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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658화 (415/2,000)

# 658

658화. 수주대토(守株待兎)

한립은 소매를 펄럭이며 걸어가 길가의 건물들을 살폈다.

이미 시장 안에는 돌아다니는 수사들이 많았는데 다들 서둘러 누각을 오가며 혹시나 누군가 자신을 눈여겨보지 않을까 경계하는 듯했다.

몇 걸음 더 나아가 그가 걸음을 멈추고 몇몇 누각을 쳐다보았다. 작은 궁전처럼 생긴 2층짜리 6개의 건물 때문이었다. 일렬로 서 있는 건물들 앞에 남색 요수, 금색 소검, 푸른 영초 등 여섯 가지 도안들이 수놓아진 표식이 흩날렸다.

‘육연전(六連殿)? ’

난성해의 상당수 세력들이 역성맹에 가입해 일원이 되었다는 것은 알았지만 이렇게 대놓고 점포를 차리고 있을 줄은 몰랐다. 보아하니 역성맹의 세력이 상당히 커진 듯 했다.

그는 역성맹의 원영기 수사 몇몇과 갈등이 있었기에 굳이 그들 앞에 나설 이유가 없었다. 한립이 고개를 저으며 다른 건물로 걸음을 옮기려는데 육연전에서 돌연 수사 여럿이 우르르 걸어 나왔다.

맨 앞의 두 명을 본 한립의 표정이 미세하게 달라졌다.

오십 대의 푸른 장포를 걸친 노인과 미색의 도복을 입은 삼십 대 도사였는데 놀랍게도 둘 다 원영 초기의 수행을 지녔다. 그리고 그들 뒤로 네 명의 결단기 수사들이 육연전 가게 주인의 복색을 한 중년인의 인사를 받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원영기 수사들이 둘이나 동시에 점포를 찾아 주었으니 버선발로 마중할 만 했다. 그러나 한립의 표정이 달라진 것은 다름 아닌 젊은 도사 때문이었다.

예전에 그를 죽이려 들던 묘학 진인보다 스무 살은 어려 보였지만 외모가 비슷했던 것이다. 보통 다른 수도자의 몸을 빼앗은 수사들은 은연중에 여러 비술을 사용해 용모와 체격을 이전과 똑같이 바꾸어 놓는다.

어쨌든 고계 수사가 남의 몸을 빼앗아 연명하는 것이 그리 명예롭지는 않았던 것이다. 그가 묘학 진인과 용모와 체격이 비슷하지만 훨씬 어려보이는 것을 보니 관련 비술을 시행한 지 얼마 안 된 것 같았다.

한립은 재빨리 놀란 기색을 지우고 유유히 육연전 앞을 지나갔다.

묘학 진인과 노란 장포의 노인이 그를 훑는 것이 느껴졌지만 빼빼 마른 노인의 모습을 한 그의 수행이 상당히 높아 놀란 것을 제외하면 별 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들은 제자들을 이끌고 시장 중심을 향해 걸어갔다.

한립도 고개를 돌리지 않고 길을 가는데 그때 묘학과 옆의 노인이 입술을 달싹이며 서로 전음을 주고받았다. 그들을 등진 한립은 잠시 멈칫하다가 아무렇지 않게 그들과 멀어졌다.

골목을 돌아 그는 제법 규모가 있어 보이는 누각으로 들어갔다.

한 시진 후 그는 가게 주인의 공손한 마중을 받으며 걸어 나왔고 멀리 떨어지지 않은 또 다른 누각으로 들어가기를 반복했다. 그가 다섯 번째 가게를 빠져 나왔을 때는 불필요한 법보며 고보들을 진귀한 재료와 백여 개의 고계 영석으로 바꾼 후였다.

그런데 밖에는 정체 모를 결단기 수사 몇이 돌연 주변을 배회하고 있었다.  한립은 속으로 냉소하며 원래 계획과 달리 그대로 시장을 걸어 나가 성곽 쪽으로 향했다.

