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60
660화. 다시 만난 극음
몇 시진이 지나고 어느새 밤이 되었다. 한립은 빛줄기로 변해 주위를 살피다가 바로 섬을 향해 날아갔다. 동시에 그는 비술을 펼쳐 푸른빛을 약하게 하여, 어두운 밤에 일반 수사들의 눈을 피할 수 있었다.
한 식경이 지나 그는 섬에 이르렀고 이미 묘학의 원영을 통해 역성맹 수사들이 머무는 곳을 알고 있었기에 소리 없이 섬으로 들어갔다. 그리고는 거대한 산봉우리 중 하나로 곧장 날아갔다.
가는 길에는 은밀히 설치 되어있는 금제들이 많았고 경비를 도는 수사들의 수도 상당했다. 산봉우리에 가까워질수록 경비가 삼엄해졌다. 물론 그는 금제들이나 저계 수사들은 개의치 않고 아무도 모르게 지나쳐갔다.
푸른 빛줄기가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고 날아가 역성맹 구역의 가장 핵심적인 봉우리에 도착했다.
그는 앞으로 더 나아가지 않고 산봉우리를 살피며 생각에 잠겼는데 눈동자에서는 남색빛이 일렁이고 있었다. 그러자 그곳을 둘러싼 희미한 남색 보호막이 눈에 들어왔다.
표면에 거울처럼 매끄러운 것이 희귀한 종류의 거대 진법으로 형성된 강력한 금제 같았다.
한립은 미간을 좁혔다. 이런 강력한 진법은 간단히 부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눈동자에서 남색빛을 거둔 한립이 한 손을 뒤집어 세 가지 색의 무언가를 꺼내들었다.
바로 삼염선이었다.
이렇게 되면 금제를 지키는 수사가 이상을 감지하겠지만 정 안 되면 수비병을 죽이면 그만이었다. 약간의 시간만 주어지면 극음 사조를 재빨리 죽이고 섬을 떠나는 일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한립은 마음을 정하고 깃털 부채를 흔들려했다.
‘……? ’
그런데 그 순간 무언가를 감지하고 삼염선에서 법력을 거두었다. 삼염선을 회수한 그가 자리에서 사라졌다. 그러자 멀리서 여러 빛들이 반짝이더니 소란스럽게 산봉우리로 날아들었다.
잠시 후 빛이 가시고 세 인영이 나타났다.
머리를 산발한 백발 수사는 얼굴이 어려 보였지만 원영 중기의 수행을 지니고 있었고, 그 뒤로 두 명은 백발 수사와 얼굴이 닮았는데 핏기 하나 없이 창백한 얼굴에 얇디얇은 하얀 장포만을 걸쳐 기묘한 느낌을 자아냈다.
백발 사내는 이곳 금제가 익숙한지 남색 보호막 앞에서 멈춰 붉은 전음부를 안으로 쏘아 보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남색 보호막이 깜빡 거리며 갈라졌고 그들이 안으로 들어간 뒤 빠르게 원래대로 돌아갔다.
아무도 모르게 푸른 그림자가 그들의 뒤를 바짝 쫓았는데 원영 중기의 백발 수사도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 남색 보호막 속에는 수사 몇 명이 그들을 마중 나와 있었다.
“비 선배님께서 와주셨습니다. 당 장로님께서는 급한 일이 있으셔서 일단 귀빈루에서 오늘 밤은 쉬시지요. 내일 다른 선배님들과 운연전(雲烟殿)에서 만나시면 됩니다.”
결단기 장한이 공손한 어투로 말했다.
“그게 무슨 소리냐? 급하다며 당장 달려오라 일러 놓고 이제는 내일 만나자니? 당 장로가 나를 가지고 노는 것이더냐!”
백발 수사는 곧바로 불쾌한 내색을 했다.
“절대 아닙니다. 당 장로님께서 갑자기 일이 생겨 그런 것이지 비 선배님을 소홀히 대할 의도는 없습니다.”
“내일 당 노인네에게 따지면 될 일이니 되었다. 그래서 수사들은 얼마나 도착 했더냐? 내일이 모이기로 한 마지막 날인데.”
“뇌공도의 묘학 선배님과 천망도(天芒島)의 황 선배님을 제외한 모든 선배님들이 도착하셨습니다.”
이제야 안심한 장한은 아는 대로 대답하였다.
“묘학 그 녀석은 한 번 몸을 잃고는 쥐새끼처럼 겁이 많아졌지. 분명 홀로 움직이지는 않을 테고 황곤과 같이 오려다 지체되는 것이 분명하다.”
장한은 귀머거리라도 된 듯 그의 말을 모른 척했다. 그 모습에 백발 수사가 냉소하며 뒤편의 창백한 사내에게 무언가를 분부했다.
핏기 하나 없는 사내의 두 눈이 핏빛으로 물들며 기이한 움직임으로 상반신이 뱀처럼 늘어나 가만히 서 있던 축기기 수사의 목을 물어뜯어 피를 빨기 시작했다.
“흐헛!”
주변의 축기기 수사들이 대경실색해 연달아 뒤로 물러나며 몇몇은 당황한 나머지 법기를 방출해 몸을 보호하기도 했다.
