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신공-671화 (428/2,000)

# 671

671화. 천남 복귀

“네 뜻이 그렇다면 지금부터 시작하자. 은과문이 처음으로 나타났을 때는 진선계에서 유실되어 영계로 흘러든 물건 중 일부에 각인이 된 채였다. 영계의 수사들이 오랜 시간과 공을 들여 하나하나 정리해 해석해낸 것이지.

물론 진정한 선가의 해석과는 어긋나겠지만 차이가 크진 않을 것이다. 일단 부적을 제련하는데 가장 많이 쓰이는 문자부터 설명하자면…….”

사내아이는 한립의 둔광 속에서 느긋하게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당연히 이런 기회를 놓칠 리 없는 한립은 정신을 집중하며 이야기를 듣고 궁금한 점이 있으면 곧바로 물어보았다.

이렇게 두 달이 지나 한립이 은과문에 대해 대충 파악할 무렵 드디어 규성도 인근 해역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이 날도 어김없이 아이의 설명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데 앞쪽에서 검은 점이 나타났다. 멀리서 그것을 본 한립은 속도를 높여 순식간에 가까워졌다.

그곳은 둘레가 6, 70리 밖에 되지 않는 작은 섬으로 미미하게나마 영맥이 흐르고 있었다. 수백 장 위에서 섬을 내려다보던 한립은 내심 세월의 무상함을 느꼈다.

이곳은 바로 그가 기거했던 소환도(小寰島)였던 것이다. 이 섬을 떠날 때만 해도 금단에 성공하지 못했었는데 이제는 원영 후기 대수사가 되어 돌아오게 되었다.

‘수행에 대한 의지는 굳었지만 지금의 경지가 될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지!’

고요히 허공에 떠 있던 그가 마음을 정리하고는 푸른빛으로 변해 다시 날아갔다. 소환도가 나왔다는 것은 머지않은 곳에 규성도가 있다는 말이었다.

과연 반나절 후 멀리서 규성도가 어른어른 보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는 항구에 있는 입구가 아니라 주변을 돌아 섬 전체를 뒤덮은 하얀 금제로 뛰어들었다.

쾅!

굉음이 울리고 충돌한 부분의 보호막이 격렬히 흔들리더니 한립이 그곳을 뚫고 지나갔다.

그러자 섬 내부에서 여러 둔광들이 당황한 채 보호막 쪽으로 날아들었고, 축기기 수사들은 보호막을 살핀 후 흩어져 주변을 수색했지만 아무것도 찾아내지 못했다.

그 시각 한립은 벌써 천 리 밖의 어느 산꼭대기에 내려 품에서 우윳빛의 원반을 꺼내 들었다.

한립이 주술을 외자 원반 표면에서 푸른빛과 하얀빛이 섞이며 눈부신 빛을 뿜어내더니 한손으로 원반을 가볍게 건드리자 빛이 사라지며 거울처럼 변한 표면에 붉은 점이 나타나 반짝였다.

한립이 흡족하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원반을 들고 떠올랐다. 잠시 후 하늘 높이 뜬 그가 으슥해 보이는 장원을 내려다보며 의아해했다.

“여기에 문사월의 일가가 머물고 있는가?”

한립이 중얼거리며 화려한 둔광을 내뿜고 있자니 아래에 있는 범인들이 소란스러워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건물 속에서 두 개의 빛이 날아들어 그의 앞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노인과 중년인 모두 축기기 수행을 지닌 자들이었다.

“너희는…….”

한립이 그들을 훑으며 미간을 좁혔다. 다가온 이들도 그의 용모를 확인하고는 화들짝 놀라 서둘러 예를 올렸다.

“한 선배님을 뵙습니다. 저희가 선배님이 오신 것도 모르고 오래 기다리시게 하였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그들은 문사월 부부가 대동하고 있던 네 명의 축기기 제자들 중 일부였다.

“너희 사부는 어디에 있느냐?”

“이곳은 제자가 거둬들인 기명제자의 거처입니다. 지금 사부님과 사모님께서는 이곳이 번잡하다며 사매를 데리고 산속에 임시 거처를 마련하여 지내고 계십니다.”

