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73
673화. 전생과 현생
“저를 부르신 것입니까?”
봉지라는 노인은 정말 자신을 부른 것이 맞는지 헷갈리는 눈치였다.
“너를 부른 것이지 그럼 누굴 불렀겠느냐? 너는 원래 이곳에 기거하였었으니 어서 나와 선배님의 하문에 답하거라!”
유생은 자신의 제자가 굼떠 한립이 불쾌하기라도 할까봐 무섭게 다그쳤다.
“예! 바로 가겠습니다.”
노인은 천천히 날아와 유생 옆에 섰다.
“네가 원래부터 이곳에 살고 있었다고?”
“선배님께 아룁니다. 저는 입문하기 전부터 이곳에 살고 있었습니다.”
“축기는 어떻게 하게 된 것이더냐?”
고개를 끄덕인 한립의 질문은 모두의 추측을 빗나갔다.
“어머니께서 생전에 어느 고인께 받은 축기단을 주셨기에 순조롭게 축기를 할 수 있었습니다.”
“네가 매 여인의 자손이었구나.”
한립의 표정이 온화하게 변했다.
“……설마 저희 외할머니를 아십니까? 아, 그 축기단을 주셨다는 선배님이!”
봉지는 멍한 얼굴로 중얼거리다가 무언가를 깨닫고는 소리쳤다.
“바보는 아니로구나.”
“단약을 내려주신 큰 은혜는 항상 마음속 깊이 새겨 두고 있었습니다.”
축기기 노인은 반갑고 기쁜 마음에 황급히 허리를 숙이며 인사했다.
“너의 외조모와도 인연이 있었는데 이후 또 너희 어미를 만나 축기단을 내준 것이다. 그런데 아직까지 축기 중기에 머물러 있다니 자질이 뛰어나지 않았던 모양이로구나! 지금은 나이를 먹고 기운이 쇠해 더 멀리 나아가기는 어렵겠어.”
“제가 부족해 선배님을 실망시켜 드렸습니다.”
봉지는 노인의 얼굴을 하고서도 얼굴을 붉히며 부끄러워했다.
“실망이라 할 것까지는 없다. 그런데 화령문이 어찌 이곳에 종문을 연 것이더냐? 이전에 너희 외조모를 모시던 거처가 이곳이란 것을 모른 것이냐? 그녀는 내 오랜 벗이라 할 수 있건만.”
돌연 그가 얼굴을 굳히니 분위기가 싸늘해졌다. 그 모습에 곁에 서 있던 유생과 노인의 얼굴은 그야말로 흙빛이 되었다.
“저도 약간은 들어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신 수사님이 당시 기거하시던 대나무 집은 온전히 다른 곳으로 옮겨 아직까지 보존하고 있고요. 그것이 제가 이 산을 종문에 받치는 조건이었습니다.”
봉지가 가슴이 철렁해 서둘러 해명했다.
“그랬구나.”
한립이 결단기 수사들을 향해 시선을 옮겼다.
“맞습니다. 선배님. 이곳은 저희 화령문의 산문이 아니라 임시 거처로 원무국에 처리할 일이 있어 여러 제자들을 이끌고 온 것에 불과합니다. 신 수사의 옛 가옥은 그대로 보존하고 있으며 저희는 손도 대지 않았습니다.”
“알겠다. 그러나 이곳은 내 오랜 벗이 머물던 곳이고 다른 수사들이 머무는 것을 원치 않는다. 그러니 앞으로 어찌해야 할지 알 것이다.”
한립은 냉랭한 시선으로 유생과 노인을 쳐다보았다.
“알겠습니다. 바로 이곳에서 철수하고 제자들이 머물 다른 곳을 찾겠습니다.”
“알아들었다니 다행이구나. 너는 신 수사의 거처가 있는 곳으로 안내하거라.”
한립은 그들을 놔두고 축기기 노인에게 일렀다.
“예! 바로 모시겠습니다.”
봉지는 곧바로 유생에게 인사하고는 법기를 탄 채 산봉우리의 다른 쪽으로 날아갔다. 그리고 한립도 푸른빛을 방출해 전금아를 휘감고는 그 뒤를 따라갔다.
“저 선배가 원영 후기의 수사라니 확실한 것입니까? 모습은 삼대수사와 닮지 않았는데요.”
봉지와 한립이 사라지자 유생이 입술을 달싹이며 노인에게 전음을 보냈다.
“아마 맞을 거네. 영기의 압력이 사부님보다 몇 배는 강했어. 하지만 삼대수사는 아닌 듯하니 우리 천남에 드디어 네 번째 대수사가 출현한 것인가!”
“정말이라면 천남에 새바람이 불겠습니다.”
“이 이야기는 나중에 다시 하세! 상대의 정체가 무엇이든 하루라도 빨리 이곳에서 철수해야 하네.”
“사형의 말이 맞습니다. 그럼 제가 당장 명을 내리지요! 겨우 좋은 자리를 차지했는데 이리 떠나자니 아쉽습니다.”
