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70
670화. 금궐옥서(金闕玉書)
한립은 천천히 날아가며 말이 없었고 허천정 안의 천란 성조도 그에게 생각할 시간을 주려는 듯 조용했다.
“아까 말한 곤붕의 깃털은 특별히 사용할 곳이 있다는 것입니까?”
한립이 돌연 화제를 돌렸다.
“유천곤붕과 라후는 천지가 개벽할 때 혼돈 속에서 탄생했다는 상고 시대의 생령(生靈)이다. 요령(妖靈)이나 신령(神靈)이라고도 부르지. 그런 존재가 떨어트린 물건의 가치가 어떨지 잘 생각해 보거라. 내 본체도 이런 요령들을 보면 감히 건들지 못하고 멀리 피해가지.
유천곤붕과 라후는 타고난 천적인데, 아마 곤붕이 차원을 돌아다니다 우연히 인계에 숨어 있는 라후를 발견하고 공격한 것일 게야. 듣기로는 두 요령의 신통이 엇비슷하다던데, 라후는 본체가 인계에 있으니까 경계 간 압력에 영향을 받지 않아 공격을 하려던 곤붕이 도리어 당한 게지.
그 덕을 네가 다 보았구나! 유천곤붕은 바람 속성 요령으로 태어나자마자 관련 천지법칙을 깨우친다. 깃털이 조금 상하기는 했지만 바람 속성 령보를 제련하는 데는 최상의 재료라고 할 수 있지.
게다가 일단 제련하는데 성공만하면 보통 령보와는 비교할 수도 없다. 예전에 누군가 영계에서 이화기린(離火麒麟)의 비늘로 화룡조(火龍罩)라는 령보를 제련했었는데 위력이 굉장해서 모든 령보 중 100위 안에 들었다고 한다.”
“100위요?”
천란 성조가 말하는 기상천외한 이야기에 한립은 어안이 벙벙해졌다.
“겨우 100위라고 우습게 보는 것이냐? 너도 팔령척이나 삼염선 그리고 령보의 모조품들을 몇 개 지니고 있지만, 솔직히 팔령척과 칠염선은 그 중에서 저급에 속한다. 혼돈만령방(混沌万靈榜)에 오른 것만이 진정한 의미의 통천령보라고 할 수 있지. 나머지는 그냥 령보다! 그리고 모든 령보들 중 위력이 100위 안에 들어야 혼돈만령방에 이름을 올릴 수 있는 게야.”
“혼돈만령방……. 이제 영계 이야기는 됐습니다. 그런데 인계에서는 희귀하기 짝이 없는 통천령보가 영계에서는 그래도 적잖이 제련되는 모양이군요. 아까 말하던 거래는 혹여 곤붕의 깃털과 관련된 것입니까?”
“네 풍뢰시는 아직 제련이 끝난 것이 아닐 것이다. 그리고 바람 속성의 영력도 지니고 있고 말이야?”
천란 성조는 그의 질문에 답하지 않고 갑자기 풍뢰시를 언급했다.
“그건 왜 그러십니까? 풍뢰시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처음에는 바람과 천둥 속성을 동시에 부릴 수 있게 제련되었다고 알고 있습니다. 다만 체내에는 벽사신뢰 뿐이라 뇌둔술만 이용했던 것이고요. 제련이 끝난 것인지 아닌지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곰곰이 기억을 더듬어 보던 한립이 사실대로 대답했다.
“곤붕의 깃털을 사용할 방법을 하나 알려 주마. 바로 풍뢰시를 다시 제련해 령보로 만들 방법으로 말이야! 깃털 자체가 바람 속성에 관한 천지 법칙을 함유하고 있어서 네가 바람 속성 영석을 지니지 않아도 부릴 수 있을 게다. 물론 수행이나 보조 재료가 제한적이라 진정한 통천령보로는 제련하지 못하겠지만 저급 령보는 문제없을 것이다.”
천란 성조가 거만하게 말하며 미소 지었다.
“무엇과 제련법을 교환할 생각입니까? 당연히 그냥 알려줄 생각은 아닐 테구요.”
