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82
682화. 심연
추마골은 당시 고마가 나타났던 곳이니 남은 마기가 있었다고 해도 이상할 것이 전혀 없었다. 산 정상에서 가부좌를 하고 하루를 꼬박 보낸 그는 자신이 두 번째 원영이라면 어디로 향했을지 생각했다.
‘마기의 심연!’
한립의 두 눈이 번쩍 뜨였고 눈빛이 형형했다. 그는 당장 푸른 빛줄기로 날아올랐다.
이틀 후, 추마골을 떠난 한립은 불가사의한 속도로 칠령도로 향했다.
현음진경에 적힌 바에 따르면 마기관체(魔氣灌體)의 비술은 1년 남짓한 시간이면 초보적인 단계를 완료할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이 마기의 심연에 가기도 전에 두 번째 원영이 줄행랑을 치게 두고 볼 수는 없었다.
* * *
같은 시각, 마기의 심연 안에서 검은 장포 사내는 자신의 행적이 한립에게 들켰음을 알고도 떠나지 못하고 있었다. 마기관체의 술법이 가장 중요한 고비에 이르러 중단할 수 없었던 것이다.
게다가 두 번째 원영은 추마골을 나온 후 은닉술을 사용하며 이곳까지 날아왔기에 다른 수사들을 만난 적도 없었다. 그래서 한립이 이미 원영 후기에 이르렀다는 중요한 소식을 들을 수 없었다.
그는 원영 중기 수사의 둔광 속도를 생각하며 한립의 경로를 예측했다. 그의 계산대로라면 한립이 바로 마기의 심연으로 날아온다고 해도 두 달은 걸릴 것이다.
마기관체는 이제 거의 막바지에 이르러 달포를 남겨 두고 있었으니 걱정할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불안한 마음을 다독이며 이곳에 남아 있는 것이었다.
‘이번 기회를 놓치면 상대의 눈을 피해 마기의 심연에 숨어들 방법이 없다.’
원영은 이렇게 생각하며 정순한 마기를 받아들이는데 집중했다. 그러나 지금 한립의 속도는 원영 중기 수사보다 배는 빨랐고 겨우 한 달 만에 무변해에 이르렀다.
이제 이틀이면 칠령도에 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한립은 바로 마기의 심연으로 향하지 않고 방향을 틀어 칠령도 중 영별도로 향했다.
과거에 마기를 재봉인하며 공로로 위무애 등이 내어준 영별도(靈鱉島)가 기억났기 때문이다. 그때부터 낙운종의 관할이었으니 응당 낙운종 제자들이 주둔하고 있을 것이다.
작은 산에 내려선 그가 의식을 퍼트려 수백 리에 달하는 섬을 순식간에 훑어 수사들이 주둔하는 곳을 알아냈다. 한립은 입을 달싹이며 소리 없이 중얼거린 후 가부좌를 한 채로 앉아 있었다.
그러자 영별도가 갑자기 소란스러워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두 무리의 수사들이 각각의 방향에서 날아들어 한립이 앉아 있는 산봉우리로 쇄도했다. 한립은 가만히 앉아 그들을 응시하며 눈을 반짝였다. 두 무리의 수사들은 한립을 확인하고 분분히 하강했다.
“대장로 님을 뵙습니다!”
“한 사조님을 뵙습니다!”
여러 수사들이 공손히 예를 올렸는데 작은 눈에 두꺼운 눈썹을 지닌 노란 장삼의 사내와 삼십대 여인만이 결단기 수사였고 나머지는 전부 축기기 수사들이었다.
“네가 벌써 결단에 이르렀구나.”
한립의 시선이 노란 장삼의 수사에게 머물렀는데 뜻밖에도 무덤덤하던 얼굴에 웃음이 피어났다.
“제자가 이전에는 사숙님의 신분을 몰라 뵙고 무례하게 굴었으니 용서해 주십시오!”
노란 장삼 사내는 한립이 한눈에 그를 알아보자 안색이 창백해져 더듬더듬 용서를 구했다. 곁에 선 여인은 그저 당황스러웠다.
말주변 좋기로 유명한 그녀의 ‘규 사형’이 갑자기 왜 이러는지 알 수 없었고 놀랍게도 대장로님과 아는 사이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모르고 한 일인데 어찌 탓을 하겠느냐. 그때는 사정이 있어 스스로 수행을 숨긴 것이니 너희 사형제들을 탓할 이유도 없고. 다만 규 사질이 벌써 결단기에 이르다니 놀랍구나! 다른 두 명은 어찌 되었더냐?”
노란 장삼 수사는 그에게 설운호를 잡자고 한 규환이라는 낙운종 제자였다. 자질이 뛰어 나지 않았는데 연기기에서 벌써 결단에 이르다니 한립이 의아해 할만 했다.
“왕 사형 등은 운이 좋지 않았습니다. 축기에도 성공하지 못해 오래 전 세상을 떠났습니다.”
규환은 한립이 이전 일을 전부 기억하고 있자 쓴웃음을 지으며 답했다.
“그래, 그들도 자질이 뛰어난 편은 아니었으니 축기에 이르지 못할 수도 있었겠지. 규 사질은 기연이라도 만난 모양이로군?”