유생은 한숨을 내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흥! 이미 충분히 운이 좋았다는 것을 왜 생각하지 못하느냐. 봉지를 본 문에 받아들였으니 망정이지 아니었다면 무슨 짓을 당했을지 어찌 알겠는가. 그런데 저계 제자 중에 저런 대수사와 인연이 있는 자가 있을 줄이야. 봉지의 선조는 누구이기에 여기까지 찾아온 것일까?”
새까만 노인이 미간을 좁히며 물었다.
“저도 정확히는 모르지요. 봉지를 제자로 받은 것은 오래전이지만 축기기 수사라 거둔 것이지 자질이 평범해 눈여겨본 적도 없어요. 다만 이곳에 있던 대나무집의 원주인에 대해 물어보기는 했습니다. 금제가 간단해도 꽤 오묘한 구석이 있었으니까요. 그런데 겨우 연기기 수사였다는 이야기에 그마저도 신경을 껐죠.”
“연기기 수사와 원영 후기 수사라……. 아무리 오래 전 일이라지만 벗이라기에는 너무 격차가 크군.”
노인이 알수 없다는 말투로 중얼거리자 유생이 쓴웃음을 지어 보였다. 이어 그들은 더 이상 지체하지 않고 명을 내렸다.
이때 한립과 전금아는 파릇파릇한 기운이 가득한 대나무집에 들어와 있었다. 내부는 더없이 깨끗했고 세월의 흔적을 느낄 수 없었다. 봉지가 옆에 서서 안내를 하며 자신의 공로를 담아 자세히 설명했다.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어머니의 분부를 받들어 정기적으로 영기의 빛을 쐬어준 덕에 썩지도 않고 예전 모습 그대로입니다. 물론 청소도 꼼꼼하게 해두었고요.”
“오, 성실하게 이곳을 지켜왔구나.”
한립이 입 꼬리를 올리며 대청으로 들어가 주위를 살폈다.
물건들은 그대로인데 그 주인만 세상을 떠나고 없었다. 감회에 젖어 있던 그가 곁에 있는 전금아의 표정을 살피다 움찔했다.
소녀의 맑은 눈이 대나무 탁자와 의자 등을 살피는 데 여념이 없었고 무엇에 홀린 듯 정신을 차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 모습에 한립의 마음이 복잡해졌다.
잠시 후 그가 축기기 노인에게 손을 저으며 말했다.
“제자와 이곳에서 하루 머물 것이니 내일 다시 오거라.”
한립의 말에 노인은 공손히 대답하고는 조용히 밖으로 나섰다. 그 즉시 한립의 신형이 흐릿해졌다.
대청 한 구석에 가부좌를 하고 앉아 눈을 감고는 전금아가 신여음의 거처를 천천히 둘러보게 기다린 것이다.
이튿날 아침 봉지가 긴장한 얼굴로 다시 이곳을 찾아 왔을 때는 대나무 탁자에 두 병의 이름 모를 단약만 남겨져 있을 뿐, 한립과 소녀는 사라진 후였다.
노인은 그것을 보고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원영 후기 수사가 남긴 단약이니 엄청난 가치를 지닌 단약일 것이다.
그 시각 한립은 전금아를 데리고 벌써 백만 리 밖을 날고 있었다.
“사부님, 그곳에 저를 데려가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혹시 저와 관련이 있는 곳인가요?”
“이전에는 나도 확신할 수 없었지만 지금 보니 그런 것 같구나.”
“저와 어떤…….”
“윤회와 전생을 믿느냐?”
소녀가 질문을 던지기 전에 한립이 말을 끊고 먼저 물었다. 그러자 청초한 소녀의 안색이 확연히 달라졌다.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습니다.”
“대나무집에서 하루 동안 머물러 보니 느낌이 어떻더냐?”
“잘 모르겠지만 느낌이 이상했습니다.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이상한 느낌이요.”
“그곳은 예전에 내 벗이 지내던 곳이다. 용음지체(龍吟之體)를 지니고 천부적인 재능을 지닌 진법사였는데 어린 나이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지.”
“사부님께서 구해주시지 않으셨나요?”
“그때는 결단도 하지 못했는데 어찌 그녀를 구할 수 있었겠느냐. 게다가 그녀는 사정이 있어 이 세상에 미련이 없었다. 내가 이전에 보라고 준 진법서도 그녀가 남긴 것이지. 신 수사보다 먼저 제운소라는 수사와도 인연을 맺었는데 내가 막 축기에 이른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그때 경매회를 참가하기 위해…….”
한립은 조금도 성가셔하지 않고 제운소를 만난 것부터 신여음을 알게 된 일들까지 차근차근 이야기 해주었다. 그는 다시 돌아와 신여음의 시녀였던 여인의 자손을 만난 데까지 전부 이야기하고서야 입을 다물었다.
전금아는 내내 입을 다물지 못하다가 복잡한 눈빛으로 말했다.
“사부님은 저를 그분이 윤회해 다시 태어난 것이라 생각하시는 거군요!”
“이전에는 의심이었지만 너를 데리고 대나무집을 다녀오니 5할 정도 확신이 드는구나. 보아하니 윤회가 아예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던 게지.”
