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65
665화. 혼사
한립의 신형이 흐릿해져 그 안으로 사라진 후에는 보호막이 진동하며 천천히 원상태로 돌아갔다. 그리고 한립이 들어서자마자 하얀 성궁 복장을 한 열댓 명의 수사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너희뿐이더냐?”
대규모 공격을 받은 직후라기에는 축기기 수사들을 위주로 한 수비 병력이 너무 형편없어 보였다.
“며칠 전 격렬한 전투를 거쳐 많은 수사들이 성으로 돌아가 휴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저희는 번을 돌며 순찰을 도는 것뿐이고 가까운 곳에 백 명이 넘는 제자들이 상시 대기하고 있으니 안심하십시오.”
“나는 어찌 알아본 것이지?”
한립이 영기의 압력을 발산하며 얼굴을 굳히자 결단기 사내가 힘없이 뒤로 밀려났다.
“성궁에서 몇 달 전 한 선배님의 용모와 신분이 담긴 옥간을 섬을 수비하는 제자들에게 내려 보냈습니다. 언제든 선배님이 오시면 극진히 모시라는 분부와 함께 말입니다.”
한립에게 의식이 튕겨져 나간 사내가 다급히 말했다.
“그렇구나. 두 분 성주께서 내게 이리 관심을 보이시다니…….”
한립이 미소 지으며 영기의 압력을 거둬들였다. 이에 안심한 사내가 미소를 머금고 무어라 말하려는데 한립이 고개를 들고 멀리서 다가오는 빛을 바라보았다.
“다른 이에게 보고한 것이냐?”
“예, 한 선배님의 소식이 있으면 바로 장로님들에게 보고해 직접 맞이하게 하라는 명이 있었습니다.”
“그래?”
“조 장로님께서 친히 한 선배님을 맞이하러 오시나 봅니다.”
사내가 한립의 기분을 맞추려 말했지만 한립은 그저 고개를 끄덕이고는 팔짱을 끼고 지켜볼 뿐이었다. 사내는 장로급이 나타났는데도 거만한 자세를 유지하는 그를 보며 어안이 벙벙해졌다.
원영기 수사도 아니었고 의식이 튕겨나가 정확한 수행을 확인하지도 못했으니 그가 원영 초기 수사일 것이라 짐작만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둔광이 가시고 하얀 빛줄기 속에서 머리가 하얗게 센 노인이 나타났다. 비단 장포를 걸치고 옥으로 만든 허리띠를 한 노인은 길고 가느다란 눈매가 서늘한 인상이 들었다. 원영 초기의 수사는 한립을 발견하고 눈을 반짝이며 다가와 포권을 했다.
“한 형이시죠? 제가 급히 달려오기는 했는데 늦었습니다. 이해해주십시오.”
노인은 만면에 웃음을 지으며 오랜 벗처럼 살갑게 말했다.
“괜찮습니다. 듣자니 며칠 전에 은사도가 큰일을 겪었다던데, 지금 상황은 어떠합니까?”
“요수들이 소란을 피우기는 했지만 화형기 요수들은 하나도 없었기에 별 일은 없었습니다. 이곳을 책임지는 분은 본래 영 장로신데 요수들이 침략한 원인을 파악하고자 잠시 떠나셔서 제가 한 형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저를 기다렸다고요?”
“그렇지요! 두 분 성존께서 한 형이 내해로 돌아오시는 대로 한번 뵙자고 청하셨으니까요. 솔직히 말씀 드리면 이곳에서 한 형이 오시기만을 기다린 지 몇 달째입니다.”
“무슨 일인지 아십니까?”
“자세한 이야기는 일단 조용한 곳으로 옮겨서 하시는 것이 어떨까요?”
“그러시지요. 저기면 되겠습니까?”
노인의 제안에 한립이 잠시 생각하다 십여 리 떨어진 작은 산을 가리켰다.
