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신공-697화 (454/2,000)
  • 697화. 성궁 전투(4)

    *

    “그건 그렇지만…….”

    한립이 무언가를 이야기하려다가 고개를 돌려 대청 입구를 쳐다보았다.

    그러자 잠시 후 입구에서 세 명의 수사들이 들어왔다.

    한 명은 원영 중기, 나머지 두 명은 초기였다.

    원영 중기의 수사는 얼굴 전체에 곰보자국이 있는 보라색 장포를 걸친 거한이었는데 릉록령에게 예를 올리지도 않고 한립을 거만한 표정으로 훑어보았다.

    그런데 그의 동공이 수축하며 믿기 어렵다는 표정을 지었다.

    “마 장로, 어서 오세요. 일단 앉으시면 다른 장로 분들이 도착하는 대로 성궁의 귀빈을 소개할까 합니다.”

    릉옥령이 먼저 웃으며 말을 걸었다.

    “수행의 깊이가 짐작할 수 없을 정도시니 궁주께서 중시할 만한 분이군요.”

    거한은 곧 평정을 회복하고 한립을 향해 예의상 미소를 보인 후 의자에 앉았다.

    다른 두 명의 성궁 장로들도 보라색 장포의 거한이 암전하게 자리에 앉자 릉옥령에게 포권을 하고는 뒤따라 앉았다.

    릉옥령이 손을 들어 슬쩍 머리를 뒤로 넘기는데 시선 속에서 일순 냉기가 스쳤다.

    이를 본 한립은 그저 웃는 듯 마 는 듯한 묘한 표정을 지었다.

    한 눈에 봐도 마 장로라는 자는 새로 취임한 성궁 궁주에게 승복하지 못한 듯 보였고, 릉옥령 역시 이 번 기회에 자신의 위세를 빌려 권위를 다지려 하는 것 같았다.

    곧이어 다른 성궁 장로들도 연달아 도착했고 한립이라는 낯선 대수사의 등장에 모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다들 약삭빠른 노인네들이라 마 장로가 얌전히 꼬리 내린 모습만 보고도 흠칫 놀라며 한립을 더없이 공손한 눈길로 바라보았다.

    삽시간에 대청에는 스물 댓 명의 성궁 장로들이 모였고 조 노인, 보라색 장포 거한 그리고 릉옥령이 원영 중기인 것을 제외하면 나머지는 전부 초기의 수행을 지닌 자들이었다.

    “거의 다 모이신 것 같으니 제가 귀빈을 소개하겠습니다. 전 대 궁주께서 친히 객경 장로로 모신 한립 수사십니다!”

    “한 수사라……. 뭐, 한립?”

    과연 다들 들어보았던 이름인지 소란스런 가운데 누군가 놀라 중얼거렸다. 한립이 눈을 빛내며 쳐다보니 뜻밖에도 인자한 인상의 하얀 의복을 입은 노인이었다.

    노인을 보고 기억을 더듬던 한립이 무언가를 생각해 내고는 표정이 달라졌다.

    “누구신가 했더니 허천전에서 뵈었던 분이군요. 당시 허천전 개방을 주관했던…… 또 다른 수사 분은 어디 계십니까?”

    한립의 목소리가 조금 음산해졌다. 이에 하얀 의복의 노인은 안색이 창백하게 변해 있었다.

    그는 놀랍게도 허천전에서 일격에 한립의 심장을 관통해 죽일 뻔했던 성궁 집법 장로였다!

    처음에는 그저 눈에 익다고만 여겼는데 상대가 중얼거리는 소리에 기억이 떠오른 것이다.

    “한 형께서 서문 장로를 다 아십니까?”

    “별 것 아닙니다. 원영을 응결하기 전 서문 수사와 언짢은 일이 있었을 뿐입니다.”

    표정이 어두워졌던 한립이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바로 무표정하게 돌아와 대답했다.

    “그랬군요. 서문 장로가 혹여 수사에게 폐를 끼친 일이 있더라도 한 형께서 너그럽게 봐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럼 이제 만천명을 상대하는 일에 대해 다시 이야기해봐야겠지요?”

    그가 대충 넘어가자 릉옥령도 안심하며 서둘러 화제를 돌렸다. 그러나 하얀 의복의 노인은 불안한 마음을 가라앉히기 어려웠다.

    “천성 쌍성께서 릉 수사께 무어라 전하셨는지 모르겠습니다만……. 내가 수락한 조건은 수사의 목숨이 위태로울 때 내가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만 도움을 드린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성궁을 위해 동급 수사와 목숨을 걸고 싸우기라도 하라는 것입니까?”

    한립의 차분한 물음에 대청 전체가 쥐 죽은 듯이 고요해졌다.

    “성궁이 화를 당한다면 저라고 무사하겠습니까? 게다가 한 형에게 만천명과 목숨을 걸고 싸워 주십사 부탁한 적도 없습니다.

