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5화. 적혼번(赤魂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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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색이 급변한 한립은 낮게 일갈하며 전신에 금빛을 크게 터트렸고 다른 손으로 원자산에 대고 있는 팔을 내리쳤다.
그제야 비틀거리며 원자산의 거대한 홉인력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였으니 망정이니 원영 초, 중기의 수사였으면 법력을 크게 잃었을 것이다.
“한 형, 괜찮으십니까?”
“괜찮습니다. 원자산이 기이하여 일반적인 방법은 통하지 않겠군요. 잠시 머물며 다른 방법이 없는지 궁리해 보고 결정하겠습니다.”
“그렇게 하십시오. 허나 한 형의 법력이 아무리 심후해도 원자신광을 수련하지 않고 이곳에 오래 머무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아마 기껏해야 사나흘이지 더 지나면 수행에 영향을 미칠 것입니다. 그러니 제가 사흘 후에 다시 오겠습니다.”
릉옥령은 반대하지는 않았지만 거듭 당부했다. 그녀는 한립이 고개를 끄덕이자 옥패를 넘겨주고는 곧바로 자리에서 물러났다.
여인의 모습이 옥문 밖으로 완전히 사라지자 한립은 거리낌 없이 옥패에 영력을 주입해 대량의 주술이 다시금 옥문으로 스며들게 했다.
우웅!
잠시 진동하던 옥문이 스스로 굳게 닫혔다.
공간을 폐쇄한 그는 원자산을 연구 하지 않고 먼저 의식을 퍼트려 동굴 전체를 살살이 수색했다.
수상한 금제나 누군가 이곳을 염탐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확인하고서야 저물대에서 진법 법기를 꺼내 곳곳으로 날렸다.
그러자 노란 안개가 바닥에서 피어올라 동굴 전체를 가려주었다. 모든 일을 마친 그가 다시 거무튀튀한 작은 산으로 시선을 돌렸다.
산 형태의 보물을 처음 보는 것은 아니었지만 이처럼 골치 아프지는 않았다. 예전에 천중산 고보는 겉모습만 산봉우리였지 본질은 일반적인 보물과 똑같았다.
“지켜보니 저 계집아이는 수사가 원자신광을 수련하는데 관심이 아주 많네 그려.”
푸른빛이 소매 속에서 튀어 나와 사내아이의 허상으로 변했다. 천란 수사의 인간 모습이었다.
“저도 느꼈습니다. 확실히 릉 궁주는 제가 원자신광을 익히기를 바라고 있더군요. 기억대로라면 원자신광은 난성해에서 오랫동안 전수되었지만 익히기 어려워 천성쌍성만이 원자산을 얻은 후에야 수련에 성공했죠. 이것을 수련하려면 저도 원자산의 힘을 빌려야 할 텐데 그럼 그들처럼 체내의 영력을 오행지력과 연결해야 하니 쉽게 이곳을 떠날 수 없을 것 입니다.”
“오, 그럼 그 계집아이가 흉계를 꾸민 것이로군.”
사내아이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흉계라 하기는 그렇지만……. 영원히 천성성에 갇히게 되면 어쩔 수 없이 성궁에 가담해야겠죠. 그렇지 않고서야 천성쌍성이 저를 보자마자 어물쩍 화신기 고비를 뚫을 비술들을 건넬 리가 있었겠습니까? 그들이 알려준 비술들은 자세히 살피면 쓸 만한 것은 원자신광 뿐이었습니다. 눈에 보이게 함정을 파놓고 알아서 들어가라는 꼴이지요.”
“그자들은 이 일을 들키면 수사가 어떻게 나올지 두렵지 않았나 보군.”
“화신기에 대한 열망이 있다면 눈에 뻔히 보이는 함정이라도 걸려들 수밖에 없다고 본 것이지요. 하지만 원자신광을 수련해야 할 때가 오기 전에 원자산을 옮길 수만 있다면 자연히 해결될 문제입니다. 천성쌍성은 그러지 못할 거라 자신했던 것 같지만요! 하긴 그들도 원자신광을 익히면서 수백 년간 이곳에 갇혀 있었는데 안 해본 방법이 있었겠습니까?”
한립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천성쌍성과 마찬가지로 일단 원자산의 힘을 빌리지 않고 원자신광을 익혀보면 되지 않겠는가? 공법을 조금 익히고 난 다음 천천히 천남까지 옮겨가는 것이지.”
사내아이가 웃음을 흘리며 제안했다.
“제 시간이 남아도는 줄 아십니까? 원자신광을 그렇게 빨리 익히기도 어렵겠지만 1, 2성을 익힌다 한들 원자산을 저물대에 넣지 못하면 전송진을 통과할 수 없습니다. 설마 이것을 이고 천남까지 날아가라는 말씀입니까.”
“하긴 그도 그렇군. 만일 영계였다면 건곤대(乾坤帶)를 가지고 산을 담아 옮길 수 있었을 텐데…….”
