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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708화 (465/2,000)
  • 708화. 뜻밖의 손님

    *

    청년의 마지막 말은 새까만 얼굴의 거한을 향한 것이었고 반문을 용납하지 않겠다는 말투였다.

    조봉유는 그 말에 조금 안심하고는 중년인을 힐끗 살폈다.

    솔직히 눈앞의 고인이 대수사인 것은 알겠지만 적인지 아닌지는 알아야 대처 할 것이 아닌가!

    중년인이 머뭇거리다 결국에는 그를 향해 슬쩍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그것을 본 조 수사가 바로 대답했다.

    “당연히 선배님 말씀을 따라야지요. 그런데 저희 각주님께서 귀한 손님과 만나고 계시는 중이라, 제가 먼저 보고를 드리고 안내해 드리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손님이 와계신다고?”

    청년은 잠시 생각하다 무표정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새까만 얼굴의 수사가 그제야 안심하며 품에서 전음부를 꺼내 중얼거린 후 안쪽으로 날려 보냈다.

    그리고 곧 바로 웃음기 어린 얼굴로 한립을 옥문 안쪽으로 안내했다.

    하얀 얼굴의 중년인도 몇 걸음 뒤에서 그들을 따랐는데 뜻밖에도 둘 다 날아가지 않고 옥 계단을 차분히 걸어 올라가고 있었다.

    ‘금공(禁空) 금제!’

    청년이 미간을 좁히다 피식 냉소했다. 온 몸에 푸른빛이 번뜩이며 그가 저공비행을 하는 데는 뜻밖에도 전혀 지장이 없었다.

    그는 아래쪽에서 걸어가는 그들을 보고 내심 쓴웃음을 지었다.

    금제가 아무리 대단해도 원영기 이하의 수사들이나 구애를 받는 것이지 원영 후기의 대수사를 제약하기에는 어림도 없었다.

    그러나 본 각의 주인과 마찰을 빚고 싶지 않아 그들의 안내를 받으며 천천히 이동했다.

    그 젊은 청년은 천남에서 멀고 먼 길을 날아온 한립이었다. 수행은 크게 늘었지만 모란 초원을 지나 이곳까지 오는데 장장 반년이나 걸렸다.

    이번에는 아무런 문제없이 너무 순조롭게 지나왔다는 것이 의외랄까?

    이전에는 추살을 당하느라 죽을 뻔 했으니 말이다.

    사실 돌올족 선사들을 마주치면 따끔하게 혼내주려고 했었는데 의외의 상황이 벌어졌다.

    날아가는 그 긴 시간 동안 몇몇 저계 선사들을 마주친 것을 제외하면 결단기 이상의 돌올족 선사들도 만나지 못한 것이다.

    나중에 알고 보니 백 년 전 무슨 이유인지 천란성녀와 대선사가 명을 내려 모든 고계 선사들을 천란성전으로 불러들여 한꺼번에 폐관수련에 들게 했다고 한다.

    아마 폐관 수련이 끝나면 돌올족 수도계의 역량도 한 단계 오를 것이다.

    이 사실을 알고 한립은 조금 아쉽게 생각했으나 굳이 천란성전으로 쳐들어가지는 않았다.

    천란성전을 건드리는 것은 돌올족 선사 한두 명과 원한을 쌓는 것이 아니라 돌올족 전체를 건드리는 일이었다.

    천성성에서 성궁 장로 하나를 죽이기는 했지만 그것이 돌올족 전체를 건드리는 것은 아니었다.

    한립은 대초원을 건너 대진으로 들어왔다.

    개자공간에 관한 일은 다른 일에 비하면 비교적 간단하고 금방 처리할 수 있을 것 같아 먼저 이리로 온 것이다.

    그는 대진 모처의 시장에서 천기각 지부를 찾아 개자공간 제련법을 사고 싶다고 말했다.

    하얀 얼굴의 중년인은 그가 보통 원영기 수사였으면 딱 잘라 거절했을 것이다.

    하지만 대수사의 수행을 드러낸 한립을 앞에 두고 결단 후기의 수사가 어찌 경거망동 하겠는가! 그는 그저 웃음기 어린 얼굴로 구구절절 설명을 했다.

    개자공간을 제련하는 비술은 겨우 지부를 주관하는 그가 알 수 없는 일로 반드시 각주님께 보고해야 하는 일이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사안이 중대하니 직접 천기각 본각에 다녀올 테니 두세 달만 기다려 달라고 했다. 한립은 일리 있다고 여겨 허락했지만 기다리지 않고 그를 쫓아온 것이다.

    듣기로 천기각은 그저 대외적인 이름에 불과했고 실제로는 정마 십종이 암암리에 연관되어 있다고 했다.

    거기다 원영 후기 대수사가 이곳의 객경 대장로를 맡고 있었는데 어느 종문인지 정확히 아는 이는 드물었다.

