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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684화 (441/2,000)
  • # 684

    684화. 거처

    한 식경 후, 한립은 대청 상석에 앉아 있었고 양 옆으로 네 명의 여인들이 공손히 손을 모으고 서 있었다.

    모패령을 비롯한 여인들은 낙운종으로 돌아오고 나서야 한립이 원영 후기의 대수사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나머지 세 수사를 압도하고 천남 제일 수사로 자리 매김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두 번째 원영 일은 걱정할 것 없다. 며칠 후 자의식을 지우고 다시 제련할 테니까 말이야. 그런데 너희가 담도 크구나. 감히 추마골 중심부에 들어갈 생각을 하다니. 중심부에 들어갔던 원영기 수사들도 살아 돌아오지 못했다는 것을 모르는 것이냐?”

    한립은 냉랭히 세 여인에게 훈계했다.

    “사숙님께 아룁니다. 환령초가 너무 필요해서 그만 위험을 무릅쓰고 그런 짓을 하고 말았습니다. 다시는 이런 일로 심려를 끼쳐 드리지 않을 것입니다.”

    송 여인이 즉시 해명했다.

    “환령초라면 환멸단(幻滅丹)을 제련해 수련의 고비를 넘기려 했던 것이겠지?”

    “맞습니다, 사부님.”

    이번에는 류옥이 솔직히 답했다.

    “그것 때문이라면 굳이 환령초를 찾아다닐 것 없다. 내가 한 병 지니고 있으니 각자 두 알씩 나눠 복용하면 될 것이야.”

    한립이 저물대를 스쳐 청록색의 작은 병을 꺼내 류옥에게 던져주었다. 그의 손에 죽어 나간 원영기 노괴 중 하나가 갖고 있던 것으로 갖고 있어봐야 쓸데도 없으니 선심을 쓴 것이다.

    병을 받아든 류옥은 한립의 말에 너무 기뻐 연달아 감사 인사를 했고 송 여인과 모패령도 희색을 감추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겨우 단약 한 병인데 그만하면 됐다. 그보다는 중요한 일이 몇 가지 있어 너희를 부른 것이다.”

    “무슨 일이든 분부만 내려주십시오.”

    송 여인이 공손히 답했고 다른 여인들도 진지하게 경청했다.

    “너희도 알다시피 난 종문을 관리하는 일에는 관여하고 싶지 않다. 그러나 대장로가 되어 나 몰라라 하며 전부 려 사백님께만 맡길 수는 없지 않겠느냐! 그래서 내가 폐관 수련을 하는 동안 려 사백님을 도울 제자가 필요하다.

    류옥, 나를 대신해 종문의 일을 관장해 보는 것이 어떻겠느냐?  물론 네 시간을 그저 낭비하게 하지는 않을 것이다. 쓸 만한 비술 구결들과 보물들을 주어 동급 수사들 중에는 적수가 없도록 만들어 주겠다. 물론 원한다면 정식으로 문하에 들일 수도 있고 말이다.”

    “정말이십니까?”

    “지금 내 신분에 거짓말을 하겠느냐!”

    “제자 전부 사부님의 뜻에 따르겠습니다!”

    류옥은 고민도 하지 않고 한립의 명을 받들었다. 그녀를 움직인 것이 낙운종에서의 실권인지 아니면 한립의 정식 제자 자리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말이다.

    이에 한립은 흡족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소매를 털어 하얀 옥간과 녹색 고리, 붉은 자 그리고 금빛이 찬란한 비검을 그녀에게 내주었다.

    류옥은 두 손으로 옥간과 보물들을 받아들며 연신 고개를 숙여 인사했는데 얼굴에는 흥분이 가득했다. 옥간에 어떤 비술이 적혀 있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고보들은 하나같이 평상시에는 꿈도 꾸지 못할 귀한 것들이었다.

    “너는 일단 려 사형에게 가보거라. 바로 전음부를 보내 미리 이야기하겠다.”

    한립의 말에 류옥이 얌전히 답하고는 바로 그곳을 빠져나갔다. 그녀가 나가고 한립이 전음부를 꺼내 무어라 중얼거리며 손을 털어냈다. 그러자 전음부가 한 줄기 불덩이로 변해 종적을 감췄다.

    “송 사질에게도 따로 시킬 일이 있다.”

    “무엇이든 분부만 내려 주십시오.”

    “별 다른 것은 아니고, 몇 년 내로 종문에 새로운 제자를 받아들일 때 천부적으로 의식이 강력한 제자를 찾아 데려 오거라. 내 문하로 거둬 따로 가르칠 것이다.”

    “천부적으로 의식이 강력한 수사라면……. 백 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한데. 장담할 수는 없겠지만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송 여인이 머뭇거리며 답했다.

