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신공-675화 (432/2,000)

# 675

675화. 계획

같은 시각, 낙운종 금지.

석실 문이 열리며 기쁜 마음을 숨기지 못한 채 한립이 걸어 나왔다. 그러자 려락이 그럴 줄 알았다는 얼굴로 미소 지었고 같이 기다리던 전금아도 처음 보는 한립에 모습에 적잖이 놀랐다.

“한 사제, 사매는 어떠하던가?”

“괜찮습니다. 대진에서 알아낸 술법을 펼쳐두었으니 앞으로 위급한 상황은 벌어지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완이의 차녀천월결 수련이 중요한 시점이라 빙벽을 벗어나려면 몇 년은 더 있어야 할 듯합니다. 제가 같은 속성의 공법을 익혔다면 도움을 줄 수 있었을 텐데 안타까울 뿐입니다.”

작게 한숨을 내쉰 그의 얼굴에 아쉬운 기색이 가득했다.

“급하게 생각하지 말게. 사매가 안전하게 깨어났으니 몇 년 정도야 금방 지나갈게 아닌가. 내 사제 혼례에서 축하주를 나눌 날도 머지않았구만!”

려락도 마음이 편해졌는지 한립을 행해 장난스런 웃음을 흘렸다. 순간 한립의 얼굴에 붉은 기운이 스치며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러고 보니 사제의 신분에 지금의 거처는 적합하지가 않겠어. 돌아가는 대로 주봉을 내주어 새로 거처를 마련할 수 있게 하겠네.”

“그러실 필요는 없습니다. 제가 머무는 자모봉(子母峰)이 규모는 크지 않지만 고즈넉한 맛이 있지요. 완이가 돌아오면 저희 부부의 거처로 삼겠습니다.”

“사제가 원치 않는다면 그건 되었고. 사제의 원영기 꼭두각시를 아직 내가 데리고 있는데 그것은…….”

려락은 아쉬움이 느껴지는 얼굴로 주저하다 이야기를 꺼냈다.

“전 이미 원영 후기에 이르렀으니 크게 필요치 않습니다. 종문에 기증할 테니 사형께서 계속 관리해 주십시오.”

“정말 고맙네, 한 사제!”

려락에게는 큰 도움이 되는 물건이었기에 대단히 기뻐했다.

“그런데 완이의 수련이 중요한 고비라 혹시 무슨 일이 생기지는 않을까 걱정됩니다.”

“사제의 말뜻은…….”

“자모봉이 금지와 꽤 멀리 떨어져 있고 앞으로 몇 년간은 제련해야 할 보물이 있어 몇 번 산문을 나서야 할 것 같습니다. 금제를 손 봐 더욱 강화하고 완전히 이곳을 폐쇄해야 마음이 놓일 듯합니다. 사형의 의견은 어떠십니까?”

“난 또 무슨 이야기라고! 그런 일이야 사제가 마음대로 하시게. 안 그래도 사제가 돌아왔으니 이곳의 금제를 관리하는 것을 전부 넘기려고 했으니.”

“고맙습니다. 아, 제 제자도 앞으로 종종 사형의 돌봄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한립이 생각난 김에 전금아를 가리켰다. 그는 전금아가 용음지체의 체질을 타고 났다는 사실과 자신의 벗이었던 수사의 환생일지도 모른다는 사실도 언급했다.

“허, 윤회가 실재했다니 신기한 일이구만. 걱정 말게! 사제가 다른 볼일 있으면 이 사형이 전 사질의 양기가 폭주하지 못하게 잘 관리해 주겠네.”

려락이 바로 한립의 말을 알아듣고 주저 없이 승낙했다.

“려 사형께 수고를 끼치게 되었습니다. 허나 제가 최선을 다해 음기의 속성을 지닌 영단을 모아 안배해 놓을 터이니 걱정 놓으십시오.”