“그럼 사부님이 저를 거둬주신 것은…….”
전금아는 조금 불안해했다.
“걱정 말거라, 너를 제자로 받아들인 것은 진심이니! 신 수사와는 친분도 있었지만, 그녀의 천부적인 진법가로서의 재능에는 탄복할 정도였지. 너를 제자로 받은 것은 신 수사와의 정을 보아서이기도 하지만 너를 진정한 진법대사로 키워 유용하게 쓰려 함이다. 물론 지금이라도 네가 내 제자가 되기 싫다면 난성해로 돌려보내 주마.”
“제가 사부님의 벗의 환생인지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사부님께서 대수사의 신분으로 일개 연기기 수사인 저를 제자로 받아 주셨는데, 그런 기회를 포기할 만큼 어리석지는 않습니다.”
전금아는 당황해 연신 고개를 저으며 혹시 한립이 그녀를 원치 않을까 걱정했다.
“좋다. 내 문하에 들어온다면 다른 것은 몰라도 결단기까지는 무사히 이를 수 있게 도와주겠다.”
“사부님의 제자가 되고 싶습니다.”
“낙운종으로 들어가면 정식으로 거두어 주마. 난 이전에 정식으로 제자를 들인 적이 없다. 기명 제자가 한 명 있으니 돌아가는 대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 말에 소녀가 안심하며 동행한 후 처음으로 배시시 웃어 보였다. 이어 한립이 전신의 법력을 북돋자 둔광이 몇 배로 빨라지며 순식간에 하늘 저편으로 사라져갔다.
* * *
몇 달 후, 한립은 소녀를 데리고 계국 국경 안으로 진입했다.
다시 며칠이 지나 눈부신 푸른빛이 운몽산맥 인근 백리 밖에 이르렀을 때 갑자기 하늘을 울리는 우렁찬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용의 울음소리 같기도 하고 봉황의 울음소리 같기도 한 포효는 허공의 구름마저 몸을 떨며 흩어지게 만들었다. 엄청난 속도의 푸른 빛줄기는 몇 번 번뜩이자 수십 리를 날아갔고 강력한 영력은 운몽산맥의 삼대종문 전체를 뒤흔들 만했다.
위로는 원영기 장로부터 아래로는 연기, 축기기의 보통 제자들까지 멀리서 들려오는 고함소리에 깜짝 놀라고 말았다. 특히 원영기 노괴들은 즉시 종문을 나서 어떤 고인이 나타났기에 운몽산맥에서 이렇게 거침없이 행동하는 것인지 확인하려 했다.
이렇게 한립이 막 산 외곽 10리까지 근접했을 때 마주 오는 빛줄기 다섯 개를 보게 되었다. 그는 다시 남궁완을 볼 생각에 마음의 평정을 유지하기 어려운 상태였다.
한립이 빛을 거두자 고함소리도 멎었고 그와 전금아가 허공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잠시 후 그의 얼굴에 보기 드문 미소가 어렸다. 다섯 빛줄기 중 대부분이 낯익었던 것이다. 3, 40장 앞에서 빛줄기들이 빛을 거두고 수사들이 나타났다.
“한 사제, 정말 자넨가!”
남색 장포를 입은 중년인이 멀리서 한립의 얼굴을 확인하고는 기뻐하며 소리 질렀다. 그는 한립을 입문시켰던 낙운종 려락이었다.
“려 사형, 그간 무탈하셨습니까!”
한립이 밝게 웃으며 려락을 향해 포권을 했다.
“누가 이렇게 신통이 뛰어 난가 했더니 한 수사께서 돌아오셨군요. 헛! 한 형, 벌써 후기에 이른 겁니까?”
사내아이의 모습을 한 붉은 장포 수사는 고검문 화룡 동자였다. 그는 귀신이라도 본 듯 기겁한 얼굴이었다.
“남 형께서도 이미 중기에 이르셨군요?”
“겨우 중기에 이른 것과 수사께서 대수사의 반열에 오른 것이 어디 비교가 되겠습니까.”
화룡동자는 놀란 마음을 추스르며 얼떨떨하게 말했다. 다른 이들도 화들짝 놀라 동시에 의식으로 한립을 훑고는 눈을 부릅떴다.
특히 려락의 목소리가 부들부들 떨려왔다.
“정말이었어. 사제가 벌써 후기의 대수사가 되었다니.”
“이번 여정에서 수확이 많아 운 좋게 후기에 이를 수 있었습니다.”
려락은 크게 기뻤지만 일순 무어라 말해야 할지 몰라 그저 입이 찢어져라 웃고 있었다.
“축하드립니다, 한 형! 겨우 백여 년 사이에 수도의 길에서 멀리도 가셨습니다. 보아하니 저희 운몽산 수사들이 천남 전역에서 위세를 떨칠 날이 머지않았습니다.”
그는 백교원의 풍 장로로 한립이 후기에 이른 것을 확인하고는 열기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다들 한립 앞에서 자연히 고개가 숙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