“어디든 한 형의 뜻대로 하시면 됩니다.”
조 장로는 작은 산을 보고는 단번에 대답했다. 이어 그가 성궁 제자들에게 몇 마디를 분부하고는 한립을 안내해 산 쪽으로 날아갔다. 얼마 안 되는 거리였기에 둘은 눈 깜짝 할 사이에 산 정상에 도착했다.
“이제 하실 말씀이 있다면 단도직입적으로 해주시지요.”
한립은 두 발이 땅에 닿자마자 차분히 말했다.
“허허, 한 형께는 아주 좋은 일입니다.”
“좋은 일이라니? 무슨 뜻인지 모르겠습니다.”
“한 수사의 나이가 상당히 어리다고 들었습니다.”
“그래서요?”
“그럼 됐습니다. 한 형께서는 본 궁의 릉 장로를 어찌 생각하십니까?”
여전히 조 장로의 얼굴에서는 웃음기가 가시지 않았다.
“릉옥령 수사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예, 바로 저희 성존 분들의 영애시지요!”
“젊은 나이에 원영기에 이른 수사이니 자질이 뛰어나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것은 어찌 물어보시는 겁니까?”
“릉 장로도 자질이 뛰어난 것은 사실이지만 한 형과 비교하자면 모자람이 있지요. 만일 두 분이 서로 도우며 수련을 쌓아 간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한 형께서는 릉 장로를 반려로 맞는 것에 대해 어찌 생각하십니까?”
“반려요?”
그 순간 한립은 화들짝 놀라 입을 다물지 못했다.
“예! 한 형과 릉 장로는 나이와 수행 모두 어울리지 않는 면이 없지 않습니까! 제가 중매를 선다 생각하시고 고려해 보시면 어떨까요?”
놀란 기색이 가신 한립은 급격히 미간을 좁혔고 그것을 본 노인은 살짝 불안해졌다.
‘이렇게 좋은 일을 마다할 자가 있단 말인가? ’
본래 수도계에서 원영기 여수사는 용의 뿔과 봉황의 깃털만큼 귀한 존재였다. 거기다 동년배를 만나기는 하늘의 별 따기였기에 대부분이 남녀가 함께 수련하는 쌍수(雙修)의 장점을 알면서도 결단기나 축기기 시첩을 둔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런데 릉옥령은 원영기 수사에 꽃처럼 아름다운 외모를 지녔고 심지어 성궁 궁주의 여식이 아닌가! 아니 이렇게 좋은 혼처를 또 어디 가서 구한단 말인가?
상대가 놀랄 것은 예상했지만 급격히 무덤덤해진 얼굴을 보고 있자니 무슨 일인지 알 수 없었다.
“두 분 성존께서 말씀하시길 두 분이 혼인하시고 또 저희 성궁에 들어오고자 하신다면, 다음 대 성궁의 주인은 바로 수사라고 하셨습니다. 성궁의 주인이란 곧 난성해의 주인과 같고 또…….”
노인은 부럽다는 얼굴로 천성쌍성이 제시하는 조건을 줄줄이 읊어댔다. 침묵하던 한립은 내심 탄식하며 그의 말을 끊었다.
“귀 궁의 호의에 정말 감사드립니다. 하지만 저는 안 될 것 같군요.”
“예? 조금 더 고려해 보시지요. 며칠 후에 답을 주셔도 되는데요.”
조 장로는 자신의 설득에도 무표정하게 있던 한립이 단박에 제안을 거절하자 난색을 표했다.
“옥령 선자나 귀 궁 때문이 아니라, 제겐 이미 반려가 있습니다. 역시 원영기 수사이고요.”
한립은 차분하지만 단호하게 답했다.
“그러셨군요. 그렇다면 어쩔 수 없겠군요. 그저 수사와 릉 장로가 인연이 닿지 않은 것뿐이군요. 하지만 정말 아까운 것은 사실입니다.”
