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6화. 화신기
*
“이것은?”
사내아이는 깃발들의 정체를 알지 못했다.
대진 곤오산에 갔을 때 천란수는 아직 지능이 없었고 한립이 귀라번을 얻는 과정도 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눈앞의 귀라번에서 물씬 풍기는 혼백들의 기운을 천란수가 어찌 느끼지 못하겠는가!
“이미 제련이 된 이 깃발들 속의 혼백들을 이용해 적혼번을 만들 수 있을까요?”
“혼백이기만 하다면 안 될 것 없지. 허나, 보아하니 두 깃발 모두 적혼번 보다는 못해도 만만치 않은 보물 같은데 그렇게 없애면 아깝지 않겠는가? 게다가 이 두 개만으로는 혼백의 수가 턱없이 모자라네.”
귀라번을 자세히 살피던 사내아이가 대답했다.
“괜찮습니다. 위력이 쓸 만은 하지만 령보가 있는 제게는 큰 의미가 없습니다. 그리고 부족한 혼백의 수는……. 이런 것들이 열댓 개 된다면 어떻겠습니까?”
“열댓 개나? 그렇군, 이건 한 벌로 된 보물 중에 일부로구만! 이미 열 댓 개를 지니고 있는 겐가.”
사내아이는 불현듯 무언가를 알아채고 말했다.
“아직은 아닙니다만 어디서 찾을 수 있는지는 알고 있지요. 솔직히 그보다 더 많은 혼백을 응결하고 있는 다른 보물도 알고는 있습니다. 안타깝게도 그것은 화신기 요물의 수중에 있어 노리기 어렵지만요.”
한립은 또 다른 보물을 언급하며 안타까워했다.
그가 말한 것은 만요곡에서 만난 차 요괴의 만요번이었다.
당시 그 깃발로 인해 꽤나 고생했으니 품고 있는 혼백의 수량이 귀라번에 비할 수 없다는 것쯤은 잘 알고 있었다.
“한 수사가 충분한 혼백을 모을 자신이 있다니 적혼번의 제련법을 알려주겠네. 원자신광은 노부도 흥미로워서 말이지. 자네가 대성하면 어찌 될지 궁금하구만. 그럼 천남으로 돌아가는 대로 적혼번 제련 준비에 들어갈 것인가?”
“급할 것 없지요. 모든 것은 일단 원영 후기의 최고봉까지 법력을 끌어 올리고 오자동심마의 한염을 철저히 제련한 다음의 이야기입니다. 어차피 나머지 귀라번들이 다른 원영기 마수(魔修)들의 수중에 있는 터라 수행을 더 갈고 닦을 필요도 있고요.”
“마음대로 하시게. 그럼 돌아가서 적혼번의 제련법부터 일러주겠네. 일단 다른 보조 재료들을 모아두면 시간을 아낄 수 있을 게야.”
사내아이의 신형이 흐릿해지며 허상이 사라졌다. 한립은 내심 기뻐하며 온 몸에서 푸른빛을 강하게 발산해 하늘 끝으로 종적을 감추었다.
* * *
몇 달 후, 그는 상고 전송진을 통해 천남으로 돌아왔다.
그는 전송진 주변을 지키도록 배치해둔 육익상공들을 거두고 다시 한 번 전송진을 허물고 지하 동굴을 떠났다.
다시 두 달이 지나 계국의 운동산맥에 도착했을 때 한립은 자신이 돌아왔다는 소식을 려락에게 알리고 바로 자모봉으로 향했다.
그러나 남궁완은 아직도 폐관 수련 중이었다. 수도자들에게 겨우 일 년의 시간은 아무 것도 아니었기에 한립은 그녀의 수련을 방해하지 않고 놔두었다.
천남 수도계는 천남 제일 수사가 한동안 낙운종을 떠나 있었다는 사실 조차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그러나 려락은 한립이 돌아왔다는 소식에 한시름을 놓았다.
낙운종은 현재 한립의 명성과 문중의 서너 명의 원영기 수사들 덕분에 초대형 종문의 지위를 간신히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립은 거처로 돌아간 즉시 비검전서(飛劍傳書)를 이용해 류옥에게 옥간을 전했다.
그가 폐관 수련을 하는 동안 적혼번 제련에 필요한 보조 재료들을 모아놓으라는 내용이었다.
이후 그는 밀실로 들어가 청원검결의 마지막 1성과 오자동심마가 품고 있는 한염 제련에 몰두했다.
그러는 동안 세월은 유수와 같이 흘러 어느 덧 50년이 지났다.
그동안 한립은 남궁완이 출관하자 딱 한 번 수련을 멈추고, 낙운종 밖을 유람하며 그녀와 특별한 시간을 보냈다.
