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78
678화. 풍뢰시 제련
“내 말을 믿지 못하겠다면 지양 형께서 직접 낙운종에 다녀오시지요. 수사가 태진문에서 여기까지 달려온 것을 보면 아마 그럴 생각이 있으신 거겠지요.”
지양 상인은 얼굴을 굳히며 반박하지 않아 그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내가 수사라면 굳이 직접 찾아가 모욕을 당하지는 않을 겁니다. 허나 나야 세상을 뜰 날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아무래도 상관없지요. 한 가 녀석의 실력이 화신기 수사에 비할 정도라 해도 신경 쓰고 싶지 않습니다. 물론 수사와 합환 노마는 이 세상에 발붙이고 있을 시간이 오래 남았으니 어쩔 수 없을 테지만요.”
“위 형의 수명이 얼마 남지 않았단 말입니까?”
무덤덤한 위무애의 말에 지양은 화들짝 놀랐다.
“내가 다른 대수사들보다 200년 먼저 지금의 수행에 이렀으니 그만큼 일찍 떠나는 것이 순리지요. 아마 몇 년이면 끝일 겁니다. 그래도 수사와 합환은 아직 시간이 있으니 화신기에 대한 희망을 잃지 마십시오.”
푸른 장삼의 노인이 쓸쓸히 당부했다.
“위 형…….”
지양은 무언가 말을 하려다 복잡한 얼굴로 차마 입을 떼지 못했다.
“수도의 길에 끝을 보지 못했으니 반평생 인계를 좌지우지 했어도 모두 허사라는 생각이 듭니다. ……지양 형을 오랜 세월 알고 지냈으니 내 충고 한 마디 하지요. 더는 천남과 종문의 일에 연연해 말고 오직 수련에만 매진하세요!
나처럼 죽을 날만을 기다리는 일은 없길 바랍니다. 게다가 한 가 녀석의 실력으로 보아 내가 사라지고 나면 수사와 합환만으로는 적수가 될 수 없을 것이니, 그냥 천남 제일의 문파라는 허명을 내주고 호의를 표하는 것이 나을 겁니다.
어차피 세상 모든 것은 흥망성쇠를 겪기 마련이니 문파의 세력에 집착할 필요가 없다는 말입니다. 그렇게만 한다면 한 가 녀석도 절대 수사를 궁지로 몰지 않을 것이고 지양 형에게도 수련에 매진할 기회가 생기겠지요.”
“당부 고맙습니다. 말씀 하신 것은 깊이 숙고해보겠습니다.”
지양 상인은 위무애의 말에서 진심을 느꼈다.
“내 할 이야기는 다 했으니 나머지는 수사가 잘 선택하시면 됩니다. 그럼 나는 돌아가야겠으니 이번 만남이 마지막이 될 지도 모르겠군요.”
포권을 한 위무애는 지양 상인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빛줄기로 변해 칠령도 방향으로 사라져갔다. 지양 상인은 그 자리에 가만히 서서 고민스런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한참 후, 길게 탄식한 지양 상인도 하얀 빛줄기로 변해 날아갔는데 계국쪽으로 향하는 길이었다. 태진문의 원영 후기 수사는 직접 한립을 만나보기로 결정한 듯했다.
정말 새로 등장한 대수사가 소문처럼 두려운 존재라면 위무애의 조언에 따라 즉시 종문으로 돌아가 폐관을 하고 화신기에 이를 준비에만 매진할 계획이었다.
한 달 후, 지양 상인은 직접 낙운종에 찾아갔다가 반나절 만에 그곳을 떠나 태진문으로 돌아가 뜻을 이루지 않고는 영원히 출관하지 않겠다는 선언을하고 폐관수련에 들어갔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다.
이렇게 되니 천남 제일 수사라는 한립의 위명은 굳어져갔고 낙운종은 몇 달 만에 계국 대부분을 장악했다. 계국의 다른 수도종문들은 먼저 귀순하거나 아예 그곳을 떠나 다른 곳으로 근거지를 옮겨 버렸다.
고검문과 백교원은 운몽산맥에 위치했기에 자리를 보전할 수 있었고 세력도 커졌다. 그러나 하루아침에 낙운종에 종속되다시피 했기에 마냥 즐거울 수 만은 없었다.
* * *
낙운종 자모봉의 동굴.
한립은 두 눈을 감고 가부좌를 튼 채 밀실에 설치된 거대 진법 안에서 하얀 날개 한 쌍을 제련하는 중이었다. 날개의 표면에는 각종 주술이 빽빽하게 떠올라 흐르고 있었다.
한립은 수결을 맺어 진법에서 푸른색과 하얀색의 불기둥을 북돋아 깃털 제련에 박차를 가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그가 수결을 거두더니 두 눈을 뜨고 화염 속에서 천천히 회전하는 깃털을 가리켰다.
쿠꽈광!
깃털이 부르르 몸을 떨며 푸른빛을 머금었고 은빛 뇌전이 우렁차게 터져 나오며 엄청난 기세를 내뿜었다. 그러나 한립은 불만스럽다는 듯 얼굴을 굳혔다.
