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0화. 성궁 전투 (7)
*
“두 배라, 만 수사의 씀씀이가 참 시원시원하십니다!”
만천명의 제안에 한립은 묘한 표정을 지었다.
“부족하다 여기시는 겁니까?”
“충분합니다. 아니 넘치지요! 허나 안타까운 일은 제가 약조를 쉽게 저버리는 편이 아닙니다. 허나 만 수사가 무사히 이곳을 빠져나간다면 다음번에는 수사와의 거래를 고려해 보겠습니다.”
한립의 모습은 마치 상대를 조롱하는 것 같았다.
그의 말에 역성맹과 성궁 수사들은 다들 어안이 벙벙해졌다.
한립의 말이 끝나자 만천명의 얼굴에 웃음기가 싹 사라지고 음산한 기운을 드러냈다.
“한 형이 결정을 내린 것 같으니 저도 한 번 실력을 겨뤄보고 싶군요. 우리가 움직이면 주변 수사들에게 폐가 될 테니 조금 멀리 떨어져 겨루는 것이 어떻습니까?”
“제 뜻과 같군요!”
그 말에 한립이 고민 없이 답했다.
그의 대답에 만천명은 조금 의아한 눈치였지만 즉시 수결을 맺어 보라색 빛줄기로 변해 천성성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날아갔다.
한립은 릉옥령을 향해 고개를 끄덕이고는 푸른 빛줄기로 변해 그 뒤를 쫓았다.
순식간에 두 명의 원영 후기 수사가 앞다퉈 하늘 저편으로 모습을 감췄다.
릉옥령과 조 노인은 서로 시선을 교환하며 걱정을 드러냈다.
만천명은 진즉에 한립의 존재를 알고 있었던 것 같은데 그 자가 싸울 장소를 정한다면 무슨 꿍꿍이가 있을 수도 있었다.
그런데 한립이 주저 없이 따라가니 불안한 마음이 들었던 것이다.
“만 수사도 갔고 할 일도 없는데 어디 너희 후배들의 신통이 어떤지 구경이나 해봐야겠구나! 원영기 수사들은 수백 년 동안 죽여 본 적이 없어 손이 근질근질하던 참이니 말이야.”
머리를 산발한 남씨쌍마의 거한이 새빨간 혀로 입술을 핥으며 기괴한 웃음을 흘렸다.
그는 수결을 맺으며 입을 벌려 뼈로 만든 하얀 고리를 방출했는데 대량의 핏빛 안개가 용솟음쳐 주변 수십 장을 피바다로 만들었다.
귀곡성이 울려 퍼지는 핏빛 안개는 그대로 성궁 수사들을 향해 날아들었다.
이에 거한 옆에 딱 붙어 있던 여인도 소매를 털어 기이한 향기의 분홍색 안개를 분출했다.
그들의 공격에 융 노인과 노부인도 각각 금색 구슬과 13자루의 청록색 비검을 방출해 공격을 개시했다. 이것을 본 성궁 쪽 수사들도 지체 없이 각종 신통을 발휘해 대응하기 시작했다.
쿠과쾅!
순식간에 마기와 각종 신통이 맞부딪치며 대치 상태를 이루었다.
양쪽에 대기하고 있던 결단기와 축기기의 수사들도 동시에 함성을 내지르며 각종 법기와 법보를 발동해 충돌하면서 혼전이 시작됐다.
이제 주변 수십 리가 폭음과 함성, 그리고 각종 병장기가 부딪치는 소리로 가득 찼다.
아마 단시간에 결판이 나지는 않을 것 같았다.
* * *
같은 시각, 한립과 만천명은 단숨에 천 리 밖으로 물러나 망망대해 위에서 멈춰 섰다.
한립은 푸른빛을 거두며 뒷짐을 지고 나타났는데 얼굴에는 전혀 긴장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강력한 의식을 지녔기에 매복이나 숨겨진 무언가가 있었다면 진즉 알았을 것이다.
의식으로 살펴보니 백 리 내로는 아무도 없었고 무슨 금제나 진법 같은 것도 전혀 없었다.
한립은 태평한 만천명을 보며 내심 우스웠다.
만 문주 역시 그처럼 자신감이 가득 차 있다는 것이 흥미로웠던 것이다.
“이 정도면 고즈넉하니 자리가 좋지 않습니까? 한 수사 같은 대수사가 몸을 눕힐 곳이니 아무 곳이나 고를 수야 없지요.”
만천명이 주변을 둘러보다 한립을 향해 고개를 돌렸는데 시선이 얼음장 같았다.
“제가 몸을 눕힐 곳이라…….”
“제가 너무 자만한다고 여기십니까?”
“아닙니다. 그저 만 형이 그간 수련을 하느라 힘들어 머리가 어떻게 된 것은 아닌지 심히 우려되어 그럽니다.”
콧방귀를 뀌는 만천명을 향해 한립은 미소를 잃지 않았다.
“어디 죽고 나서도 그렇게 말할 수 있을지 두고 봅시다. 그 전에 수사에게 소개하고 싶은 자가 둘 있습니다.”
