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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690화 (447/2,000)

690화. 취령주(聚靈珠)

*

한립은 별다른 말없이 손을 저어 세 가지 물건을 끌어당겼다.

이때 연여언의 맑은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병 안에 든 것은 본문 성약인 혈지단(血肢丹)입니다. 이 단약은 다른 효과는 없지만 유일하게 육체의 손상에 불가사의한 효과를 보입니다. 사지가 완전히 잘려 떨어져 나가도 적시에 이 약을 복용하기만 하면 다시 생겨나니까요.

혈지단은 제련하기가 무척 어려워 본 문에서도 겨우 열댓 개를 보유하고 있을 뿐입니다. 병 안에 세 개가 들어있으니 받아주십시오.

그리고 혈혼탁(血魂鐲은 극소수의 수사들만이 알고 있는 마기(魔器)입니다.

역대 귀령문 문주가 지니던 것으로 왕 문주가 추마골에서 죽어 종 장로께서 회수해온 물건이지요.

일반적인 마기와는 달리 직접 공격에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팔찌 안에 혼백이나 마귀 등의 특별한 존재를 배양하는데 쓰입니다.

피의 기운을 흡수해 힘을 키우고 나중에 적에게 방출해 부지불식간에 죽일 수 있지요.

그리고 마지막 목갑에는 나머지 두 가지 보다 더욱 진귀한 물건이 들어 있습니다.”

여기까지 말한 연여언이 잠시 전음을 멈추고 반짝이는 눈동자로 한립을 살폈다.

그런데 한립은 혈지단과 혈혼탁에는 조금도 마음이 끌리지 않는 듯했다.

내심 탄식한 그녀가 여전히 평정을 유지하며 덧붙였다.

“한 형께서 나무 속성의 공법을 주 공법으로 익히셨다 들었습니다. 목갑 안에는 오행(五行) 취령주(聚靈珠) 중의 목령주(木靈珠)가 들어있습니다.”

“취령주? 전해지는 말에 따르면 천지의 다섯 가지 속성 중 한 가지 속성의 영기를 흡수하고 나머지 속성의 영기는 배척한다는 이보가 아닙니까?”

태평하기만 하던 한립의 안색이 일순 변하며 믿기지 않는다는 듯 반문했다.

“맞습니다. 바로 그것입니다. 취령주가 기초 진법인 취령진법과 이름은 유사하지만 그 효력의 차이는 제가 굳이 말씀을 드리지 않아도 아시겠지요. 한 형도 잘 아시다시피, 수련하는 공법의 속성만 맞는다면 영 안의 보물들보다도 도움이 되는 것이 취령주입니다.”

한립은 진지한 눈빛으로 초록색 목갑을 응시했지만 노란 금제 부적이 붙어 있어 안의 내용물은 확인할 수 없었다.

그가 갑자기 입을 벌려 목갑을 향해 입김을 불자 푸른 기운이 밀려들어 금제의 부적이 떨어졌다.

달칵.

잠시 후 목갑의 뚜껑이 저절로 열렸다.

목갑을 열자 초목의 싱그러운 향기가 물씬 피어오르며 초록빛으로 반짝였다.

그 광채 속에 엄지손톱만 한 비취색 구슬이 담겨 있었다.

구슬이 허공에 노출되는 순간 농염한 나무 속성 영기가 충만해졌고 한립이 그것을 한 모금 들이키자 정신이 맑아지는 기분을 느꼈다.

“과연 취령주가 맞습니다. 상고시대에나 몇 번 발견되었다는 기록만 있을 뿐 이후 제련해낸 이가 없었는데 귀 문이 소장하고 있을 줄은 몰랐습니다. 그런데 연 선자! 귀령문은 정말 이렇게 귀한 보물을 내주려는 것입니까? 나무 속성 공법을 수련하는 수사가 이것을 지니고 있으면 수련 속도가 배는 빨라질 텐데요.”

한립이 구슬을 들어 자세히 살펴보다가 다시 평정을 되찾고 물었다.

“인계에서 구하기 어려운 보물은 맞지만 본 문이 살아남을 수 있다면 상관없습니다. 게다가 저희 귀령문은 본래 나무 속성 공법을 익히는 수사가 드물지요. 저희가 지니고 있어봐야 제대로 쓰이지 못할 텐데 차라리 본 문의 활로를 여는데 도움이 되고자 합니다.”

“처음 두 가지는 몰라도 취령주는 확실히 내게도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허나 내가 나서서 어령종 등 다른 종문들을 말려주기를 원한다면 한 가지 조건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무슨 일이든 본 문이 할 수 있는 일이라면 수사를 실망하게 해드리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노란 장포 거한이 두 눈을 번뜩이며 간절히 말했다.

“왕 씨 가문의 다른 이들은 상관없으나 왕선은 두 번 다시 보고 싶지 않군요. 저도 원수의 가문을 도울 마음은 없으니까요. 제 뜻을 아시겠습니까?”

한립이 의미심장하게 거한을 쳐다보았다.

