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87
687화. 액체
휘영청 밝은 보름달이 우윳빛을 발산하며 기이한 약 향을 뿜어내고 있었다.
한립은 그것을 확인하더니 날개를 펄럭여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그리고 진법 밖의 원래 자리로 돌아와 땅 위에 놓아둔 세 개의 법기를 가리켰다.
그러자 조롱박, 옥병, 사발이 떠오르더니 그의 머리 위를 돌기 시작했고 그때 보름달이 기울어지며 은색의 기이한 달빛이 천란수를 비추었다.
이어 약 향은 더욱 진해졌고 보름달 표면에 물빛이 어리며 무언가가 떨어져 내렸다. 한립은 주저하지 않고 세 법기를 가지고 푸른 빛줄기로 변해 솟아올랐다.
보름달이 주먹 크기의 우윳빛 액체 한 방울을 떨구었는데 액체가 하얀빛으로 산산이 흩어져 은색 달빛을 따라 천란수 쪽으로 서서히 다가갔다.
신기한 것은 하얀빛들이 달빛의 범위 속에서만 존재할 뿐 그것을 벗어나서는 즉시 무(無)로 돌아간다는 것이었다. 하얀빛들은 요수의 몸에 닿자마자 그 안으로 흡수되어 사라졌다.
뇌겁을 치르느라 초췌해졌던 천란수가 하얀빛을 흡수하자 정신을 번쩍 차렸고 입에서 요기를 분출해 떨어져 내리는 모든 빛을 흡수하려 들었다. 이제 천란수의 몸집은 이전보다 훨씬 커져 있었다.
이때 푸른 빛줄기가 번뜩이며 먹구름 속의 보름달로 향했는데 백여 장을 앞두고 갑자기 주변에 은색 벼락이 응결하더니 미친 듯이 그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마치 무수히 많은 은색 뱀들이 지척에서 그를 물어뜯으려 달려드는 것처럼 엄청난 기세였다. 산전수전을 다 겪은 한립도 깜짝 놀랄 만한 상황이었지만 다행히 천란수의 전음을 통해 미리 대비하고 있었다.
그는 바로 손바닥을 뒤집어 무언가를 꺼내들었는데 바로 은빛 찬란한 령보 팔령척이었다.
무수히 많은 은색 벼락들이 몸에 닿기도 전에 한립이 나무 자를 휘두르자 손바닥 크기의 은색 연꽃이 곳곳에 피어나 그를 물샐틈없이 보호했다.
꽈광! 꽈과광!
은색 벼락이 연꽃에 내리꽂히며 폭발했고 가느다란 뇌전들이 튀어 나갔다. 연꽃은 번번이 흩어지면서도 바로 대량의 꽃을 피워내 벼락을 막아냈다.
푸른 빛줄기가 번뜩이며 순식간에 먹구름으로 다가갔고 보름달과도 겨우 열댓 장 거리에 이르렀다.
두 번째 액체가 보름달에서 흘러내린 순간 그는 무슨 금제에라도 걸린 것처럼 움직임을 멈추었고 주변에서 수없이 많은 벼락이 들이닥쳤다.
조금 전보다 더욱 엄청난 기세였다.
그러나 은색 연꽃에 둘러싸인 한립은 은색 벼락은 개의치 않았다. 그는 곧바로 주변을 맴도는 세 법기를 가리켰고 세 법기들은 바로 빛줄기로 변해 보름달을 향해 쏘아져 나갔다.
법기들이 떠난 순간 많은 벼락들이 그에게 내리꽂혔다.
더욱 흉흉해진 기세의 벼락 공격에 한립 주변이 폭죽처럼 터져나갔고 팔령척의 연꽃들도 겨우 버티고 있었다. 연꽃이 보호하는 구역이 점점 좁아지며 벼락의 공세가 그를 향해 좁혀 들었다.
하지만 그는 오직 세 법기를 조종해 보름달에 다가가게 하는 데만 집중했다.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법기들이 보름달과 가까워질수록 천근만근처럼 무거워져 달팽이같이 기어가듯 움직이고 있었다.