    그저 전투가 벌어지는 동안 붙들어 주기만을 바란 것이고, 그 정도는 한 형의 능력 범위 내의 일일 텐데요.”

    릉옥령이 고운 미간을 좁혔다.

    “불가능한 일은 아니지만, 상대도 대수사인데 일단 싸우기 시작하면 목숨을 건 전투로 이어지지 않을지 누가 장담하겠습니까?

    만일 상대가 위력적인 술법을 행하려 한다면 언제든 자리를 떠도 된다는 약조를 해주신다면 나서는 것을 고려해 보겠습니다.

    게다가 성궁의 안위와 수사의 안전은 다른 문제라는 것은 잘 아실 것입니다. 성궁이 사라져도 수사의 목숨은 구할 수 있을 테니까요.”

    한립이 조목조목 따지자 릉옥령의 표정이 미묘하게 달라졌다.

    “한 수사의 말씀대로라면 결국에는 나서 주실 수 있다는 뜻이지요. 적합한 대가를 지불하면 말입니다! 노부의 생각이 맞습니까?”

    말없이 듣고 있던 조 노인이 수염을 쓸어내리며 끼어들었다.

    “물론 이 세상에 거래할 수 없는 것은 없지요. 귀 궁에서 충분한 조건을 제시한다면 위험을 무릅쓰고 만천명을 상대하는 것도 불가능한 일은 아닙니다.”

    “원하시는 것이 있으십니까?”

    이번에는 마 노인이 눈을 반짝이며 입을 열었다.

    “글쎄요. 그보다는 귀 궁에서 제시를 해보시지요.”

    한립의 무덤덤한 말에 성궁 장로들의 표정이 달라졌고 몇몇은 서로 전음을 주고받으며 상의를 했다.

    누구나 동급 수사와 목숨을 걸고 싸우라고 하면 웬만한 대가가 주어지지 않은 한 거절하는 것은 당연했다.

    그랬기에 한립이 목숨을 건 싸움은 거절한다는 데도 화를 내거나 분노를 느끼는 이들은 없었다.

    게다가 누구나 인계의 최정상에 선 대수사들의 전투는 훨씬 더 치열하고 위험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제 한립이 마음에 찰만한 거래조건을 제시하는 것이 문제였다. 웬만한 법보나 재료 혹은 공법과 비술이 대수사의 마음에 들겠는가!

    가장 상석에 앉은 릉옥령은 웅성거리며 사담을 주고받는 장로들을 가만히 지켜보다가 붉은 입술을 달싹였다.

    “한 형의 말씀이 일리가 있습니다. 하지만 일반적인 물건으로 한 형의 마음을 사기는 어렵겠지요. 본 궁의 원자신광 수련법과 원자산을 조건으로 내건다면 어떠시겠습니까?

    워낙 현묘한 공법이라 한 형과 같은 천재만이 이것을 수련할 수 있는 자격이 있다 여겨 드리는 말씀입니다.”

    여인의 말에 한립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다른 성궁 장로들도 흠칫 놀라 이상하다는 듯 시선을 주고받았지만 나서서 반대하는 이는 없었다.

    원자신광은 천성 쌍성이 수련하던 공법으로 유명했지만 그 난해함과 단점 역시 전부 알고 있는 터라 일반적인 원영기 수사들에게는 계륵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니 원자신광 공법과 원자산을 거래 조건으로 내거는 것에 반대하기는커녕 한립이 거절할까 걱정스러웠던 것이다.

    모두의 예상을 깨고 한립은 오래 고심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보아하니 릉 선자께서 내가 원하는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욕심을 부리는 사람은 아니니 그것으로 거래하지요.

    만천명을 죽이겠다고는 약속하지 못하겠지만, 다른 수사들에게 손을 쓰지 못하게 막아 보겠습니다.”

    “좋습니다! 저는 한 형께서 약조를 어기지 않을 것이라 믿습니다. 바로 원자신광의 수련 법결을 전해드리고 전투가 끝나는 대로 원자산을 내어 드리겠습니다.”

    “그럼 릉 수사의 소식을 기다리겠습니다. 멀리서 급히 오느라 피곤이 쌓여있으니 먼저 일어나 휴식을 취해도 되겠습니까?”

    “그러셔야죠! 조 장로, 한 수사를 쉴 곳으로 모셔드리고 잘 대접해 주세요.”

    릉옥령이 동의하며 조 장로에게 밝은 얼굴로 분부했다.

    백발노인은 퍼뜩 대답하고 궁주에게 인사를 올린 후 한립을 밖으로 안내했다.

    릉옥령을 향해 고개를 끄덕이고 뒤따라 걸어가던 한립이 갑자기 장로들 속에 앉아 있던 서문 장로를 의미심장하게 쳐다보았다.

    ‘히익!’

    그제야 한립은 아무렇지 않게 대청을 나섰지만 남은 서문 장로는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는 등 뒤로 식은땀이 흐르며 의식에 극통을 느끼며 하마터면 의자에서 굴러 떨어질 뻔했다.