    그러나 한립이 신경 쓸 문제는 아니었다. 객경 대장로가 음라종 종주만 아니라면 천마종이나 태일문 출신의 대수사라도 그와는 상관이 없었다.

    이번에 대수사라는 신분을 통해 개자공간 제련법을 얻으려고 온 것이지만 공짜로 강탈하겠다는 것이 아니라서 대량의 영석들과 진귀한 재료도 충분히 챙겨왔다.

    어차피 상대에게도 계륵에 가까운 비술이라면 이렇게까지 성의를 보이는데 굳이 대수사와 척을 지며 버티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의 예상대로 그들이 옥 계단을 절반도 오르기 전에 전각 안쪽에서 연달아 빛줄기들이 날아들었다.

    열댓 개의 빛줄기들은 허공을 선회해 전각 입구를 중심으로 양쪽으로 갈라섰는데 다들 금제의 제약을 받지 않는 듯했다.

    그들 사이로 두 명이 나란히 걸어 나와 한립을 내려다보았다. 한립은 슬쩍 미간을 좁혔다 펴며 걸음을 뗐다.

    그러자 허공에서 열댓 장 가까운 거리가 단숨에 좁혀졌고, 괴이한 궤적을 그리며 전각 입구에 내려서서 두 수사와 마주하고 섰다. 양측의 수사들이 놀라 저물대로 손이 향하려 했다.

    “쓸데없는 짓들 말고 물러나 있거라! 아, 이분이 한 수사님이시겠군요.”

    두 수사 중 왼쪽에 선 살집 많은 노인이 양쪽의 수사들을 나무라고는 활짝 웃는 얼굴로 한립을 향해 말을 건넸다.

    “천기각의 각주되십니까?”

    한립도 노인을 훑으며 담담히 물었다.

    “노부는 찬고라 하고, 본 각을 맡고 있습니다. 수사께서 이곳을 찾아 주신 이유는 장궤를 통해 들었습니다. 자세한 이야기는 안에 들어가서 하심이 어떨지요?”

    살찐 노인은 두툼한 손을 모으고 공손히 말했다.

    그의 열 손가락에는 각양각색의 다 양한 반지들이 끼어져 있었는데 어떤 것은 반짝거렸고 또 다른 것들은 투박하기 그지없었다.

    “그러시지요. 그런데 이쪽 대사 분은 어찌 불러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한립이 상대의 반지를 훑고는 승려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노란 승려복에 맑은 인상을 지닌 열예닐곱 살 정도의 소년이 어마어마한 영기의 압력을 발산하고 있었었기 때문이다.

    “대사라니 당치 않습니다. 빈승 그저 염죽이라 불러 주시면 됩니다.”

    “염죽…….”

    한립이 그의 이름을 읊조려보았지만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사대 불종의 고계 수사들 중 절반은 본래 일반 수사들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았고 한립은 본디 대진 출신도 아니었기에 그들을 전부 알 도리가 없었다.

    그러나 살찐 노인은 한립의 얼굴에 조금 놀랐다가 곧 그런 기색을 지웠다. 하지만 한립의 신중한 성격에 어찌 그런 표정을 읽지 못했겠는가.

    ‘유명한 불종의 수사인가? 그렇지 않고서야 천기각 각주가 이상하게 여길 리가 없을 텐데.’

    하지만 살찐 노인 옆의 소년은 그저 미소를 머금고 인자한 고승의 풍모를 풍기고 있었다.

    그때, 하얀 얼굴의 중년인과 조 씨 수사가 드디어 전각 앞에 도착해 서둘러 살찐 노인을 향해 예를 올렸다.

    찬고는 몇 마디 분부하고 조 수사를 돌려보냈지만 하얀 얼굴의 장 씨 중년인은 남게 했다.

    그들은 천기각 안으로 들어가 대청으로 보이는 곳에 자리를 했는데 장 씨 중년인을 포함한 나머지 결단기 수사들이 양쪽으로 나뉘어 서 있었다.

    “한 수사께서 이리 찾아 주신 것은 개자공간을 제련하는 비술을 구입하기 위해서라고 들었습니다. 맞습니까?”

    “맞습니다. 그런 연유로 여기까지 오게 된 것입니다.”

    한립도 돌려 말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기에 담백하게 인정했다.

    “비술을 원하시는 이유는 아마 공간 균열을 찾으셨고 그곳을 스스로 개자공간으로 바꾸어 아무도 그 위치를 모르게 하기 위함이겠지요?”

    천기각 각주는 원영 중기의 수행에 한 세력을 좌지우지하는 자였다. 그는 한립에게 공손히 대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비굴하지는 않았다.

    “제 의도를 바로 알아맞히십니다.”

    “본 각에 수사와 같은 목적으로 찾아오신 분들이 한둘이 아니었습니다. 스스로 공간균열을 발견해 자신 만의 개자공간을 제련하고 싶지만 다른 이들이 그 위치를 아는 것이 꺼려졌던 것이죠. 게다가 그 중에는 수사와 동급의 대수사도 있었습니다.”