려락과 한립의 대화를 들으며 전금아는 안심했다. 사실 사부가 멀리 떠나거나 폐관 수련에 들어가면 자신은 어떻게 되는 것인지 걱정이 많았는데 한립이 미리 모든 것을 염두에 두고 있어 든든하게 느껴졌다.

이후 려락은 한립에게 앞으로 있을 의식과 며칠 후 고검문, 백교원 장로들의 방문에 대해 이야기 하다 돌아갔다.

한립은 려락이 금지를 벗어나기를 기다렸다가 품에서 일고여덟 벌의 진법 깃발과 원반을 꺼내 석실 주위의 금제를 완전히 새롭게 변화시켰다.

대진을 다녀오며 죽인 원영기 수사의 수가 적지 않았으니 그들의 저물대에서 얻은 진법 도구들도 상당했고, 예전부터 이곳을 지키는 금제가 영 미덥지 않았기에 이번에 마음먹고 강화를 해두려는 것이었다.

다시는 그가 없는 동안 반려에게 무슨 일이 생기는 것을 두고 볼 수 없었다. 진법 법기들을 이용해 진법을 펼치는 그의 손놀림이 엄청나게 빨랐다. 그는 겨우 한식경 만에 진법 설치를 마치고 전금아에게 미소를 지었다.

한립은 잠시 석실로 들어가 머물다가 웃는 얼굴로 걸어 나왔다.

“가자. 너를 위한 거처를 마련해주마! 앞으로 내가 소장하고 있던 진법 관련 경전의 일부는 네게 맡겨 놓을 것이다.”

그는 기분이 좋은 듯 소녀를 휘감고 날아올라 곧바로 그의 거처가 있는 자모봉으로 향했다. 순식간에 푸른 빛줄기가 금제 대전을 빠져나와 낙운종 동쪽에 위치한 자모봉 상공에 멈추었다.

한립이 소매를 털자 열댓 개의 금빛 비검들이 튀어나갔고 한 장 크기의 금빛이 번뜩이며 사라졌다. 이어 가부좌를 한 그가 수결을 맺더니 산허리쯤에서 쿠르릉 하는 큰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의 뒤에 서 있던 전금아는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요리조리 두리번거렸다. 한립의 수행에 겨우 작은 동굴을 파는데 오랜 시간이 걸릴 리 없었다.

“거처는 완성되었으니 내부는 알아서 꾸미도록 하여라. 필요한 것이 있으면 내 장로영패를 가지고 종문으로가 얻어오면 될 것이야. 나는 며칠 간 보물 몇 가지를 제련해야 하니 그동안 낙운종에 적응하고 있거라.”

“예, 사부님!”

전금아는 조금 들뜬 기색으로 답했다. 한립이 손바닥을 뒤집자 반짝이는 물건들이 나타났는데 영패, 깃발, 구슬, 비검, 거울 등 예닐곱 가지나 되는 각양각색의 법기들이었다.

“질이 나쁘지 않은 것들인데 네 수행으로도 간신히 부릴 수는 있을 것이다. 가지고 가 제련을 하고 호신용으로 쓰도록 하여라. 내 제자라면 스스로의 목숨 정도는 지킬 줄 알아야지. 영패는 자모봉 금제를 여는 법기이니 그것을 먼저 제련한 후에 드나들어야 할 것이다.”

“감사합니다, 사부님! 항상 명심하겠습니다.”

전금아는 한 눈에 법기들이 상급 또는 최상급이라는 것을 알아보았다. 이 정도면 결단기 수사가 써도 손색이 없을 정도였으니 그녀는 기뻐하며 법기들을 받아들었다.

한립이 가볍게 웃고는 푸른 빛줄기로 변해 자모봉의 가장 높은 봉우리인 모봉(母峰)으로 향했다.

* * *

떠난 지 거의 백 년 만에 자신의 거처로 돌아왔다. 그는 모든 것이 이전 그대로 인 것을 보며 잠시 감상해 젖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저물대 속의 영초와 영수들을 꺼내 서둘러 약재원에 심고 밀실에 넣어 두었다.

