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7화. 천기전(天機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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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금아와 석견은 한립의 부름을 받지 못한 것이 내심 실망스러웠지만 다른 결단기 수사들과 마찬가지로 그 자리에서 잠자코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남궁완과 장로들이 따로 명을 내린 것은 아니었지만 그들은 함부로 자리를 이탈하지 않았고 송여인 등이 모봉 쪽으로 사라진 후에야 사담을 나누었다.
그들은 전금아, 석견과도 친분이 있는지 굉장히 살갑게 말을 걸어왔다.
한립의 엄명이 있어 결단한 이후에도 대부분의 시간을 자모봉에 기거하며 수련에만 매진하던 전금아와 석견도 오랜만인지 즐겁게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남궁완과 수사들이 한립의 거처로 간 지 몇 시진이나 지났지만 돌아올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 * *
세 달 후, 푸른 빛줄기가 낙운산맥 위로 솟아올라 별안간 자취를 감추었다.
다시 몇 달이 지나자 낙운종은 한 대장로가 종문을 떠나 바깥을 유람하고 있다는 소식을 전했다.
다만 출타를 한 이유와 목적지에 대해서는 얼버무려 아무도 정확히 알 수가 없었다.
다른 세력들은 이 소식에 크게 놀라지 않았는데 반년 전 한 대장로가 화신기 진입을 시도하다 실패했다는 소문이 알음알음 천남 전역에 알려졌기 때문이다.
한립을 경계하던 세력들에게는 다행스러운 이야기였다.
안 그래도 천남 제일 수사로 불리는 한립이 화신기에 이르러 수명이 2천 년 이상이 되면 그들의 야심은 언제까지고 억눌릴 수밖에 없었다.
그들이 보기에 화신기 진입에 실패한 한립이 갑자기 낙운종을 떠나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는 이유는 분명했다.
이제 수련을 통해 법력을 늘려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기에 기연을 찾아 헤매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그러나 고비를 넘길 방안을 찾을 확률은 극히 낮았다. 그렇지 않다면 천남의 나머지 삼대 수사들이 줄곧 원영 후기에 머물러 있을 리 없었다.
이제 한립을 제외한 천남의 원영 후기 수사는 둘밖에 없었다.
구국맹의 대장로였던 위무애가 백 년 전에 이미 세상을 떠났는데 화의문이 줄곧 이 소식을 숨기다 겨우 몇 년 전에야 공표했다.
이 소식에 천남이 한동안 뒤숭숭했다. 구국맹은 이 일로 휘청거렸고 다른 종문과 세력들은 다시금 이익을 위해 갈라졌다.
출관을 한 한립도 이 이야기를 듣고 한동안 탄식했다.
위무애는 화신기 경지에 겨우 한 걸음 남겨두고 있었는데 그것을 뛰어 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고 만 것이다. 이렇게 안타까운 일이 어디 있겠는가!
이에 한립의 영생에 대한 의지는 더욱 깊어졌다. 그에게는 영생을 제외한 모든 것이 눈앞의 연기요, 지나가는 바람에 불과하게 느껴졌다.
제 아무리 강을 가르고 바다를 뒤엎는 능력을 지녔어도 수명이 다하면 아무 소용이 없는 일이었다. 그는 절대 이번 생을 그렇게 허무하게 보내고 싶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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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립은 푸른 빛줄기로 변해 모란 초원을 지나고 있었다. 대진으로 돌아가 음라종이 지니고 있는 귀라번을 모으는 것이 이번 원정의 목표였다.
화신기에는 이르지 못했지만 원영 후기의 최고봉에 올랐으니 그만큼 성공 가능성도 커졌다.
기억대로라면 건 노마가 죽고 음라종에는 원영 후기 수사가 한 명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그 자가 어리석게 한립과 맞서지 않는다면 귀라번을 모으는 일은 큰 문제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음라종 종주는 한립에게 부인을 잃은 원한을 품고 있는 자였다.
한립은 자신이 낙운종을 비운 사이 원한을 품은 대수사가 수명이 다하기 전 쳐들어와 원수라도 갚겠다고 날뛴다면 정말 큰일이었다. 생각하면 할수록 상대를 죽여야겠다는 마음이 확고해졌다.
그가 비록 이번에는 화신기 고비를 넘는데 실패했지만 아직 원자신광이라는 대비책이 남아 있으니 완전히 기가 꺾인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이번에 대진에 가는 것도 귀라번을 가져오기 위한 것도 있지만 따로 처리할 일이 있어서였다.
원자신광을 수련하기 시작하면 꼼짝없이 한 곳에 묶여 있어야하고 공법을 대성하기 전에는 떠날 수 없으니 미리미리 준비해둬야 했다.
일단은 태양정화(太陽精火)를 찾아 지니고 있는 한수(寒髓)를 이용해 회양수(回陽水)를 만드는 것이 가장 급했다.
