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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674화 (431/2,000)
  • # 674

    674화. 추마골의 이변

    낯선 얼굴의 두 사내는 각각 고검문과 백교원의 새로운 장로들이었다. 그들은 한립 앞에서 더욱 긴장하며 인사를 한 후에는 분별 있게 나서지 않았다.

    “남 형, 풍 수사께서는 먼저들 들어가시지요. 저는 종문을 오래 떠나 있던 터라 일단은 돌아가 며칠 쉬어야겠습니다. 그러고 나서 고검문과 백교원에 찾아뵙지요.”

    한립의 겸손한 언사에 화룡동자와 풍 노인은 연거푸 그럴 것 없다고 고개를 저으며 다른 장로들과 낙운종으로 찾아가겠다고 말했다. 그들은 사흘 후 다시 만나기로 약조하고 먼저 떠나갔다.

    “려 사형, 다른 종문에서는 새로 장로가 된 원영기 수사가 나왔는데 본 종은 아직 입니까?  어찌 사형께서 저를 맞이하러 홀로 나오셨는지요.”

    “거 참 사제 부끄럽게 되었군. 지난 백여 년간 사제의 위명에 기대 자질이 뛰어난 제자들을 꽤 거둬들였지만 아직 수행이 낮아서 말이야. 그래도 원영기에 이를 가능성이 있는 아이들은 몇 보이니 시간이 지나면 상황이 좋아질 걸세. 그런데 이 아이는…….”

    려락은 멋쩍게 답하다 한립 뒤에 선 전금아를 보았다.

    “제자로 거둔 아이인데 아직 정식으로 예를 올리지는 못했습니다.”

    “사백님을 뵙습니다.”

    한립이 웃으며 하는 말에 전금아가 영특하게 나서서 인사를 올렸다.

    “허허, 일어나거라! 사제가 정식으로 제자를 들일 줄이야. 사백으로서 별것은 아니지만 예전에 얻은 보호 법기를 주마!”

    려락은 웃음을 터트리며 저물대를 뒤져 붉은빛이 반짝이는 수정 구슬을 전금아에게 내줬다. 소녀가 멈칫하다가 기쁜 얼굴로 다시 허리를 숙이고는 법기를 받아들었다.

    한립은 그저 웃음으로 감사를 표하고 려락과 함께 낙운종으로 향했다.

    가는 동안 려락은 백여 년간 낙운종의 상황을 이야기해 주었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정 사형이 세상을 떠났다는 것과 남궁완이 아직도 저주에서 풀려나지 못했다는 점이었다.

    정 사형이 죽었을 거라고 짐작은 했지만 직접 들으니 마음이 편치 않았다.

    “사제 걱정 마시게. 사매가 아직 봉인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것은 사실이지만 이미 깨어났으니 별문제는 없을 걸세. 얼음벽 안에서 중요한 공법을 수련하는 중이라니 도리어 억지로 꺼낸다면 그간의 노력이 수포로 돌아갈 게야.”

    한립은 려락의 말에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보아하니 그의 예상대로 저주를 푸는 술법을 펼치지 않아도 남궁완은 큰 이상이 없는 듯했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힘들게 알아낸 술법이고 혹시 후유증이 있을지 모르니 저주를 푸는 술법을 펼쳐두는 것이 나을 것이다.

    이런 저런 이야기가 오가는 중에 그들은 낙운종 금제대진(禁制大陣) 앞에 이렀다. 오는 길에 려락이 전음부를 보내놨기에 그들이 날아들자마자 거대한 진법으로 만들어낸 짙은 안개가 꿈틀거리며 흩어졌다.

    뜻밖에도 산 전체의 진법을 완전히 거둔 것이다.

    한립이 멈칫해 무어라 말하기도 전에 수백 명의 축기기 수사들이 열댓 명의 결단기 수사들의 인솔 하에 날아올랐다. 그들은 양쪽으로 갈라져서 도열하더니 입을 모아 외쳤다.

    “낙운종 제자들이 한 장로님의 원영 대성(大成)과 산문 귀환을 경하 드립니다.”

    그들은 전부 흥분한 낯으로 한립을 향해 깊이 허리를 숙였다. 그가 원영 후기의 대수사가 되었다는 소식이 려락의 전음부를 통해 낙운종 제자들에게도 알려졌던 것이다.

    자신이 속한 종문에서 대수사가 나왔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들도 똑똑히 알고 있었다. 낙운종은 단숨에 천남의 대형 종문 반열에 들어감은 물론이고 그들이 누릴 수 있는 수도자원의 양도 이전과는 확연히 달라질 것이다. 그러니 제자들이 기뻐하는 것은 당연했다.

    한립은 옆에선 려락을 향해 쓴웃음을 지었다.

    “려 사형, 이렇게 거창한 인사를 받을 생각은 없었습니다.”

    “그 무슨 말인가. 사제가 대수사가 되어 돌아왔는데 당연히 성대하게 맞이해야지! 얼마 후 연회도 열 생각이네. 사제의 신분에 맞게 다른 종문의 장로들도 초청하고 말이야.”