조 장로가 한립의 이유를 듣고는 더는 권하지 못했다. 이미 원영기 여수사를 반려로 두고 있다는데 더 무어라 하겠는가! 그런데 이상한 점은 최근 몇 백 년 간 원영기에 이른 여수사가 릉옥령을 제외하면 없었다.
‘반려도 수련에만 매진해 알려지지 않은 여수사일까? ’
그는 천성쌍성이 포섭하려는 낯선 고계 수사가 줄곧 폐관 수련을 하느라 난성해에 얼굴이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라 여기고 있었다.
“그럼 이 일은 더 언급하기 어렵겠고 성존께서 따로 분부하신 말씀이 있는데 들려드려도 되겠습니까?”
한숨을 푹 내쉰 조 장로가 화제를 돌렸다.
“들어보겠습니다.”
여러 세력들이 겨루는 와중에 성궁이 그를 포섭하려 드는 것이 이상할 것이 없었다.
“두 분 성존께서 한 수사와 정식으로 만나 뵙기를 청하십니다. 물론 만나는 장소는 천성성 주변 해역을 벗어나지 않는 곳에서 자유롭게 정하시면 됩니다. 이번에 상의드릴 일은 화신기 고비를 넘길 방법에 관한 것이라 합니다.”
“화신기 고비를 넘길 방법이라…….”
한립은 턱을 쓸어내리며 고민했다. 다른 조건이었다면 바로 거절했겠지만 사안이 중대한 만큼 이해득실을 따져볼 만 했다.
“귀 궁 쌍성께서 괜찮으시다면 사흘 후 천성성 북쪽 천여 리 밖의 작은 섬에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곰곰이 생각하던 한립이 결국 결론을 내렸다. 그의 신통에 어디 갇히지만 않으면 원영기 수사들의 포위도 뚫고 달아날 수 있었다.
“그럼 그렇게 보고 올리겠습니다.”
이후 그들은 몇 마디를 더 주고받다가 한립이 먼저 자리를 떠났다. 그는 바로 전송진이 있는 곳으로 날아갔다.
우연히 지난번에 번을 서던 산발 수사가 오늘도 석실 앞을 지키고 서있었고 낯선 수사 몇 명에게 무언가를 거절하듯 고개를 젓고 있었다. 푸른 빛줄기가 괴이하게 그들 앞에 나타났다.
“한 선배님을 뵙습니다.”
산발 수사가 바로 한립을 알아보고 다가와 인사를 올렸다.
“내해로 돌아가야겠는데 문제없겠지?”
“그럼요! 들어가시죠!”
한립의 냉랭한 물음에도 성궁 수사는 미소를 짓고는 얼른 전송부를 꺼내 바쳤다. 대나이령이 있어 굳이 필요는 없었지만 한립은 거절하지 않고 전송부를 받아 석실 안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석실에서 하얀 빛이 번뜩이며 그가 사라졌다. 그가 나타나자 긴장하고 있던 수사들의 얼굴이 그제야 평정을 되찾았다.
그 중 산발 수사와 같이 있던 결단기 수사가 입을 열었다.
“여 형, 저분은 귀 궁의 장로십니까? 어찌 저는 처음 뵙는 것 같습니다.”
“아직은 아니시지만 객경영패를 지니고 계신 것으로 보아 시간문제 아니겠습니까? 아마 성궁에서 새로 영입하는 장로님이겠지요.”
“그렇게 되면 성궁 세력이 더욱 강해지겠습니다. 원영 초기이실까요, 아니면 중기실까요?”
“정확한 수행은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초기 수사일 가능성이 높겠지요. 중기 수사 중에 알려지지 않은 분은 드물지 않습니까.”
“하긴 그렇습니다. 그래도 우리와 비교하면 어차피 천 년이 넘는 수명을 지녔으니 부러울 따름이지요. 우리도 원영을 응결할 날이 올지 모르겠습니다.”