은닉술을 펼친 결단기 수사들이 바로 그를 따라 성문을 빠져나갔다가 어안이 벙벙해졌다. 분명 의식으로 쫓고 있던 상대가 눈 깜짝할 사이에 연기처럼 사라졌기 때문이다.

그들 중 일부는 한립이 다녀간 점포에서 파견한 이들이었고 일부는 그저 가게 주인들이 공손히 마중하는 광경을 보고 따라 붙은 이들이었다.

노인 분장을 한 원영 후기 수사가 얼마나 대단한 물건을 구입해 사라지는지 알아보려는 것이었다. 한립이 사라지자 주변을 샅샅이 뒤진 그들은 아무런 소득 없이 울적하게 돌아가야만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허공에서 푸른빛이 번뜩이며 한립이 나타났다. 그리고 수사들이 사라진 방향을 바라보며 조소했다. 갑자기 중요한 할 일이 생겨 이곳에서 소란을 피우기 어려운 상황이 아니었다면 저들은 모두 죽었을 것이다.

한립이 주위를 살피더니 방향을 정해 빛줄기로 날아올랐다. 잠시 후 푸른 빛줄기가 성 주변의 작은 산을 돌아 떨어져 내렸다. 그윽하게 꽃향기가 퍼지고 안개가 짙게 낀 곳이었다.

흡족하게 고개를 끄덕인 그가 손을 들어 올리자 오색찬란한 진법 깃발들이 사방으로 날아갔다. 바로 하얀 안개가 용솟음치며 산에 있던 안개와 합쳐졌고 한립은 그 속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웽웽웽웽.

몸을 숨긴 그가 허리춤의 영수대를 건들자 천 마리가 넘는 서금충들이 몰려 나와 금색 구름떼를 이루었다. 한립은 가부좌를 하고 주술을 읊으며 전신에서 푸른빛을 번뜩였다.

펑!

서금충 무리가 폭발하듯 사방팔방으로 쏘아져 나갔고 한립은 두 눈을 감은 채 꼼짝하지 않았다. 추마골에서 이미 한 번 펼친 적 있는 의식화천(意識化千)의 비술로 대연결의 도움을 받아 스스로 깨우쳐낸 신통이었다.

자신의 의식 대부분을 천 개가 넘는 가느다란 작은 의식으로 분리해 서금충의 몸에 깃들게 하면 천 마리가 넘는 첩자를 풀어 놓는 것과 같은 효과를 볼 수 있었다.

의식화천의 비술은 한립이 의식을 영수에 깃들게 하는 것과 비슷하면서도 또 달랐는데, 하나는 대부분의 의식을 무수히 많은 조각으로 나누어 서금충의 눈과 귀를 빌려 주변을 수색하는 것이라 반드시 자신이 직접 조종해야 했고 일정 범위를 벗어날 수 없었다.

그러나 독립된 의식 한 줄기를 살아있는 생물에 깃들게 하는 방식은 명을 받은 영수가 알아서 움직이면 되었다. 어느 정도 화신술(化身術)과 비슷한 효과를 내서 일정 시간이 지나기 전에는 얼마나 떨어져 있든 상관없었다.

서금충들은 하얀 안개를 벗어나자마자 어떤 것은 땅 속으로 또 어떤 것은 허공으로 날아가 사라져 버렸다. 간단하게 친 결계 안에서 가부좌를 튼 한립은 두 눈을 꼭 감고 집중했다.

* * *

해가 해수면 아래로 지고 밤이 찾아오자 뇌공도 전역이 어둠 속에 잠겼다.

그러나 성곽만은 영력이 충만한 월광석으로 반짝였는데 주변의 어둠과 극명하게 대비되어 밤바람에 더욱 스산한 느낌이 들었다.