“백여 년 전에 우연히 얻은 영초를 먹고 갑자기 수행이 빨리 늘기 시작하였습니다.”
“다 복이 따른 게지. 옛 이야기는 이쯤 해두고 너희에게 물을 것이 있다!”
“무엇이든 하문하시지요!”
여인이 수사들을 대표해 공손히 답했다. 한립이 낙운종 대장로가 아니라 해도 천남 제일수사였으니 당연히 잘 보여야 했다.
“별 다른 것은 아니고, 최근 1년 간 마기의 심연 봉인에서 이상한 일은 없었더냐?”
“봉인이라면 멀쩡합니다. 일곱 개의 섬에서 돌아가며 순찰을 도는데 아무런 변화도 없다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어찌 그러십니까?”
“돌아가며 순찰을 돈다면 다른 섬의 수사들이 이상한 것을 보았다고 해도 너희가 모를 수도 있겠구나.”
“저희에게 알려주지 않는다면 그렇다고 봐야 합니다.”
규환은 여인과 시선을 교환하고는 조심스레 답했다. 예상과 달리 한립은 전혀 불편한 내색을 하지 않고 저물대에서 가지각색의 진법 깃발과 원반을 꺼내 들었다.
“너희들은 36명의 제자들을 이끌고 당장 마기의 심연 입구로 날아가거라! 난 마기의 심연에 내려갔다 올 터이니 현강천살진(玄罡天煞陣)을 펼쳐 무엇이든 빠져나가려 한다면 반드시 막아야 한다. 죽이라는 것이 아니라 잠시 시간을 끌라는 뜻이다.”
생각지도 못한 명령에 수사들은 놀랐으나 연달아 그러겠다고 답하며 고개를 조아렸다.
“시간이 얼마 없다. 나는 먼저 가볼 터이니, 바로 인원을 선발해 봉인 위로 금제를 펼치거라!”
한립이 진법 법기들을 던져 주고는 바로 몸을 일으켰다.
규환 등이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푸른 빛줄기가 번뜩이며 봉인이 있는 마기의 심연으로 날아갔다. 규환과 여인은 서둘러 전음부를 뿌려 적합한 제자들을 불러 모았다.
잠시 후, 한 무리의 수사들이 집합하자 그 둘은 진법 법기들을 챙겨 섬을 날아올랐다. 조금이라도 지체했다가 한립의 일을 망칠까 두려웠기에 더 서두른 것이다.
그때 한립은 벌써 마기의 심연 위에 있었다.
당시 거대했던 소용돌이는 이제 5, 60장 밖에 되지 않았고 사방에 열댓 개의 커다란 기둥들이 솟아 있었다.
금속도 아니고 나무도 아닌 재료를 이용해 제련한 기둥들은 분명 바다에 떠있었는데 이상하게도 해류에도 움직임 없었다. 기둥들에서 우윳빛 광채가 나며 하얀 보호막을 형성해 소용돌이를 철저히 막고 있었다.
“한 선배님도 보시면 아시겠지만 봉인은 아무런 이상도 없습니다. 혹여 오해를 하신 것은 아닐 지요? 저희 일곱 섬의 수사들이 한시도 거르지 않고 이곳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한립 뒤로 일고여덟 명의 수사들이 서 있었고 그 중 붉은 장포를 입은 결단기 수사가 눈치를 보며 말했다. 나머지 축기기 수사들이야 두 손을 모으고 바르게 서서 다들 숨죽이고 있었다.
“봉인을 깨트리지 않고 이 안에 들어갈 방법이 한두 개인 줄 아느냐. 게다가 너희의 이목을 피하는 일은 더욱 쉽겠지.”
한립은 고개도 돌리지 않고 냉랭히 말했다. 그 말에 붉은 장포 수사는 그저 어색하게 쓴웃음을 지었다.
“조금 있다가 우리 낙운종 제자들이 임시진법을 펼쳐 입구를 통제할 것이다. 너희 적련종(赤蓮宗)은 협조만 하면 된다. 문제없겠지?”
“예, 문제없습니다! 선배님께서는 직접 봉인 안으로 들어가시려는 겁니까?”
“그렇지 않을 거면 여기까지 왜 왔겠느냐. 지금은 마기를 억누르는 힘이 가장 강할 때이니 들어가기에 최적의 기회일 것이다.”
한립이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니 한낮이라 작렬 하는 태양이 기세등등했다. 붉은 장포 수사도 그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들더니 이제야 알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럼 너희는 가서 일을 보거라.”
한립이 더는 지체 하지 않고 소매를 털어 삼염선을 꺼내 들었다. 그러자 부채가 반짝이며 삼색 화염이 일었고 그가 몸을 날려 보호막으로 쇄도하는 동시에 깃털 부채가 허공을 갈랐다.
쿠쾅!
굉음이 터지고 삼염선은 날카로운 불의 칼날처럼 우윳빛 보호막을 베고 틈을 만들어냈다. 그 안의 칠흑 같은 마기가 용솟음치며 당장이라도 빠져나올 기세였다.