“소개요? 그런 장난에 속을 줄 아십니까. 이곳에 다른 수사가 숨어있었다면 제가 벌써 머리를 잘라 수사께 선물했을 텐데요.”
음산한 만천명의 말에 한립이 냉소하며 거침없이 대답했다.
“그렇습니까? 수사가 뭔가 오해한 것 같은데. 그 둘은 수사라고 불리기에는 이미 사람이 아니라서요.”
유유히 말을 마친 만천명이 허리춤에서 새까만 주머니를 풀어 허공에 던지고 수결을 맺으며 주술을 외웠다.
그러자 주머니가 뒤집히며 검은 기운이 흘러나왔고 키 큰 자와 마른 자의 인영이 귀신처럼 나타났다.
“연시(煉尸)?”
경험이 풍부한 한립은 검은 기운만 보고도 그것이 강력한 시기(尸氣)를 품어 내는 연시라는 것을 알아보았다.
만천명은 피식 웃으며 법결로 연시의 기운을 북돋았다.
두 인영이 한쪽 팔을 들어 올리자 주변의 시기가 구렁이처럼 변해 그들 몸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검은 시기가 사라지자 잿빛을 한 두 인영의 얼굴이 공개되었다.
그러나 한립은 두 연시를 보면서도 아무런 표정변화가 없었다.
키가 큰 쪽은 매서운 얼굴에 팔이 무릎까지 늘어졌고 백옥을 깎아 놓은 듯 반짝이는 두 손도 이상할 정도로 거대했다.
그러나 키가 작은 쪽은 야윈 얼굴에 왜소한 여인의 모습을 하고 있었는데 어깨에 모양이 다른 단검 3개를 지니고 있었다.
만천명은 한립이 두 연시를 보면서도 전혀 놀라지 않자 눈빛이 사나워졌다.
그가 즉시 수결 모양을 바꾸자 온 몸에서 빠득거리는 괴이한 소리가 들리며 체구가 커졌고, 입에서 보라색 안개를 방출해 그 안으로 숨어들었다.
보라색 구름 속에서 그는 오색찬란한 빛을 번뜩이고 있었다. 이 모습을 지켜보며 한립은 턱을 쓰다듬었다.
그가 두 손을 내렸을 때 한쪽 소매에서 삼색빛이 떨어지며 영보 팔령척이 나타났다.
겉으로는 아무 내색도 하지 않았지 만 상대가 어떤 비술을 사용하든 처음부터 전력을 다해 상대할 작정이었다.
‘기회를 보아 일단 팔령척으로 상대를 붙들어 두고 지척에서 삼염선으로 일격을 날린다!’
꽈광!
이런 생각을 하며 한립의 두 눈이 남색으로 일렁였고 등 뒤에서는 천둥소리가 울리며 한 쌍의 날개가 나타났다.
그런데 그가 막 날개를 펄럭여 이동하려는데 기겁할 일이 벌어졌다!
가지각색의 빛을 내뿜던 구름 덩이에서 빠득 거리는 소리가 멎더니 엄청난 마기가 하늘 높이 치솟으며 회백색의 음산한 기운을 내뿜은 것이다.
눈을 가늘게 뜨고 그 안을 주시하던 한립은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만천명은 정도 만법문의 문주가 아닌가! 그런데 어찌 마도의 공법을 수련했지? 게다가 이렇게 익숙한 기운이라니……. 고마의 진마기와 비슷하면서도 완전히 달라.’
한립은 문득 비슷한 종류의 마기를 생각해 봤지만 바로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그런데 누군가 광소를 내뿜으며 마기 속에서 튀어나왔다.
그 자의 등 뒤로 여섯 개의 선명한 허상이 떠있었는데 머리에 뿔이 달리고 날카로운 이빨을 지닌 마물이었다.
그는 전신이 비늘 갑옷으로 뒤덮여 있었다.
“육극진마공(六極眞魔功)!”
“본 존의 마공을 알아보다니 어리석은 놈은 아니었구나!”
광소가 멈추고 상대는 한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분명 만천명의 복색을 하고 있었지만 체격이나 얼굴이 이전과는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한립은 상대의 얼굴을 보고 눈을 부릅떴다.
한립은 연시의 얼굴과 만천명의 복색을 한 상대의 얼굴을 번갈아 보며 길게 숨을 토해냈다.
연시와 수사는 체격 차이를 제외하면 똑같이 생겼던 것이다.
“당신을 만 문주라 불러야 할까요? 아니면 육도극성이라고 불러야 할까요?”
“내가 누군지 알아냈구나?”
‘만천명’이 콧방귀를 뀌자 등 뒤의 요마 환영들이 몸을 떨었다.
“육극진마공은 난성해 제일의 마공인데 그것을 이 정도까지 익힌 자는 육도 수사뿐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찌 만천명의 육체를 빼앗고 그의 행세를 한 것입니까?
또 수사와 똑같이 생긴 연시는 무엇이고요? 설마 분신을 만들어 놓은 것입니까, 그것도 아니면 자신의 육체로 이런 짓을 한 것입니까?”
