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85
685화. 화형뇌겁
푸른 실 사이로 암녹색 원영이 다시 나타났는데 목과 사지가 푸른 실에 묶여 움직이지 못했다. 그리고 그때 열댓 개의 은색 바늘이 방향을 틀어 원영에게 날아갔다.
푸푸푸푸푹!
바늘은 원영의 몸 곳곳에 깊숙히 박혀 들어갔고 그제야 원영은 몸을 떨며 전신의 법력을 통제하지 못했다. 두 번째 원영의 작은 얼굴에 절망스런 기색이 내비쳤다.
“네 얕은 수를 내가 모르겠느냐? 어차피 죽이려는 것이 아니라 다시 동화시키려는 것뿐이니 그리 저항할 것 없다.”
“이것이 나를 죽이는 것과 뭐가 다르지. 자의식이 없는 내가 나란 말이더냐?”
한립의 말에 두 번째 원영은 원한에 사무친 듯 악을 쓰며 소리를 질러댔다.
“그 말도 맞지만 너는 본래 내 두 번째 원영이니 자의식이 있어서는 안 된다. 내가 자신의 두 번째 원영을 동화시키겠다는데 무슨 할 말이 그리 많단 말이냐. 탓 하려거든 네 존재를 탓하거라.”
미간을 좁힌 한립은 냉랭히 답하고는 곧바로 수결을 맺어 푸른 실들이 빛을 머금자 두 번째 원영은 눈빛이 흐려지며 정신을 잃고 말았다.
그제야 안심한 한립은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갑자기 구경 중인 사내아이를 쳐다보았다. 그는 한립의 시선을 느끼고 얌전히 신형을 흐트러트려 사라졌다.
고개를 끄덕인 한립이 허공의 솥뚜껑을 가리키자 허천정이 닫히며 그의 몸속으로 돌아갔다. 가볍게 숨을 내쉰 그가 가부좌를 하고 앉아 두 번째 원영을 향해 손짓했다.
강력한 힘으로 원영이 빨려 들어와 그의 앞에 둥실 떴을 때 한립은 의식으로 원영의 상태를 확인했다. 상대의 의식이 약해졌음을 확인하고서야 두 눈을 감고 자신의 정수리를 내리쳤다.
그러자 그의 머리끝에서 푸른빛이 반짝이며 수 촌 크기의 푸른 원영이 나타났다. 한립이 100년 넘게 갈고 닦아온 주 원영이었다. 원영은 푸른 솥을 밟고 서서 두 손으로 녹색 나무 자를 꼭 쥐고 있었고, 머리 위에는 하얀 구슬이 떠 있었다.
또한 미간 사이에 희미하게 검은 기운이 아른거렸고 주위로는 수십 개의 초소형 금빛 검들이 쉼 없이 선회했다.
주 원영이 두 번째 원영을 힐끗 보자, 발아래 작은 솥이 푸른빛을 내며 원영을 싣고 천천히 날아갔다. 암녹색 원영이 한 척 거리까지 가까워지자 한립의 주 원영이 작은 발로 솥을 건드렸다.
웅!
솥이 진동하자 두 번째 원영을 구속하던 푸른 실들이 순식간에 사라져 암녹색 원영만 남게 되었다.
그리고 허천정은 점점 몸집을 키워갔다.
주 원영이 태연히 그 위에 앉아 들고 있던 녹색 자를 허공에 툭 던져 놓고 수결을 맺으며 주술을 외기 시작하자 미간 사이의 검은 기운이 응결되어 뜻밖에도 새까만 제 삼의 눈을 만들어냈다.
기이한 빛을 내는 새까만 눈은 오직 두 번째 원영만 응시했다. 그리고 그때 주술 소리가 멎었고 제 삼의 눈이 번뜩이며 검은 기운을 뿜어냈다.