그리고 그는 밀실로 들어가 또 한 벌의 청죽봉운검들을 제련하기 시작했다.

이번에 그는 새로 얻은 경정뿐만 아니라 북야소극궁에서 대량으로 채굴한 만년현옥을 넣어 차가운 성질을 더해 위력을 높일 생각이었다.

한립은 제련이 끝난 후의 본명법보의 위력에 무척 기대가 됐다.

* * *

밀실로 들어간 한립은 꼬박 나흘 밤낮을 보냈다. 그가 흡족한 얼굴로 밀실을 나왔을 때 금제 밖에서 려락이 기다리고 있었다. 한립은 그가 온 이유를 짐작하고는 친히 마중을 나갔다.

“한 사제, 전 사질에게 들으니 보물을 제련하는 중이었다는데 이렇게 빨리 나올 줄은 몰랐네.”

“대진에서 새로 얻은 물건이 있어 제련하고 나오는 길입니다. 2, 3일이면 될 줄 알았는데 조금 오래 걸려 사형을 기다리게 하였습니다. 고검문과 백교원에서 찾아오기로 한 것 때문에 오신 것이지요?”

“그렇다네. 두 종문에서 장로들 전부가 오기로 했다네. 다들 사제가 벌써 원영 후기에 들었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겠지.”

“제가 만나보면 알게 되겠지요.”

“사제가 그렇게 해준다면 가장 좋겠지.”

차분한 한립의 말에 려락이 배시시 웃으며 답했다. 그들은 빛줄기로 날아올라 낙운종으로 향했다.

잠시 후 그들은 주봉의 대전 밖에 도착했다.

대전 입구에는 열댓 명의 축기기 수사들이 지키고 있었는데 한립과 려락을 보더니 공손히 예를 올렸지만 몇몇은 신기하다는 눈길로 한립을 힐끗거렸다.

이에 한립은 슬쩍 미간을 좁히며 코웃음을 쳤다.

아주 작은 소리였지만 려락과 제자들의 귓가에는 청천벽력과 같은 소리였다. 축기기 수사들은 가슴이 철렁해 서둘러 고개를 숙였고 감히 눈길도 돌리지 못 했다.

“오신 분들은 안에 계시더냐?”

“사조님들께 아룁니다. 고검문과 백교원의 선배님들이 안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려락의 물음에 기민한 제자 하나가 재빨리 답했다. 한립은 의식으로 대전 안의 수사들을 재빨리 훑어 수행을 모두 확인했다.

‘중기 둘에 초기 셋이라……. 두 종문의 대장로들이 전부 모였구나.’

한립은 조용히 먼저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려락은 순간 움찔했으나 분별 있게 한걸음 떨어져 뒤따랐고 모든 것을 한립이 주관한다는 느낌을 주었다. 그런데 몇 걸음 가지 않아 한립이 완전히 사라진 느낌을 받았다.

눈으로는 분명 보이는데 의식으로는 찾을 수 없었던 것이다. 려락은 조금 걱정이 되었다. 이런 일은 보통 고계 수사를 앞에 둔 저계 수사나 겪는 일이었다.

눈앞에 한립을 두고서도 의식으로 감지하지 못하니 상대가 마음먹고 기습한다면 바로 등 뒤에 설 때까지 까맣게 모를 것이다. 문제는 대전 안에 있는  수사들도 속을까 하는 점이었다.

물론 려락은 한립이 고검문과 백교원을 기선 제압 하려는 것이라 믿었지만 그래도 불안한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짧은 회랑을 지나 그들은 곧 대전에 이르렀다.

훽!

10개의 시선이 전부 려락에게 쏠렸다가 한립을 바라보았다. 려락은 그것을 확인하고서야 온전히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원영기 수사 다섯이 전부 한립이 다가오는 것을 감지하지 못했다는 뜻이었다.