등에 검을 멘 수사가 탄식하며 중얼거렸다.
* * *
사흘 후 천성성 북쪽 천여 리의 작은 산호섬.
한립이 붉은 암석 위에 눈을 감고 앉아 있었다. 그는 며칠 전 내해의 천성성으로 돌아와 잠시 머물고는 바로 떠났는데 천성쌍성이 무슨 짓을 할지 몰라 그런 것이었다.
하지만 괜한 기우였던지 그는 아무 일도 없이 성궁의 세력을 벗어났다. 마음이 놓인 그는 인근에서 며칠을 보내다 약속한 대로 이곳으로 날아왔다. 신중을 기하기 위해 항시 의식을 퍼트려 수백 리를 감시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천성쌍성 같이 오랜 세월 난성해에서 군림해 온 대수사들을 얕볼 수 없었다. 그래서 두 쌍성들이 도착하기 전 주변 지리를 파악하고 혹시 모를 불미스러운 일을 대비했다.
곧 하늘 저 끝에서 하얀빛이 반짝이며 두 개의 빛줄기가 섬으로 다가왔다.
한립은 바로 몸을 일으켜 무표정하게 빛줄기를 응시했다.
다가오는 수사들도 멀리서 그를 발견했는지 속도를 높여 순식간에 도착했고 빛이 가시자 사내와 여인이 나타났다. 여인은 비취색 궁장 차림이었고, 사내는 하얀 장포를 걸쳐 평범한 유생으로 보였지만 두꺼운 눈썹 아래 눈빛이 칼날 같았다.
두 수사는 서른 장 거리를 두고 한립을 살폈다. 이에 한립도 가볍게 허공으로 떠올랐다.
“천성쌍성의 위명은 오래 들어왔습니다. 오늘 이렇게 뵙게 되니 영광입니다.”
“난성해에 원영 후기 수사가 몇 되지 않는데 한 수사께서 저희 부부를 만나 주시니 저희의 복이지요. 이쪽은 제 부군 되는 릉소풍입니다. 저희가 유명하다지만 본명을 알고 있는 수사들은 극히 드물답니다.”
여인은 붉은 입술로 달싹이며 먼저 사내를 소개했다. 한립은 미소 지으며 자신을 냉랭한 시선으로 훑고 있는 릉소풍을 마주보았다. 둘은 동시에 서로가 만만치 않다는 것을 깨닫고 가슴이 서늘해졌다.
“조 장로에게 들었습니다. 한 형이 이미 반려가 있다니 아쉬운 일입니다. 헌데 난성해에 최근 원영을 이룬 여수사가 거의 없을 것인데 혹시 대진 출신인 것입니까?”
릉소풍은 입을 열자마자 한립이 생각지도 못한 말을 했다.
“두 분께서는 대진을 다녀오신 적이 있으시군요!”
한립이 부인하지 않고 이렇게 묻자 천성쌍성은 자신들의 판단이 옳았다고 생각했다.
“대진은 수도 성지로 이름난 곳인데 어찌 안 가볼 수 있겠습니까. 다만 난성해와 대진을 연결하는 상고 전송진이 있는 곳이 워낙 비밀에 휩싸인 곳이라 저희도 위험을 무릅쓰고 한 번 다녀왔을 뿐입니다.
그곳은 역대 성주들을 제외하면 아는 자가 드물고 주변에 장로를 파견해 지키게 하는데 수사가 다녀갔다는 보고를 들은 바가 없군요. 십여 년의 세월을 들여 바다를 건너지 않는 이상 불가능한 일일 텐데 한 형께서는 어떻게 난성해로 오신 것입니까?”
온청이 숨김없이 궁금한 바를 물었다.
“연이 닿아 오게 되었지 의도한 바는 아니었습니다. 다만 그 방법을 누군가 다시 시도하기는 극히 어려울 것이니 두 분은 마음 놓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