노인이 공손히 답했다.

“네가 거둬들인 기명제자라고?  고 씨 가문의 장자를 알고 있더냐?”

“예! 선배님께서 고 가를 아십니까?”

“고 가의 가주와 약간의 인연이 있었지. 200년이 넘은 일이지만 말이다.”

“예?  그런 일이…….”

“이곳에 다시 돌아오게 된 것도 인연이겠지. 일단은 네 사부를 보러 가야하니 나중에 고 가의 기명 제자를 불러오너라.”

“예! 존명!”

노인은 기뻐하며 대답했다. 한립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인근 산에서 문사월 부부의 기운을 느끼곤 곧장 날아갔다.

잠시 후 그는 작은 산 중턱에 내려 평범해 보이는 비탈을 향해 손을 저었다.

파앗!

푸른 기운이 암석에 닿아 폭발했고 비탈이 신기루처럼 사라지며 거대한 석문이 나타났다. 하얀빛이 표면에서 반짝이는 것으로 보아 금제를 걸어놓은 모양이었다.

한립이 손을 뻗어 불덩이를 날리자 불덩이가 석문 안으로 빠르게 사라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안쪽에서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한 선배님, 와주셨군요. 잠시만 기다려 주시면 저희 부부가 맞이하러 나가겠습니다.”

목소리가 사라지고 석문이 반짝이더니 쿠르릉 하며 활짝 열렸다. 안에서 나온 이들은 문사월 부부와 그들의 여식 전금아였다.

한립은 소녀를 보고 속으로 조금 놀랐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초췌하게 말라 볼품없던 아이가 어느덧 청초한 소녀로 변해 있었다. 그녀의 어미를 닮아 꽤 미인이었다.

“한 선배님을 뵙습니다. 이렇게 빨리 오실 줄도 모르고 먼저 나가 마중하지 못하였으니 저희의 불찰입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문사월이 활짝 웃으며 예를 올렸다.

“일이 순조롭게 풀려 원래 계획보다 일찍 도착하였다.”

“저희도 선배님이 오시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안으로 들어가 이야기 하시지요.”

문사월이 빙그레 웃으며 몸을 틀어 안내했다.

“그래, 나도 저 아이가 얼마나 진법서를 깨우쳤는지 확인해 보고 싶구나. 만족스럽다면 내 문하에 받아들여야겠지.”

고개를 끄덕인 한립은 표정 변화 없이 소녀를 쳐다보았다. 전금아는 그의 시선에 얼굴이 붉어져 고개를 숙였고 문사월 부부는 기뻐하며 서둘러 한립을 동굴 안으로 모셨다.

그렇게 하루가 흘렀다.

그동안 문사월 부부의 축기기 제자들이 거처로 찾아와 인사를 올렸고 그 중 노인은 어린 청년을 대동한 채였다. 또 하루가 지나고 푸른 빛줄기가 산을 떠날 때에는 희미하게 남녀의 윤곽이 드러났다.

* * *

한 달 후, 난성해와 까마득히 먼 대륙 천남 월국 국경 안.

거대한 협곡에 검은 장포를 입은 수사 몇이 법기를 타고 날아들었다. 다들 풍채는 좋았으나 날아가는 속도는 느린 것이 저계 수사들 같았다.

그들은 산골짜기 한쪽에 은밀하게 숨겨진 동굴 속으로 조용히 숨어들었는데 열댓 장을 더 가니 금제로 인한 영기의 빛이 반짝였다.

험악한 얼굴의 흑의 거한이 우두머리인지 한발 앞서 수결을 맺으며 주술을 읊었다. 한참 후에 두 팔을 펼치며 법결을 날리니 금제가 걸린 석문이 천천히 올라갔다.

“이번엔 어떤 사제가 이곳까지 찾아 온 겐가?”

새까만 기운이 밖으로 빠져나와 음산한 기운을 흩날리는 창백한 얼굴의 노인으로 변했다.

“오, 누군가 했더니 맹 사제 였구만 그래. 다음 당번이 사제였던가?”