원래 수도자들은 영력을 쓰면 밤에도 잘 보였고 낮보다 그 거리가 짧아질 뿐 밤낮을 따지지 않았다.

하지만 외성해는 사정이 달랐다. 워낙 요수들이 많아서 낮에 갈 길을 가고, 저녁에는 섬에 내려서 쉬어야 은닉술에 정통한 요수들에게 잡아먹힐 가능성이 낮아졌다.

아무리 수도자라도 시종일관 의식을 퍼트려 주변 상황을 경계하기는 힘들어 정식으로 요수 사냥을 하다 죽는 이들보다 암습을 당해 잡아먹히는 이들의 수가 더 많았다.

신통이 뛰어난 고계 수사가 아니면 저녁에는 섬에서 머물며 섬마다 금제를 개방해 경계를 강화하는 것이 일반적이라는 뜻이다. 뇌공도의 여덟 석탑도 동시에 빛을 뿜으며 남색 보호막으로 성 전체를 휘감았다.

그러나 늦은 시각, 삿갓을 쓴 몇몇 수사들이 조용히 성을 떠나고 있었다.

성문을 지키던 결단기 수사 한 명과 축기기 수사들은 무리 중 한 명이 삿갓을 벗어 얼굴을 보이자 일사분란하게 갈라서며 길을 터주었다.

그들은 성을 떠나자마자 칠흑 같은 밤하늘을 가르며 사라졌다. 무리는 빠른 속도로 날아가며 정말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엇?”

그런데 백여 리쯤 날아가던 중 누군가 갑자기 소리를 내 다 같이 멈춰 섰다. 그 자의 둔광 속에서 하얀 실 같은 것이 날아가 허공을 가른 것이다.

펑!

다른 수사들이 영문을 모르고 뒤를 돌아보자 허공에 금빛이 번뜩이며 하얀 실과 충돌했다.

“뭐란 말입니까?”

“모르겠지만 영충 비슷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누가 기르는 것인지 야생 요수인지 백애침(白哀針)이 뚫지 못하다니 상당히 단단한 몸을 지녔군요. 너희는 내려가 영충의 시체를 가져 오거라. 무엇인지 살펴봐야겠다.”

대답을 마친 수사가 뒤쪽의 수사들에게 분부했다. 두 수사가 공손히 답하고는 아래쪽으로 내려가 금빛 영충의 시체를 수색했다.

그러나 일다경이 지나서야 돌아온 그들은 안색이 좋지 않았다.

“문주님께 아룁니다. 영충이 죽지 않은 듯합니다. 시체를 찾을 수 없습니다.”

한 명이 불안한 눈길로 보고했다.

“죽지 않았다고?  백애침이 수나 놓는 바늘인 줄 아느냐?  어찌 영충 따위를 죽이지 못할까!”

“백 형, 정말 영충이 죽지 않았을 지도 모릅니다. 저도 영충의 행방을 찾을 길이 없으니 말입니다.”

옆에 선 갓을 쓴 수사가 신중한 어투로 그를 말렸다.

“그럴 리가…….”

바늘 법보를 쓴 수사가 깜짝 놀라 서둘러 의식을 퍼트려 주변을 꼼꼼히 뒤졌다. 그 결과 그도 금빛 영충을 찾지 못하고 난색을 표했다.

그런데 그가 손에서 무수히 많은 가느다란 하얀 실을 뿜어냈고 입술을 달싹여 전음을 보내자 다른 수사도 곧바로 손을 뻗어 초록색 종을 꺼내 들었다.

“누구신지 모르겠으나 그만 숨어계시고 나오시지요!”

하얀 실을 방출한 수사가 고함을 치며 사방을 훑는데 몸에서 엄청난 기세가 느껴졌다.

* * *

주위는 조용했고 어둠 속에서는 어떤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분노해 소리를 지른 수사가 비술을 사용해 상대를 끌어내려는 것 같았다.