그 순간 두 번째 액체마저 떨군 보름달은 서서히 신형이 흐릿해지며 사라지고 있었다. 주위의 먹구름이 거세게 요동치며 한립도 놀랄 만 한 엄청난 영기의 압력을 형성하고 있었다.
곧 9번째 벼락의 파동이 시작될 것이 분명했다.
한립은 눈을 번뜩이며 의식을 모았고 보름달을 향해 실신자(失神刺)를 방출했다. 무형의 거대한 힘이 보름달로 다가가자 물처럼 허공에 파문이 일었고 세 법기의 속도가 한층 빨라졌다.
그것을 확인한 한립은 머뭇거리지 않고 입에서 정혈을 뿜어내 열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핏방울이 핏빛 안개로 변해 번뜩이며 사라졌다.
곧 괴이한 일이 일어났다.
본래 여러 색을 띄던 법기들이 핏빛 안개가 사라진 순간 핏빛으로 물들었고 순식간에 허공의 보름달에 다다른 것이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보름달이 번뜩이며 모습을 감추었고 하늘에는 세 개의 법기들만 덩그러니 남았다. 세 법기들이 보름달 속에서 무언가를 담아냈는지 혹은 담아 내지 못했는지는 한립조차 알 수 없었다.
꽈광!
큰 굉음을 끝으로 그를 사정없이 내리치던 은색 벼락들이 전부 먹구름에 빨려들어 사라졌다. 그러나 한립은 더욱 신중하게 상황을 살폈다.
그가 먼 곳을 향해 손짓하자 조롱박 등의 법기들이 날아 돌아왔다. 푸른 기운으로 법기를 휘감은 그는 어느새 진법 옆으로 돌아가 있었다.
한립은 세 개의 법기를 회수하고 그 중 조롱박의 안을 힐끔 살피며 손바닥을 뒤집었다. 그러자 나머지 두 법기들이 전부 저물대로 들어갔다.
천란수는 한립이 무슨 일을 하든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는 오직 하늘 높은 곳만을 주시했고 벼락들이 잠시 흩어져 보이지 않았지만 먹구름에서 전해지는 강력한 파동에 긴장을 늦출 수 없었다.
요수는 이제 은색 요기를 다 써버렸는지 맨몸으로 진법 속에 서 있었는데 회백색 요기로는 다음 벼락 공격을 막아낼 수 없다고 여기는 듯했다.
콰앙!
한립이 미소 지으며 상대에게 무어라 하려는데 하늘에서 둔중한 천둥소리가 울려 퍼지며 거대한 은빛 벼락이 새까만 구름 속에서 나타나 은색 교룡으로 변해 떨어져 내렸다.
은색 교룡은 완전히 떨어져 내리기도 전에 몸에서 은색 뇌전을 방출해 하늘을 밝혔다. 천란수가 그것을 보고 안색이 급변해 입에서 어스름한 회색의 구슬을 뿜어냈다.
바로 요수의 생명과도 같은 요단이었다.
그러나 은색 교룡이 천란수를 덮치기 전 진법 밖에서 한립이 홀연히 나타나 은색 방패를 날려 천란수를 보호했다. 이에 천란수가 겨우 한시름을 놓았다.
콰과광!
굉음이 울리며 은색 교룡이 은색 장막에 내리꽂혀 폭발했다. 비록 은색 장막은 형체를 유지했지만 은색 교룡은 사라지지 않고 표면을 타고 계속 공격했다. 거대한 천둥소리가 연달아 울릴 때마다 은색 교룡의 몸집이 작아졌고, 연달아 열댓 번 공격을 한 후에는 크기가 원래의 절반으로 줄어들었다.
“됐으니 수사의 보물을 그만 거두게. 이제 스스로 이겨내겠네.”
천란수가 은색 장막 안에서 큰소리로 외쳤다. 이에 한립은 오는 길에 들었던 천란수의 말을 떠올리곤 즉시 진법 속으로 손을 뻗어 은색 장막을 치웠다.