사내아이가 아쉽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한립은 건곤대라는 것이 무엇인지 몰랐지만 공간 계열의 보물이라고 짐작했다.
‘이번에는 천란 수사도 방법이 없는 모양이구나.’
그렇다면 스스로 해결책을 찾아야 했다. 화신기에 이르기 위해 원자산을 빌려 원자신광을 익혀보고 싶었지만 이런 식은 아니었다.
천성성에 갇혀 머물고 싶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낙운종에서 원자신광을 익힐 마음도 없었다.
천남에서 그의 명성을 생각하면 이 일은 언제든 밖으로 알려지게 될 테고 그렇다면 낙운종도 성궁처럼 큰 화를 입을 것이다.
가장 좋은 방법은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빠르게 공법을 대성해 아무에게도 틈을 보이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빨리 원자신광을 익힐 수 있을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
오자동심마의 한염으로 시도를 해 보고 안 되면 차선책으로 원자신광을 이용할 계획이었다. 어찌됐든 일단은 묘책을 생각해내 원자산을 갖고 떠나는 것이 급선무였다.
한립은 모든 고민을 덮어두고 저물 대에서 열댓 장의 부적을 꺼내 쏘아 보냈다. 그러자 부적들이 산의 표면에 붙었고 한립이 수결을 맺자 부적들이 발동했다.
쾅! 콰쾅!
연달아 폭음이 울리고 열댓 개의 부적들이 폭발해 재로 변해 버렸다. 난색을 표한 그는 가볍게 숨을 고르고 이번에는 진법 법기 한 벌을 꺼내 들었다.
진법 법기들이 날아가고 다채로운 빛을 머금자 동굴 안에 그의 주술 소리가 울려 퍼졌다…….
* * *
사흘 후, 푸른 빛줄기가 번뜩 거리며 성산 정상을 조용히 빠져 나가 사라졌다.
얼마 후, 성궁 성산의 가장 꼭대기에 있는 성전(聖殿)에서 81번의 맑은 종소리가 하늘을 울렸다.
마치 용의 울음소리 같은 종소리는 천성성에 있는 수사라면 누구나 들을 수 있을 것이다.
성궁은 대수사 한립이 정식으로 성궁의 객경장로직을 받아 들였고, 앞으로 성산에서 백 년간 폐관 수련에 들어갈 거란 사실을 갑작스럽게 공표했다.
이 소식을 들은 각종 세력들은 의견이 분분했지만 아무도 의심스럽게 생각하지는 않았다.
어쨌든 역성맹과의 전투에서 한립이 성궁을 대신해 친히 만천명을 죽여 성궁에 승리를 안겨주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내심 다른 꿍꿍이를 품고 있던 이들은 철저히 계획을 포기했고 내성해에서는 섬 전역을 봉쇄하고 한동안 바깥일에는 나서지 않으리라 선언하는 세력들이 적지 않았다.
성궁이 도처에 제자들을 파견해 역성맹의 잔당들을 추격하는 것을 제외하면 겉으로는 굉장히 평화로운 상태로 접어든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사실 성궁과 역성맹의 전투에서 수많은 사상자가 생겨나면서 다른 종문과 세력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그렇기에 이 기간 동안 수많은 종문들이 사라지고 신흥 세력이 나타나기를 거듭했다.
그런데 성궁에서 대수사를 객경장로로 들였으니 이제 다들 꼼짝없이 얌전하게 굴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들이 두려워하는 성궁의 객경장로는 천성성의 밀실이 아니라 그곳에서 멀리 떨어진 어느 바다 위를 날아가고 있었다.
“성궁의 객경장로가 되다니 뜻밖이구나. 상대가 수백만 영석을 대가로 제시했다지만 성가신 일을 꺼리는 자네의 성격으로 보아 단번에 거절할 줄 알았는데.”
한립의 귓가로 사내아이의 웃음기 어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성가신 일이 싫기는 합니다만 그렇게 많은 영석을 준다는데 이름뿐인 자리 맡으면 어떻습니까! 게다가 난성해는 이미 정세가 안정되었으니 제 이름을 빌려 다른 세력들을 겁주려는 것뿐입니다. 도리어 제가 정말 천성성에 남겠다고 했다면 성궁 늙은이들이 불안에 떨며 밤잠을 이루지 못했을 테지요.”
“맞는 말일세! 자네의 수행이면 억지로 성궁을 차지하는 것도 불가능한 일은 아니지. 성궁 장로들을 적당히 처리하고 자기의 심복들을 양성하면 2, 3백 년 내로 성궁 궁주의 성은 한 씨(氏)로 바뀔게 아닌가!”
“영계에 올라갈 마음이 없다면 나쁘지 않은 선택이겠지요. 하지만 그렇지 않은 바에야 그렇게 쓸데없는 일을 해서 무엇 하겠습니까? 그저 수련 시간을 잡아먹을 뿐이지요.”
