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2화. 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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닷새 후 동흰아와 함운지가 차례로 낙운종을 떠났는데 동훤아는 한립의 도움으로 심마를 벗어나 결단 후기에 이를 수 있게 되었고, 함운지는 그가 선물한 여러 보물과 단약이 든 약병 외에 어령종 대장로에게 보내는 서한을 품고 돌아갔다.
미소를 머금은 남궁완은 그가 내려서는 것을 보며 온화하게 말했다.
“운지는 벌써 떠난 건가요? 며칠 더 머물다가도록 하지요.”
“아니오. 이제 그녀에 대한 마음의 매듭도 한결 풀린 듯하오.”
한립이 미소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방금 또 당신의 미인 지기(知己) 중 하나의 소식을 들었어요. 자령이라는 여인이 몇 해 전 원영을 응결하는데 성공하고 대진으로 떠났던 걸요? 아마 근시일 내로는 만나기 어렵겠네요.”
“자령의 자질에 원영을 이루는 것이 신기한 일도 아니오. 그녀가 천남에 있고 없고는 중요하지 않소. 인연이 닿는다면 다시 만나게 되겠지. 그것보다 며칠 후 제련에 필요한 재료가 도착하면 바로 폐관 수련에 들어가야겠소!
하루라도 빨리 원영 후기의 최고봉에 이르러 대연결을 완전히 익히고 다섯 종류의 극한의 한기와 오자동 심마를 하나로 합쳐야 할 듯하오.”
“좋아요! 나도 힘을 내서 원영 후기에 이르겠어요. 출관할 때엔 우리 부부 모두 원하는 바를 이루었으면 좋겠네요.”
남궁완의 생긋 웃는 모습이 온화하면서도 매혹적이었다.
“나도 완이의 말대로 되길 바랄 뿐 이오. 그러나 그 전에 나와 함께 둘 만의 밤을 보내는 것도 잊지 마시오!”
한립이 갑자기 묘한 얼굴로 남궁완의 몸을 훑었다.
“치, 언제부터 이렇게 경망스러워졌담!”
남궁완은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라 소리쳤지만 나무라는 와중에도 즐거운 기색이 가득했다.
“경망스럽다고 말했소? 태어나서 그런 말은 처음 들어보오. 아마 이 번 생에는 오직 당신에게만 경망스러운 사람이 될 듯하오.”
한립이 큰 소리로 웃음을 터트리자 산봉우리가 쩌렁쩌렁 울리며 메아리 쳤다.
자모봉의 동굴 안, 열네댓 살 되어 보이는 소녀가 한 손에 옥간을 듣고 열심히 읽고 있다가 한립의 웃음소리를 듣고 잠시 고개를 갸웃거렸다.
* * *
운몽산 자모봉의 밀실 안.
곳곳이 하얗고 흐리멍덩한 것이 밀실 전체가 금제에 둘러싸여 있는 것 같았다.
한립은 전신에서 푸른빛을 반짝이며 앉아 있었고 그 주변에는 백골 다섯 구가 그를 둘러싸고 가부좌를 하고 있었다.
백골들은 전신을 회백색 마기로 감싸고 있었는데 각각의 입에 검은색, 하얀색, 남색, 노란색, 초록색의 다섯 가지 화염을 머금고 있었다.
가부좌를 하고 중간에 앉은 한립의 두 손에 눈부신 보라색 화염이 보일 듯 말 듯 피어올랐다.
그리고 밀실 벽 한쪽에서 은빛이 번뜩이며 푸른 인영이 괴이하게 나타났는데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
반나절 후, 한립이 입을 벌리자 눈부신 보라색 화염이 한 줄기 실로 바뀌어 그의 입안으로 흡수되었다.
그때 한립이 천천히 눈을 떴고 처음에는 멍하던 시선이 시간이 흐를수록 점차 맑아져 갔다.
그는 고개를 돌려 곁에선 푸른 인영을 보더니 미세하게 미간을 좁혔다.