“내가 허천정에 동화된 걸 해결해 주거라. 그리고 네가 죽기 전까지 혹은 승천하기 전까지 나를 지켜주고! 거기다 허천정에 갇혀 있으나 8급이 되도록 화형뇌겁(化形雷劫)을 치르지 못했으니 나를 좀 도와줘야겠다. 지금 내 힘으로는 겁을 지니기가 무척 위험하니 말이야.”
천란 성조는 서슴없이 원하는 조건을 줄줄이 늘어놓았다.
“겨우 그게 조건입니까?”
“노부가 괜히 욕심을 부려 이상한 조건을 대면 괜히 네 놈의 살심만 일깨울 게 아니냐?”
“좋습니다. 그게 전부라면 거래를 할 만 하지요. 하지만 당신을 허천정에서 풀어 주는 것은 제가 죽기 직전 혹은 화신기에 이르러 승천할 준비가 되어 있을 때입니다. 문제 있으십니까?”
“문제없다. 아주 현명한 선택이야! 우리는 원래부터 서로 죽자 사자 싸울 이유가 전혀 없었으니까. 내 성의를 표하는 의미로 먼저 은과문을 전수해 주지!”
천란 성조는 기분이 좋아졌는지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저야 거절할 이유가 없지요.”
한립이 금빛 부적을 내려다 보며 태연하게 상대의 제안을 받아 들였다. 그리곤 돌연 허리춤에서 푸른색 저물대를 꺼내들었다. 바로 금화 노조의 것이었다.
한립이 의식으로 안을 훑어 내용물을 확인하곤 각양각색의 옥간들을 꺼내 자세히 살피기 시작했다. 마치 천란 성조와의 일은 새까맣게 잊은 사람 같았다.
하지만 성조도 눈치가 빨라 그를 재촉하거나 방해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한식경이 지난 후 마지막 옥간까지 살핀 한립은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금빛 옥부에 대한 설명이 어디에도 없었던 것이다.
‘직접 제련한 물건이 아니란 말인가? ’
그런데 갑자기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그가 고개를 숙이고 다시 의식으로 저물대를 살피자 푸른빛이 번뜩이며 무언가가 빠져 나왔다. 금제용 부적이 붙어 있는 노란 목갑이었다.
한립은 주저하지 않고 부적을 뜯어낸 다음 목갑을 내리쳤다. 목갑이 천천히 열리며 우윳빛 옥패가 드러났는데 놀랍게도 주먹만 한 옥패의 표면에 은색의 문자가 떠다녔다. 바로 은과문이었다.
글자들은 깨알처럼 작았지만 의식으로 훑어보면 또렷하게 확인할 수 있었는데 한눈에 보기에도 파손된 게 분명했다. 그가 자세히 살피려는데 옥패 표면의 은빛 글자들이 깜빡이며 불쑥 은빛으로 튀어 나가 버렸다.
이에 놀란 한립은 목갑에 붙어 있던 금제 부적을 떠올리곤 경계심을 높였다. 그리고 일부러 은빛이 한 장 밖으로 멀어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번개처럼 손을 뻗었다.
다섯 손가락에서 푸른빛이 크게 번지며 천둥소리가 울리더니 은빛이 몸을 떨며 옥패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와 멈추었다.
한립이 어두운 얼굴로 손짓하자 은빛이 무언가에 빨려 들어가 듯 돌아와 그의 손에 잡혔다.
“금궐옥서(金厥玉書)! 이런 물건이 어떻게 인계에!”
“천란 성조께서는 이 물건에 대해 아십니까?”
한립이 속으로 흠칫 놀라 물었다. 영계 요족 수사가 이렇게 당황할 정도면 보통 물건이 아니라는 뜻이었다.
“말도 안 돼. 엄청난 영성을 지닌 물건이 영기가 희박한 인계에 남아 있을 리가……. 알았다, 이건 금궐옥서의 찢어진 조각이라 거의 영성이 다 했구나! 그래서 영계로 돌아갈 수 없었던 것이야. 허나 누가 이것을 찢어낸단 말인가?”
천란 성조는 한립의 질문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너무 놀라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이에 한립이 미간을 좁히다 헛기침을 두어 번 했다.
“흠! 내가 추태를 부렸구나. 노부도 너무 놀라서 말이다.”