종 노인과 연여언의 안색이 창백해졌지만 거한은 그리 놀란 것 같지 않았다.

“한 형의 뜻을 제가 왜 모르겠습니까. 저는 문제없다고 보는데 종 사형의 뜻은 어떠하십니까?”

거한이 고개를 돌려 종 노인을 향해 물었다.

“한 형께서 이렇게까지 말씀하시니, 본문의 존속을 위해서라도 결단을 내려야겠지요.”

“그럼 사형께서도 동의하신 것으로 알고, 이 일은 제가 본 문을 대신해 약조하겠습니다.”

거한은 이제 주저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뜻밖에도 그는 한 번도 연여언을 바라보거나 동의를 구하지 않았다.

“좋습니다. 그럼 주신 것은 받도록 하지요. 며칠 후 직접 어령종과 몇 몇 가문들에게 서한을 보내겠습니다.”

한립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자 거한의 얼굴에 희색이 가득했다.

목적을 이룬 귀령문 수사들은 곧바로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연여언이 마지막으로 대청을 빠져 나가다 멈칫했다.

그녀는 고개를 돌려 물끄러미 한립을 바라보다가 작게 입을 달싹였지만 결국에는 하려던 말을 내뱉지 못 하고 한숨만 쉬며 떠나갔다.

한립도 그것을 알고 표정이 달라졌으나 탁자 위의 세 가지 보물을 놓고 생각에 빠져들었다.

*    *     *

귀령문 수사들은 낙운종을 떠나 세 개의 빛줄기로 변해 돌아가는 중이었다. 그들이 드디어 운동산맥을 벗어나자마자 종 노인이 노란 장포 거한에게 물었다.

“연 사제, 정말 왕 사질을 어떻게 할 참인가?”

“종 사형, 저도 그러고 싶지 않지만 상대가 그리 분명히 요구하는데 어찌 거절할 수 있겠습니까. 어차피 왕가 전체를 축출하는 것도 아니고, 왕 사형의 자손이 왕선 한 명만 있는 것도 아니니 대가 끊길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의 입장에서는 나름 관대한 처분으로 내건 조건이겠지요. 제 생각에는 이번 기회에 본 문에서 왕 씨 가문 제자들을 정리해야 할 것 같습니다. 만일 상대가 이 일로 본문에 불만을 품기라도 한다면 득보다는 실이 더 많을 것입니다.”

“그것은…….”

노인은 고민하는 기색이 뚜렷했다.

“여언아, 네게는 미안하게 되었다. 왕 씨 가문과 정혼할 때 이런 날이 오리라고 상상이나 했겠느냐! 네가 먼저 원영기에 이르고 왕선 그 녀석이 실패해 그나마 다행이지. 왕가가 우리 연가를 쳐 비밀리에 수련 중이던 나를 제외한 고계 수사들에게 전부 금제를 심어 놓지 않았느냐! 너도 예외는 아니었고. 왕선 그놈이 먼저 부부의 정을 져버렸으니 상심할 필요 없다.”

거한은 고개를 돌려 줄곧 말이 없는 연여언에게 미안한 기색을 비치었다.

“당숙의 뜻을 제가 어찌 모르겠습니까. 하지만 그래도 한때는 부부였던 제가 어찌 그런 제안에 바로 동의할 수 있겠어요.

이번에 돌아가는 대로 저는 백 년 간 폐관 수련에 들어가 종문의 일에는 관여하지 않을 테니 왕 씨 가문과 왕선을 어찌 처리하시든 제게는 알려주실 것 없습니다.”

연여언은 차분히 말을 마치고 속도를 높여 먼저 나아갔다. 노란 장포 거한이 이를 지켜보며 안타까워했다.

“노부도 할 말이 뭐가 더 있겠는가. 본 문을 위한 일이니 왕가의 일은 연 사제의 뜻대로 하시게.”

“종 사형, 마음 놓으십시오. 제가 분별 있게 처리하겠습니다.”

거한은 종 노인의 말에 활짝 웃었지만 노인은 마음이 편치 않은지 고개를 저으며 입을 다물었다.

“그건 그렇고 취령주를 다른 이의 손에 넘긴 것이 정말 아쉽습니다.”

“아쉽다고? 사제는 취령주가 정말 본 문의 보물인 줄 아는가?”

종 노인이 피식 웃으며 거한이 깜짝 놀랄 만한 말을 했다.

“예? 그게 무슨 뜻입니까? 사형이 본 문의 보물 창고에서 직접 꺼내 오신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요.”

“그것은 원래부터 본 문의 보물이 아니었네. 내가 아는 것은 합환 노마가 내게 친히 건넨 물건이라는 것 뿐이네.”

“합환 노마가 말입니까?”

노란 장포 거한이 갑작스러운 이야기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얼마 전 노마가 불쑥 찾아와 구슬을 주며 예전에 본 문이 합환종에 빌려주었던 보물이라 하더군. 그리고 은연중에 이것을 이용해 낙운종 한 장로의 도움을 받으라고 암시를 하더군. 연 사제의 생각에는 너무 기막힌 우연이라고 생각지 않는가?”