푸른 인영은 거처 밖에서 활동하게 한 인간형 꼭두각시였는데 일정한 기간마다 꼭두각시 안의 두 번째 원영을 동화시킬 때 외에는 줄곧 거처 관리를 맡겼었다.
꼭두각시가 이곳에 나타났다는 것은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일이 생겨 그가 나서야 한다는 뜻이었다. 한립은 내심 의아했다.
‘대수사의 신통에도 뒤지지 않는 두 번째 원영이 처리하지 못한 일이라.’
그는 인간형 꼭두각시에 의식을 불어 넣어 두 번째 원영을 동화하기 시작했다.
일각 후, 한립의 표정이 묘해졌고 꼼짝 않던 꼭두각시가 허리춤의 저물대에서 무언가를 꺼내 내밀었다.
그것은 바로 손바닥만 한 반절짜리 옥부(玉符)였다.
한립이 그 안에 약간의 영력을 불어 넣자 빼빼하게 써진 핏빛 글자들이 떠올랐다.
“천란 수사도 깨어나셨군요! 이번 폐관 수련은 꽤 길었습니다.”
오랜 시간 말을 하지 않았던 터라 한립의 목소리가 조금 잠겨 있었다.
“겨우 백이삼십 년이 지났을 뿐이니 길지도 않지! 이제 출관을 하려는 것인가? 허나 한염동심마(寒焰同心魔)의 제련이 막바지에 이르러 십여 년 정도만 더 하면 완전히 연화에 성공할 것인데 아쉽지 않겠는가?”
영기의 빛이 번뜩이며 한립의 소매 속에서 작은 솥이 빠져나왔고 그 안에서 사내아이가 나타났다.
이제 그는 이전보다 두, 세 살은 더 먹어 보였다.
“돌아와서 마저 제련하면 되니 아쉬울 것은 없습니다. 다만 만리부를 통해 난성해에서 소식을 전해 왔는데 천성 쌍성과의 약속이 있어 이번엔 릉옥령의 어려움을 모른 척 할 수가 없군요.”
“천성 쌍성이라면 난성해의 후기 수사 부부가 아닌가? 이전에 솥 안에서 슬쩍 살피니 수행은 높았지만 수명이 얼마 남지 않았더군. 지금까지 아무 일도 당하지 않았어도 수명이 다해 죽었을 것이네.”
한립의 말에 사내아이가 눈을 굴리며 천성 쌍성을 떠올렸다.
“릉옥령이 보낸 소식엔 천성 쌍성에 대한 이야기는 없었지만 그들은 이미 세상을 떠났을 겁니다. 그럼 이번이 기회가 될 수도 있겠지요. 성궁의 원자신광에 흥미가 생겨서 말입니다. 당시 천성 쌍성이 준 화신기에 진입하는 방법들을 자세히 살펴보았는데 쓸 만한 것은 원자신광 뿐이었습니다. 이번에 가면 그 수련 방법을 얻을 생각입니다.”
“원자신광은 영계에서도 들어본 일이 없네. 아마 인계 수사가 독자적으로 연구해낸 것이겠지. 하지만 아무 공법이나 수련하는 것은 신경이 분산되니 대도(大道)를 이루는데 방해가 되지 않게 조심하게.”
사내아이가 분명히 경고했다.
“원자신광을 수련하기 전 일단 법력을 원영 후기의 최고봉까지 끌어 올리고 그 다음 극한의 한염으로 화신기 고비를 넘길 생각입니다. 성공 한다면 좋겠지만 실패하면 어쩔 수 없이 원자신광을 익혀 봐야겠지요.”
“수사가 그리 계획하고 있다면 나도 더는 해줄 말이 없네. 노부가 화신기에 이를 비술들을 많이 알고는 있지만 영기가 희박한 이곳에서는 다 무용지물이라네. 그런데 백여 년 간의 수련에는 성과는 있었는가? 법력은 크게 늘어난 것 같은데.”