    “그럼 수사께서는 비술을 내준 적이 있으십니까?”

    “아니요! 다들 절대 다른 이들에게 발설하지 않겠다고 다짐했지만 본 각이 비술을 아무에게나 내주었다면 벌써 예전에 천기옥이며 천기부 같은 물건들을 독점하여 판매하지 못 했을 것입니다.”

    “수사가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필시 다른 해결 방법이 있어서겠군요.”

    “한 형의 말씀대로입니다. 천기각이 수많은 동급 수사들과 척을 지고서야 살아남을 수 없었겠지요. 고유의 제련 비술을 내주지 않고 그것을 대신할 물건으로 그 분들의 요구를 충족시킬 수 있었습니다.”

    “대신할 물건이요?”

    이번에는 한립도 약간 놀라워했다.

    “본 각은 이미 오래 전에 진법 법기 한 벌을 연구해냈습니다. 일종의 금제를 만들어내 어떤 공간을 임시로 개자공간과 비슷하게 바꾸는 것이지요. 개자공간과 똑같다고는 할 수 없어도 거의 비슷합니다.”

    “그런 것이 다 있었군요. 허나 겨우 금제의 힘만으로 형성된 개자공간은 부족한 점이 많을 텐데요.”

    한립이 미간을 좁히며 고개를 저었다.

    “부족한 점이 있기는 하지만 한 형 같은 수사들에겐 해가 될 만한 것은 아닙니다.”

    찬고가 상대의 반응에 개의치 않고 말했다.

    “어디 들어보지요.”

    “전대 각주께서 몇몇 진법종사들과 협업해 개자공간을 제련하는 원리를 기반으로 개자진법(芥子陣法)을 만들어 내셨습니다. 너무 넓지 않은 공간이라면 진법 법기들로 금제를 펼칠 수 있지요.

    물론 개자공간을 형성하는데 필요한 영석은 매 년 1만 개 이상이 필요합니다. 공간 자체에 영맥이 흐른다면 필요한 영석의 수는 줄어들겠지요. 또한 진법을 통해 만들어낸 임시 개자공간은 기껏해야 2, 3천 년 밖에 유지되지 못하고 이후 진법 법기들은 효력이 다하면 공간 자체와 함께 무너져 내리게 됩니다.

    이 두 가지 단점 중 전자는 수사가 지닌 가산을 생각하면 걱정할 거리도 아니고, 후자는 수사의 수명을 생각해도 충분히 여유가 있지요! 가문이나 종문 대대로 물려 줄 것이 아니라면 화신기에 이르지 못한 원영기 수사들의 수명은 기껏해야 2 천여 살이 아닙니까.”

    찬고가 능숙하게 설명했다. 그 말을 들은 한립이 턱을 매만지며 생각에 잠겼다.

    “이렇게 하십시다. 한 수사께서 저희 개자진법에 관심이 있으시다면 본 각에서 특별히 저렴한 가격에 판매하지요.”

    노인은 웃음을 흘리며 노련한 장사치의 눈으로 한립을 훑었다. 그가 분명 이 조건을 수락할 거라 믿는 눈치였다.

    그러나 다음 순간 찬고의 미소는 그대로 굳어 버렸다.

    “……아무래도 그냥 개자공간의 제련 비술을 구매해야겠습니다.”

    깊이 생각하던 한립이 고개를 저은 것이다.

    양손을 공손히 모으고 곁에 서 있던 하얀 얼굴의 중년인도 안색이 조금 달라졌다.

    그리고 시종일관 참견하지 않던 염죽이라는 승려도 의외라는 듯 고개를 들어 한립을 보았다.

    “비술을 고집하시는 데는 수사만의 이유가 있겠지요. 무엇 때문에 그러시는지 물어도 되겠습니까?”

    살찐 노인의 눈빛이 흔들리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자기도 모르게 퉁퉁한 손으로 의자 손잡이를 규칙적으로 두드리고 있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제가 발견한 공간균열이 이미 불안정하기에 겨우 진법법기로 그것을 막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반드시 제련 비술을 알고 싶습니다.”

    “개자공간의 제련법을 원하신다 라……. 일단 노부와 한 번 겨뤄보고 이야기 나누시지요.”

    바로 그때 어디선가 아주 노쇠한 목소리가 들려왔고 은빛이 반짝이며 전각 외부에서 빛줄기가 날아들었다. 빛이 가시고 나타난 것은 은색 장포를 걸친 노승이었다.

    노승을 보고 앉아 있던 찬고와 염죽이 서둘러 몸을 일으켜 맞이했고 살찐 노인도 숨길 수 없는 희색을 드러냈다.

    “원지 대사, 오셨습니까!”

    “원지 사형을 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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