바로 그때 사방에서 웽웽거리는 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수사들이 흠칫 놀라 주위를 살피니 어둠 속에서 금빛 딱정벌레들이 빽빽하게 그들을 포위하고 있었다.

놀란 수사들은 영충을 부리는 수사를 찾기 위해 의식으로 계속 주변을 훑었지만 아무것도 찾지못해 그들의 마음은 더욱 초조해졌다.

은닉술이 능통한 신통을 지녔던지 아니면 그들보다 수행이 더 뛰어난 수사일 터인데,  어느 것도 희소식은 아니었다.

“우리를 가둬 두셨으면 이제 이유를 말해주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렇게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것은 무슨 경우입니까?”

옥 망치를 꺼낸 수사가 일갈하자 그의 보물이 녹색 빛을 반짝이며 흔들거렸다.

“나를 만나보고 싶다면 조금만 더 기다리십시오. 묘학 수사, 한 모가 만나 뵙기 위해 가는 중입니다!”

돌연 어둠 속에서 사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말투로 보아 아직 멀리 떨어져 있는 듯 했다.

“한 수사?  누군지는 모르겠으나 빈도와 무슨 은원이라도 있는 것입니까?”

사내가 하는 말에 수사 한 명이 삿갓을 벗고 젊은 얼굴을 드러냈다. 바로 묘학 진인이었다. 그 옆에서 하얀 실들을 내뿜은 수사도 삿갓을 벗으니 낮에 묘학과 함께 하던 노란 장포의 노인이었다.

그 뒤로 서 있는 자들은 당연히 그들의 제자들일것었다. 묘학 진인의 추궁에 사방에서 사내의 웃음소리가 둘려오다 뚝 그쳤다.

“묘학 수사와 원수를 진 자입니까?”

“확실하지 않습니다. 한 씨 성을 지닌 자와 원수라니 기억나는 바가 없는데요.”

노란 장포 노인의 말에 묘학은 손에 든 불진을 털며 답했으나 가장 궁금한 것은 바로 그였다.

“어찌 되었든 좋은 의도로 우리를 가로 막은 것이 아니니 조심하시지요.”

“그것은 빈도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찌 척을 진 원영기 수사들 중에 떠오르는 자가 없는 것인지…….”

묘학은 중얼거리며 생각에 잠겼다. 그 찰나 어둠 속에서 푸른 빛줄기가 날아들어 금빛 영충 무리에 도착했다. 빛이 가시고 나타난 자는 푸른 장삼을 걸친 청년 한립이었다.

그가 묘학을 훑으며 냉소했다.

“공들여 찾은 보람이 있습니다. 벽령도에 가시는 것 같은데 알아서 지닌 영석을 내놓으시겠습니까 아니면 제가 도와드릴까요?”

청년은 평온한 얼굴로 원영 초기의 묘학과 노인을 대놓고 무시했다. 그러나 묘학 등은 의식으로 그를 훑고는 두려운 기색을 보였다.

수행을 정확히 파악할 수는 없었지만 은은하게 느껴지는 영기의 압력만으로도 원영 중기 이상의 수사일 가능성이 높았다. 게다가 상대가 자신들의 행적을 꿰고 있자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다.

“그대가 뉘신지는 모르겠지만 노부는 이룡도(離龍島) 황곤이라 합니다. 영석을 내놓으라니 무슨 뜻인지 도통 모르겠구려.”

“지금 모른다고 하셨습니까?  내 친히 둘의 전음을 듣고 이리 온 것인데 어찌 모른다고 할 수 있습니까. 혹여 원망하려거든 묘학과 동행한 채 나를 마주친 운명을 탓하십시오. 묘학, 나를 기억하시겠습니까?”

청년이 노인의 말을 비꼬며 묘학에게로 서늘한 시선을 돌리자 그의 얼굴이 자세히 드러났다. 노란 장포 노인은 한립의 거침없는 언사에 얼굴이 굳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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