사내아이는 한립의 몸을 훑으며 담담히 물었다.
“법력이 꽤 늘었지만 아직 멀었습니다. 적어도 5, 60년은 더 수련해야겠지요. 그것도 각종 영약을 쉼 없이 복용했을 때 이야기지. 그저 수련만 해서는 백 년이 넘어도 어려울 것입니다.”
한립은 작게 탄식하며 신비한 공간에서 제련해냈던 강운단(絳雲乃)을 떠올렸다.
‘강운단만 넉넉하다면 수련 시간을 몇 배는 단축할 수 있을 텐데.’
안타까운 일은 강운단에 필요한 영초가 인계에서는 이미 멸종되었고 영묘원에서는 옮겨 심을 수 없다는 점이었다.
지금 그의 경지에 다른 단약들은 효과가 턱없이 부족했다.
그동안에도 그는 신비한 병의 녹색 액체를 이용해 영초를 길러내는 것 외에도 명청령안과 영충들을 숙련시키는데 사용해왔다.
다만 명청영수로 눈을 씻어 내는 일은 스무 해 전에 그만두었는데 아무리 두 눈을 씻어내도 이제는 더 이상 맑아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물론 한립의 명청령안의 위력은 이 전과 비교하면 엄청난 차이였다.
대량의 영력을 불어 넣으면 구름과 안개를 꿰뚫어 보았고 심지어 극성으로 펼치면 의식을 사용하지 않고도 천 장 밖의 물건까지 지척에 있는 것처럼 선명하게 볼 수 있게 되었다.
육익상공 역시 드디어 날개가 두 쌍으로 늘어났고 신통도 5급에서 7 급 수준으로 올라섰다.
이제 바람과 눈을 부려 12마리 지네가 동시에 신통을 펼치면 십여 리는 순식간에 빙하로 뒤덮을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서금충 중 일부는 여전히 진화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천란 성녀가 알려준 오행 영기의 힘으로 성장을 촉진할 수는 있었지만 아직 그것을 펼칠 시기가 되지 않았고 얼마나 더 세월이 흘러야 할 지 알 수도 없었다.
또한 대진에서 얻은 토룡갑의 경우, 대량의 영단을 꼬박꼬박 챙겨 먹이며 수련시키고 있는데 그의 수행으로 보건데 8급 화형기에 이를 날도 머지않아 보였다.
한립은 이제 청원검결을 익힘과 동시에 대연결 수련을 병행했다.
영근 자질을 개선해서 인지 아니면 그가 의식에 관해서 천부적인 재능이 있어서인지 단숨에 대연결의 마지막만 남기고 모두 익혀 냈다.
이렇게 되니 지금 그의 의식은 이 전보다 배는 강해져 마지막 남은 1 성 마저 전부 수련하고 나면 화신기 수사와 비교해도 부족하지 않을 강력한 의식을 지니게 될 것이다.
그의 의식뿐만 아니라 몸 역시 상상하기 어려운 경지까지 올라 매우 튼튼해졌다.
질풍구변을 수련하기 위해 명왕결을 3성까지 익혀냈는데, 비록 시간을 많이 허비하지는 않았지만 그 과정이 너무 어렵고 고통스러워 한립마저 중간에 포기할 뻔 했었다.
이러니 영계에서도 3성 이상을 수련한 자를 찾기 어려웠을 것이다.
명왕결 3성을 대성하고 나니 그 위력이 상상을 초월했다.
영기의 보호막이 없어도 맨몸으로 일반 법기 공격을 막아낼 수 있게 된 것이다.
오히려 질풍구변은 생각보다 간단해서 겨우 1년 만에 전부 깨우치고 이제는 마음대로 신통을 펼칠 수 있었다.
그리고 한립은 폐관 수련을 하는 동안 몇 가지 보물도 제련해냈다.