“수도의 길을 향한 자네의 굳은 의지가 정말 감탄스럽네. 나였다고 해도 저렇게 거대한 세력이라면 꿀꺽 삼키고 싶었을 텐데 말이야. 이곳 하계에서 승천하는 수사들은 전부 의지가 이리 굳은 것인가?”
“제가 성자도 아니고, 성궁과 같은 엄청난 세력에 마음이 흔들리지 않을 리 있겠습니까. 허나 저는 허상을 위해 시간을 낭비할 마음이 없습니다. 천란 수사께서는 본디 천지 영수라 저에 비해 수명이 훨씬 기니 겨우 수백 년이 별 것 아니겠지만 말입니다.”
“일리 있는 말이네만 어쨌든 원자산을 두고 가는 것이 아쉽군.”
“괜찮습니다. 잠시 성궁에 맡겨 둔다고 생각하면 되지요. 원자산이 어디로 달아나는 것도 아니고 원자신광을 수련할 때 다시 오면 될 일입니다. 문제는 어떤 방법을 써도 축소시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이지요.”
“그 동굴 속에서 수사가 며칠간 온갖 방법을 다 시도해 보았지만 통하지가 않았지. 이런 물건이 인계에 있어서는 안 되는 것인데…….”
사내아이는 무언가 생각에 잠긴 듯 했다.
“하지만 수사께서 말씀하셨다시피 강한 위력을 지닌 공간 보물이라면 원자산을 통째로 옮길 수 있을 것입니다.”
“노부의 본체가 지닌 건곤대 같은 것을 말하는 겐가? 설마 그런 보물을 지니고 있다고? 미리 말해 두는데 일반적인 공간 법기나 보물로는 원자산을 옮기는 것은 무리일세.”
“반절 정도는 지니고 있습니다. 저도 얼마 전에야 이런 보물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생각해 냈고요.”
“반절?”
사내아이가 멍하니 묻자 한립은 곧 바로 저물대를 스쳐 검은빛이 번뜩이는 물건을 불러냈다. 바로 흑풍기의 남은 부분이었다.
강력한 위력의 공간 령보이니 원래는 원자산을 담는 것도 가능했을 것이다. 그것을 본 사내아이가 가볍게 혀를 차며 한립의 소매에서 푸른빛으로 변해 나타났다.
사내아이는 흑풍기를 끌어당겨 자세히 관찰하기 시작했다.
“공간 령보! 이런 것은 영계에서도 드문 것인데 이렇게 훼손되다니 안타까운 일이로다.”
이리저리 살피던 사내아이는 다시 그것을 던져주며 신중하게 말했다.
“고쳐 쓸 수 있겠습니까?”
“령보급 보물로 다시 복구하는 것은 어려울 걸세. 다만 다시 제련해 조금 급이 낮은 공간류 보물을 만들어 내는 것은 가능하겠지! 적혼번(赤魂幡)이라는 공간 보물이면 될 것도 같은데, 허나…….”
“무엇이 문제입니까?”
“다른 보조 재료들이야 구할 수 있겠지만 이것을 제련하려면 대량의 혼백이 필요하네. 보물의 위력이 혼백의 수량에 따라 결정되기 때문이지. 이전에 언급했던 영계의 칠대 사기(邪器) 중 하나로 제련하는 과정이 아주 험난하고 잔인하지. 원자산을 담으려면 못해도 수백만의 영혼은 있어야 할 걸세. 물론 다른 공간 보물로 제련하는 방법도 있지만 그것들은 필요한 재료들이 절대 이곳에서 구할 수 있는 것들이 아니라서 말이야.”
사내아이가 정색을 하고 설명했다.
“그렇게 많은 혼백이 필요하단 말 입니까?”
한립도 어안이 벙벙해졌다.
“최소한이 그 정도라네! 진정한 적혼번의 위력을 발휘하려면 천만 개는 있어야 하지.
수사는 그저 물건이나 담고자 하는 것이니 그렇게까지는 필요하지 않겠지만 진정한 적혼번의 위력은 통천 령보와 비교해도 크게 떨어지지는 않네. 특히 공간 신통을 지니고 있 에 수많은 수사들이 탐을 낼만한 물건이고 말이야.”
“혼백 천만 개! 보이는 섬마다 돌아다니며 깡그리 학살하지 않는 한 어렵겠습니다. ……아니지, 그것 말고도 방법이 있을 지도 모르겠군요.”
“다른 묘책이 있단 말인가?”
한립은 사내아이의 물음에 답하지 않고 저물대를 스쳤다.
녹색 빛이 반짝이며 두 개의 자그마한 녹색 깃발이 손에 들렸는데 표면에 주술이 가득한 것이 비범해 보였다.
바로 대진 음라종의 귀라번이었다.
그 중 하나는 심지어 건 노마가 친히 지니고 있던 보물이었고 다른 하나는 마기를 주입한 상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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