잠시 후 그가 입에서 파란색 작은 솥을 뿜어냈고, 허천정은 빙글 돌아 조용히 지면에 내려 앉았다.
“무슨 일이 있는 것이더냐? 이미 제련 방법을 한두 번 일러준 것도 아닌데 말이야.”
“알려준 대로 제련했습니다만……. 곤붕의 깃털이 풍뢰시에 융합되어 바람 속성 영력을 발동할 수는 있으나 이 정도는 삼염선이나 비슷한 급의 모조품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설마 저를 속이신 것은 아니겠지요?”
“그럴 리가 있나! 곤붕의 날개는 보물 중의 보물인데 위력이 겨우 그 정도일리가! 일단 내가 직접 봐야겠다.”
솥이 번뜩이더니 천란 성조가 응결해낸 환영이 나타났다. 한립은 말없이 허공의 깃털을 가리켰다.
슉!
풍뢰시가 푸른색과 하얀색 빛을 내며 사내아이 머리 위에서 나타났다. 사내아이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깃털을 자세히 살피며 수시로 표정이 달라지다가 잠시 후에는 아예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겼다.
“어찌 된 일인지 알겠구나. 곤붕 깃털의 제련이 예상보다 어려워서 간신히 풍뢰시와 섞어 놓았지만 본래 지니고 있던 바람 속성의 위력을 발동할 수가 없구나. 이러니 모조품 수준이지 진정한 통천령보와는 하늘과 땅 차이일 수밖에.”
다시 눈을 뜬 천란 성조가 차분히 설명했다.
“그럼 곤붕의 위력을 발동하려면 어찌 해야 합니까?”
“네가 바람 속성 공법으로 갈아타던지, 아니면 최상품의 바람 속성 영석을 구하던지 해야겠지.”
“수련하는 공법을 바꾸는 것도, 바람 속성의 극품영석을 찾는 것도 불가능합니다.”
“그럼 문제인데! 다른 방법도 있지만 인계에서는 불가능한 일이라…….”
“어찌 되었든 제가 제련을 잘못한 것이 아니라 당신의 예상이 빗나가 이렇게 된 것이군요.”
천란 성조가 어쩔 수 없다는 듯 중얼거리자 한립이 거침없이 불만을 토로했다.
“뭐, 그렇다고 볼 수 있지.”
“됐습니다. 그래도 풍뢰시가 바람과 천둥의 속성을 전부 발휘하게 되었으니 그것만으로도 만족합니다. 어차피 수사가 말하는 엄청난 능력을 지니게 돼도 지금 제 수행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울 게 아닙니까.”
잠시 후 한립이 먼저 표정을 풀며 더 이상 따지지 않았다. 그러자 오히려 천란 성조가 흠칫 놀라며 의심스럽다는 얼굴을 했다. 한립의 수행은 보잘 것 없었지만 만만히 볼 상대가 아니라는 것을 느낀 것이다.
“조건이 있으면 그냥 빨리 말하거라. 내 실수이니 어느 정도 보상은 해야겠지.”
천란 성조가 찜찜한 듯 결국 먼저 이야기를 꺼냈다.
“선배님께서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후배 된 도리로 따르겠습니다.”
“…….”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한립이 미소 지으며 이렇게 말하자 천란 성조가 어이없다는 듯 눈을 흘겼다. 한립이 저물대를 스치자 푸른 기운이 몇 가지 이상한 물건들을 품고 나타났다.
주먹 크기의 투명하고 끈적거리는 물체, 두 개는 크고 하나는 작은 새까만 수정돌, 흑백의 두 가지 색을 지닌 구슬과 엄지손톱만한 새까만 눈알이었다.
“이것들은 전부 우연히 얻은 것들인데 제 견문이 얕아 무엇인지도 모르고 있습니다. 수사께서는 상계에서 오셨으니 저와는 다르시겠지요. 아는 바가 있다면 가르침을 받고 싶습니다.”
“허, 이런 것들을 대체 어디서 얻은 것이더냐? 다른 것들은 그렇다 치고 저 두 가지는 영계에서도 구하기 어려운 것들인데.”
천란 성조가 물건들을 훑다 손을 뻗어 허공을 쥐었다. 그러자 투명한 물체와 새까만 눈알이 천란 성조의 손으로 빨려 들어갔다.
“천란 성조께선 아는 물건들입니까?”
“이 두 가지를 어디서 얻었는지 일단 말해 보거라.”
“하나는 언제부터 타오르고 있었는지 모를 오래된 솥에서 얻은 것이고, 또 하나는 눈이 셋 달린 요수의 것입니다.”
“그럼 내가 생각한 것이 맞겠어!”
과연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천란 성조가 우선 끈적끈적한 물체를 들어 올리며 말했다.
“이것은 화령사(火靈絲)로 불 속성 갑옷을 제련하는데 최상의 재료이지. 본래 아주 희귀한 음귀의 속성을 지닌 광석인데 불길에 오랫동안 제련되면서 녹지 않고 이런 상태가 된 것이로구나.”
“화령사요?”