불멸체 신통을 사용하게 해줄 목생주의 제련이 가장 시급했는데 뜻밖에도 그 보조 재료가 삼대영목 중 하나인 양혼목과 영안수였다.
다른 이들이라면 구하지 못할 진귀한 나무 속성 보물이었지만 그에게는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았다.
그는 이렇게 목생주를 제련하고 연화를 시키는 중이었다.
이외에도 쌍미인면갈(双尾人面蝎)의 한 쌍의 독침과 곤오산에서 가져온 화룡이 새겨진 기둥들을 이용해 두 개의 쓸 만한 법보도 만들어냈다.
“흠.”
지난 세월동안 이룬 성과를 생각하던 한립은 소매를 털어 새까만 옥병을 방출했다. 그러자 다섯 백골들이 몸을 떨며 회백색 마기를 흩날렸고 악귀 머리로 변해 마화를 뿜어냈다.
“가라.”
한립이 손을 뻗어 법결을 날렸다.
악귀 머리들이 빙그르 돌며 신속히 줄어들었고 곧 새까만 옥병에서 흘러나온 기운에 휩싸여 빨려 들어갔다.
옥병을 회수한 그는 몸을 일으켰다.
그가 소매를 펄럭여 하얀 빛을 방출하자 석실 내의 금제가 사라지며 문이 드러났다. 그가 문을 향해 걸어가자 인간형 꼭두각시는 다시 은빛을 내며 사라졌다.
*
천남 중부의 월국 수도계는 지난 수백 년간 연달아 전쟁을 치르고 오랜 세월 태평했던 적이 거의 없었다.
처음에는 월국 여섯 종문이 마도의 침공을 받아 흩어졌고 나중에는 그 마도 종파들끼리 세력을 다뤄 결국 귀령문이 승리했다.
그런데 백여 년 전 어령종이 다른 종파와 연합해 추마골에서 세력을 크게 잃은 귀령종을 월국에서 몰아내었다.
이제 월국은 어령종을 우두머리 삼아 몇몇 종문들이 나눠가졌으며, 그 중 가장 세력이 강한 어령종이 영맥 광산 절반 가까이를 독점했다.
어느 커다란 골짜기 아래로 난 영맥 광산도 어령종 소유 중 하나였다.
이곳은 영석 생산량이 풍부한 편이었지만 월국 여섯 종문과 귀령문 그리고 어령종이 수백 년 간 마구 채굴하다 보니 영석이 거의 남지 않았고 자연히 크게 신경 쓰지 않는 곳이 되었다.
어령종은 겨우 연기기 저계 제자 둘을 남겨 이곳을 지키게 하였다.
이 날도 어령종 제자들은 광산 입구에 서서 종 내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 떠들고 있었지만 푸른 인영이 동굴에 스며든 것을 전혀 알아채지 못했다.
푸른 인영은 그대로 광산의 가장 깊숙한 곳으로 들어섰다.
노란 빛을 번뜩이며 모습을 드러낸 것은 평범한 용모의 청년 한립이었는데, 그는 텅 빈 동굴을 살피며 잔잔한 미소를 지었다.
한 달 전, 출관한 그는 남궁완을 만나지 못하고 멀리 다녀와야 할 것 같다는 소식만 남기고 떠나왔다.
그녀는 지난 백 년 동안 몇 차례 출관을 해 천남 각지를 유람하며 스스로의 심성을 갈고 닦았고, 한립이 출관하기 몇 년 전에는 다시 밀실로 들어가 폐관 수련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쉬운 마음은 어쩔 수 없었지만 그녀의 수련을 방해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떠나기 전 낙운종에 들러 려락과 류옥을 만났다.
그가 폐관 수련을 하는 동안 낙운종은 하루가 다르게 발전했고 오래 전에 천남에서 손가락 안에 꼽히는 거대 종파로 거듭났다.
게다가 백봉봉의 송여인은 원영을 응결하는데 성공해 낙운종의 네 번째 원영기 수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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