노인은 흑의 거한의 얼굴을 확인하고는 곧바로 미소를 지었다. 그도 그럴 것이 노인은 축기 초기였지만 거한은 축기 중기 수사였던 것이다.

“맞습니다, 범 사형! 명을 받고 체 사형을 대신해 광맥을 지키러 왔습니다. 저 안쪽이 광맥의 입구가 맞겠지요?”

“성질도 급하구만. 맞네, 이곳이 바로 광맥의 입구지. 그런데 데려온 제자들은 이게 다인가?  너무 적은데?”

노인이 거한 뒤의 수사들을 보며 의심스러워했다.

“지금 우리 귀령문의 상황이 이전과 다릅니다. 제자들이 대부분 어령종과 마염문을 방비하는 일에 치중해 이 정도도 겨우 모아온 것입니다.”

“그건 그렇지! 그 인원으로는 이곳을 꾸려나가는데 고생 좀 하겠어.”

“됐으니 일단 광맥을 안내해 주시지요.”

거한은 벌써부터 동굴 안쪽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래야지. 나를 따라 들어 오게나!”

노인이 법결을 던져 석문을 다시 봉하고는 거한을 데리고 안으로 들어갔다. 이리저리 여러 통로를 돌아가자 바닥에 몇 장 너비의 균열이 나타났고 안에서 비추는 하얀 빛으로 보아 지하 통로가 뚫려 있는 것 같았다.

그곳 입구에 앉아 있던 검은 장포의 연기기 수사 둘이 노인과 거한 등이 걸어오는 것을 보고 황급히 예를 올렸다.

노인은 손을 저어 답하고는 거한 일행을 데리고 균열 속으로 내려갔다.

일각 후, 그들은 지하 통로를 절반 정도 돌아보고 있었다. 광맥을 파내려가느라 길은 굉장히 복잡했고 많은 범인 청장년층들이 비지땀을 흘리며 영석을 파내고 있었다.

노인은 길을 안내하며 익숙하게 이런저런 것들을 설명했다. 그가 이곳을 관리한지도 벌써 10년이 넘었던 것이다.

한참을 돌아보고 있는데 앞에 통로가 나타났고 아래쪽으로는 더 깊은 지하로 연결된 곳이 있었다. 흑의 노인은 고개를 저으며 뜻밖에도 거한 일행에게 그곳은 소개하지 않고 돌아가려 했다.

“범 사형, 이곳은 왜 그냥 지나치십니까?  지하로 통하는 통로인 것 같은데요.”

“거긴 오래 전에 금지(禁地)로 정해진 곳인데 지금은 버려진 지 오래네.”

“금지요?  무엇이 있기에 그리됐습니까.”

“별다른 것은 없고 상고 전송진이 하나 있네. 하지만 사용할 방법이 없으니 처음에는 금지로 정해 지키다가 나중에는 방치한 것 아니겠는가?  나도 정확한 사정은 모르지만 아마 왕선 사숙과 관련된 일로 그리된 것 같네.”

“왕 사숙님이라면 본래…….”

거한도 왕선이라는 이름에는 놀란 듯했다.

“사제도 알겠지만 왕 사숙의 일을 우리 같은 후배가 이야기할 주제나 되겠는가.”

“이미 버려진 곳이라면 소개 좀 해주십시오. 사실 요 몇 년간 진법에 대해 연구 중인데 상고 전송진이 어떻게 생겼는지 직접 보고 싶습니다.”

“사제가 진법을 연구하고 있다고?  꽤 멀어서 시간이 좀 걸릴 것인데?”

노인의 표정이 조금 이상해졌다.

“이상하게 여기실 것 없습니다. 고비를 만나 수련에 진전이 없으니 다양한 방법으로 자극을 얻으려는 것입니다. 진법 연구에서 얻은 깨달음으로 기연을 얻을지 누가 알겠습니까.”

거한이 탄식하듯 말했다.

“뭐 그렇다면 내 사제를 데리고 가주겠네.”