암녹색 원영이 몸을 사시나무 떨듯하며 눈을 부릅떴지만 이미 초점을 잃은 눈빛은 이지를 상실한 후였다. 동시에 한립의 주 원영도 두 눈을 부릅떴고 눈동자에서 두 줄기의 빛기둥을 두 번째 원영의 눈 속으로 쏘아 보냈다.
두 번째 원영은 사지에 힘이 빠져 가끔 경련을 일으켰고 얼굴은 고통스럽게 일그러졌으나 비명조차 지르지 못했다.
* * *
보름 후, 밀실 석문이 열리며 한립이 걸어 나왔다. 그러자 문밖에 은빛이 번뜩이며 그와 똑같이 생긴 인간형 꼭두각시가 괴이하게 나타났다.
한립은 꼭두각시를 보며 미소 짓고는 자신의 머리를 매만져 암녹색 원영을 불러내 인간형 꼭두각시 속으로 집어넣었다. 잠시 후, 꼭두각시의 두 눈에 충만한 생기가 느껴졌다.
“과연 내 예상대로였어. 대연보경에 적힌 비술을 이용해 두 번째 원영을 깃들게 했으니 이제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어도 꼭두각시를 마음대로 부릴 수 있겠군. 너무 오래 떠나 있는 것만 아니라면 두 번째 원영과 꼭두각시를 거처에 남겨놓고 다녀도 되겠구나!”
한립은 자신이 의도한대로 되자 손뼉을 치며 기뻐했다.
“묘책이기는 하나, 인간형 꼭두각시까지 지닌 두 번째 원영이 자의식을 찾을까 두렵지 않느냐?”
소매 속에서 사내아이의 유유자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수사께서 말씀하지 않으셔도 미리 생각해둔 바가 있습니다. 원영 후기가 되어야 사용할 수 있는 금제 비술을 두 번째 원영 뿐 아니라 인간형 꼭두각시에도 걸어 두었으니, 두 번째 원영의 의식이 주 원영의 의식보다 강해지지 않는 한 문제없을 겁니다. 언제든 꼭두각시를 꼼짝 못 하게 만들 수 있다는 뜻이지요.”
“그렇군. 노부가 괜한 걱정을 했구먼.”
“천란 성조의 호의에 감사할 뿐입니다. 그런데 화형뇌겁은 이곳 자모봉에서 치르는 것이 좋겠습니까 아니면 다른 곳을 수소문할까요?”
“화형뇌겁은 금제로도 숨길 수가 없으니 자모봉은 안 될 게야. 인적이 드문 곳을 찾는 것이 낫겠지.”
“알겠습니다. 완이를 만난 후에 바로 이동하겠습니다.”
한립도 이미 약조한 일을 계속 미룰 생각은 없었기에 단번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일단 낙운종으로 가 남궁완의 수련 상황을 확인하고는 다음 날 바로 소리 없이 운몽산을 떠나 서쪽으로 날아가기 시작했다.
닷새 후, 한립은 황량하기 그지없는 황야 위에 떠 있었다. 풀 한 포기 자라지 않는 이곳은 눈길이 닿는 곳마다 누런 흙 아니면 회백색 돌덩이들뿐이었다.
그는 먼저 주변 수만 리를 의식으로 훑었다. 수사는 물론이고 속세의 범인 그림자도 찾을 수 없었다.
“어떠십니까? 우리 계국과 화우국(花雨國) 국경 근처의 버려진 땅이라 2, 30만 리 내로는 범인들도 살지 않는 곳입니다.”
“화형뇌겁을 치르기에 괜찮은 곳이구나! 한 수사는 일단 내 본체를 방출해 내가 이곳에서 사흘간 마음의 준비를 할 시간을 주게.”
“알겠습니다.”
대답이 끝나자마자 한립은 솥을 향해 손가락을 튕겼다.
텅!
그러자 솥뚜껑이 날아가 푸른 기운이 새어나왔고 천란 성조의 분신이 소머리에 교룡의 몸을 한 반 척 크기의 요수로 나타났다. 요수는 허공을 빙글 돌며 몸집이 불어나더니 푸른빛을 내뿜으며 한 장 크기로 커졌다.