붉은 장포 수사는 안색이 달라졌고 한립은 미리 준비한 대로 한 손을 저었다. 동시에 푸른 기운이 검은 마기를 압도해 억눌렀고 그 틈에 한립은 마기의 심연 속으로 사라졌다.
그 즉시 갈라졌던 봉인이 다시 원래대로 돌아가 놀랍게도 마기는 한 줄기도 빠져나오지 못했다. 그제야 붉은 장포 수사가 안심했다.
그때 뒤쪽의 축기기 수사들이 소리쳤다.
“사백님, 저길 좀 보십시오!”
움찔한 붉은 장포 수사가 고개를 돌리자 멀리서 수십 개의 빛들이 날아오고 있었다.
“낙운종 수사들이로구나. 한 선배님의 말씀대로 이 안에 강력한 요마가 숨어들었단 말인가?”
붉은 장포 수사는 먼 곳을 응시하며 중얼거렸다. 칠흑 같은 마기 속에 푹 잠긴 한립은 전신에서 금빛 뇌전을 번뜩이며 벽사신뢰를 이용해 마기의 침투를 막고 있었다.
금빛 뇌전과 마기는 쉼 없이 서로 얽혀들며 낮게 울려 퍼지는 천둥소리 속에 흩어져갔다. 한립은 마기를 신경 쓰지 않고 수결을 맺어 다시 현목화영대법(玄牡化嬰大法) 중의 비술 구결을 읊었다.
1천 장, 2천 장, 3천 장…….
의식에 아무 것도 감지되지 않자 그의 얼굴이 점점 굳어갔다. 거의 7, 8천 장 정도를 내려갔을 때 그의 표정이 미묘하게 달라졌다.
‘내 추측이 틀렸단 말인가? 두 번째 원영이 이곳이 아니라 다른 곳에서 수련하고 있다면…….’
가슴이 철렁한 그가 수결의 형태를 바꿔 주술을 읊기 시작했고 남색으로 일렁이는 눈으로 아래쪽을 살폈다. 그런데 갑자기 그의 표정이 이상해졌다.
한립은 이번엔 확실히 목표를 정한 듯 어딘가로 날아가기 시작했다. 3, 4백장 정도 더 날아가자 멀리서 야수의 울음소리 같은 포효가 들려왔다.
입술을 꿈틀한 그는 속도를 줄였고 삼염선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점점 더 강렬한 남색으로 물들어가는 눈동자는 마기의 아래쪽을 주시했다.
그는 명청령안을 최고로 발동했기에 마기의 심연 속에서도 백 장 밖까지 볼 수 있었다.
백 장 밖에 커다란 검은 그림자가 고개를 쳐들고 미친 듯이 괴성을 지르고 있었다. 잠시 후 한립의 남색 눈동자와 검은 그림자의 새빨간 눈이 마주쳤다!
한립은 가슴이 서늘해졌다.
새빨간 눈동자에 깃든 포악한 기운은 정상으로 보이지 않았고 오직 피에 미친 야수 같았다. 그는 갑자기 괴성을 멈추자 검은 그림자로 흐릿하게 변해 아래쪽으로 사라졌다.
그 모습을 보고 표정이 달라진 한립은 서두르지 않고 소매를 털어 은색 방패를 꺼내 은색 보호막을 펼쳤다. 그때 등 뒤의 마기가 꿈틀거리며 새까만 팔뚝이 날아들어 보호막을 강타했다.
쾅!
마귀의 손톱이 보호막을 반 척이나 파고들었다. 이에 한립은 두 걸음을 물러나서야 엄청난 힘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러나 동시에 두 손이 흐릿해지며 뒤도 돌아보지 않고 금빛 검을 휘둘렀다.
금빛이 번뜩이며 털이 수북한 팔뚝을 베었다. 그러자 검은 그림자가 괴성을 지르며 펄쩍 뒤로 물러났는데 다시 몸을 가눌 때는 핏빛의 눈으로 매섭게 한립을 노려보고 있었다.
“과연 너로구나! 허나 마기관체는 실패한 것 같군. 이런 몰골에 이지를 상실하다니.”
천천히 몸을 돌린 한립이 검은 그림자를 살피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열댓 장 거리에서 똑똑히 보니 아직 천살마시의 모양이 남아있었다. 하지만 찢겨져 나간 검은 장포 사이로 털이 수북하게 난 팔이 드러났고 몸 곳곳에 주먹 크기의 검은 껍질이 생겨나 음산한 빛을 반짝였다.
해골처럼 앙상해진 머리는 검은 기운이 드리워있었고 일그러진 얼굴은 흉악하기 그지없었다. 팔뚝이 잘려나갔지만 상처 부위에서는 피가 쏟아지지 않았다.
괴물은 입으로 이상한 소리를 중얼거리면서 한립이 든 금빛 검을 보고 겁을 먹은 것 같았다. 당장이라도 한립을 찢어 죽이고 싶다는 눈빛이었지만 본능적으로 다시 공격을 하지는 않았다.
허리춤에 걸어둔 저물대가 가득 차있었는데 무엇하나 꺼내 부리지 않는 것을 보면 완전히 이성을 잃은 모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