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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689화 (446/2,000)

689화. 마침내 일가를 이루다

*

…….

한립과 남궁완이 자모봉 정상에 나란히 서서 하얀 구름이 떠가는 풍경을 말없이 지켜보고 있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남궁완이 이마에 드리운 머리카락을 넘기며 한립을 향해 빙긋 웃었다.

“전화위복이라더니, 차녀천월결 덕에 봉인 속에서 원영 중기에 이를 수 있었네요! 그래도 마지막에 부군이 도와주지 않았다면 이룰 수 없었을 겁니다. 제류장이라는 것을 복용해 십여 년의 수련 시간을 아꼈으니까요. 그런데 부군이 벌써 후기에 이른 것은 아직도 놀랍군요. 이제 인계에서는 화신기 노괴들을 제외하면 부군의 적수가 없겠죠?”

“적수가 없다는 말은 함부로 하면 안 되오. 내가 기연을 얻었다면 인계의 다른 수사들도 언제든 그럴 수 있을 테니.”

미소를 지으며 한립이 겸손히 말했다.

“난 당신 같은 수사가 또 있을 거라고는 믿기지 않는데요. 그런데 지금 생각해도 봉혼주 때문에 위험할 뻔 했어요. 화섬의 요단으로 저주의 위력을 대부분 제거했다고 생각했는데 강력한 금제가 체내에 잠복해 있었잖아요. 발작하기 전에 저주를 푸는 술법을 시행해서 다행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후환이 무궁무진 했을 거예요.”

남궁완의 빛나는 눈망울이 소녀처럼 곱고 아름다웠다.

“나 역시 한시름 놓았소. 대진에 다녀온 것이 허사가 아니어서 말이오. 나중에 내가 준 배영단을 복용하면 당신이 후기에 이르는 것도 가능성이 있소.”

“배영단은 정말 신묘해요. 원영 후기의 고비를 돌파하는데 그리 효과가 좋다니요.”

남궁완이 눈을 깜빡이며 반신반의했다.

“이 요단을 위해 대진의 원영 중기 수사마저 몇 명이나 죽어나갔다면 그 효과가 어떨 것 같소?”

“부군께서 그리 말씀하니 중기의 경지를 견고하게 다진 후 배영단을 복용해야겠어요.”

그녀가 고개를 기울이며 살포시 웃자 무척 매혹적이었다. 한립은 남궁완의 아름다운 얼굴을 보며 지난 며칠간 뜨거웠던 날이 떠올라 가슴이 요동쳤다.

그가 무언가를 말하려다가 표정이 달라져 먼 곳을 바라보자 남궁완도 같은 곳을 쳐다보았다.

잠시 후, 하얀 빛줄기가 금제를 뚫고 멀리서 날아들었다. 한립은 그가 누구인지 바로 알아보고는 조금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하얀 빛줄기는 바로 모패령이었다.

“공자님을 뵙습니다. 언니도 함께 계셨군요.”

“패령이가 여기까지 급히 찾아 온 것을 보면 려 사형께 곤란한 일이 있어서겠지?”

남궁완이 점잖고 온화하게 물었다.

“그것이 손님들 중 두 무리가 아직 돌아가지 않고 남아 있는데 공자님과 아는 사이라며 뵙기를 청합니다. 려 사형께서 제게 그들과 만나볼 의향이 있는지 공자께 여쭈라 하셔서요. 원치 않으시면 바로 돌려보내시겠다고 하셨습니다.”

“부군과 아는 사이라고? 설마 아리따운 여인들은 아니겠지?”

남궁완이 촉촉한 눈길로 한립을 힐끗 보며 장난스럽게 웃었다.

“언니의 말씀 대로예요. 두 무리를 대표해 모두 여수사들이 만남을 청했습니다.”

“오, 부군께서 이렇듯 풍류를 즐기며 사셨을 줄은 몰랐습니다.”

“풍류를 즐기다니? 크흠, 어찌 그런 농을 하시오. 패령, 손님들의 존함이 어찌 되더냐?”

남궁완이 한립을 향해 눈을 흘기자 한립은 헛기침을 하며 재빨리 물었다.

“한 무리는 귀령문의 연 씨 성을 지닌 여인과 귀령문 장로 두 분이고, 나머지는 어령종의 함운지라는 여수사와 합환종의 동훤아라는 분입니다.”

“그들이?”

한립은 멍하니 중얼거렸다. 곁에 서 있던 남궁완은 그저 눈썹을 끌어 올리며 가볍게 웃어 넘겼다.

“정말 부군과 아는 사이인 모양이네요. 가서 만나보고 오세요. 이대로 거절하는 것도 실례가 아니겠어요?”

“완이의 말대로 모두 수행이 낮던 시절부터 알던 이들이니 만나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소. 패령, 일단 사형에게 내 바로 가겠다고 전하거라. 손님들은 따로 만나 볼 것이니 일단 귀빈각으로 모시고.”