“그렇지요. 취령주가 정말 본 문의 보물이었다고 해도 합환 노마가 곱게 돌려줄 작자입니까? 그렇다면 취령주에 무슨 수작이라도 부려 놓은 것은…….”

영민한 거한이 바로 어찌된 일인지 알아듣고 안색이 달라졌다.

“보물 자체에는 문제가 없네. 내 여러 차례 살펴보았지만 듣던 바와 똑같은 취령주였어. 그렇지 않고서야 내가 무턱대고 그자의 뜻대로 했겠는가.”

“하지만 노마가 쓸데없는 일을 했을 수도 있지 않습니까. 종 사형도 참, 저와 먼저 상의하셨어야지요. 만일 구슬에 문제가 있다는 것이 밝혀지면 이건 귀령문이 멸문지화를 당 할 수도 있는 일입니다.”

노란 장포 거한의 표정이 초조해졌다.

“노마의 말대로 하지 않았다면 우리가 천남 제일의 수사를 움직일 수 있었겠는가. 미리 상의했든 하지 않았든 소용없는 일이네. 이 방법 말고는 본 문이 살아날 기회나 있겠는가?”

종 노인이 서늘하게 콧방귀를 뀌며 답하자 거한은 한 마디도 대꾸하지 못했다.

“됐습니다. 이미 주고 온 구슬을 이제 와서 어쩌겠습니까. 그저 구슬에는 문제가 없어 저희가 말려드는 일이 없기를 바라야지요.”

한동안 멍하니 고심하던 연 씨 거한이 자신을 위로했다.

“연 사제의 말 대로네. 취령주는 상고 시대의 유명한 이보였으나 오랜 세월이 흘렀으니 어찌 변했을지 누가 알겠는가? 그가 스스로 진짜 취령주라 인정했으니 앞으로 어찌되든 우리가 알 바가 아니네.”

“좋습니다. 이 일은 이렇게 마무리 짓도록 하지요. 허나 그래도 조심하는 것이 좋으니 본문이 이번 위기에서 무사히 벗어나면 바로 이전을 하고 백 년간 산문을 봉해야겠습니다.

“사제의 말대로 진행하게.”

종 노인도 고개를 끄덕여 찬성했다. 대화가 끝나자마자 그들은 속도를 높여 연여언이 사라진 방향으로 향했다.

*     *     *

같은 시각 합환종 금지.

농염한 회색 안개에 가려진 천양담(天陽潭)에서 누군가 바위에 앉아 있었다.

“지금쯤이면 그것이 한가 녀석의 수중에 들어갔겠구나. 취령주를 얻었다고 좋아하지 말거라! 수련 속도는 훨씬 빨라지겠으나 화신에 이르기 위한 고비에 이르렀을 때는…….”

귀빈루에 남아있던 한립이 취령주를 만지작거리다가 다른 보물들과 함께 넣어두려는데 사내아이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한 수사, 정말 그 구슬을 지니고 있으려는 것인가?”

“어찌 그러십니까? 혹시 취령주에 무슨 문제라도…….”

“구슬 자체는 아무 문제없네. 다만 취령주가 사실은 실패작 혹은 미완성의 보물에 불과하다는 것은 수사 들은 잘 모르지. 이런 것의 도움을 받아 수련 속도를 높였다가는 일정 경지에 이르면 완전히 막다른 길에 이르게 될 걸세.

취령주로 수련하는 고계 수사는 경지를 높이기 위한 고비를 넘기기가 다른 수사들의 배 이상은 어려워지거든. 한 가지 속성의 영기만 흡수 하다 보니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다른 속성의 영기에 감응하는 능력이 약해지기 때문이지.

원영기 이하의 수사들은 그런 단점이 있는지도 잘 모르겠지만 천지 원기를 느껴야 다음 경지로 갈 수 있는 자네 같은 수사들은 득보다 실이 훨씬 많겠지.

그래서 영계에서는 취령주가 신기한 능력을 지녔음에도 자질이 떨어지는 저계 수사들을 위해서만 사용하네. 고계 수사들의 수련에 이런 얕은 수는 통하지 않는 법이네.”

“그렇습니까? 그렇다면 이것은 제가 화신기에 이르는 데 방해가 될 물건이군요.”

한립이 손에 든 비취색 구슬을 보는 눈빛에 어렴풋이 노기가 어렸다.

“노부가 말하지 않았는가? 이 구슬은 아직 완성되지 않았네. 만일 다른 진귀한 나무 속성 재료들을 찾을 수만 있다면 목생주(木生珠)라는 보물로 제련할 수 있을 텐데.

그 구슬은 수련 속도를 높여주지는 않지만 완전히 연화를 하면 딱 한 번 불멸체(不滅體)가 될 수 있는 신통을 발휘해 수사가 위기에 처했을 때 목숨을 보전하게 해줄 걸세.”

“불멸체!”

한립은 넋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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