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8화. 성궁 전투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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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궁의 고위층들은 다들 이 일과 한립이 관련되어 있다고 추측했다.
대전 안에서 대수사와 서문 장로가 과거의 은원이 있다는 말을 모두 듣지 않았던가!
그러나 의심은 그저 의심으로 남았고 다들 가슴이 서늘해져 그 누구도 ‘한립’이라는 이름은 거론하지 않았다.
상대가 대수사라 함부로 건드릴 수도 없었지만 아무런 증거도 없다는 점이 한몫했다.
서문 노인이 죽은 시각에 한립은 조 장로와 깨달음에 대해 교류한다며 줄곧 붙어 있었던 것이다.
물론 눈가림에 불과하다는 것은 알았지만 생각이 있는 수사라면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직접 나서지 않아도 원영기 수사 한 명쯤 세상에서 사리지게 만들 수 있는 존재였기 때문이다.
만일 다른 수사였다면 일단 잡아서 추혼술을 하면 그만이었지만 대수사를 어찌하겠는가?
이렇게 생전에 서문 장로와 친분이 두터웠던 장로들마저 입을 꾹 다물었다.
게다가 성궁이 총력을 기울여야할 전투가 곧 시작될 터이니 절대 상대의 심기를 거슬러서는 안 되었다.
이에 릉옥령부터 성궁 장로들까지 모두 귀머거리에 벙어리가 된 듯 이 일을 모른 척 지나갔다.
한립은 조 장로와 반나절 정도 깨달음을 나눈 후 자신의 밀실로 돌아갔다.
그 후 서문 장로가 죽어다는 소식을 들은 조 장로는 한참이나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못했고 마지막에는 쓴웃음을 흘리며 난색을 표했다.
그는 한립이 머무는 석실 앞에 있던 두 명의 결단기 제자들을 불러 조용히 건물을 떠났다.
자신과 한담을 나누며 다른 신통으로 원영기 수사를 처리할 실력자라면 옆에 붙어 감시하는 것은 시간 낭비였다.
이런 때는 거리를 두는 것이 상책이었다. 최소한 상대가 자신에게 살의를 느낄 일은 없을 것 아닌가!
닷새 후, 한립이 밀실을 나와 다시 성궁 대전에 이르렀을 때는 성궁 장로들 외에도 서른 명이 넘는 결단기 수사들이 모여 있었다.
대부분이 결단 후기 수사로 장로들이 키우는 성궁의 핵심 인물들이 분명했다.
한립이 천천히 걸어 들어오는 것을 보고 수사들의 시선이 몰렸다.
대부분 경외심이나 의혹이 어린 눈초리였는데 그들은 일단 한립의 시선이 향하면 전부 고개를 조아리고 감히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이전에는 한립이 대수사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의 신통으로 만천명을 막을 수 있을지 의심하는 자들이 있었다.
그런데 한립이 성궁에서 소리 없이 원영기 수사 하나를 제거해 버리자 오히려 그에 대한 믿음이 생겨났다.
이는 릉옥령은 물론이고 한립도 전혀 생각지 못한 결과였다.
그녀는 이번 일로 모두의 사기가 올라간 것에 만족했지만 한립은 아무런 신경도 쓰지 않았다.
“한 수사, 앉으세요. 일단 역성맹의 공격 계획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릉옥령이 한립을 보며 예의 바르게 말했다.
고개를 끄덕인 한립은 그녀보다 아래쪽에 자리 잡았지만 소매를 털어 하얀 옥간을 꺼내 읽기 시작했다. 다른 수사들은 전혀 개의치 않는다는 태도였다.
릉옥령은 담담히 미소 지었으나 대청 안의 다른 수사들을 보는 눈길은 한없이 진지했다.
그녀가 이런저런 분부를 내리고 이야기를 하는 동안 한립은 옥간에 대부분의 의식을 두었지만 약간의 의식을 분리해 성궁의 각종 대책과 진열 등을 파악했다.
성궁의 계획은 간단해서 풍화천절진의 108개 풍화주 중 천성성을 중심으로 사방에 설치된 36개만을 부 작정이었다.
성궁 내부의 진법대가들의 예상에 따르면 이 36개가 진법의 핵심으로 이것만 파괴해도 풍화천절진이 버티지 못하고 스스로 허물어질 것이라 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 전에 만천명이 직접 지키고 있을 진법의 눈을 반드시 점령해야겠지만 말이다.
원영기 장로들과 결단기 수사들은 릉옥령의 삼엄한 명이 떨어질 때마다 숙연한 얼굴로 명을 받들었다.
각 풍화주를 공격할 인원들이 배정 되었는데 어떤 곳은 두세 명의 원영기 수사들이 무리를 이끌었고 어떤 곳은 결단기 수사들로만 이루어졌다.
듣고 있던 한립이 이상한 마음에 골똘히 생각하다 그 까닭을 알아냈다.
이렇게 풍화주의 위치와 위력을 꿰고 있는 것은 아마 역성맹 고위층 중에 성궁의 첩자가 끼어있기 때문 일 것이다.