요족이 화형뇌겁을 할 때는 다른 수사가 호법을 설 수는 있지만 절반은 스스로 그 위력을 받아내야 한다고 했다. 만약 그마저도 하지 않는다면 다음으로 넘어가지 않을 뿐만 아니라 뇌격은 멈추지 않고 계속될 것이다.
은색 장막이 사라지자 곧바로 은색 교룡이 천란수에게 달려들었지만 다행히 회백색 요단이 번뜩이며 이를 막아섰다.
요단은 은색 교룡이 아무리 방향을 틀어 달려들어도 한 발 앞에 나타나 그 앞을 막아섰고 그럴 때마다 교룡의 몸집이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한립은 턱을 쓰다듬으며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이 정도라면 이후 뇌격도 문제없겠군. 하긴 8급 요수에게나 무서운 뇌격이지 내게는 아무것도 아니니까 말이야. 이제 중요한 건 나머지 절반을 천란수가 스스로 버틸 수 있느냐 하는 것인데.”
그의 예상대로 마지막 두 번의 파동은 은색 방패가 대부분 위력을 막아냈고, 나머지는 천란수가 간신히 막아냈다. 마지막 벼락이 멎자 하늘을 가득 메웠던 먹구름이 기이하게 흩어지며 별안간 햇빛이 쏟아졌다.
진법 속에 떠있던 천란수는 회백색 요기로 층층이 몸을 감아 누에고치처럼 꿈틀거렸다.
한립은 무표정하게 그것을 쳐다보았다.
화형뇌겁을 치렀으니 이제 새롭게 인간의 모습을 만들어가는 중일 것이다. 그것은 스스로 통제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태어나는 것처럼 저절로 일어나는 것이었다. 보통 여우 요수 등은 화형을 하면 잘생긴 사내나 아름다운 여인으로 바뀌고, 본체가 추레한 요수들은 인간 형상을 해도 그 모습이 추레해진다.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한립이 문득 어딘가로 고개를 돌리니 변이 요수였던 거대 구렁이의 잔해가 서금충에 의해 깨끗이 뜯어 먹혀 뼛조각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한립이 즉시 길게 휘파람을 불자 서금충 떼가 날아와 그의 영수대 속으로 들어갔다. 이후 한립은 천란수의 화형뇌겁이 끝나기를 기다리며 가부좌를 하고 눈을 감았다.
그렇게 꼬박 하루가 지나갔다.
빠직!
거대한 누에고치가 뜯어지는 소리가 들리며 하얀 살결의 부드러운 팔이 튀어 나왔다.
“드디어 끝났군! 한 수사, 정말 수고 많았네.”
익숙한 목소리가 들리자 한립이 미소 지으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 * *
며칠 후, 한립은 조용히 운몽산 자모봉으로 돌아왔다.
그는 지금 밀실에서 조롱박 등 세 개의 법기를 꺼내놓고 금색 뿔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앞에는 한 장 크기의 푸른 솥이 떠 있었는데 그 위에는 뽀얀 피부에 붉은 입술을 지닌 사내아이가 서책을 보며 고개를 젓고 있었다.
사내아이는 화형뇌겁을 마친 천란수로 환영으로 나타났을 때의 모습과 퍽 닮아 있었다. 생각해보니 영수의 본체는 영계에서 이미 화형을 했을 테니 대충 어떤 모습이 될지 알고 있었을 것이다.
한립은 손끝으로 금색 뿔을 만지며 입을 열었다.
“실험을 해보았는데 거의 모든 형태의 영력을 흡수할 수 있고 다시 방출할 수도 있었습니다. 단점은 흡수하는 양에 한계가 있다는 점과 흡입 속도가 느리다는 것 정도고요.”
“오, 변이 영수의 재료 답구만. 영력을 흡수하는 재료는 영계 수사들도 서로 싸워서라도 얻고자 하는 것일세. 유명한 방어구 령보들은 대부분 이런 재료를 포함하고 있지.”