    “사형 뜻대로 하시죠. 허나 저는 이런 일에 큰 관심이 없으니 기껏해야 얼굴이나 잠시 비추겠습니다.”

    어쩔 수 없이 한립도 동의했다.

    천남의 관례대로라면 원영 후기에 이른 수사가 성대한 의식을 거행하는 것이 옳았다. 천남 전역에 새로운 대수사가 등장했음을 공표하고 그에 따라 종문도 걸맞은 명성을 지니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한립이 무턱대고 반대할 수만은 없었다. 수많은 제자들에 둘러싸여 낙운종으로 돌아온 한립은 바로 커다란 대전 안으로 들어갔다.

    한립의 자리는 대전 중앙이었고 려락은 그와 나란히 앉았지만 살짝 구석으로 밀려났기에 누가 봐도 그를 상석에 앉힌 것이다.

    그것을 본 한립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원영 후기 대수사가 있는데 그가 종문의 대소사를 주관하지 않는다면 안팎으로 보기가 좋지 않았고 문제가 생기기 십상이었다.

    그렇기에 한립도 이 일을 묵인하며 대전 중앙에 앉아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어쨌든 오랜 세월 종문을 떠나 있어 내부 사정을 모르니 모든 일처리를 려 사형이 맡는 것이 온당했다.

    려락은 원영기 수사로서는 실력이 탁월하지는 않았지만 종문을 관리하는 능력은 뛰어났다. 그는 먼저 새로 결단기에 이른 제자들을 불러 한립에게 하나씩 인사를 시켰고 이후 정식으로 한립이 원영 후기에 이르렀음을 선포했다.

    흥분한 제자들은 곧 있을 대규모 의식과 관련한 임무를 나눠 받았는데 그 동안 한립은 조용히 문하 제자들을 훑어보았다.

    이곳에 있는 이들이라면 대부분이 결단기 제자였고 가끔 전문적인 업무를 맡는 축기기 집사들도 있었다. 그의 시선이 제자들에게 닿자 그들은 감히 마주보지 못하고 고개를 숙여 존경을 표했다.

    그런데 한립은 그중에 자신의 기명제자인 류옥과 백봉봉의 송 여인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멈칫했다.

    “려 사형, 송 사질이 보이지 않습니다. 다른 임무를 맡아 산문을 나선 것입니까?”

    “아직 그 얘기를 안 했구만. 송 사질은 추마골에 갔네! 제련하고 싶은 연단이 있는데 거기에 필요한 진귀한 영초가 부족하다고 말이야. 이미 멸종되었다고 알려진 영초인데 누군가 추마골에서 그 영초를 구해왔다더군.”

    “추마골에 들어갔단 말입니까?”

    “그 영초는 추마골 외곽에서도 찾을 수 있다 하니 안심해도 될 걸세! 이유는 모르겠지만 지난번 사제가 들어갔다 나온 후로 중심부는 아주 위험천만해졌지만 외곽은 시간이 지날수록 금제의 힘이 약해졌지. 공간균열도 대부분 사라져서 몇몇 위험 지대와 숨어 있는 요수들만 피하면 괜찮을 걸세.

    그래서 지난 수십 년 동안 추마골 외곽에 들어가 득을 본 수사들의 수가 상당하네. 그러고 보니 류 사질과 사제의 시첩 역시 함께 갔다네. 그들 모두 결단기 수사인데다 좋은 보물들을 지녔으니 별 탈 없을 게야.”

    “추마골이 그렇게 변했다니……. 류옥과 모패령도 갔단 말입니까?”

    “그렇네. 무슨 영단 묘약을 남겨 두고 갔던지 사제의 시첩이 백 년도 되지 않아 결단 중기에 이르렀더군. 수련 속도가 너무 빨라 나도 놀랐을 정도야. 아마 원영을 이루는 것도 불가능하지는 않을 듯하네.”

    려락이 모패령을 떠올리며 혀를 찼다.

    “모패령은 자질이 원래 뛰어난 편이었습니다.”

    한립은 대답을 하면서도 생각에 빠져들었다. 당시 십여 년이면 대진에서 돌아올 수 있을 거라 여겼기에 그리 많은 단약을 남기지 않았었다.

    만일 단약이 충분히 공급되었다면 그녀는 이미 결단 후기에 이르렀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미 스스로 원영 후기에 이르렀고 전봉배원공의 효과는 오직 원영기 수사에게만 있었다.

    화신기에 이르는 데는 아무 소용이 없으니 그녀의 거취에 대해 생각해볼 때였다. 다들 그녀가 자신의 시첩인줄 알고 있으니 이제 와서 자유롭게 놓아준다고 해도 어떤 사내가 접근하겠는가?

    그는 려락과 잠시 이야기를 나누다 남궁완을 보러가야겠다며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한립은 전금아를 잠시 대전에 나두고 홀로 낙운종의 금지로 향했다.