유람하는 동안 한립은 남궁완에 푹 빠져 지냈지만 다시 자모봉으로 돌아온 후에는 고된 수련을 계속 이어 갔다.
수도자의 비애였다.
그들은 범인들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긴 수명을 지니고 있었지만 죽음에 이르기 전까지 쉼 없이 수련하며 불로장생의 꿈을 좇아야 했던 것이다.
천성적으로 의지가 강한 이들은 몰라도 평범한 수사들에게는 어려운 일이었다.
계속 수련을 하자니 그 끝이 너무 아득했고 그냥 포기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그러나 매번 새로운 경지에 이를 때마다 수명이 거의 배로 늘어나는 것은 엄청난 유혹이었다.
이렇게 되니 수도계의 수사들은 두 부류로 나뉘었다.
자질이나 수행이 그리 높지 않은 중, 저계 수사들은 일단 어느 정도 성취를 이루면 더 발전할 가능성이 크지 않다는 것을 깨닫고 처첩을 여럿 들이거나 다양한 친우들을 사귀며 자유롭게 살아갔다.
그 중 일부는 아예 속세로 돌아가 자신의 일족을 돌보며 한 지방을 통치했다.
나머지 몇몇 고계 수사들은 영생의 길이 멀지 않음을 느끼고 조금도 시간을 낭비하지 않고 수련에만 매진하는 이들이었다.
한립과 낭궁완은 후자에 속했다.
그들은 원영 후기와 원영 중기 수사로 인계에서는 최정상에 선 수사들이었지만 영계로 승천해 영생을 얻고자 하는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서로를 반려로 맞이할 만큼 은혜하고 아꼈으나 남녀 간에 누릴 수 있는 기쁨은 자제하고 있었다.
남녀 간의 교류로 수행이 증진할 수도 있겠지만 둘의 공법은 그런 쪽으로 큰 관련이 없었고 늘어나는 법력도 그들의 수행에 비해 너무 미미했기 때문이었다.
오히려 사사로운 정에 억매이다 깨달음을 얻는데 방해가 될 수도 있었다. 그렇기에 둘은 다시 폐관에 들어간 이후 쉽사리 나서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자모봉 상공 위로 마른 하늘에 벼락이 내리치고 그곳을 중심으로 주변 수백 리의 천지원기가 요동쳤다.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각양 각색의 영기 덩어리들이 분분히 산맥과 암석 그리고 수목 속에서 피어올라 자모봉을 향해 빠르게 응결했다.
그렇게 형성된 광채의 구름은 거의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고 알록달록 허공을 수놓으며 한립이 있는 동굴을 중심으로 회전했다.
이렇게 어마어마한 천지현상에 한립 문하의 제자들은 물론이고 폐관 수련 중이던 남궁완까지 전부 밀실을 나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자모봉은 낙운종에서도 그리 멀지 않았기에 고계 수사들도 이것을 감지해 바로 열댓 개의 눈부신 빛줄기로 변해 낙운종 금제대진을 빠져나와 날아들었다.
그 맨 앞에는 려락과 이미 원영기에 접어든 송 여인이 진중한 얼굴로 서 있었다.
그리고 그들 바로 뒤에는 하얀 의복의 여인이 희색이 만연해 따라가고 있었다. 바로 류옥이었다.
그간 수행이 크게 늘지는 않았지만 한립을 대표해 낙운종 내에서 권력을 행사했기에 원영기급 장로들을 제외하면 일인자라고 할 수 있었다.
려락과 송 여인도 그녀를 존중하며 예의바른 태도를 취했다.
류옥은 상당히 들떠있었다.
만일 한립이 다시 한 번 도약한다면 그녀의 지위는 순풍에 돛을 단 것처럼 거침없이 앞으로 나아갈 것이다.
이미 권력의 맛을 본 그녀는 수련에 전념하기에는 이미 틀린 상태였다.
현재 상태로도 동급 수사들은 물론이고 원영기급 노괴들도 그녀에게 공손하기가 이를 데 없으니 그 느낌이 어떻겠는가!
게다가 스스로의 자질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
원영기에 들기 위해 계속 시도해 보았지만 실패했고, 이제는 희망을 버리고 려락을 보조해 낙운종을 이끌어 가는 데만 전념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수도의 길에서 대도(大道)를 이루지 못하더라도 조용히 살다 흔적 없이 사라질 마음은 없었다. 려락은 그녀의 태도에 크게 만족해 평소에도 중요한 일이나 권한을 많이 위임하는 편이었다.
그들은 어느새 자모봉 밖에 도착해 있었지만 금제가 그들을 막아섰다.
허공의 영기 덩이로 이뤄진 광채의 구름이 한립이 있는 밀실을 향해 밀려드는 것을 보고 그들은 서둘러 내부로 전음을 보냈다.