사내아이가 요수 가죽으로 만든 서책을 옆에 두고 한립을 향해 환하게 웃어 보였다.
“그럼 갑옷으로 제련할 수 있습니까?”
“총명한지고! 만일 그것을 수사가 지닌 화령사와 합친다면 보기 드문 위력의 갑옷을 만들어 낼 수 있을 걸세. 령보까지는 아니더라도 그에 못지않을 정도는 되겠지. 허나 나라면 그렇게 하진 않을 걸세.”
“어째서입니까? 마침 갑옷 종류의 보물이 필요하던 참인데요.”
“수사가 인계에서 평생 늙어 죽을 작정이라면 안전이 제일이겠지만. 공간접점을 지나 영계로 승천할 요량이라면……. 다른 보물을 만드는 것이 나을 걸세!”
“다른 보물이라면?”
“당연히 화계주(化界珠)네! 그것만 있으면 공간접점을 지나는 데 큰 도움이 될 테니까.”
의아한 얼굴의 한립에게 사내아이가 주저하지 않고 말했다.
“화계주? 성조의 분신이 인계로 강림할 때 화계석(化界石)이란 것을 사용했다 들었습니다. 그것이 관련이 있는 것입니까 아니면 아예 같은 것을 칭하는 것입니까?”
“그 둘은 확실히 관련이 있는 것이 맞네! 화계석은 영계 특유의 소모성 재료이고, 화계주는 제련을 통해 만들어낸 보물이지. 기능은 비슷하지만 그 위력이 천양지차인데 화계주의 위력이 화계석의 백분의 일 정도라고 하면 될까?”
“백분의 일이요?”
“그렇다고 화계주의 위력을 의심할 것은 없네. 화계석은 역성반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파계삼보(破界三寶) 중 하나로 그 같은 이보는 영계의 요왕들도 많이 지니지 못하는 것일세.
화계주는 비록 그 둘 보다는 못해도 공간 금제를 깨는데 유명한 보물이고 제련하기 위해서는 영기를 흡수하는 재료가 필요해서 희소한 편이지. 내가 영계에 있을 때 호기심에 공간접점에 들어간 일이 있었는데 그 안의 공간 폭풍과 경계 간 압력을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서늘해지네!
파멸법목을 극성으로 익힌다 해도 그곳을 통과할 가능성은 미약하다는 뜻이야. 그렇지 않고서야 하계에서 영계로 숨어드는 수사들이 어디 한 둘이겠는가. 화계주가 없다면 공간접점을 지나보겠다는 생각은 버리는 것이 나을 것이네. 본래 수사가 화신기에 이르면 알려주려 했으나 이런 재료를 벌써 얻었으니 미리 이야기하는 것일세.”
“말씀대로라면 화계주를 제련하는 것은 좋겠습니다.”
가만히 듣고 있던 한립이 코를 긁적이며 쓴웃음을 지었다.
“파멸법목을 지니고 있지 않았다면 이런 이야기도 꺼내지 않았을 걸세. 그 두 가지는 갖추고 있어야 공간접점에서 살아나갈 희망이라도 품을 수 있겠지. 한수를 준 정을 생각해 파계주의 수련법을 알려주겠네.”
“은원이 분명하십니다. 그런데 지난번부터 묻고 싶은 것이 있었는데 일전에 8급 거북 요수가 겁을 치르는 것을 보았는데 천란 수사와는 완전히 달랐습니다. 벼락의 위력이 거의 절반도 되지 않았지요.”
“그게 뭐 이상한 일이라고! 종족이 다르면 화형뇌겁도 당연히 다른 것이지. 대단한 내력을 지닌 천지 영수일수록 치러내야 할 겁도 강해져서 전설 속의 진룡 같은 영수들은 화형뇌겁만 해도 13번의 뇌격 파동을 견뎌야 하네. 나는 11번에 그쳤으니 그만하면 나쁘지 않은 편일세.”
숨길 일도 아니라는 듯 사내아이가 솔직히 말했다.
“그런 것이었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