잠시 생각하던 한립이 고개를 끄덕이며 분부를 내렸다.

“예, 그럼 저는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모패령이 허리를 숙여 인사를 하고는 하얀 빛줄기로 변해 날아갔다. 한립은 그 자리에 서서 미간을 좁혔다.

“왜요? 패령이에게 무슨 불만이라도 있어요?”

남궁완이 한립의 표정을 보고 장난기 어린 질문을 했다.

“그게 아니라 이해가 가지 않아서 그러오. 당신이 어찌 그녀를 의자매로 들였는지 말이오. 내 뜻대로 제자로 삼아도 되었을 것을.”

“패령이랑 의자매를 맺은 게 어때서요? 난 부군과 수도의 길을 함께 하고 싶은 것이지 제자 같은 것은 들일 생각이 없어요. 또한 그녀의 신세가 이전의 나와 비슷하니 인연이라는 느낌도 들고요. 우리가 의자매가 되었으니 앞으로 그녀가 정말 당신의 시첩이 되던 아니면 공법을 전수해 제자로 삼던 누가 뭐라고 하겠어요.”

“더는 이야기 하지 않을 테니 모두 당신 뜻대로 하시오. 나는 일단 손님들을 보고 와야겠소.”

“그럼 빨리 다녀와요. 난 먼저 거처로 돌아가 있을게요.”

“……완이 당신이 익힌 차녀천월결이 그리 불가사의할 줄은 몰랐소. 수련을 할 때 놀랍게도 달의 음기를 이용해야 하고, 진법을 펼쳐 달의 음기를 모으는데 그 힘이 다른 수사들의 수련에 악영향을 끼친다니. 그리하여 우리가 각자의 거처에서 따로 생활하게 되었지 않소.”

“그때는 공법의 위력에 재해가 생길 줄은 생각도 못했어요.”

남궁완이 미안하다는 기색으로 말했다.

“안타깝기는 하지만 수련할 때만 떨어져 지내는 것이고 또 두 거처가 지척에 있으니 괜찮소. 나머지 시간에는 한 곳에 머물 수 있으니까! 그럼 나는 다녀오겠소.”

한립은 도리어 그녀를 위로하고 푸른 빛줄기로 변해 자모봉을 날아올랐다.

낙운종의 귀빈루는 열댓 개 정도 되었는데 모패령이 그 중 한 건물 옆에서 수시로 하늘 위를 날며 확인하고 있었다. 순간 하늘 끝에서 푸른빛이 번쩍이더니 푸른 빛줄기가 눈 깜짝할 사이에 누각 상공으로 떨어져 내렸다.

“공자님을 뵙습니다. 귀령문 수사들은 이곳에서 휴식 중이시고 다른 여인 두 분은 옆쪽 귀빈루에 따로 모셨습니다.”

한립이 나타나자 모패령이 다가서며 보고했다.

“알았으니 너는 이만 물러가거라.”

뒤쪽 누각을 바라본 한립이 멀지 않은 곳의 다른 누각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을 들은 모패령이 공손히 예를 올리고 하얀 빛줄기로 날아올랐다.

한립의 신형이 흐릿해지고 누각 입구에 나타나 의식으로 안을 훑은 뒤 안으로 들어섰다.

누각의 대청 안에는 두 사내와 여인이 앉아 담소를 나누고 있었는데 장작개비같이 바싹 마른 거한과 안색이 창백한 노인 그리고 스무 살 정도 되어 보이는 아리따운 여인이 있었다.

꽃처럼 화사한 외모의 여인은 바로 연여언이었다. 셋은 무슨 이야기 중이었는지 초조한 기색이 느껴졌다.

한립이 입구에서 나타나자 세 수사의 시선이 쏟아졌다. 그들은 한립의 얼굴을 확인하고는 다들 반갑게 몸을 일으켜 맞이했다.

“그리 예의 차리실 것 없습니다. 모두 앉아서 이야기 나누시지요.”

세 수사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한립이 괴이한 움직임으로 나타나 나무 의자에 앉았다. 연여언은 물론이고 사내들도 그의 움직임을 파악하지 못했다.

“그럼 말씀대로 따르겠습니다.”

창백한 인상의 노인은 가슴이 서늘해졌지만 바로 만면에 웃음을 띠고 답했다.

“연 선사, 못 본 사이 원영기에 이르렀습니다.”

한립이 여인을 살피며 빙긋 웃었다. 월국에서 만났을 때는 선후배의 칭호를 하였는데 이제 그녀가 어엿한 원영기 수사가 되어 나타난 것이다.

“얼마 전에야 겨우 수련의 고비를 넘겨 그렇게 되었습니다. 한 수사께서 천남 제일의 수사가 되신 것에 비하면 언급할 가치도 없지요! 이번에 제가 한 형을 뵙고자 한 것은, 긴히 부탁드릴 일이 있어서입니다.”