잠시 후, 안개가 스스로 흩어지자 다들 거침없이 그 속으로 날아갔다. 안개 사이로 만들어진 통로 끝에서 나타난 이는 모패령이었다.
그녀는 노란 진법 깃발을 들고 그 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장로님들을 뵙습니다. 남궁 수사께서 기다리고 계시니 저를 따라 들어가시지요.”
그들은 모패령을 따라 자봉(子峰) 쪽을 향해 날아갔고 그곳에는 남궁완이 새하얀 궁장을 입고 서 있었다. 그녀는 마치 달빛을 머금은 선녀 같아 보였다.
그녀는 걱정스러운 듯 려락 등이 도착하자 간단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영기의 구름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그 곁에 사내와 여인이 서 있었는데 한립의 제자인 전금아와 석견이었다.
그 둘은 이미 수십 년 전에 결단에 성공했는데 특히 전금아는 용모가 변하지 않는 단약을 복용해 아직도 열예닐곱 살로 보였다.
그들은 송 여인과 려락이 도착하자 남궁완의 뒤에서 공손히 예를 올렸다.
“남궁 장로, 한 사제가 화신기에 이르고자 고비를 넘고 있는 것입니까?”
려락은 남궁완을 보며 들뜬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화신기에 이르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게 아니라면 이런 엄청난 광경이 벌어질 리 없지요. 그런데 이런 징조가 지속되는 것으로 보아 순조롭게 진행되는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군요.”
남궁완의 눈빛이 흔들렸다.
“순조롭지 않다니 그럴 리가 있습니까? 한 사제가 벌써 이런 엄청난 천기 변화를 불러왔는데 말입니다.”
“영기의 구름들이 부군과 융합되는 현상을 보인다면 거의 성공했다고 볼 수도 있겠지요. 그런데 영기의 구름은 간신히 끌어들였지만 천지원기를 제대로 조종하는 것으로는 보이지 않아서 말입니다. 이번에는 순조롭게 풀리지 않을 것 같습니다.”
다른 이들도 남궁완의 말을 들고 보니 광채를 발산하는 영기의 구름 들이 힘겹게 모봉으로 떨어져 내리고는 있지만 무형의 힘에 의해 튕겨 나가는 중이란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려락은 마음이 무거워져 더는 묻지 않고 산봉우리 쪽을 주시했다. 송 여인은 비록 입을 열지는 않았지만 흔들리는 눈빛으로 보아 태평한 상태는 아닌 듯했다.
지켜보는 다른 수사들도 마찬가지였지만 원영기 장로들을 앞에 두고 입을 열 수는 없었다.
그런데 그때 멀리 하늘 위에서 영기의 구름들이 진동하고 경천동지할 굉음이 터져나가며 오색찬란한 빛으로 흩어져 버렸다.
모봉을 중심으로 모여든 영기 덩어리들이 순식간에 사라진 것이다.
이제 자모봉 인근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원래 상태로 돌아갔다.
남궁완의 얼굴에 안타깝다는 기색이 스쳤고, 그 모습을 보고 송 여인이 입을 열었다.
“이제 한 사형께서 화신기의 입구에 한 발을 들여놓은 것이 확실합니다. 비록 오늘은 마지막 고비를 넘기지 못했지만 상관없습니다. 한 사형의 남은 수명과 법력을 생각하면 언제고 다시 성공할 수 있는 일이니까요.”
“맞네! 처음 시도에 이 정도 천기 변화를 불러온 것을 보면 앞으로 꼭 성공할 날이 있을 걸세.”
려락도 안타까웠지만 그런 기색을 지우고 송 여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말씀이지만 부군의 신중한 성격에 만반의 준비를 하지 않았다면 무턱대고 화신기 진입을 시도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수행을 더 늘릴 수 없을 때까지 수련한 다음 마지막 한 걸음을 떼셨을 테니, 앞으로 기연을 만나지 않은 한 몇 번을 시도한다고 해도 결과는 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잠시 침묵하던 남궁완이 쓴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려락과 송 여인이라고 어찌 이 사실을 모르겠는가.
그저 서로 위안삼아 한 이야기였는데 남궁완의 냉철한 말에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류옥도 아쉬워 뭐라 입을 떼려는데 모봉에서 한립의 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목소리는 크지도 작지도 않았지만 모든 이들의 귓가에 또렷하게 들려왔다.
“완이가 왔구려! 려 사형, 송 사매도. 오신 김에 다들 안으로 드시지요. 이번에 화신기에 진입하려는 시도가 실패했으니 아마 한동안 천남을 떠나 있어야할 것 같습니다. 려 옥도 함께 들어 오거라.”
“다들 함께 들어가시지요.”
남궁완이 한립의 목소리를 듣고 려락 등을 향해 미소 지었다. 려락과 송 여인은 거절하지 않고 따라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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