“그럼 한 수사는 노부를 위해 호법을 서주게.”
요수는 교룡의 몸을 말아 하얀 암석 위에 내려앉았다. 한립은 요수인 천란수의 행동을 지켜본 후 또 다른 암석으로 가 역시 가부좌를 하고 눈을 감았다.
인간과 요수가 각각 암석에 앉은 채 삼일 밤낮이 지나갔다.
넷째 날, 태양이 막 떠오를 무렵 둘은 동시에 눈을 떴다.
“노부가 이미 기운을 최상으로 끌어 올렸네. 적어도 이번 뇌겁을 무사히 치를 가능성이 6, 7성은 되겠지! 수사는 처음부터 나서지는 말고 노부가 버티지 못할 때쯤 도움을 주면 되네. 그저 마지막 세 번의 벼락만 막아 줘도 고맙겠네.”
“그렇군요. 기억해 두겠습니다. 뇌겁을 치르기 전에 일단 이것부터 한 방울 삼키시지요.”
한립은 손바닥을 뒤집어 현빙으로 만든 병을 꺼내 던져주었다.
“이것이 무엇인가?”
의아한 얼굴로 천란수가 병을 받더니 뚜껑을 열고 의식으로 내용물을 확인했다.
“한수(寒水)! 어떻게 이런 것을!”
“대진에 있을 때 우연히 얻은 것인데 성조께서 은과문을 전수해주셔서 한 방울 내어드리는 겁니다. 너무 약소하다 여기시지는 않겠지요?”
“허허, 약소하다니 그럴 리가 있나! 한수는 영계에서도 귀한 것으로 세상에 나타나면 순식간에 우리 요족들이 채가고는 하지.”
천란수는 한껏 들떠서 말하다가 고개를 돌려 한립을 바라보았다.
“한수를 준 은혜는 노부가 결코 잊지 않겠네.”
그의 말에 한립이 빙그레 웃으며 저물대를 스쳐 진법 법기와 원반 한 벌을 꺼냈다. 방원 백여 리를 뒤덮는 금제 진법을 펼치려는 것이었다.
일다경이 지나 그가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을 때는 주변에 안개가 가득해 사방이 흐릿했다.
“만일을 대비한 것입니다. 이제 저는 진법을 유지하며 성조를 위해 호법을 설 터이니 뇌겁을 잘 치르십시오.”
“화형뇌겁의 벼락이야말로 진정한 천뢰(天雷)라고 할 수 있네. 인계의 금제로는 막을 길이 없지. 그건 그렇고 뇌겁을 치르는 김에 노부가 수사에게도 선심을 좀 쓰겠네.”
천란수가 눈을 반짝였다.
“무슨 말씀입니까?”
“이것은 영계의 사람들이라면 전부 아는 이야기지만 하계에서는 아는 자가 거의 없지.”
천란수가 웃음을 흘리며 입술을 달싹여 전음을 보내기 시작했다. 듣고 있던 한립의 얼굴에 놀란 기색이 나타나더니 마지막에는 조금 흥분했다.
“그게 사실이라면 더없이 좋은 기회입니다. 마침 적합한 법기가 있으니 해보지요.”
한립이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사실이네. 허나 적시에 나서야지 만일 착오가 생긴다면 도리어 낭패를 당할 걸세.”
“경거망동하지 않을 테니 너무 걱정 마십시오.”
천란수의 당부에 한립이 미소를 머금었다.
“한 수사가 경솔하지 않다는 것은 잘 알고 있으니 그럼 노부도 천뢰를 불러들여 뇌겁을 치를 준비를 하겠네. 기운을 숨기는 비술에 정통해서 다행이지 안 그랬다면 허천정을 빠져 나온 순간 이미 화형뇌겁이 들이 닥쳤을 걸세.”
한숨을 내쉰 천란수는 바람처럼 허공으로 떠올랐다. 한립도 바로 푸른 빛줄기로 변해 번뜩하며 진법 밖으로 빠져나갔다. 이어 남색 빛으로 일렁이는 눈으로 하얀 안개를 뚫고 천란수의 행동을 주시했다.
