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69
669화. 은과문(銀蝌文)
한기가 사라진 지네들은 몸집이 한 장으로 불어나 있었고 하얀 껍데기 위에 남은 희미한 검흔들이 격렬한 전투가 있었음을 알려 주었다. 그가 법결을 날려 육익상공들을 작게 만들고는 영수대 속으로 돌려보냈다.
조금 더 기다리자 다른 두 방향에서도 육익상공들이 날아들었는데 한 무리는 아무렇지 않았지만 다른 무리의 지네 하나는 다리가 몇 개 잘려나갔다.
한립이 지네들을 전부 거두고 호수 중심을 내려다보았다. 곧 푸른 기운을 일으킨 그는 빛줄기로 변해 호수 속으로 사라졌다. 호수는 그다지 깊지 않아 2백 여 장 정도 내려가니 바닥이 보였다.
이 호수는 앞이 보이지 않고 의식마저 차단하고 있었지만 만호자가 정확한 위치를 알려주어 손쉽게 목표한 곳을 찾을 수 있었다. 그곳은 아주 평범해 보이는 암초더미였다.
한립이 그곳을 눈으로 훑고는 손가락을 튕겨 푸른 검기를 쏘아 보냈다. 그러자 호수 바닥에서 남색 보호막이 펼쳐지며 잠시 검기를 막아내더니 얼마 버티지 못하고 갈라져 빛으로 흩어졌다.
암초들은 환영에 불과해 그 자리에서 사라졌고 대신 다섯 가지 보호막이 백여 장을 뒤덮으며 나타났다.
한립은 보호막을 타고 흐르는 영기의 흐름을 느끼며 턱을 쓸었다. 방금 깨버린 남색 보호막은 간단한 환술 금제에 불과했는데 아마 결단기 수사들이 다른 이들의 이목을 피하려 임시로 펼쳐 놓은 듯했다.
문제는 만호자가 갑자기 세상을 뜨느라 그에게 금제를 해체할 법기나 법결을 남겨주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제 남은 방법은 힘으로 부수는 것뿐이었다.
‘다섯 가지 속성의 기운이 응결된 것이라 시간이 걸릴 것 같은데…….’
그는 수결을 맺어 인간형 꼭두각시와 36개의 비검들을 불러냈다. 비검들은 몸을 떨며 열댓 장 크기의 거대 금빛 검으로 합쳐졌는데 법결이 검의 표면으로 날아가자 팔뚝만한 뇌전이 번뜩이며 살아있는 뱀처럼 움직였다.
뱀의 형상을 한 뇌전은 거검을 몇 바퀴 돌고 혀를 내밀어 쉭쉭 거리는 기세가 굉장했다. 또한 인간형 꼭두각시가 붉은 궁을 꺼내 비취색 화살을 쏘자 천둥소리가 울리며 금빛 뇌전과 작은 화살이 동시에 튀어나갔다.
한립이 신중한 얼굴로 손가락을 뻗자 거검이 산이라도 가를 듯 떨어져 내렸다. 경천동지할 굉음이 울리며 보호막 표면이 흔들렸고 호수물이 용솟음쳐 거대한 소용돌이를 만들어냈다.
소용돌이 중심에서 꼼짝 않고 서 있는 한립의 얼굴에는 미소가 어렸다.
아래쪽의 오색 보호막은 이미 사라졌고 중앙에 직경 열댓 장의 소형 진법만이 은은하게 빛을 발하고 있었다. 진법은 특수한 재료로 만들어졌는지 물이 스며드는 것을 막고 있었다.
한립은 일단 꼭두각시를 회수하고 진법 앞에 내려서서 자세히 살펴보기 시작했다. 잠시 후 고개를 끄덕인 그는 영수대에서 육익상공 절반을 불러내 명령을 내렸다.
새하얀 지네들은 전신을 흔들며 진법 아래까지 파고 들어갔다. 한립은 그제야 안심하고 법결을 진법 바깥쪽에 던져 넣고는 하얀빛이 번뜩이며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잠시 후 한립은 어떤 석실 안에 들어와 있었다. 그다지 넓지는 않았지만 청석으로 만든 석문이 하나 닫혀 있었다.
그는 가부좌를 틀고 의식을 방출해 석실 구석구석을 살폈다. 그리고 아무도 숨어 있지 않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안색이 한결 편해졌다.
한립은 몸을 일으켜 석문으로 걸어갔다.
* * *
반나절 후, 눈부신 푸른 빛줄기가 호수 속에서 빠져나와 몇 번 번뜩이더니 자취를 감추었다. 한립은 날아가면서 손으로 금빛의 광석을 만지작거렸는데 얼굴엔 미소를 띄고 있었다.
‘만호자의 거처에 이렇게 많은 보물이 있었다니.’
그곳에는 수많은 영석과 각종 재료 그리고 보물과 경전이 쌓여 있었다. 그 중에는 이름은 들어봤지만 한 번도 보지 못한 진귀한 보물도 꽤 있었다. 그러나 그를 가장 기쁘게 한 것은 주먹만 한 경정이었다.