회양수가 있으면 수명을 4분의 1은 늘릴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지난 번 소극궁에서 한려상인의 원영에게 태양정화를 찾을 수 있는 실마리를 알아냈기에 적당한 때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나머지 하나는 전자에 비해 그렇게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성공하면 좋고 실패해도 그만인 일이었다. 그저 지난번 천기부를 매매했던 천기각을 찾아가 개자공간(芥子空間)을 제련할 수 있는 비술을 물어볼 계획이었다.
대진 진경에서 경매에 참가했을 때 천기각 장궤가 공간균열을 이용해 개자공간을 제련할 수 있다고 말해 준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추마골에서 발견한 영묘원의 잔해로 자신만을 위한 공간으로 제련할 수 없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수많은 원영기 수사들은 알려진 거처를 제외하고 따로 비밀 거처를 만들어 두곤 했다.
심지어 몇몇은 여러 곳에 비밀스럽게 거처를 마련해 귀한 보물을 따로 숨겨두거나 만일의 사태를 대비한 퇴로를 준비했다.
한동안 수련을 하는데 바빠 그런 일은 신경 쓰지 않았는데 그곳이 원자신광을 수련하기에 가장 최적의 공간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만의 개자공간을 제련하고 그 것을 은밀히 숨겨진 전송진을 통해 외부와 연결해두면 화신기 수사라 해도 어쩌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적이 외부의 전송진을 없애도 그의 신통에 다시 공간의 약점을 찾아 찢고 나올 수 있을 테니 걱정할 까닭이 없었다.
반대로 공간 외부에 있는 수사는 아무리 공간을 찢으려 해도 공간이 있는 구체적인 위치를 몰라 할 수 없을 것이다.
이는 한립이 한참을 연구한 끝에 내린 결론이었다.
물론 다른 은밀한 장소를 찾아 수련하는 것도 가능하겠지만 안전성을 따져봤을 때 개자공간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물론 개자공간의 제련 비법은 천기각이 독점하고 있었기에 얻기 까다로울 수도 있었다.
‘허나 개자공간의 제련 비법을 내어주기 원치 않아도 대수사인 나를 만족시킬 만한 대안을 마련하지 않겠는가?’
동급의 원영 후기 수사가 머무는 세력이라도 대수사와 함부로 원수지간이 되길 원하는 세력은 없었다.
천기각이 오늘 날까지 비술을 독점할 수 있었던 것도 그것이 다른 세력들의 흥미를 끌기에는 쓸모가 크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한립은 생각을 마치고 둔광을 번뜩여 하늘 저 끝으로 사라졌다.
* * *
천남과 천만 리나 떨어진 대진 옥주(玉州), 작은 산을 끼고 있는 성에는 안개비가 자욱하게 내리고 있었다.
비에 젖은 청석 돌길을 지나는 이들은 얼마 되지 않았고, 그나마 다들 비를 피하려고 정신없이 걸어갔다.
그때 노란 장삼을 입고 하얀 우산을 쓴 누군가가 막 청석 돌길로 들어섰다. 우산에 가려져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걸음걸이가 차분한 것으로 보아 마치 산보를 나온 듯 했다.
우산을 들고 있는 뽀얀 손으로 보건데 힘겹게 살아가는 평민은 아닐 것이다.
가끔 지나가는 행인이 이상하다는 듯 그쪽을 살피기도 했지만 노란 장삼의 사내는 신경 쓰지 않았다.
그가 막 눈에 띄지 않는 골목을 보고 방향을 틀었다.
골목은 꽤나 깊었는데 그 끝은 높은 담으로 둘러싸여 있어 더 이상 이어진 길은 없었다. 그런데도 노란 장삼의 사내는 개의치 않고 걸어갔다.
파앗!
우산 쓴 사내가 거의 벽에 부딪히려고 할 때 기이하게도 하얀빛이 번뜩이며 사라졌다.
범인들이 그 광경을 보았다면 귀신이라도 보았다 여겼겠지만 수도자가 보았다면 눈속임에 불과한 결계라는 것을 바로 알아차렸을 것이다.
그러나 수도자들도 방금 벽을 통과한 자가 다시 몇 겹의 기묘한 금제들을 연달아 지나쳐 도착한 곳을 보았다면 깜짝 놀랐을 것이다.
결계 뒤로는 백 장은 될 법한 옥문이 나타났는데 그곳을 지나면 옥으로 만든 계단이 허공으로 연결되어 청록색 거대한 전각으로 통했기 때문이다.
전각 주변은 우윳빛 영기가 안개처럼 퍼져 있었고 보기 드문 조류형 요수들이 유유히 떠다니며 각종 기이한 화초들이 피어나 신선이 사는 선경처럼 느껴졌다.
