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신공-688화 (445/2,000)

# 688

688화. 금강결과 제류장

“그런데 이 요족의 질풍구변(疾風九變)이 아주 흥미롭군. 그런데 이걸 노부에게 보이는 이유는 수사도 관심이 있어서인가?”

사내아이가 서책을 들어다보며 웃는 듯 마는 듯한 얼굴로 한립을 바라보았다. 그가 들고 있는 것은 과거 한립이 소취인과 그 할아버지에게서 얻은 요족 공법이었다.

그 안에는 무명의 기운을 숨기는 구결과 요족 문자로 쓰인 공법이 적혀 있었는데 한립이 관련 문자를 익히고 나서야 공법의 이름과 조류 형태의 요족 수사를 위한 공법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태생적으로 날개와 요족의 강인한 신체를 지니지 않는 이상 수련하기 어려운 공법이었다.

“질풍구변의 위력이 남다르긴 하지요! 제가 풍뢰시를 지니고 있지만 활용할 수 있는 법결을 몰라서 말입니다. 이 공법은 신법 위주니 제가 익힐 만한 것이 있을 것 같은데 혹시 천란 수사께서 공법을 조금만 수정해 제가 수련할 수 있게 만들어 주시겠습니까?  도와주시면 금궐옥서를 먼저 살피게 해드리겠습니다. 어차피 너무 현묘한 내용이라 지금은 깨달음을 얻기 어려우니까요.”

한립이 차분히 원하는 바를 말했다.

“이 공법은 귀한 신법 구결로 풍뢰시를 지닌 자네가 탐낼 만하네. 하지만 이런 신통을 펼치기 위해서는 반드시 요족과 같은 강력한 육체가 있어야 하네. 자네가 육체를 단련하는 체련 법결을 익혀 보통 인간 수사들보다 강인한 육체를 지닌 것은 알지만 그 정도로는 부족하네.”

“조금 부족한 것이라면 극복하겠습니다. 예전에 불문 공법인 명왕결을 얻어 1성씩 수련을 해나갈 때마다 몸이 훨씬 강해지는 것을 느꼈으니까요. 이미 2성을 수련해냈으니 3성까지만 익히면 질풍구변을 익히기 위한 최소한의 조건은 갖출 수 있을 것입니다.”

한립이 미리 생각한 바를 이야기했다.

“명왕결이라는 불문 공법?”

“왜 그러십니까?”

“그 공법이 총 몇 성까지 있지?”

“총 7성까지 있습니다.”

“이것이 우연이란 말인가……. 마침 나도 불문에서 유래한 체련 법결을 아는 것이 있는데 그것도 7성으로 이뤄져 있단 말이지.”

사내아이가 묘한 미소를 머금었다.

“내가 말한 불문 공법은 연기기 때 익히는 오행기초 공법보다 더 흔한 것으로 영계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것이네.”

“누구나 알고 있다는 것은…….”

한립은 어렴풋이 사내아이의 말을 이해하고는 깜짝 놀랐다.

“이 불문 공법은 영계에서 영근이 없는 범인들조차 수련할 수 있는 것이네. 범인들이 이 공법을 3성 이상 익히고 특수한 무기를 들면 저계 수사나 요수와도 대등하게 싸울 수 있지. 만일 5성 이상 익혀내면……. 저계 수사나 요수들은 감히 건드릴 수 없는 존재가 될 걸세.”

“지금 농을 하시는 겁니까?  어찌 범인이 수도자와 필적할 수 있단 말입니까?”

“영계의 일은 수사가 가보면 알 것이니 내가 말해 무엇 하겠나. 허나 조금만 알려주자면 영계에서는 범인들도 중요한 세력을 이루고 있다네. 아주 오래전 범인 중 머리가 비상한 자들이 모여 기초 공법의 힘을 빌리지 않고 외부의 영기를 이용할 수 있는 체련이라는 것을 찾아냈지.

심지어 범인들 중 걸출한 자가 고계수사나 강력한 요수를 격살하는 일도 있었다네! 내가 말한 것은 금강결(金剛決)이란 공법으로 범인들이 가장 많이 익히는 체련 공법 중 하나일세.”

“그렇다고 해도 수도자와 비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대부분의 법술을 펼칠 수도 법기를 다룰 수도 없을 텐데요.”

“그야 그렇지. 범인들은 어찌해도 범인일 뿐이니 아무리 수련을 해도 영근이 없으니 수도의 길을 걸을 수도 없고, 수명도 겨우 백 년 남짓이 아닌가! 요행히 수명을 연장하는 보물이나 영약을 얻었다고 해도 고작 백 년 넘게 사는 것이 다겠지.

허나 영계에서는 영근이라는 것이 후천적으로 만들어질 수도 있다고 믿기 때문에 체련 공법을 익힌 자가 나중에 영근을 얻으면 그 잠재력이 무한하다고 하네. 인족 삼황(三皇) 중 하나인 천원 성황도 본래 범인 중 유명한 인물로 나중에 영근이 생겨 수도자가 된 경우일세.”