“소란 피울 것 없다. 내 마시(魔尸)가 흡혈해야 하는 시각일 뿐이다.”
백발 사내가 눈을 부릅뜨며 노려보는 통에 마중을 나온 수사들은 뜨끔하며 법기들을 거둘 수밖에 없었다.
그제야 얼굴을 푼 백발 수사가 저물대를 스쳐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커다란 단약을 꺼내 또 다른 사내에게 던져주었다. 사내는 멍하니 입을 벌려 핏빛 단약을 삼키고는 그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뿌드득 으드득!
그 와중에도 피를 빨던 사내는 여전히 멈추지 않고 피를 빨아댔다. 원래 7척은 되던 거한이 그에게 피를 빨리며 이상한 소리를 내더니 체형이 급격히 줄고 피부가 말라 나무껍질처럼 변했다.
백발 수사는 차가운 눈빛으로 그것을 지켜보다 목을 물린 수사가 난쟁이처럼 줄고 나서야 흡혈 중인 사내에게 핏빛 법결을 날렸다. 동시에 사내가 몸을 부르르 떨며 이빨을 거두고 원래 모습으로 돌아갔다.
붉은 빛이 백발 사내의 손을 떠나 난쟁이로 변한 거한의 몸에 닿았다.
파칙.
축기기 장한은 핏빛 화염 속에서 순식간에 먼지처럼 사라졌고 혼백조차 살아남지 못했다.
“이제 귀빈루로 안내하거라.”
백발 사내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결단기 수사를 향해 명했다.
“예……. 선배님 저를 따라 오시지요!”
결단기 장한은 표정이 급변하다 서둘러 웃음을 머금고 대답했다.
이렇게 백발 수사와 두 강시들이 산봉우리로 날아가자 금제를 지키던 나머지 수사들이 살았다는 듯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그 모습을 수백 장 위에서 한립이 지켜보고 있었다.
“음살혈시(陰煞血尸)! 인계에서 저런 마시를 제련해 낼 줄은 생각도 못했구나! 결국에는 음살(陰煞)의 기운이 몸에 침투해 죽을까 두렵지도 않단 말인가.”
한립은 백발 수사가 데리고 다니는 마시들의 정체를 단번에 눈치 채고는 팔짱을 끼며 중얼거렸다.
음살혈시는 한립이 건 노마에게 얻은 연시법결(煉尸法決)이란 서책에서 본 마시의 종류 중 하나였다. 제련법이 실린 것은 아니었지만 음살혈시의 위력이 강하고 제련 과정이 악독하다는 것은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음살혈시를 제련하려면 반드시 자신의 혈족의 시체를 이용해야 나중에 반서(反噬)를 막을 수 있었다. 제련할 때는 시체 주인의 혼백까지 영원히 강시 속에 가두어야 했기에 윤회도 할 수 없게 된다.
비록 수도계가 범인들에 비해 피붙이에 대한 정이 옅은 것은 사실이었지만 이렇게 극악무도하고 잔인한 짓을 하는 이들은 드물었다. 거기다 이상하게도 친족을 이용해 음살혈시를 제련해낸 수사들은 하나같이 비극적으로 생을 마감한다는 소리가 떠돌기도 했다.
이렇게 되니 몇몇 수사들은 마시의 위력을 흠모하기도 했지만 제련 방법을 아는 이는 극소수였다. 건 노마처럼 오자동심마를 수련한 대수사도 구체적인 제련 법결을 모르지 않았는가!
한립은 한 눈에 백발 수사의 음살혈시들을 알아보고 놀란 마음이 가시지 않았지만 백발 수사의 정체가 무엇이고 얼마나 흉악한 자이든 그와는 상관없는 일이었기에 즉시 허공을 선회해 산봉우리 중간으로 날아갔다.
묘학과 노인의 원영을 헤집고도 극음이 정확히 어디에 기거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는 산 중의 축기기 호위병을 하나 잡아다 추혼술을 이용해 원하는 정보를 알아냈다.
한립은 호위병을 재로 만들고 산꼭대기로 올라갔다. 산 정상은 무척 넓었지만 건물이 많지 않아 큰 전각과 몇몇 누각을 제외하면 텅 비어 있었다.
한립은 은닉술을 펼치며 소리 없이 누각 중 하나로 다가갔다. 으리으리한 5층 누각은 아래로 갈수록 넓어져서 1층은 수백 장의 부지를 차지할 정도로 넓었다.
기이한 새까만 암석을 잘라 만든 누각은 짙은 회색의 음기를 발산해 음산한 분위기를 풍겼다. 한립은 짙은 회색의 음기로 둘러싸인 누각을 바라보다가 냉소하며 한 손으로 허공을 갈랐다.
보라색 빛이 굳어 만들어진 칼날이 음기를 가르자 그를 위한 통로가 만들어졌다. 한립이 주저 없이 푸른 빛줄기로 변해 안으로 뛰어들었다.
“누구냐?”