요수는 서른 장 가까이 올라가 멈추더니 고개를 들고 콧김을 뿜어댔다. 그러자 전신에서 푸른빛이 요란하게 번뜩이며 요기를 품은 바람이 거세게 몰아쳤다.
요수의 포효 소리가 천지를 뒤흔들자 강력한 요기가 바람을 타고 치솟았고 천란수는 비술을 펼쳐 신형을 더욱 키웠다.
드디어 세상에 8급 요수의 본체가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거의 한 호흡 만에 하늘에서 천둥소리가 울리며 새까맣게 구름이 몰려들었고 폭우가 쏟아졌다. 엄청난 광경에 한립은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본래 이곳은 극히 건조한 지역으로 수십 년 동안 비가 거의 내리지 않아 버려진 곳이었다. 그런데 오늘 천란수가 요기를 방출해 비가 내리니 엄청난 변화였다.
‘천란수의 화형뇌겁이 예삿일이 아니구나.’
쿠르르 콰쾅! 꽈과광!
한립이 생각을 하는 동안 새까만 구름이 요동치며 팔뚝만 한 뇌전들이 번뜩였고 뇌전이 그물처럼 얽혀 하늘을 뒤덮었다.
이때 진법 속의 포효 소리도 더욱 커졌다.
회색 요기의 바람이 몸집을 키우더니 놀랍게도 회백색 소용돌이를 일으키며 먹구름을 향해 치솟았다.
쾅!
굉음이 울리고 기둥뿌리 같은 벼락이 요기(妖氣)의 소용돌이로 내리쳤다. 은빛이 터져 나오며 회백색 소용돌이가 반으로 갈라졌고, 벼락과 소용돌이가 일시에 사라졌다.
그제야 소머리에 교룡의 몸을 한 요수가 모습을 드러냈는데 똬리를 튼 그의 모습이 이전과 확연히 달라져 있었다. 놀랍게도 몸 양쪽으로 보라색 날개 한 쌍과 건장한 녹색 팔을 뻗고 있었다.
“……!”
한립은 한참 생각해봐도 그가 알고 있던 천지 영수들 중 그 모습과 일치하는 모습을 찾을 수 없었다.
그때 천란수가 굵은 뇌전을 올려다보며 두 날개를 펄럭였고, 그럴 때마다 주변의 회백색 요기가 뭉쳐 그 안으로 종적을 감추었다.
하늘의 천둥소리는 점점 더 빈번해졌고 벼락들도 끊임없이 쏟아져 내렸다. 주변 십여 리에 전부 벼락이 내리쳐 옆으로 비켜선 한립도 대책을 세우지 않을 수 없었다.
그가 가볍게 탄식하며 수결을 맺으니 전신에 금빛 뇌전이 번뜩이며 그물을 만들어 한립을 보호했다. 벼락이 금빛의 뇌전 그물에 내리꽂혀 금색과 은색이 폭발했지만 그의 금빛 그물은 미세하게 떨릴 뿐 멀쩡했다.
이제 한립은 벼락에 신경 쓰지 않고 오직 멀리 보이는 회백색 요기 덩어리에 집중했다. 허공의 벼락들은 인근을 초토화시켰지만 그중 대부분은 천란수에게 떨어졌다.
명청령안으로 보니 회백색 요기는 거의 은빛 뇌전에 뒤덮여 피할 곳이 없어 보였다. 한립은 그것을 보고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난성해에서 거북 요수가 화형뇌겁을 치르는 것을 본 적이 있었다. 당시 거북 요수는 이미 화형뇌겁의 막바지에 이르러 있었는데 이 정도 까지는 아니었다.
그런데 천란수의 화형뇌겁은 처음부터 이렇게 엄청난것이 막바지에는 어떨지 상상이 가지 않았다.
‘요수마다 화형뇌겁의 강도가 다 다른 것인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