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57
657화. 뇌공도(雷空島)
한립은 움직임을 멈추고 상황을 살폈다.
삿갓을 써 얼굴을 가린 중년인이 황토색 비검을 휘두르며 요수의 공격 대부분을 막아냈다. 나머지 축기 후기 수사들은 백발의 노인과 어려보이는 묘령의 여인이었는데 그들도 푸른 작살과 새빨간 수레바퀴를 써서 중년인을 돕고 있었다.
다만 6급 요수는 전신이 새하얗고 아기 울음소리 같은 것을 냈는데 뜻밖에도 난성해에서도 보기 드문 영리수(嬰鯉獸)였다. 이전에 그가 보았던 영리수보다 몸집이 컸고 뽀얀 손에 들고 있는 도, 검, 북, 깃발 등의 보물들도 나쁘지 않아 보였다.
도, 검, 북은 최상급 법기였지만 노란 기운에 휩싸인 북은 고보라서 휘두를 때마다 은색 파문을 일으키며 위력을 선보였다. 한립의 등장에 양쪽이 모두 주목했고 그가 인간 수사라는 것을 확인하자 삿갓 사내가 기쁜 마음에 소리쳤다.
“저는 뇌공도(雷空島)의 진경이라 합니다. 도와주신다면 꼭 후하게 보답하겠습니다.”
요수의 핍박에 한립의 수행도 확인하지 않고 결단기 수사라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6급 영리수 역시 이미 지능이 상당한 요수였다. 안개 속에 숨어 한립의 수행을 확인한 요수는 그가 원영기 수사라는 것을 깨닫고는 공포에 질렸다.
한립이 대답하기도 전에 영리수가 울음소리를 내며 백 개가 넘는 남색 뇌전 덩이를 세 명의 수사에게 쏘고는 몸을 날려 심해로 달아나려 했다.
하지만 한립이 그것을 보곤 소매를 털었다. 한 척 길이의 비검이 빠르게 날아가 순식간에 몸을 떨며 열댓 장 길이의 거검으로 변해 영리수를 벤 것이다. 영리수는 금빛이 번뜩인다고 느낀 순간 이미 고통으로 몸을 떨며 의식을 잃었다.
금빛이 요수의 몸을 돌며 핏줄기 속에서 조각을 내놓았고, 영리수는 혼백조차 달아나지 못하고 괴멸되었다. 잔해가 떨어져 내리자 한립은 곧바로 요수의 시체에서 나온 남색 구슬을 손에 쥐었다.
그리고 요수가 죽자 백 개가 넘던 뇌전 구슬도 한순간에 흩어져 버렸다. 세 수사는 한시름을 놓고 한립을 향해 존경스런 눈빛을 보냈다.
수사들이 한립에게 다가오더니 삿갓 사내가 거리를 두고 멈춰 서서 깊이 허리를 숙였다.
“청양문(靑陽門) 진경이 선배님께 인사 올립니다. 요수들에게 오랫동안 시달리고 있었는데 선배님의 도움으로 겨우 살았습니다. 혹시 선배님의 존성대명을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사내는 의식으로 슬쩍 한립을 살피고는 더욱 공손해졌지만 그렇다고 비굴한 모습은 아니었다.
“청양문이라면 삼양 상인의 제자이더냐?”
한립이 낯익은 이름에 멈칫하며 물었다.
“삼양 상인께서 저의 스승님 되십니다. 스승님을 아십니까?”
삿갓 사내는 한립의 수행을 짐작하고 놀랬지만 내심 원영 초기 수사라고 짐작했다. 그처럼 난성해에서는 원영 중기 수사도 극히 드물었던 탓이다.
“유명하신 분이니 들어보았을 뿐 뵌 적은 없다.”
청양문 삼양 상인이라는 이름을 들으니 예전에 원요가 청양문 소주를 죽이고 추격 받았던 일이 떠올랐다. 그러나 그가 아무리 이름을 날렸어도 기껏해야 원영 중기 수사에 불과했다.
“너희가 주변 지역에 대해 잘 알겠구나. 벽령도의 구체적인 위치가 어떻게 되느냐?”
벽령도라는 말에 청양문 사내가 미소 지었다.