사내아이의 말에 한립이 턱을 쓰다듬으며 말이 없었다.

“뭐 지금은 이런 것에 대해 고민할 것 없네. 영계의 범인들이 이런 조화를 부릴 수 있는 것도 그곳의 영기가 하계보다 훨씬 밀집되어 있기 때문이니까. 이곳은 예전 마계의 침입으로 다른 하계들보다 영기가 부족하니 범인들이 이런 공법을 얻어도 천지 영기를 이용하기는 어려울 것이야.”

“다른 하계들이요?  그 말씀은 인계가 이곳 하나가 아니라는 뜻입니까?”

사내아이의 설명에 한립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이곳처럼 우리 영계에 속한 하계만 해도 8백 개는 될 걸세. 보통 이런 하계에서 수련하던 인족이나 요족 수사들이 스스로 영계로 승천을 하곤 하지. 물론 이곳 인계는 오랜 세월 동안 영계로 진입한 이가 몇 되지는 않지만 고마의 침입을 받지 않은 하계들은 많이들 성공했네.

내가 특별히 이곳 인계를 노려 분신으로 강림한 것도 첫째는 영기가 희박해 대겁(大劫)을 피하기 쉬워서 이고, 둘째는 아무도 내가 이런 곳에 숨어있을 거라 예상하지 못하기 때문이지.”

그 말에 한립은 당혹스러웠다.

이전에는 인계가 오직 이곳 하나뿐이라 영계가 큰 힘을 들여 고마들을 격퇴하는 것을 도왔다 여겼는데 천란 수사의 말을 들어보니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이 분명했다.

“어차피 지금 영계의 일을 많이 알아둬야 좋을 것이 없으니 일단 금강결 이야기나 하세. 비록 영근이 없는 범인들이나 익히는 것이지만 수련하기 어렵다는 것은 영계에서도 소문이 자자하네. 5성이 아니라 3성까지도 익히기도 벅차 대다수의 범인들이 그저 1성을 익혀 건강한 육체를 지니는 것으로 그치네.

2성을 수련하기 위해서는 겪어야 하는 환골탈태의 고통이 일반인은 견디기 어려우니까 말이야. 그래도 일정 경지에 이르면 요수에 뒤지지 않는 강한 육체를 얻게 되지. 수사의 명왕결은 비록 처음 들어보는 공법이지만 이 공법과 관련이 있을 지도 모르네. 불문의 체련 공법은 몇 개 되지 않으니까 말이네.”

“그럴지도 모릅니다. 명왕결도 수련하기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니까요.”

“옥간을 하나 내주면 금강결 구결을 복제해 주겠네. 지니고 있는 것과 같다면 상관없겠지만 다르다면 둘 중 하나를 선택해 익히면 되겠지.”

“그럼 천란 수사가 수고 좀 해주십시오.”

이렇게 좋은 일을 마다할 리 없었기에 한립은 재빨리 손바닥을 뒤집어 옥간을 꺼냈다. 옥간을 받은 사내아이는 천천히 눈을 감더니 구결을 복제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한립의 얼굴에서 미소가 가시고 구리 조각 하나와 어떤 공법 구결이 머릿속을 스쳤다. 바로 오래 전에 얻은 범성진편(梵聖眞片)과 만호자가 알려준 탁천마공의 법결이었다.

요족을 위한 공법인 범성진편에서부터 명왕결까지 전부 고마계에서 유래한 마공이라는 결론을 내린지 오래였다.

하나는 처음 부분으로 몸의 기초를 단련하는 내용이었고, 다른 하나는 마지막 부분으로 신통을 부릴 수 있는 법결이었다. 중간 부분이 빠져 있었는데 만호자가 탁천마공의 구결을 알려준 순간 한립은 그것이 빠져있던 중간 부분의 공법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어째서 탁천마공이라는 이름으로 마도의 최상급 마공이 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말이다. 이렇게 그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하나의 완전한 공법 구결을 모으게 되었다.

게다가 질풍구변의 법결을 익히려면 반드시 명왕결을 익혀야 하니 알 수 없는 힘에 의해 그가 범성진편의 법결을 수련하도록 이끌고 있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일다경이 지나자 솥 위의 사내아이가 눈을 번쩍 뜨며 한 손을 뻗어 노란 빛을 날렸다. 한립이 소매를 펄럭여 구결을 복제한 옥간을 끌어당겼다.

“일단 구결을 확인하고 이야기하세.”

사내아이의 말에 한립이 고개를 끄덕이고 의식을 불어 넣어 내용을 확인했다. 잠시 후 한립이 탄식하며 의식을 회수했다.

“명왕결과 같은 공법인가?”

“예, 영기를 체내에 주입하는 수법을 제외하면 나머지는 거의 똑같습니다.”