상대가 이렇게까지 말하자 노인도 어쩔 수 없이 수긍했다. 그의 대답을 들은 거한의 얼굴에 희미하게 미소가 번졌다. 이렇게 그들은 지하로 향하는 통로를 따라 거의 한 식경을 구불구불 내려가 사방에 연결된 종유석 동굴에 진입하게 되었다.

그곳은 미궁처럼 복잡했지만 작게 새겨진 표식을 따라 계속 걸어가자 꽤 규모가 있는 동굴에 다다랐다. 그리고 그 안쪽에 오래된 육각형 전송진이 하나 설치되어 있었다.

“사제, 바로 이곳이네!”

노인이 상고 전송진을 가리켰다.

“허, 이게 서책으로만 보던 상고 전송진이군요! 실제로 볼 기회가 있을 줄은 몰랐습니다.”

거한은 전송진을 보고 눈을 반짝이더니 성큼성큼 다가가 살피기 시작했다. 노인은 한쪽에 서서 수염을 쓸어내리며 말이 없었고 연기기 제자들은 호기심이 들었지만 감히 거한과 같이 구경하지는 못했다.

“듣기로는 이곳에 남겨진 전송진은 완전한데 반대편 진법에 문제가 있어서 사용할 수 없는 것이라고 하더군. 노부도 이것이 어디로 통하는지 궁금하지만 알 방도가 없었네. 사제도 이곳에서 십여 년은 있게 될 테니 천천히 연구하고 이제 그만 돌아가세!”

거한이 전송진에서 눈을 떼지 못하자 노인이 대충 설명하며 돌아갈 것을 재촉했다.

“돌아가다니요?  한적하니 분위기도 좋은데 사형은 영원히 이곳에 남으시죠.”

거한의 말에 노인이 반응을 보이기도 전에 돌연 서늘해지더니 노인의 몸에서 목이 떨어져 내렸다.

그제야 거한이 천천히 몸을 돌리더니 복잡한 기색으로 노인의 시체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맹 수사, 어찌 귀령문이 눈에 밟히나 봅니다.”

연기기 제자들 중 평범해 보이는 중년 수사가 입을 열더니 은백색 비검을 회수했다. 노인은 뜻밖에도 뒤쪽에서 날아든 비검에 살해당한 것이다.

“당신네 마염문에 몸을 맡기기로 한 이상 후회는 없습니다. 이 자도 저와 교분이 깊지 않고요. 그렇지만 오랜 세월 오가며 만난 정이 있으니 안타까운 마음이 드는 것도 당연하지요.”

맹 씨 거한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맹 수사, 마음 편히 먹으세요! 귀령문은 백여 년 전에 원영기 수사 둘과 수많은 결단기 수사를 잃어 세력이 크게 줄었습니다. 이번에 우리 마염문과 어령종 그리고 혈살종이 연합했으니 화를 피하기 힘들겠죠. 앞으로는 혈살종이 귀령문을 대신할 테니 미리 본문에 투항 것은 현명한 선택이었습니다.”

이름 모를 중년인이 웃음을 흘렸다. 그 순간 나머지 수사들의 기운도 달라졌다. 그들은 사실 전부 마염문 축기기 수사들이었다.

“약속만 지켜주신다면 최선을 다해 협력할 겁니다.”

“그건 걱정할 것 없습니다. 맹 형의 자질이 나쁘지 않으니 이번 전쟁이 끝나는 대로 사부님께서 거둬주실 것입니다. 귀령문에서 아무런 지도도 받지 못하고 홀로 수행하는 것보다는 훨씬 낫지요. 사부님이 기운을 숨길 수 있는 부적을 주셔서 성공적으로 잠입도 했고, 이곳은 외진 데다 드나드는 수사가 없어 많은 인원이 숨어 있기에 안성맞춤입니다.”

“다행히 상고 전송진이 있어 말을 꾸며낼 수 있었습니다. 안 그랬다면 상대를 죽이는 동안 이곳에 상주하는 열댓 명의 연기기 제자들이 금제를 발동하거나 전음부를 날려 보냈을 테니까요. 이제 그들을 한 자리로 불러 모아 깔끔하게 처리하면 후환은 없을 겁니다.”

거한은 안색을 싹 바꾸어 냉혹하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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