경정이 있으니 이제 72개의 비검으로 완전한 대경검진을 펼칠 수 있게 되었다. 36개로 만드는 절반짜리 검진도 위력이 크지만 완전한 대경검진은 상상을 초월할 위력을 낼 것이다.
푸른 빛줄기 속에서 느긋하게 날아가던 한립은 이번에는 갑자기 입을 벌려 한 촌 크기의 작은 솥을 분출했다. 바로 허천청이었다.
한립이 솥을 손바닥 위에 두고 다른 수결을 맺어 법결을 날려 넣었다. 그러자 작은 솥이 푸른빛으로 반짝이더니 뚜껑이 천천히 벌어졌다. 금빛이 번뜩이며 부적이 빠져나온 것이다.
한립은 기다렸다는 듯 부적을 향해 푸른 기운을 뿜어내자 부적의 빛이 어두워지며 푸른빛에 갇혀 끌려왔다. 부적은 바로 금화 노조가 쓰던 것으로 순간이동에, 금색 꽃잎과 벌까지 불러냈고 위력도 상당했다.
‘아마 독문 비술로 만들어낸 부적일 것이야!’
금화 노조와 싸우는 내내 부적의 정체가 궁금했던 한립은 참지 못하고 곧바로 부적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부적은 겉보기에는 평범해 보였지만 네 귀퉁이에 은색 상고 문자들이 적혀 있었다.
상고문자는 무척 신비해서 은색 올챙이가 꿈틀거리는 것 같은 느낌을 주었다. 반복해서 살펴봐도 그가 이전에 보았던 상고 문자와 일치하는 것은 없었다.
그밖에 특이한 점은 부적 표면에 콩알만 한 금빛들이 살아 있는 것처럼 떠돌아다닌다는 것이었다. 눈도 깜빡이지 않고 부적을 살피자니 절로 미간이 좁아졌다.
“흥! 은과문(銀蝌文)을 너희 인계 수사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으냐? 그냥 포기하는 것이 나을 것이다.”
별안간 한립이 들고 있던 허천정에서 어린아이 목소리가 들려왔다. 한립은 말없이 눈을 반짝이더니 화를 내기 보다는 웃음을 터트렸다.
“오, 이것에 대해 잘 아시는 모양입니다?”
“은과문은 상계에서도 아는 사람이 별로 없지. 예전에 이 문자를 아는 인류 수사의 원신을 잡아먹지 않았다면 나도 몰랐을 것이다.”
“허천정이 집처럼 편안해서 영원히 나올 생각이 없으신 줄 알았는데. 오늘을 웬일로 입을 다 여셨습니다.”
한립은 진지한 얼굴로 허천정을 내려다보았다.
“화신기에도 이르지 못한 인계 수사인 너와 내가 무슨 할 말이 있겠느냐만. 지금은 다르지! 이제 유천곤붕(游天鯤鵬)의 깃털을 얻었으니 나와 이야기할 수준도 되었고 거래도 할 만해.”
“유천곤붕이라면 바다 속에서 제가 보았던 거대한 새 요수를 말하는 겁니까?”
그 말에 한립이 바로 난성해에서 보았던 불가사의한 전투를 떠올렸다.
“거대한 새 요수라니, 그렇게 부르는 것은 인계뿐이다. 영계에서 유천곤붕을 신봉하는 천붕족(天鵬族)들이 들으면 큰일 날 소리라고.”
“천붕족이요?”
“영계에 대해서는 더 말할 것도 없겠지. 운이 좋아 너도 승천하게 되면 자연히 알게 될 테니까. 뭐, 상계로 가지 못한다면 쓸데없는 소리일 테지만!”
아이는 의아한 한립의 얼굴을 보고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그렇게 말하는 당신도, 어차피 천란 성조(星鳥)의 본체가 아니라 영계 요족 수사의 분신에 불과하지 않습니까. 이제 겨우 8급 요수와 비슷한 수행을 쌓았으니 화신기 신통을 회복하려면 얼마나 더 걸릴지 알 수 없을 텐데요?”
한립이 지지 않고 냉소했다.
솥 안에서 들리는 아이의 목소리는 놀랍게도 한립이 천란 성녀와의 일전에서 얻은 천란 성조의 분신이었다.
요수는 허천정 안에 백여 년을 갇혀 있다 스스로 영계의 기억을 회복했지만 허천정에서 달아날 길이 없어 얌전히 입을 다물고 있었던 것이다.
한립이 원영 후기에 이른 후 두 개의 통천령보를 다시 제련했고 통보결 2성을 익혀 드디어 허천정을 열게 되었는데 기이한 일이 일어났다.
천란 성조의 분신이 영계의 둔술을 펼쳐 그의 눈앞에서 달아나 순식간에 백여 장 밖으로 사라졌는데, 솥이 돌연 푸른빛을 번뜩이자 천란 성조가 다시 허천정 속으로 들어가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한립은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너무 오래 솥에 갇혀 있다 보니 체내의 기운이 허천정에 동화되어 예전 은월과 같은 상태가 된 것이다.