    “급할 것 없으니 그저 신경만 쓰고 있으면 된다. 내가 보니 이미 결단 중기의 최고봉에 이른 것 같은데 그저 환멸단에만 기대서는 경지를 높일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구나. 이것은 음원환(陰元丸)이다. 유명한 단약은 아니지만 처녀인 여수사에게 큰 효과가 있다하니 한번 복용해 보거라.”

    한립이 한 손을 들어 올리자 푸른빛 속에서 검은 병이 나타나 소리 없이 날아갔다. 송 여인은 음원환이라는 이름을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지만 대수사인 한립이 하는 말이니 틀림없이 큰 도움이 될 것이라 믿었다.

    이에 여인은 기뻐하며 감사 인사를 했고, 한립은 송 여인에게 몇 가지 당부를 하고는 내보냈다. 이제 시선이 모패령에게 향했다.

    모패령은 조금 긴장한 듯 살짝 고개를 들었다가 그가 자신을 쳐다보는 것을 보고는 고개를 숙였다. 그녀의 하얀 귓가가 붉어져 있었다.

    “내 시첩으로 부린지 벌써 백 년이 지났구나.”

    “예, 저를 거둬주셨을 때 막 원영에 성공하셨는데 벌써 후기의 대수사가 되셨습니다.”

    “본래 처녀의 몸이었던 네게 전봉배원공을 익히게 해 원영기의 수련 고비를 넘고자 했는데 계획보다 빨리 중기와 후기로 넘어가고 말았지. 그러나 전봉배원공은 오직 원영기의 경지에서만 쓸모가 있다.”

    “공자님이 말씀은……. 저를 자모봉에서 내보내시려는 것입니까?”

    모패령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내가 너를 어찌 내보내겠느냐?  그런 말은 아니다. 하지만 당시 내 시첩이 된 것도 절반은 가문의 압박 때문이었는데 이미 결단기 수사가 되었으니 아무도 너에게 혼사를 강요할 일은 없을 것이다.

    그리고 나 역시 너를 애매모호한 신분으로 곁에 둘 수는 없다. 한창 나이인 네 앞길을 막는 일이고 또 완이가 돌아오면 무어라 설명해야 하지 않겠느냐?”

    여기까지 말하고 한립이 잠시 말을 멈추었다.

    “그럼 공자께서는 저를 어찌하고 싶으신 것입니까?”

    “간단하다. 그때처럼 너에게 두 가지 선택권을 주마. 첫째, 그동안 전봉배원공을 익히며 고생했으니 충분한 보상을 해 자유롭게 해주겠다. 그리고 자모봉을 떠나 누구와 혼인하든 관여하지 않을 것이다.”

    “지금 공자님의 명성에 아무리 저를 놓아주신다 하셔도 천남에서 누가 감히 저를 아내로 맞겠습니까.”

    모패령이 씁쓸하게 웃으며 중얼거렸다. 그 말에 한립이 미간을 좁히고 말을 이었다.

    “둘째, 수련에 매진하고 싶다면 계속 자모봉에 남아 명의상 내 시첩 노릇을 계속 하거라. 실제로는 너를 제자로 받아들여 수련을 지도해 줄 것이다. 자질이 나쁘지 않으니 완이의 제자로 삼아 그녀의 공법을 전수받는 것도 좋겠지.

    여인이 익히기에 적합한 공법이니 내게 배우는 것보다 나을 수도 있다. 이렇게 하면 말은 나오겠지만 네게 큰 피해는 가지 않을 것이다.”

    한립이 여인의 얼굴을 똑바로 응시했다. 그러나 모패령은 두 선택을 듣고도 얼굴이 어두웠다.

    “둘 다 선택할 수는 없는 것입니까?”

    “무슨 말이지?”

    “공자님의 진정한 시첩이 되고 싶습니다! 공자님을 따라 평생 함께하겠습니다.”

    “그건 안 된다.”

    모패령의 결연한 모습에 한립도 표정이 달라졌지만 결국에는 고개를 저었다.

    “공자님을 모시기에 제 수행이 너무 낮아 그러십니까?  아니면 용모가 마음에 안 드시는 것입니까?”

    모패령은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전부 아니다. 결단 중기의 수행이면 결코 낮다할 수 없고, 네 외모는 내가 보아왔던 여인들 중에서도 열 손가락 안에 들 것이다.”

    “그럼 조금도 생각하지 않고 거절하신 것은 혹여 남궁 장로님이 싫어하실까 염려되셔서 그러신 건지요?”

    “물론 완이의 생각도 중요하다. 허나 더 중요한 것은 나는 수련에만 매진하기 때문에 걸핏하면 수십 년씩 폐관 수련을 해왔다는 것이다. 네가 원영기 수사라면 수명이 천 살은 될 테니 그나마 상관없겠지만 지금 네 수행에 내가 폐관을 하면 평생 나를 만날 기회가 몇 번 되지 않을 것이다. 너의 귀한 시간을 그렇게 허송세월하게 둘 수는 없지 않겠느냐.”