“곧 죽을 놈이 그걸 알아서 뭐하려고?”
한립의 말에 육도극성은 음산하게 웃으며 팔을 털어냈고 여섯 마리의 허상들 중 두 개가 양쪽으로 갈라져 앞쪽의 연시 속으로 스며들었다.
그러자 사내와 여인 모양을 한 연시가 몸을 부르르 떨며 눈을 부릅떴는데 청록색 안광이 번뜩였다.
게다가 육도극성이 난해한 주술을 중얼거리자 두 연시는 회백색 기운에 휩싸였다.
그리고 엄청난 비명을 질러대더니 연시들의 몸이 미친 듯이 불어났다.
고통스런 절규 속에서 두 연시는 네다섯 장 크기의 거대한 마물로 자라났다.
그중 하나는 동전 크기의 비늘이 뒤덮여 몸이 새까맣게 빛났고 머리에는 한 쌍의 뿔이 그리고 등 뒤로는 푸른 꼬리가 생겨났다.
나머지 하나는 삼각형의 머리에 4개의 청록색 눈을 깜빡여 소름 끼치는 모습이 되었다.
그 모습에 한립도 내심 놀랐다.
“육도진마공을 극성으로 익히면 성마의 분혼을 소환해 육신에 깃들게 할 수 있다! 이런 신통은 화신기 수사와도 겨룰 법하고 상고 시대부터 지금까지 이런 경지에 다다른 수사는 거의 없었다. 이제 저 두 마리 마물도 원영 후기의 신통을 발휘할 텐데 한 수사는 홀로 셋을 상대하며 목숨을 부지할 자신이 있는가?”
육도극성이 광소하며 의식을 움직이자 두 마리 마물이 흐릿해지며 그 자리에서 사라져 한립의 양쪽에서 기묘하게 나타났다.
그중 뿔과 꼬리가 달린 마물이 푸른빛으로 변해 그에게 달려들었고 다른 하나는 날카로운 무언가를 뿜어내며 온몸을 털어댔다.
한 척 길이의 핏빛 뼈바늘이 빽빽하게 날아들어 한립을 뒤덮었는데 워낙 가까이에서 공격해 피할 길이 없어 보였다.
육도극성도 한립과 마찬가지로 일격에 상대를 죽일 생각 같았다.
득의양양한 표정을 하고 있는 육도극성은 두 마물의 물샐틈없는 협공에 한립이 죽을 거라고 확신했다.
그런데 다음 순간 노마의 얼굴이 그대로 굳어버렸다.
푸른빛이 가슴을 꿰뚫고 핏빛 뼈바늘들이 그에게 바람구멍을 내기도 전에 한립이 날개를 펄럭이며 사라진 것이다.
푸른빛과 날카로운 핏빛들은 목표를 잃고 허공을 스쳤다. 이에 육도 극성이 움찔하며 날카로운 시선으로 주위를 수색했다.
그가 의식을 방출해 철저히 주변을 장악하기도 전에 머리에 뿔이 난 마물 위로 푸른 뇌전이 번뜩이며 누군가 나타났다.
바로 순간이동을 한 한립이었다.
그가 곧바로 초록색 나무 자를 띄우자 마물의 발밑으로 한 척 크기의 은색 연꽃이 피어났다.
연꽃은 빙글빙글 돌며 일곱 가지 불광을 뿜어냈는데 마물이 꼼짝 못 하고 체내의 마기마저 응결되었다.
다시 한립이 무표정하게 두 손을 합장하자 삼색 화염이 나타났고 엄청난 영기의 압력이 주위로 퍼져나갔다.
키에에엑!
곁에 선 또 다른 마물이 드디어 한립을 알아차리고 괴성을 질렀다. 핏빛 뼈바늘들이 방향을 틀어 한립을 향해 쇄도했는데 그 속도가 이전 보다 훨씬 빨랐다.
순식간에 무수히 많은 날카로운 뼈바늘이 한립의 지척에 이르렀다.
그러나 그는 당황하는 기색 없이 힐끗 뼈바늘들을 쳐다볼 뿐이었다.
잠시 후 아무것도 없던 허공에 은빛이 번뜩이며 작은 방패가 나타났고 두꺼운 은색 장막으로 변해 그를 보호했다.
그 순간 핏빛 뼈바늘들이 날카롭게 은색 장막을 파고들었다.
퍼퍽! 퍼퍼펑!
핏빛들이 폭발해 비처럼 쏟아져 내렸고 이에 은색 보호막이 격렬하게 흔들렸다.
핏빛 뼈바늘의 위력은 상상을 초월해 각각이 웬만한 최상급 법보의 위력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원강순도 그것들을 튕겨낼 도리가 없었다.
“……!”
한립이 안색이 달라져 주술을 중얼 거리자 손톱 크기의 금색 구슬이 미간에서 나타나 금색의 보호막을 펼쳤다. 바로 체내에서 배양하던 금강조였다.
오랜 세월 배양해 위력이 이전보다 훨씬 강해졌고 그 단단함도 원강순보다 몇 배는 더 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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