한립은 천란 성조가 든 물컹한 물체를 보며 의아해했다.
“이건 화령사의 완전한 모습이 아니다. 불 속성 공법에 정통한 수사가 실 형태로 뽑아내야 한다. 어차피 한 수사는 못하겠지만. 화령사는 희귀한 보물이라 재료로도 쓸 수 있고, 그대로 사용해도 일반 비검보다는 훨씬 뛰어난 위력을 발휘하지. 그런데 이상한 것은 연한 남색을 띄어야 하는데 투명하다는 거야.”
“보통 화령사를 만들려면 얼마나 걸립니까?”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한립은 갑자기 표정이 달라졌다.
“워낙 희귀해서 정확하게는 모르겠지만 오래 걸리지. 짧게는 100년에서 수백 년까지 말이야. 화염 속에서 오래 정련할수록 양은 줄어들고 더욱 정순해진다고 하더군.”
“그렇군요.”
천란 성조의 설명에 한립은 무언가를 깨달은 눈치였다.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이냐?”
“아닙니다. 다음 물건도 봐주시지요.”
그저 희미하게 웃은 한립이 시선을 검은 눈알로 돌렸다. 천란 성조는 잠시 침묵했지만 더 캐묻지 않았다.
“……이거야 말로 사연이 긴 물건이지. 나는 영계에서 강림한 분혼에 불과한데다 속성이 나와 상극이라 지니고 있어봐야 의식에 손상만 입겠지만 나도 욕심이 날 정도니까 말이야.”
“이게 그렇게 대단한 물건입니까?”
“네가 뭘 알겠느냐. 용, 기린과 같은 천지영물들에 대해서는 들어봤겠지?”
“당연히 들어봤습니다. 인계에서는 사라진지 오래지만 기록은 남아 있으니까요. 설마 그런 존재들과 연관이 있다는 것입니까?”
“그건 아니지만 엇비슷하다고 해야 할까? 용과 천적 관계인 자렬수(呲咧獸)의 세 번째 눈이자 영계에서도 명성이 자자한 파멸법목(破滅法目)이니까 말이야. 머리가 셋에 꼬리가 다섯인 자렬수는 중간 머리에 눈이 하나 달렸는데 그게 바로 파멸법목이다.
평소에는 절대 뜨지 않다가 공간을 찢어 적을 흔적도 없이 죽일 때만 뜬다고 하더군. 물론 이 눈알만 가진다고 해서 그런 능력이 생기진 않겠지만 관련 비술을 익히면 괴이한 방법으로 적을 공격할 때나 상대의 환술이나 둔술 그리고 순간이동을 깨트릴 때 유용하겠지. 천리안(千里眼)이나 비슷한 비술을 익히는 수사들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얻고 싶은 보물일 게야.”
한립이 그 말에 마른 숨을 삼키며 천란 성조 손에 들린 눈알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정말 자렬수의 파멸법목이었다면 그 가치가 금궐옥서 만큼 엄청났겠으나, 보아하니 네가 죽인 세 눈 박이 요수는 자렬수의 피를 이어받은 이종 영수였을 게다! 게다가 파멸법목이 완전히 무르익기 전에 파냈으니 네가 운이 좋다고 해야 할 지 아쉬운 일이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구나.”
천란 성조는 아깝다는 듯 혀를 찼다.
“그건 또 무슨 말입니까?”
“간단히 말해서 성년이 된 자렬수의 눈이라면 지금 네 수행으로는 꿈도 꿀 수 없겠지만 미성년이었던 자렬수의 눈을 파낸 덕에 파멸법목을 익혀볼 만 하다는 것이다. 물론 전자에 비해 위력은 한참 못 미치겠지만 말이다.”
“이종 영수이기에 본래의 영수에 비해 완벽한 신통을 발휘하지 못하는 것이군요.”
“보편적으로 그렇기는 한데, 예외란 늘 있는 법이다! 영계의 구령산(九靈山)에 머무는 분천 요왕은 화기린(火麒麟)의 피가 약간 흐르고 있는데 진화 관련 신통을 물려받아 진짜 적통 화기린들 조차 상대하기 꺼린다고 하더구나. 내 기억대로라면 공간접점을 찾아내 언젠가 영계로 건너갈 요량인 것 같던데, 그렇다면 반드시 파멸법목을 수련할 수밖에 없을 게다.”
천란 성조가 묘한 표정을 지었다.
“어째서죠?”
“자렬수가 유천곤붕이나 라후처럼 강제로 세계를 넘나들 수는 없지만 그래도 경계 간 압력을 약화시키는 신통을 지니고 있다. 물론 실제로 얼마나 쓸모가 있을 지는 눈알이 지닌 힘과 수련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그런 신통이 있었다니…….”
“일단 수련을 하고 나면 자연히 알게 될 것이다. 노부가 너를 속일 이유가 있겠느냐.”
천란 성조의 말에 한립은 그저 고개를 숙이고 깊은 생각에 잠겼다. 그것을 본 천란 성조가 씩 웃더니 두 물건을 만지작거리며 생각할 시간을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