“천란 성조의 말을 들으니 이것도 영계에서 내려온 물건인가 봅니다.”
“이게 어떤 물건인지 알면 너도 깜짝 놀랄 것이다. 이건 영계의 물건이 아니라 진선계(眞仙界)의 것이니까! 다시 말해 진정한 선가(仙家)의 물품이라는 것이지.”
돌연 허천정에서 푸른빛이 반짝였고 빛들이 응결되어 키가 한 척 정도 되는 사내아이가 나타났다. 허천정의 영기를 빌려 잠시 인간 형태를 띠고 나타난 것이다. 서너 살 밖에 안 돼 보이는 하얀 얼굴의 아이는 어두운 눈빛으로 옥패에서 눈길을 떼지 못했다.
그는 왠지 마음이 복잡해 보이는것이 뭔가를 부러워하는 것 같기도 하고 안타까워하는 것 같기도 했다.
“선가의 물건이라니 정말입니까?”
“진선계는 영계와 인계 사이의 경계 간 압력이 약한 편이다. 그러니 가끔 그곳의 물건이 영계로 흘러드는 일도 종종 벌어지지. 다만 금궐옥서는 너무 유명한 것이라 노부도 놀랐구나.”
“조금 더 자세히 설명해 주실 수 있습니까?”
“안 될 것도 없지. 어차피 영계의 인족들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라 비밀이랄 것도 없으니까! 이것에 대해 설명하려면 일단 진선계의 선인(仙人)에 대해 먼저 언급해야 한다. 우리 영계에는 선인들의 물건이 다양한 이유로 흘러들기는 했지만 쓸 만한 물건은 거의 없었다.
게다가 영계에서 기록이 시작된 이래 한 번도 선인이 영계로 강림한 적도 없었지. 다만 멀고 먼 옛날 선인의 유골 한 구가 영계에서 발견된 일이 있었는데 금궐옥서는 그 선인의 유골에서 찾은 것이다.
듣기로는 원래 총 108장으로 이뤄져 있는데 각 장에 선가의 비술이 하나씩 적혀 있다고 하더구나. 그 중 36장은 수련법과 공법구결 그리고 현묘한 신통들이 적혀 있고 나머지 72장에는 부적, 진법, 연단, 연기술 등이 고르게 적혀 있다고 한다.”
아이는 잠시 생각하더니 선망 어린 말투로 다시 입을 열었다.
“그 중 핵심은 36장으로 나머지 72장에 적힌 내용들은 삼라만상을 모두 담고는 있지만 실용성이 거의 없다. 단약, 부적, 법기 할 것 없이 필요한 재료들이 듣도 보도 못한 것들이었지.
당시 영계에는 36장의 금궐옥서를 차지하기 위해 피바람이 불었다. 그러나 오랜 세월 서로 뺏고 빼앗기다 유실되어 이제 행방을 알 수 있는 것은 겨우 7, 8장에 불과하게 되었지. 하지만 한 장이라도 이것을 얻어 수련에 성공한 수사들은 대부분 인족에서 거물급이 되었다.
삼황(三皇)과는 비할 바가 못 되어도 일부 지역에서 군림할 정도는 되었던 게야. 그러나 가장 매혹적인 사실은 영계에서 근 십만 년 동안 수련을 통해 대도(大道)를 깨우치고 선계로 올라간 선사들은 전부 이 금궐옥서를 익힌 적이 있다는 소문이 돌았다. 이것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너희 인족 수사들이 미쳐서 날뛸 만 했지.”
“인족 수사들이요? 그럼 금궐옥서는 전부 인간 수사들의 수중에 있다는 말씀입니까?”
“처음에는 우리 요족들도 36장의 금궐옥서를 빼앗는데 참여했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요족 수사들은 그곳에 적힌 공법들이 인간 수사들의 수련에나 어울린다는 것을 깨달았지.
익혀봐야 아무 효과가 없거나, 오히려 수행이 깎기고 심한 경우 폭주해 죽기도 했거든. 결국 요족들은 완전히 금궐옥서를 포기했다. 발견된 선인의 유골이 인간의 형상을 하고 있었으니 이상한 일도 아니지.”