연여언 역시 찬찬히 그를 훑더니 복잡한 감정을 드러냈다. 한립은 그저 미소 지을 뿐 별다른 대답은 하지 않고 창백한 얼굴의 노인을 바라보았다.

“수사께서 종 장로시겠군요. 추마 골에 들어갔을 때 멀리서나마 뵌 적이 있습니다.”

“한 형께서 저를 다 기억해 주실 줄은 몰랐습니다. 영광입니다 그려.”

“귀령문은 지금 위기에 처해 있는 것으로 압니다. 그런데 귀령문의 고위직을 맡고 있는 세 분께서 월국에 계시지 않고 이곳에서 저를 만나고자 하심은 무슨 연유가 있기 때문입니까?”

한립이 단도직입적으로 묻자 귀령 문수사들은 서로 눈치를 살피며 머뭇거렸다. 그러자 한립이 미간을 좁히며 불쾌한 기색을 드러냈다.

“한 수사! 사실 이번에 저희가 귀 종에 찾아온 것은……. 도움을 청하기 위해서입니다. 귀령문이 이번 위기를 무사히 넘길 수 있게 나서주십시오. 수사의 도움이 없다면 저희 귀령문은 정말 사라져 버릴지도 모릅니다.”

“귀 문을 도와 달라고요?”

연여언이 주저하며 하는 말에 한립이 눈썹을 끌어올리며 반문했다. 끌어올린 입가에는 분명한 조소가 어려 있었다.

“저도 본 문이 한 형께 큰 죄를 지은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일은 모두 왕 문주 부자의 소행이었습니다. 왕 문주는 추마골에서 목숨을 잃은 지 오래고, 이제 더는 왕 씨 집안이 귀령문을 지휘하고 있지 않습니다.”

노란 장포의 거한이 다급히 해명했다.

“왕 씨가 지휘하고 있지 않다니요? 듣기로는 왕선이 아직도 귀 문에서 유유자적 생활하고 있다던데요.”

그 말에 노인과 연여언은 안색이 미묘하게 달라졌지만 거한은 여전히 미소를 유지하며 대답했다.

“그렇지 않습니다. 왕선 사질은 일 전에 큰 죄를 범해 이미 집법 장로직에서 쫓겨나 면벽 수행을 명받아 과오를 뉘우치고 있습니다. 백 년 내로는 다시 본 문의 일에 관여하지 못할 것입니다.”

“과오를 뉘우친다……. 수사는 처음 뵙는 분 같은데 성함이 어찌 되십니까? 어쩐지 연 선사와 닮은 듯 해 묻는 것입니다.”

한립은 의외라는 듯 연여언과 거한을 번갈아 보다 물었다.

“역시 눈썰미도 좋으십니다. 제가 바로 여언이의 당숙 됩니다.”

“오, 연 가에서 원영기 수사가 둘이나 나오다니. 응당 연 가에서 귀령문을 주관하게 되겠군요.”

한립은 턱을 쓰다듬으며 의미심장하게 중얼거렸다.

“전부 종 사형께서 양보해 주신 덕이지요.”

“왕 사형이나 연 씨 집안이나 본문에 피해만 가지 않는다면 누가 맡아서 관리를 하든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그런가요?”

한립은 대충 대답하고는 두 눈을 가늘게 뜨고 침묵했다. 이에 귀령문 수사들은 재촉하지 않고 조용히 기다렸는데 연여언은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눈빛이 흔들렸고 거한과 노인은 그야말로 좌불안석이었다.

눈앞의 천남 제일의 수사는 귀령문과 큰 원한이 있는 사이였다. 축하 한다는 명목으로 찾아왔으니 당장 그들을 어쩌지는 않겠지만 따로 만나기를 청하면서 조금도 걱정되지 않았다면 거짓일 것이다.

귀령문이 다른 세력의 연합에 당장 숨이 넘어갈 판이 아니었다면 그들도 여기까지 뻔뻔하게 찾아올 생각은 못했을 것이다.

“예전의 은원을 따지지 않는다 해도 내가 어째서 귀령문을 도와야 합니까?”

드디어 입을 연 한립은 처음보다 한결 냉랭한 어투로 말했다. 그러나 그 말에 거한과 노인은 도리어 기뻐했다. 단번에 거절하지 않았으니 희망이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한 형께서 본 문을 위해 나서주신다면 저희 귀령문은 월국을 다른 종문들에게 넘기고 떠나겠습니다. 그저 명맥이라도 유지하고 싶습니다.

그 대가로 저희가 특별히 몇 가지 물건을 들고 왔으니 너무 약소하다 탓하지 마십시오.”

거한은 깊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는 한 손으로 허리춤을 스쳐 세 가지 물건을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한립이 무덤덤한 시선으로 그것들을 살폈다.

피처럼 붉은 팔찌와 도자기 병 그리고 은은한 녹색의 목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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