    잠시 후, 금지 속 석실 앞에 나타난 그는 떨리는 마음으로 금제를 풀고 석문 안으로 들어갔다. 석실은 여전히 깨끗하게 관리되어 있었고 떠날 때와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수정처럼 빛나는 얼음벽도 그대로였다. 유일하게 다른 점은 빙벽 안의 여자 아이가 본래의 절색의 미모를 되찾고 눈을 감고 있다는 것이었다.

    한립의 신형이 흐릿해지면 순간이동을 하듯 빙벽 앞으로 다가섰다. 고요히 여인을 바라보는 그의 눈빛이 흔들렸다. 바로 그때, 여인의 속눈썹이 움찔거리더니 천천히 눈이 떠지며 그와 시선이 마주쳤다.

    두 사람은 마치 얼어붙기라도 한 듯 일순 입을 떼지 못했다.

    “돌아왔네요. 고생 많았어요!”

    한참 후 미소를 머금은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 * *

    추마골 중심부 깊은 곳.

    이름 모를 거대한 산의 중턱에서 경천동지할 굉음이 터져 나왔다. 농염한 검은 기운이 동굴을 빠져나와 수백 장을 뒤덮으니 마신이 강림하듯 기괴한 분위기가 감돌기 시작했다.

    “고마가 남긴 마기를 이용해 백여 년도 안 돼 원영 중기에 이르고 현음마기의 마지막 2성마저 수련해 냈다. 위험을 무릅쓰고 추마골에 오길 잘했어. 이제 이곳을 돌며 쓸 만한 보물 몇 가지만 찾아 나가면 누가 나를 어쩔 수 있겠느냔 말이다.

    그 후 마기의 심연에서 마기를 주입하면 원영 후기에 이르는 것도 어렵지 않을 터! 다른 마수들은 몸이 터져나갈 일이지만 나는 본래 마시(魔尸)의 몸이니 두려울 것이 무엇인가! 그때가 되면 그자의 원신을 잡아먹는 것도 간단하겠지. 그럼 그가 곧 나이고, 내가 곧 그가 되는 것이야. ……이 세상에 나만이 유일한 ‘한립’이 되는 것이다.”

    목이 쉰 듯 날카로운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리며 기괴한 웃음을 흘렸다.

    * * *

    추마골 외곽의 대나무 숲.

    붉은 빛덩이가 대나무 틈에서 뻗어 올라 빙글 돌고는 바람처럼 달아나려 했다. 그러나 각기 다른 세 가지 검빛이 엄청난 속도로 그 뒤를 쫓아 붉은 빛덩이를 따라잡았다.

    세 검빛이 휘몰아치자 붉은 빛덩이가 이상한 소리를 내며 한 장이 넘는 거대 새의 모습으로 추락했다. 하얀 빛줄기가 대나무 숲에서 튀어나와 추락하는 괴조의 잔해를 향해 다가가는데 하얀 장삼을 입은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여인이 허공을 쥐자 괴조의 잔해 속에서 보라색 영초가 솟아올라 그녀의 손에 들어왔다.

    “류 사저, 이번에는 어떤가요?”

    다른 두 줄기의 빛이 대나무 숲을 따라 올라와 하얀 장삼을 걸친 여인 옆에 나타났다. 그중 노란 장삼의 여인이 먼저 입을 열었다.

    “우리가 찾던 것은 아니야. 이건 자염화(紫焰花)였어!”

    “모 사매, 조급해 할 것 없어. 외곽 일부를 찾은 것뿐이니 다른 곳에서 환령초(幻靈草)를 찾을 수도 있잖아.”

    백의 여인이 쓴웃음을 보이자 푸른 궁장 차림의 여인이 담담히 미소 지었다. 여인들은 류옥, 모패령 그리고 백봉봉의 송 여인이었다.

    그들은 추마골 외곽을 벌써 보름째 뒤지며 몇 가지 신기한 영초를 구했지만 아직 환령초만은 찾지 못하고 있었다.

    류옥과 모패령은 조바심이 일었지만 송 여인은 언제나 침착한 태도를 유지했다.

    “맞는 말이지만 다른 곳을 찾아보려면 위험을 감수해야 할 거예요. 아직 공간균열이 남아있는 곳도 많으니까요.”

    “이미 공간균열은 대부분 사라졌잖아. 조심해서 다니면 큰 위험은 없을 거야. 게다가 이번에 제련하려는 단약이 결단기 수사들에게 얼마나 중요한데 그 정도 위험은 감수해야지.”

    류옥이 미간을 좁히며 걱정스럽게 중얼거리자 송 여인이 가볍게 미소 지었다.

    “송 사저 말이 맞아요. 저도 고비가 와서 수련을 해도 소용이 없으니 반드시 단약이 필요해요!”

    모패령이 잠시 생각하다 한숨 쉬듯 말했다.

    “송 사저와 모 사매의 뜻이 그렇다면 저도 끝까지 함께 할게요.”

    류옥이 맑은 눈빛으로 빙그레 웃었다. 세 여인은 의견이 일치하자 다른 방향으로 빠르게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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