“그럼 되었네. 질풍구변을 익힐 예정이라면 먼저 명왕결 3성을 익히면 되겠지. 그 사이 내 질풍구변을 손 봐 자네가 익히기 적합하게 고쳐보겠네! 어쨌든 풍뢰시는 법보이니 제 살처럼 다루기는 무리가 있지. 그때가 되면 약속한 금궐옥서는 잊지 말고 내줘야 하네.”

“약조를 어기지는 않을 것이니 안심하십시오. 그런데 제류장(帝流漿)은 복용할 마음이 없으십니까?”

가볍게 미소 짓던 한립이 뒤쪽의 세 개의 법기를 가리켰다.

“제류장은 요수의 지능을 계발해주기 때문에 요족이 화형을 할 때 아주 중요한 물건이네. 인간 수사들도 복용하면 전신의 경맥을 넓혀줘 몸에 퍽 좋고 말이야. 그러나 한 번에 너무 많은 양을 복용할 수 없고 보관할 수 있는 기간도 한 달을 넘기지 못하니 내게는 소용이 없네. 한 수사는 명왕결을 익힐 생각이니 도움이 되겠지.”

사내아이는 조롱박 등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그렇다면 염치 불구하고 제가 챙기겠습니다.”

한립은 빙그레 웃으며 소매를 펄럭여 사발과 옥병을 챙겼다. 그리고 잠시 후 그가 수결을 맺으며 눈을 빛내자 밀실의 한쪽 벽에서 또 한 명의 한립이 괴이하게 나타났다.

그는 밀실에 나타나자마자 곧바로 바닥에 놓여 있는 조롱박을 끌어당기고는 다시 은빛을 번뜩이며 사라졌다. 그 모습에 사내아이의 얼굴에 놀란 기색이 스쳤으나 딱히 무어라 하지 않고 한립에게 인사를 하더니 솥 안으로 사라졌다.

한립이 손에 든 옥간을 보다가 두 손을 하나로 모으자 옥간이 어딘가로 날아갔다. 이어 그는 평온한 얼굴로 가부좌를 한 채 눈을 감았다.

같은 시각, 은색 빛이 한립의 거처에서 튀어 나가 몇 번 번뜩이더니 낙운종 내부의 금지로 들어갔다 나왔다.

밀실에 들어간 한립은 쉽사리 나오지 않았는데 가끔씩 은색 빛줄기가 튀어나와 어딘가로 사라졌다. 짧게는 며칠, 길게는 한 달 정도면 은색 빛줄기는 다시 자모봉으로 돌아왔다.

그렇게 어느덧 2년이라는 시간이 지나갔다.

* * *

천남 수도계의 거대 수도 종문들은 낙운종에서 보낸 초대장을 받고 다시 한 번 들썩였다.

이번에는 놀랍게도 천남 제일의 수사인 낙운종 대장로가 이름도 알려지지 않는 원영기 여수사를 정식 반려로 맞는 성대한 의식에 원영기 장로들을 초청한다는 내용이었다.

이에 사정을 모르고 있던 원영기 장로들은 깜짝 놀랐다.

한립은 지금 천남에서 유일무이한 명성을 지닌 대수사였기에 아무도 초청을 거절하지 못했고 폐관 중인 삼대수사들도 직접 나서지는 못해도 문하의 제자들을 시켜 진귀한 선물을 보냈다.

의식이 거행되는 며칠간 운몽산맥은 오색찬란한 아름다운 기운으로 뒤덮였다. 산맥 곳곳에 다채로운 빛을 내뿜는 누각들이 느닷없이 나타나기도 하고, 금제의 영향으로 산맥의 꽃과 나무들은 동시에 꽃망울을 터트렸다.

푸른 기운을 뿜어낸 운몽산은 마치 선경과 같았다.

운몽산의 세 종문들은 한립의 환심을 사기 위해 그가 대수사가 되었을 때보다도 훨씬 더 성대하고 웅장하게 의식을 준비했다. 며칠간 운몽산에는 초대를 받은 수사들 외에도 중소 세력의 수사들과 이름 모를 산수들이 몰려들었다.

그러다 보니 고계 수사들을 위주로 5, 6천명에 달하는 수사들이 모여 천남에서 가장 큰 규모의 의식이 되었다. 한립이 천남 제일의 수사라는 명성을 얻게 된 이후부터 상황이 달라졌다.

홀로 대수사 둘을 압도하는 실력이니 어느 종문이나 가슴이 서늘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이전부터 낙운종과 교류가 있든 없든 기회가 되면 분분히 교분을 쌓으려 들었다.

한립은 남궁완을 데리고 의식에 나타나 잠시 머물며 감사의 인사를 한 뒤 그 자리에서 합환주를 나눠 마시고는 홀연히 떠났다.

그 후 모든 일은 전부 려락이 주관하게 되었다. 려 장로는 경험이 많은 수사답게 주인공이 빠져도 남은 의식을 아주 화려하고 떠들썩하게 치러냈다.

이렇게 사나흘이 지나서야 의식은 막을 내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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