누군가 의식으로 이곳을 살폈다면 이곳이 그리 크지 않은 공간이라는 것을 알았겠지만 그 높이는 수백 장에 달해 실로 놀라운 크기를 갖고 있었다.
게다가 허공에 이런 전각을 만드는 일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 공간 입구의 거대한 옥문 아래 금색 갑옷을 걸친 무사들이 양쪽으로 늘어서 무표정하게 서 있었다.
그들 중 유일하게 잿빛 갑옷을 걸친 거한만이 우산을 들고 걸어 들어온 자에게 무어라 말하는 중이었다.
“안 된다니까 그러십니다. 아무리 대단한 일이라도 귀빈을 만나고 계시는 각주님을 방해하면 괜히 저만 혼난단 말입니다. 그러지 마시고 여기서 반나절만 기다리십시오. 안 그래도 이 석상 같은 것들이랑 이곳을 지킨 지 반년이나 지나 답답하던 참이었습니다.”
결단 후기의 수사가 겨우 문지기 노릇이나 하고 있다는 것이 놀라웠지만 그곳을 지키는 이들이 전부 꼭두각시란 것은 더 희한했다.
꼭두각시들은 살아있는 사람과 똑 같이 생겨 누가 말해주지 않으면 웬만한 수사들은 그들의 정체를 모를 것이다.
우산을 들고 공간 안에 들어온 수사는 드디어 하얀 우산을 접고 모습을 드러냈다.
“조봉유 수사! 내 지금 농담하는 것이 아닙니다. 정말 중요한 일이라 어서 각주님을 뵈어야 한단 말입니다. 나야 기다릴 수 있지만 그 분이 기다려 주실지 알 수 없는데……. 이렇게 시간을 지체하다가 본 각에 큰 화가 미치면 종형이 책임질 것입니까?”
중년인이 난색을 표하며 울화통이 터진다는 듯 말했다.
“그 분? 그건 또 무슨 말입니까?”
“나를 말하는 것이다.”
갑자기 그들 위쪽에서 낯선 사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 누구냐?”
새까만 사내가 기겁해서는 바로 하얀 보호막을 펼치며 수결을 맺었고 주변의 꼭두각시들이 두 눈을 번뜩이며 날아오르려 했다.
“조 형, 잠시만 기다립시오! 이 분, 한 선배님께 절대 무례를 범해서는 안 됩니다.”
하얀 얼굴의 중년인은 낯선 목소리를 듣더니 안색이 더 하얗게 질렸고 거한의 행동을 보고 식겁해 재빨리 소리쳤다.
“한 선배님?”
거한도 그 말을 듣고 멈칫했다. 장 씨 중년인이 이렇게 조심스럽게 나오는 것을 보면 상대는 일반적인 원영기 수사가 아닐 것이다.
‘꼭두각시까지 있는 이곳에서 우리가 어쩌지 못할 수사라면 원영 중기 노괴라도 된다는 것인가?’
조 수사는 허공에 떠오르려던 꼭두각시들을 제자리로 돌려보냈다.
“상황 판단은 빠른 편이구나. 그럼 나도 후배들에게 손을 쓸 필요는 없겠지.”
두 사람의 머리 위에서 푸른빛이 번뜩이며 푸른 청삼을 걸친 젊은 사내가 팔짱을 낀 채 나타났다. 거한은 의식으로 상대를 훑고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겁에 질렸다.
놀랍게도 청년은 원영 후기 대수사였다.
‘대진에 언제 또 새로운 대수사가 나타난 거지?’
그는 방금 꼭두각시들을 이용해 상대를 공격하려 했던 것을 떠올리며 등골이 서늘해졌다. 조 수사는 황급히 몸을 숙여 예를 갖추었다.
“선배님을 몰라 뵙고 큰 실례를 저질렀습니다.”
청년은 무표정하게 고개를 들어 거대한 전각을 올려다 볼 뿐 별다른 말은 없었다.
이에 거한은 감히 고개를 들지 못 하고 땀을 뻘뻘 홀렸다.
원영기 노괴들의 기괴한 성격으로 볼 때 그를 이 자리에서 죽이는 것도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다행히 곁에 있던 하얀 얼굴의 중년인이 대신 나섰다.
“한 선배님, 제게 조금만 시간을 주시면 각주님께 직접 보고를 올리고 연락을 드리겠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어찌 여기까지 오셨는지요?”
“시간이 촉박해서 말이지! 그냥 너희 각주와 바로 이야기를 나눠야겠다. 이곳이 말로만 듣던 천기각인가 본데……. 개자공간 내부에 있다더니 아주 희귀한 유동공간이라 몇 년 마다 저절로 위치가 바뀌겠구나. 역시 나를 실망시키지 않는 곳이야. 너도 그만 일어나거라! 입구를 지키는 것이 네 임무이니 조금 전 일은 탓하지 않겠다. 귀 각주를 만나 뵈야겠으니 안내나 하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