    하지만 한립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고통도 씻은 듯이 사라졌고 방금 꿈을 꾼 것처럼 모든 것이 정상으로 돌아왔다.

    아무리 대수사라도 성궁 깊숙한 곳에 들어와 그곳의 장로를 대놓고 죽일 수는 없었다.

    하지만 노인은 이번 회합이 끝나는 대로 은밀한 곳에 숨어 전투가 시작된 후에나 나타나야겠다고 다짐했다.

    괜히 한립 앞에 얼쩡거리다가는 큰 화를 당할 수도 있겠다고 판단한 것이다.

    당시 자신의 비검에 목숨을 잃을 뻔했으니 쉽게 잊힐 원한이 아니었다.

    “궁주님, 한 수사가 만천명을 상대 할 수 있을까요? 겉으로만 저렇게 말하고 역성맹과 내통해 배신하면 큰일이 아닙니까. 그냥 금제의 힘을 빌려 천성성을 방어하는 편이 안전하지 않을까요?”

    한립과 조 장로가 대청을 떠난 후 보라색 장포의 거한이 릉옥령을 향해 의문을 제기했다.

    “안심하세요. 한 수사는 전대 궁주님들과 약조를 맺기 전부터 저와 안면이 있는 사이입니다.

    친분이 깊다고는 할 수 없지만 허 천정과 관련해 역성맹의 정마 노괴들과 깊은 갈등을 빚었다는 것은 알고 있지요. 절대 그들과 내통할 수 없는 인물입니다.

    또한 한 수사는 만천명보다도 먼저 대수사가 되었고 허천정을 지니고 있으니 승산이 훨씬 높지요. 그리고 지금 이 방법보다 더 좋은 대안이 또 있습니까?

    천성성을 방어하는 진법이 아무리 신묘해도 상대가 풍화천절진으로 밤낮없이 풍화지력을 쏟아 붓는데 얼마나 버틸 수 있겠습니까.

    반드시 이번 일전을 통해 승부를 봐야 합니다. 때가 되면 역성맹이 사라지든 우리 성궁이 사라지든 결판이 나겠지요.”

    릉옥령은 과감히 선언했다.

    “궁주께서 그리 말씀하시니 그 자를 한 번 믿어보는 수밖에 없겠습니다.”

    보라색 장포 거한도 곰곰이 생각해 보았지만 뾰족한 수가 없었기에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릉옥령은 거만한 그가 더 이상 반박하지 않자 담담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제 그들과 결전을 벌이는 날 어떤 방식으로 공격을 가할지에…….”

    *     *     *

    밀실 안, 한립이 가부좌를 하고 수결을 맺으며 두 눈을 감고 있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그가 눈꺼풀을 꿈틀하며 천천히 눈을 떴다.

    “손을 쓰기로 마음을 먹었군.”

    한립의 귓가에 천란수사가 변한 사내아이의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찌 아셨습니까?”

    “정확히 무슨 비술인지는 모르지만 대청을 떠나기 전 의식으로 그 자에게 표식을 남겨 두지 않았는가. 한 수사가 그 자와 한담이나 나누려고 그런 일을 한 것은 아닐 테고 말이야.”

    “수사께 들켰으니 아니라고 하지는 않겠습니다. 그 자에게 목숨을 잃을 뻔했으니 원수를 갚지 않고 넘어갈 수는 없지요!

    성궁 대전에서는 상황이 조금 불편했지만 그 자가 이미 그곳을 떠났으니 이제 움직일 때입니다.”

    한립이 냉소하더니 허리춤을 스쳤 다. 은빛이 반짝이며 인간형 꼭두각시가 소리 없이 나타났고 밀실 벽으로 소리 없이 스며들었다.

    한립도 몸을 일으켜 밀실 석문으로 걸어 나갔다. 그는 길지 않은 통로를 지나 머물고 있던 건물의 대청으로 빠져나왔고 마침 조 노인이 차를 마시며 앉아 있다가 그를 발견했다.

    “조 수사께서도 나무 속성의 공법을 익히고 있다 들었습니다. 괜찮으시다면 서로 수련의 깨달음에 대해 이야기를 좀 나누시지요.”

    한립이 놀란 얼굴의 노인을 바라보며 미소를 머금었다.

    반나절 후 성궁 모처의 원신영등(元神靈燈)이라는 등불 중 하나가 꺼져버렸다.

    그곳을 지키던 성궁 제자가 소스라치게 놀라 다급히 상부에 보고를 했고 동시에 성궁이 소란스러워졌다.

    한식경 후 몇몇 성궁 장로들이 서문 장로가 머물던 거처로 달려가 밀실 중 하나를 깨고 들어갔다.

    서문 장로가 그곳으로 들어가는 것을 본 제자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밀실 어디에서도 서문 장로의 흔적은 찾을 수 없었다. 그 후로도 괴이하게 사라진 서문 장로의 죽음에 여러 가지 소문이 떠돌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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