그들은 안색이 달라지며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한 수사께서 원영 후기의 대수사가 되셨다더니, 저희 같은 중기 수사들은 기운을 찾아내지도 못하겠습니다.”

구불구불한 머리의 노인이 먼저 놀란 표정을 지우고 진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미소를 머금은 그는 고검문 대장로 금 노괴였다. 이어 보라색 장포를 입은 백교원의 열화 노괴가 재빨리 그에게 인사를 건넸다.

“맞습니다. 겨우 백여 년 만에 후기에 이르다니 한 형의 수련 속도가 정말 놀랍군요. 앞으로 이 기록을 깰 수사가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세상을 떠돌아다니다 우연찮게 기연을 만나 이리 되었습니다. 그보다 두 분께서 친히 낙운종을 찾아 주셨는데 제가 오래 기다리게 하여 실례가 되지는 않았는지 모르겠습니다.”

“우리 같이 수행을 쌓는 자들에게 이 정도 시간은 금방이지요.”

금 노괴가 웃음을 터트리자 한립이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다른 세 수사를 훑었다. 두 명은 새로 원영기에 든 장로들이었는데 온화한 인상의 여인은 백교원 의식에 참관했다 만났던 명형이라는 고검문 여수사였다.

당시 분별없이 비술을 사용해 그를 시험하려 들었던 것이 인상에 깊게 남아 있었다. 그런데 의식으로 그녀를 살핀 그가 의외라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명형 선자께서는 잘 지내셨습니까?  이제 거의 초기의 최고봉에 이르러 십여 년만 열심히 수련하시면 머잖아 중기에 다다를 것입니다.”

여인은 어색하게 서 있다가 그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 사실 한립이 대수사가 되었다는 소식에 가장 믿지 않았던 이는 바로 그녀였다. 이전에 백교원에서 만났을 때만 해도 비슷한 시기에 원영에 들었던 상대가 아닌가!

그녀는 특수한 이보를 지니고 있어 수련 속도가 다른 이들의 몇 배에 달했고 그 힘을 빌려 수차례 고비를 넘기며 고검문의 기재로 이름을 날렸다.

그런 그녀가 자신보다 어리면서 수행이 뛰어난 한립을 만났으니 참지 못하고 비술로 실력을 확인해 본 것이다.

비술이 통하지 않아 조금 놀라기는 했지만 이보의 힘을 빌려 한립을 따라 잡을 날이 머지않았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그런데 겨우 백여 년 만에 후기 수사가 되어 나타나 강대한 의식으로 그녀의 수행을 바로 알아맞힌 것이다.

“제 상황을 꿰뚫어 보시다니 과연 대단하십니다. 앞으로 운몽산에 한 형이 있어 다른 세력들은 넘볼 수 없겠습니다.”

“명형 선자의 말대로입니다. 한 사제의 나이로 보아 우리 운몽산이 앞으로 7, 8백 년은 아무 걱정도 없겠습니다. 누군가 운몽산을 넘볼까 두려워하기 보다는 이제 우리 세 종파가 운몽산 밖으로 나올까 두려워하게 될 것입니다.”

이때 려락이 여인의 말을 잇자 듣고 있던 이들의 표정이 달라졌다. 한립은 조용히 있다가 사라졌던 기운을 점점 돌아오게 해 원영 후기의 강대한 위압감을 내뿜기 시작했다.

다섯 수사들은 영기의 압력에 서 있기가 어려울 정도였고 이제 그에 대한 의심은 조금도 남아있지 않았다.

잠시 후 려락이 세 종문의 수사들이 어떻게 세력을 넓힐 것인지 상의하며 계국 전체의 수도계를 장악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대놓고 이야기하지는 않았지만 은연중에 고검문과 백교원이 낙운종에 부속된 종문처럼 이야기 되었고, 금 노괴와 보라색 장포의 열화 노괴는 시선을 마주치며 서로의 얼굴에서 어쩔 수 없다는 기색을 읽었다.

하지만 려락은 이를 알면서도 일부러 모른 척 했다.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