“그랬군요. 그런데 한 번도 선인이 영계에 강림한 일이 없었는데 어찌 그것이 선인의 유골인지 알아봤단 말입니까? 그냥 신통이 대단한 수사의 유골일 수도 있었을 텐데요.”
“그건 노부도 확실히 모르겠다. 너무 오래 전 일이라. 하지만 다들 선인의 유골이라 했으니 맞지 않겠느냐?”
“제가 얻은 것은 36장에 속합니까? 아니면 72장 중에 하나입니까?”
한립이 옥패를 손끝으로 매만지며 은색 문자가 깜빡이는 것을 살폈다.
“뒤쪽 72장은 은과문, 앞쪽 36장은 금전문(金篆文)으로 적혀 있다. 금전문이야 말로 아는 자가 거의 없는 희귀한 문자지.”
“이것은 은과문이고 게다가 완전하지도 않은 상태군요.”
한립은 그다지 상심하지 않았다. 어차피 금궐옥서가 아무리 대단해도 화신기에도 이르지 못한 인계 수사가 익히기에는 요원한 일이었다.
지금부터 영계에 올라간 뒤의 일을 걱정할 필요는 없지 않겠는가! 사내아이도 한립의 표정을 읽고 입 꼬리를 끌어 올렸다.
“사실 네 경지에 금궐옥서의 뒷부분을 얻은 것도 나쁘지 않다. 어차피 앞 장을 얻었어도 연허기(煉虛期) 수행을 지니지 못하면 익힐 생각은 버려야 하니까. 선가의 비술은 천지원기를 움직여야 하는데 삼대경계 중 중경계(中境界) 이상은 되어야 진정으로 천지원기를 조종할 수 있지.
화신기 수사도 그저 문틈으로 그 안을 살짝 들여다보는 수준에 지나지 않으니 섣불리 수련을 하려 들었다가는 낭패를 볼 게야. 허나 금궐옥서의 뒷부분은 다르다. 어차피 공법에 관련된 것도 아니니 그 안에서 몇 가지라도 깨달음을 얻으면 큰 도움이 되겠지. 다만 네가 지닌 것은 찢겨진 일부라 그 안에서 얼마나 많은 것을 익힐 수 있을지는 알 수 없지만.”
“아마 부적 제련과 관련된 내용이겠지요.”
한립이 손에 들고 있는 금빛 부적을 보며 추측했다.
“그건 모를 일이다. 은과문을 인계 수사가 정말 알아보았을 리 있겠느냐? 금화 노조라는 자는 우연히 이것을 얻고 은색 문자에 심오한 힘이 담겨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을 것이다. 선가의 물건이니 대충 따라 그리기만 해도 불가사의한 신통을 낼 수 있었겠지.”
“그렇다면 저도 시간을 내 연구해 보겠습니다. 괜찮다면 지금 은과문을 전수해 주실 수 있겠는지요?”
“문제없다만 조건이 하나 있다. 금궐옥서의 연구를 마치거든 나도 빌려 봐야겠다. 뒷부분은 우리 요족 수사들에게도 똑같이 도움이 되니까 말이야.”
“그러지요! 허나 당신은 영계의 수사이니 저보다 안목이 낫지 않겠습니까? 제가 쓸 만한 깨달음을 얻지 못한다면 천란 성조께서 알아내신 바를 제게도 알려주시지요.”
“당연히 그러마. 다만 은과문과 금전문은 진령문(眞靈文)이라 불리는 선가의 문자다. 글자 하나하나가 불가사의한 힘을 지니고 있어 평범한 옥간에 새겼다가는 힘을 이기지 못하고 폭발하겠지. 의식으로 직접 전수하는 방법도 통하지 않으니 한 글자 한 글자 내가 직접 설명해 주는 수밖에 없다. 그럼 적잖은 시간이 걸리겠지.”
“앞으로 규성도에 이르려면 적어도 두 달은 걸릴 텐데 그 정도 시간을 못 내겠습니까? 천천히 설명해 주셔도 됩니다.”
말을 마친 한립은 옥패를 다시 목갑에 넣고 금제 부적을 붙여 저물대에 넣어 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