릉옥령은 빠르게 일을 처리했고 한 식경이 지나자 대부분 수사들이 구체적인 임무를 맡게 되었다.
그녀가 고개를 돌려 미소를 머금고 말했다.
“한 수사, 저와 마 장로 그리고 조 장로와 무리를 이루어 진법의 눈을 공격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만천명이 직접 그곳을 지키고 있을 겁니다.”
“그러시지요. 다만 나는 만천명만 책임지고 나머지 수사들은 먼저 공격해 오지 않는 한 건드리지 않겠습니다.”
그제야 고개를 든 한립이 여인을 보며 담담히 답했다. 태연한 표정의 그를 보며 릉옥령은 이채를 띠었고 바로 그 말에 동의했다.
천성 쌍성을 통해 대충은 들었지만 그녀도 한립의 진정한 실력이 어떤 지는 알지 못했다.
릉옥령은 혹여 그가 적을 얕보다 일을 그르칠까 싶어 만천명이 보인 신통과 새롭게 얻은 강력한 보물 등을 설명했다.
그런데 한립은 잠자코 들으면서도 아무런 표정 변화가 없었다.
그 모습에 릉옥령은 내심 탄식했지만 이제 와서 자신 있냐고 따져 묻기도 어려웠다. 어찌 되었든 이번 전투에서 이기지 못하면 성궁은 끝이었다.
“출발!”
여인의 서늘한 일갈에 성궁 대전에 모인 수사들이 전부 일어나 밖으로 몰려나갔다.
축기기 제자들을 비롯한 저계 제자들은 벌써 성궁의 사방에 위치한 성문에서 대기하며 결단기 수사들이 도착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한립이 두 손을 마주치자 손에 쥐고 있던 옥간이 사라졌다.
그 안에 적힌 원자신광의 구결은 정말 난해해서 며칠간 연구해 보아도 약간의 실마리만을 얻었을 뿐이었다.
‘아직 원자산이 어떤 원리로 원자 신광의 수련을 보조하는지도 깨우치지 못했고.’
한립은 이런 생각을 하며 릉옥령과 다른 장로들을 따라 돌로 만들어진 대전을 빠져나왔다.
그의 예상과 달리 밖에는 열 장 정도 되는 기다란 요수 마차가 세워져 있었다.
전신이 비취색으로 반짝였고 각종 주술이 빼곡하게 뒤덮여 정성을 다해 제련한 물건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 앞에는 네 마리의 청록색 요수가 땅바닥에 엎드려 있었는데 한립은 성궁에 온 이후 처음으로 어안이 벙벙해졌다.
5, 6급 요수들은 교룡(蛟龍)들이 틀림없었다. 그의 기억대로라면 교룡 일족은 지극히 제 일족을 아낀다고 했다.
‘성궁이 아무리 난성해를 지배했더라도 교룡에게 마차를 끌게 하다니. 격노한 영수 일족의 화가 미칠 것이 두렵지 않단 말인가?’
“어찌 한 수사께서 겨우 저계 요수들을 보고 그리 놀라십니까?”
릉옥령이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의 그를 보며 미소 지었다.
“요수의 몸은 교룡 일족의 것이지만 안의 혼백이 기묘합니다.”
한립의 눈동자에 남색빛이 어린 후 그의 표정이 달라졌다.
“역시 안목이 대단하십니다! 교룡들 안의 혼백들은 확실히 교룡의 것이 아닙니다. 아버지께서 외성해를 유람하시다 금교왕과의 내기에서 이기고 얻어내신 저계 교룡들의 시체에 심해에 사는 구렁이 영수의 혼백을 넣은 것이지요.”
“그랬군요. 그런데 이것을 이용해 공격할 작정이십니까?”
“한 형은 잘 모르시겠지만 이 마차는 아버지께서 직접 제련하신 것이라 제법 쓸 만하답니다.
요수들의 신통도 꽤 요긴하고, 마차 자체도 특별한 기능이 있어 적을 공격하는 데도 도움이 되지요. 이번 전투가 중요하지만 않았어도 아까워 내놓지 않았을 것입니다.”
릉옥령은 눈썹을 끌어올리며 비밀스럽게 중얼거렸다.
한립은 릉옥령의 말에 의식으로 요수 마차를 몇 번 훑고는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이어서 네 명이 마차에 올랐고 키가 큰 대머리 거한이 요수들을 조종했다.
그는 축기기 수사였지만 벌거벗은 상반신에 근육들이 단단해 강인한 인상을 풍겼다.
휘익!
거한은 하얀 채찍을 휘둘렀고 날카로운 파공음이 들려왔다. 유유자적하게 엎드려 있던 녹색 교룡들이 재빨리 몸을 일으켜 꼬리부터 머리까지 부르르 떨며 길게 포효했다.
하얀 빛덩이로 변해 날아가는 그들의 속도는 원영 초기 수사 못지않았다.
일각 후, 한립 일행은 천성성 모처의 성문에 도착했다.