    한립도 난감한 일이었다.

    대량으로 단약을 복용한다 해도 원영을 응결하는 일은 기연이 따라야 했다. 모패령도 그것을 알고 있었기에 자신이 원영을 응결할 가능성이 크지 않다는 것쯤은 이미 알고 있었다.

    한립의 말에 멍해졌던 모패령이 무어라 말하려 했지만, 그가 먼저 손을 저어 그녀의 말을 막았다.

    “당장 선택하라는 것은 아니니 몇 년간 천천히 생각해 보거라. 이제 나는 한동안 폐관 수련에 들어갈 것이다. 그동안 너도 수련에 매진하고 나를 대신해 전금아의 기초 공법을 가르치는 데도 신경 쓰거라.”

    “예! 공자님의 명에 따르겠습니다.”

    그녀의 대답에 한립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수련에 도움이 되는 단약을 내주었다. 그리고 전금아에 관해 몇 마디 더 당부하고는 그녀를 내보냈다.

    대청에 홀로 남은 한립이 그제야 눈을 감고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마음이 편치 않은 듯 했다.

    일각이 지나 다시 눈을 뜬 그는 평소의 모습을 되찾았고 저물대를 스쳐 은빛이 반짝이는 인간형 꼭두각시를 불러냈다.

    한립이 가만히 꼭두각시를 살피다 의식을 움직이자 인간형 꼭두각시의 얼굴에 은빛이 어렸다.

    본래 중년 사내의 모습을 하고 있던 꼭두각시의 얼굴이 모호하게 흐려지기 시작하더니 빛이 사라지자 한립과 똑같은 모습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곧 몸집이 작아져 신형이 흐릿해지더니 사라져버렸다.

    한립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몸을 일으켜 거처의 밀실 중 하나로 향했다. 그리고 밀실에 도착하기 전 뜬금없이 입을 열었다.

    “두 번째 원영은 얌전히 있는지요?  혹시 수사에게 불편을 끼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육체도 없는 중기의 원영이 노부에게 불편을 끼칠 수야 없지. 다만 한 녀석이 더 들어오니 솥 안이 비좁아지기는 했구나.”

    소매 속에서 사내아이의 앳된 목소리가 들려왔다.

    “천란 성조, 조금만 참으시면 다시 두 번째 원영을 동화시켜 회수하겠습니다. 이 일이 끝나는 대로 수사가 화형뇌겁을 치르는 것을 돕지요. 괜찮으시겠습니까?”

    “네가 그 일을 기억하고만 있다면야 그 정도는 얼마든지 기다릴 수 있다.”

    천란 성조가 기뻐하며 흔쾌히 답하자 한립은 미소를 지으며 밀실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의 뒤로 석문이 소리 없이 닫혔다.

    밀실 중앙에 이른 그는 즉시 소매를 털어냈다. 그러자 푸른빛이 튀어나와 허공을 선회하더니 파란 솥이 나타났다. 솥에서 빛이 반짝이며 사내아이의 모호한 신영이 빠져나와 싱글벙글한 얼굴로 그 위에 앉았다.

    마치 좋은 구경거리를 기다리는 어린아이 같았다.

    그는 곧바로 저물대를 스쳐 진법 깃발 한 벌을 꺼내 열댓 개의 깃발들을 밀실 곳곳으로 보냈다. 그러자 노란 보호막이 불현듯 나타나 전체를 감쌌다.

    한립이 수결을 맺으며 허천정을 가리켰다.

    쉑!

    뚜껑이 날아갔고 사내아이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먼저 한쪽으로 피해 서서는 웃는 얼굴로 솥을 주시했다. 솥 안에서는 쿠르릉 거리는 소리 이외에는 어떤 것도 나오지 않았다.

    얼굴을 굳힌 한립이 주술을 외우며 법결을 날려 보내자 허천정이 미세하게 몸을 떨며 푸르스름한 물체가 솟아올랐다. 그것은 한 척가량의 무언가로 푸른 실이 칭칭 감고 있어 마치 누에고치처럼 보였다.

    “갈라져라!”

    한립이 낮게 일갈하자 괴이한 일이 일어났다. 푸른 실들이 갈라지며 암녹색의 두 번째 원영이 나타난 것이다. 눈을 감고 축 늘어진 것이 의식이 없는 것 같았다.

    이에 한립은 눈을 가늘게 뜨고 허공에 손을 뻗었다. 그러자 은빛 찬란한 바늘들이 그의 손끝에서 뻗어 나가 허공의 원영을 향해 사라졌고, 의식이 없던 원영은 전신에서 검은빛을 번뜩이며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그러자 은색 바늘은 허공을 꿰뚫고 분분히 떨어졌다. 그럼에도 한립은 전혀 당황하지 않고 오히려 입꼬리를 올리며 허천정을 가리켰고 밀실 한쪽에서 푸른  실 뭉치가 날아들어 어딘가로 쇄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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