그러나 천란 성조는 허천정의 기령이 아니라서 한립이 마음대로 부릴 수는 없었다. 그런데 금빛 부적을 살펴보는 한립을 보고 갑자기 말을 걸어 온 것이다.
“내가 왜 화신기에 들어야 하지? 인계에 올 때부터 몇 만 년 내로는 그렇게 수행을 높일 생각이 없었는걸!”
“수행을 높이기 싫다는 수도자는 또 처음입니다. 그 말을 제가 믿을 것 같습니까?”
솥 안에서 아이가 웃어대며 하는 말에 한립이 불신을 드러냈다.
“어린 녀석이 아는 게 없으니 믿기 힘들겠지. 살짝만 알려 주면 영계 요족 중에서 그래도 명성이 있던 난, 네가 상상도 못할 경지에 올라있었다. 그런 내가 할 짓이 없어서 천란 초원이나 지키려고 분신을 내려 보냈겠느냐? 영계에 있는 요족 수하들이 셀 수 없이 많은데 말야. 돌올인들은 있으나 없으나 매한가지다.”
천란 성조는 돌올인들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말했다.
“이번에 분혼 한 줄기로 이곳에 내려온 것은 만 년 후에 있을 대겁(大劫)에 대비하기 위해서다. 영계 본체가 겁(劫)을 버티지 못하고 변고를 당한다 해도 인계에 분혼을 숨겨 두었으니 살 길을 하나 남겨둔 것이나 마찬가지지. 그러니 수행을 빨리 늘릴 이유가 없지 않겠느냐? 괜히 화신기에 이르렀다가 이곳에 숨어 있던 나까지 대겁에 영향을 받을 수도 있다.”
“미리 닥쳐올 겁을 예상해 분혼을 빼돌리다니, 그런 일도 있습니까? 그럼 영계의 실력자들은 전부 이런 식으로 목숨을 부지할 길을 열어 놓는 것입니까?”
한립은 놀라면서도 반신반의했다.
“어디 분혼을 강림하는 것이 쉬운 일인줄 아느냐? 수행이 일정 경지를 넘어서야 하는 것은 물론이고 관련 비술에 정통해야 하는데다 영계에서는 구하기 힘든 화계석(化界石)까지 써야 한다.
그래야 겨우 경계 간 압력을 극복하고 분혼을 떠나보낼 수 있는데 그나마도 하계로의 강림은 열 번 중 한번 성공할까 말까이다. 실패하면 분혼은 경계폭풍 속에서 사라지고 말지. 매번 실패할 때마다 천년은 폐관 수련을 해야 회복할 수 있으니 족히 만 년은 걸리는 일이야.
나도 일고여덟 번을 실패한 끝에 겨우 성공했지. 경계 간 압력을 뚫고 신통이나 법력을 전송하는 건 그나마 조금 쉽겠지만 말이야.”
“그게 사실이라고 해도, 제게 말해주시는 이유가 뭡니까?”
“간단히 말해 너와 나 사이에 이해관계가 없다는 말이다. 이전에 널 공격했던 것은 이성을 찾지 못해 돌올인들에게 이용당했기 때문이고, 내가 당분간은 화신기에 이를 마음이 없으니 너를 어찌할까 걱정할 필요도 없다.”
한립의 물음에 성조가 웃음을 흘리며 답했다.
“그런가요? 그냥 당신을 죽이는 게 훨씬 안전하고 깔끔할 것 같은데요.”
“……지금은 내 수행이 너보다 한참 모자라니 그러고 싶으면 그래 보거라. 하지만 영계의 고위 요족의 분신이 얼마나 기이한 비술들을 알고 있을지 상상이나 해봤느냐? 죽기 전에 목숨을 걸고 네 녀석에게 중상을 입히거나 정 안되면 원신에 표식을 남길 수는 있겠지. 뭐, 영계에 오르지 못하고 네가 인계에서 죽는다면 상관없겠지만! 만일 네가 영계로 오는 날엔, 내 본체가 무슨 수를 써서 라도 너를 찾아 낼 것이다. 그때가 되면…….”
천란 성조는 말끝을 흐렸지만 의도는 아주 잘 전달되었다. 그 말을 듣고 한립은 할 말을 잃었다. 그가 판단하건데 성조의 말은 거짓이 아닐 것이다.
화신기에 들어 영계에 이를지도 모르는데 미리 그곳에 어마어마한 존재와 원한을 맺을 수는 없었다. 상대의 말투로 보아 본체의 수행으로 그를 죽이는 것은 개미를 눌러 죽이는 것보다 쉬울 지도 모른다.
다만 비술을 사용해 중상을 입힌다는 말은 크게 개의치 않았다. 그는 지금 허천정에서 떠나지 못하니 미리 준비하면 상대에게 당할 일은 없을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