그가 막 대문으로 향하는데 놀란 목소리가 들려왔고 검은 빛 속에 중년 수사가 날아오는 모습이 보였다. 극음이 아니라면 신경 쓸 이유가 없었기에 한립이 소매를 펄럭여 금빛을 방출하고 사라졌다.
검은 빛 속 중년 수사는 서둘러 입에서 법보를 꺼내려 했으나 이미 머리 위로 금빛이 번뜩인 후였다. 비명 소리가 울려 퍼지고 순식간에 조각이 난 수사는 원영이 달아날 틈도 없이 죽어나갔다.
한립은 그제야 무표정하게 중년 수사의 잔해를 살폈다. 결단기 수사는 공법으로 보건데 극음 사조의 제자 같았다. 그가 손을 튕기자 새빨간 불덩이가 날아가 시체를 재로 만들어 버렸다. 한립은 고개를 돌려 계단을 보며 눈을 빛냈다.
‘아직도 눈치 채지 못한 것인가? ’
그는 의식을 방출해 누각 위를 탐색했고 잠시 후 그의 표정이 묘해졌다. 이 넓은 건물을 마치 결단기 수사 홀로 지키고 있었던 것처럼 누각의 위층들은 전부 비어 있었고 아무도 없었던 것이다.
‘극음이 벌써 누각을 떠나 어디로 간 것은 아니겠지? ’
한립이 턱을 쓸며 갑자기 지하를 훑기 시작했다. 별안간 그의 입 꼬리가 올라가며 미소가 떠올랐다.
즉시 허리춤을 스쳐 붉고 노란 색의 옥 여의를 꺼내 들자 그 안에서 노란 빛이 흘러나와 그를 감쌌다. 이어 그가 땅 속으로 사라지자 드넓은 누각 1층은 다시 고요해졌다.
토둔술을 이용해 열댓 장을 내려간 후 한립은 회색 장막과 새까만 벽을 발견했다. 오래 고민할 것도 없이 한 손에 보라색 화염을 번뜩이며 회색 장막을 갈랐다.
촤륵.
회색 장막에 작은 균열이 생겨났고 한립이 몸을 비틀며 푸른 실처럼 변해 그 틈을 지나쳤다. 두 발이 바닥에 닿았을 때는 검은 돌로 둘러싸인 층계에 위치하고 있었다.
한립은 차분히 주위를 둘러보더니 의식을 방출해 통로 아래를 살피려 했다.
“음?”
뜻밖에도 엄청난 영석이 필요한 복잡하고 강력한 진법이 설치되어 있었다. 원영기 수사라도 거처에 이런 의식 제한 진법을 함부로 펼치기 어려울 텐데 이상한 일이었다.
그가 층계를 따라 쉼 없이 내려가는데 깊이가 예상을 넘어서서 족히 수백 장을 지나서도 끝이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조금 더 내려가자 어느 순간부터 왕성한 영기들이 물밀듯이 밀려왔다.
크게 놀란 한립은 무의식중에 걸음을 멈추고 영기를 느꼈다. 정순하기 그지없는 영기는 일반적인 최상급 영맥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그는 영기를 들이마시며 몸을 날려 열댓장을 단숨에 올라갔다. 그러자 영기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역시 뭔가 있었어!”
한립이 석벽에 손을 가져다 대자 손끝에서 한기가 번뜩이며 검은 돌덩이가 두부처럼 잘려나가 떨어져 내렸다. 한립이 눈썹을 끌어 올리며 손가락에 힘을 주자 돌덩이가 가루가 되어 부서져 내렸다.
그때 그의 눈이 남색으로 일렁였다.
‘이게 뭐야? ’
푸른 돌가루 속에 은색 결정들이 반짝였는데 명청령안을 발동하고서야 겨우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이다. 어떤 광물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이곳의 영기가 밖으로 새어나가지 않도록 하는 것이 틀림없었다.
그는 더 이상 시간을 끌지 않고 계속해서 돌계단을 따라 내려갔다. 정순한 영기가 가득한 것으로 보아 극음도 근처에 있는 것이 분명했다. 과연 대여섯 장 정도를 내려가자 눈앞이 하얗게 밝아졌고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극음 말고 또 누가 있는 건가? ’
한립은 눈을 가늘게 뜨고 이상하다 여겼지만 그의 실력에 육도나 만삼고 등이 같이 있다고 해도 꺼릴 이유가 없었다. 한립이 한 손을 튕겨 굵은 금빛 뇌전으로 석문을 네 조각냈다.
이어 석실 안으로 들어가자 검은 장포를 입은 가느다란 체구의 노인이 그를 쳐다보았다. 어안이 벙벙한 노인은 극음 사조였다.
극음은 음기가 가득한 불길로 어떤 원영을 고문 중이었는데 바로 그를 알아보고 희색을 띄었다.
“한립!”
줄곧 허천정에 대한 미련이 남아 있었는데 눈앞에 그가 나타난 것이다. 극음은 즉시 소매를 털어 검은 기운을 분출했고 새까만 구렁이로 변한 기운을 한립에게 날렸다.
한립이 비웃으며 한 손을 뻗자 굵은 금빛 뇌전이 그의 팔을 타고 내려갔다.
꽈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