하지는 않았다.
그가 의식으로 조종하자 검빛 중 일부만 붉은 교룡을 붙들어 두고 나머지 대부분은 그곳을 빙글 돌아 승려 쪽으로 쇄도했다.
무수히 많은 금빛들이 날아드는 데도 여전히 두 손으로 수결을 맺고 있는 원지 대사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염주로 만들어낸 보호막을 굳게 믿고 있는 것 같았다. 이에 한립은 속으로 코웃음 쳤고 검빛들이 내는 위세는 더욱 강해졌다.
퍼퍼픽! 퍼퍽!
금빛들이 보호막을 찌르자 마치 오래된 거목처럼 둔탁한 소리가 났지만 잠시 흔들렸을 뿐 구멍은 뚫리지 않았다. 이에 한립이 속으로 검결을 읊었다.
우웅!
동시에 승려 주변의 수백 개의 검빛들이 공명했고 즉시 하늘 높이 치솟아 하나로 융합된 장검이 등장했다.
이때 한립이 주저 없이 손을 뻗었다.
촤륵!
금빛 검이 순간 어두워지며 하얀 한기가 어리기 시작했고 놀랍게도 단숨에 수십 장 크기의 거대한 얼음 기둥 같은 모습으로 변했다.
그 모습에 아래쪽에 있던 원지 대사도 그것을 보고는 표정이 달라졌다. 그리고 그때 한립이 한손을 횡으로 그으며 냉랭히 외쳤다.
“베어라.”
빙검이 번뜩이며 사납게 떨어져 내렸고 아직 초록색 보호막에 닿기도 전에 주변 공간에 파문을 일으켰다.
웅웅!
마치 거대한 빙산이 떨어져 내리는 것 같았다.
이에 원지 대사도 초록색 보호막만을 믿고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그가 입으로 불호를 외며 발밑의 연꽃이 빙글 돈 순간, 일곱 빛깔 불광이 퍼져나가며 승려가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그러자 거검은 윙윙거리며 아무도 없는 허공을 갈랐다.
그리고 다음 순간 수 장 옆에 하얀빛이 번득이며 승려가 괴이하게 그 위에서 나타났다.
그는 수결을 바꿔 엄청난 영기의 압력을 발산했고 머리 위로 대여섯 장 크기의 거대한 환영을 불러일으켰다.
온 몸이 금빛으로 반짝였고 눈빛은 사나웠으며 구불구불한 머리에 상반신을 벗고 있는 환영은 불문의 금강역사(金剛力士)의 모습과 꼭 닮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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