거대한 섬의 상공에서는 풍화지력이 사방팔방으로 밀려들어 남색 장막을 쉴 새 없이 공격하고 있었다.
아무리 보호막이 유지되고 있다지만 폭음이 천둥처럼 울려대니 성 안의 범인들과 저계 수사들은 불안함이 극에 달했다.
한립은 성문이 있는 천성성의 허공에서 먼 곳을 응시하고 있었다.
남색 장막 밖은 그가 들어오기 전과 달라진 것이 없었고 전부 푸른색과 붉은 색으로 물들어 그의 신통으로도 멀리까지는 볼 수 없었다.
아래쪽을 보니 성문 가까이에 이미 수천 명은 돼 보이는 수사들이 몰려들어 가부좌를 하고 운기조식을 하거나 법기나 부적 등을 점검하며 전투에 돌입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조 노인과 보라색 장포 거한은 마차를 나서 다른 몇 명의 장로들과 신중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한 형, 제가 따로 부탁드릴 일이 있습니다.”
“무슨 일입니까?”
한립은 몸을 돌려 그녀를 보았다. 녹색 궁장을 입은 릉옥령이 단단히 결심을 했다는 듯 입을 열었다.
“이번 전투는 성궁의 존망이 걸린 전투가 될 것입니다. 하지만 역성맹이 오랜 세월 속세에 나서지 않던 수사들까지 모았다는 소식이 있더군요. 아마 한 형의 도움이 있어도 승산은 절반밖에 되지 않을 겁니다.
만일 이긴다면 수사를 귀찮게 해드릴 일도 없겠지요. ……하지만 만에 하나 진다면 옥간에 기록된 곳에 있는 이들을 돌봐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릉옥령은 이를 악물고 손을 내밀어 푸른 옥간을 건넸다.
“무슨 뜻인지요?”
“이들은 모두 저와 긴밀한 관계가 있습니다. 아무도 모를 거라고 자신하지만 일단 성궁이 대패하고 역성맹이 발본색원을 하려 난성해를 뒤진다면 어떻게 될지는 알 수 없는 일이지요!
차라리 수사가 이들을 데리고 가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수사는 본래 난성해 출신이 아니니 가능하시겠지요.”
릉옥령은 유언을 남기는 사람 같았다. 한립은 그런 그녀를 보며 할 말을 잃었다. 그가 말이 없자 여인이 웃으며 말을 이었다.
“물론 무턱대고 수사에게 부탁을 들어 달라는 것은 아닙니다. 아버지께서 당시 저를 세 번 도와줄 것을 조건으로 거셨지요? 만천명을 막아 주는 것으로 한 번은 사용했고요.
수사께서 이 부탁을 들어주시겠다면 이번 전투의 승패를 떠나 두 번째 기회를 쓰는 것으로 하면 어떻겠습니까?”
“릉 수사, 잘 생각해 보시오. 목숨을 살릴 수 있는 기회를 이렇게 낭비해서야 되겠습니까? 수사를 위해 고심했을 천성 쌍성 분들의 의도와도 맞지 않고요.”
“저도 압니다. 하지만 이미 성궁의 궁주가 되었는데 만일 전쟁에 대패해 성궁의 만년 대업이 제 손에서 끊긴다면 남은 두 번의 기회를 무슨 낯으로 사용하겠습니까.
그럴 바에야 가까운 이들의 목숨을 보전하는 것이 낫지요. 또한 저도 원영 중기 수사이니 별 다른 일이 없다면 제 목숨 정도는 지킬 수 있습니다.”
“릉 수사가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니 뜻대로 하지요. 이번 거래를 받아들이겠습니다. 만일 이번에 성궁이 패한다면 그들을 데리고 난성해를 떠나겠습니다.”
“한 형 덕분에 걱정을 덜었습니다. 이번 전투가 순조롭게 흘러가지 않아도 어떻게든 빠져나가실 수는 있겠지요.”
릉옥령의 나긋나긋한 말과 온화한 얼굴은 그녀의 아름다움을 더욱 돋보이게 했다.
원하던 약조를 받아낸 릉옥령은 더는 한립을 방해하지 않고 조용히 물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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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시진 후, 모든 이들이 준비를 마치자 천성성 성문이 일제히 올라갔다.
수만 명의 수사들이 각 성문을 통해 봇물이 터진 것처럼 줄줄이 빠져 나갔고 재빨리 남색 보호막을 벗어나 풍화지력이 감도는 푸르고 붉은 장막 속으로 들어갔다.
성궁 수사들의 엄청난 움직임에 풍화천절진을 지키던 역성맹 수사들도 바로 알아차렸다.
그들은 미리 준비해놓았다는 듯 대규모 수사들을 파견해 응전하는 동시에 풍화천절진을 북돋아 위력을 최고조로 끌어올렸다.
비록 초대형 진법이 결단기 이상의 수사에게는 큰 영향을 미치지는 못 해도 축기기 수사들에게는 큰 살상력을 발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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