“벽령도를 가시려는 것은 고계 영석 때문이시겠지요? 그렇다면 벽령도까지 가지 않으셔도 인근의 몇몇 시장에서 쉽게 구입하실 수 있습니다. 물론 선배님께서 광산을 관리하는 역성맹이나 천성궁 수사들과 인맥이 있다면 조금 더 저렴한 가격에 매입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시장에서 거래되는 양이 충분하더냐?”
“한 번에 3, 40개 이상을 구하시려는 것이 아니라면 시장에서도 쉽게 구하실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일단 시장을 둘러봐야겠구나. 길을 안내해주면 이 요단으로 보수를 치르겠다. 어떠하냐?”
한립은 손에 들고 있던 영리수 요단을 툭 던져주었다. 진경은 요단을 받아 들며 내심 쾌재를 불렀다.
“제게 맡겨 주십시오. 인근 해역을 돌아다닌 지 수십 년째라 시장 위치는 꿰고 있습니다.”
6급 영리수 요단이면 결단기 수사에게 큰 수확이었다. 겨우 길 안내를 하고 받기에는 과분한 보수라 절로 웃음이 났다. 이렇게 한립은 진경 등 세 수사의 안내를 받아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들의 말에 따르면 벽령도는 이곳에서 보름 거리였는데 가는 길에 그들이 거주하는 섬이 있다고 했다. 한 번도 쉬지 않고 열흘 넘게 날아가자 이름 모를 섬이 나타났다.
수천 리는 될 법한 규모에 높은 산과 울창한 산림이 있는 섬이었다.
“이곳이 뇌공도입니다. 벽령도 주변 시장들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큰 곳으로 절대 선배님께서 실망하실 일은 없을 것입니다.”
“영맥이 나쁘지 않구나.”
진경이 한립 옆에서 친절히 설명하자 한립이 멀리서 섬을 살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 인근에서는 제일의 영맥입니다. 거기다 몇 가지 희귀한 영약이 나는 곳이라 역성맹과 성궁도 뇌공도를 노렸으나 두 세력이 서로 견제한 덕에 다른 세력들이 연합하고 차지했지요.”
“그 다른 세력 중에 너희 청양문도 있겠지?”
“아……. 저희 청양문 수사들도 얼마간 머물기는 하지만 저희가 점거하고 있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웃음기 어린 한립의 말에 진경이 헛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물론 한립이 정말 청양문의 내부 사정에 큰 관심이 있어 물은 것은 아니었기에 더는 묻지 않았다.
하지만 진경이 먼저 섬의 크고 작은 세력과 몇몇 원영기 수사들을 안내해주었다.
“묘학 진인! 벽운문(碧雲門)의 그 묘학 말이더냐? 예전에 큰 부상을 입었다고 들었는데 이 섬에 머물고 있다고?”
“그 일에 대해 아십니까? 오래 전 육체가 멸살되었지만 벽운문의 비호 아래 새로운 수사의 몸을 얻었다고 합니다. 이번에 뇌공도에 온 것은 벽운문의 기반을 다지기 위해서라고 들었는데 오히려 다른 세력들이 연합해 대치하고 있지요.”
진경은 내심 놀랐지만 고분고분 아는 바를 말해주었다.
“그렇구나.”
한립은 대수롭지 않게 답했고 곧 그들은 섬에 도착해 중심부로 날아갔다. 그러자 높은 산등성이 사이로 작은 성이 보였는데 한 눈에 보기에도 만들어진 지 얼마 안 된 곳이었다.
모든 건물들은 회백색 암석을 잘라 만들었고 성의 사방에는 네 개의 성문이 있었는데 문을 통해 드나드는 것은 연기기의 저계 수사들뿐이었고 다들 하늘로 성을 넘나들고 있었다.
“섬에 머무는 수사들이 얼마나 되지? 대부분이 성 안에 거주하느냐?”
한립은 꽤나 번잡한 광경을 보며 물었다.
“저도 정확히는 모르겠으나 연기기 수사들까지 합친다면 3, 4만 명은 되지 않을까 합니다. 그 중 대부분이 성 안에 머물고 몇몇은 섬 곳곳에 모여 살기도 하지요. 물론 고계 수사들은 산에 스스로 거처를 만들어 홀로 머물기도 합니다.”
진경이 뜻밖의 질문에 잠시 생각하다 답을 내놓았다. 한립이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더는 묻지 않았다.
이제 성의 모든 것이 눈에 들어왔다. 한립은 사방을 훑어보다 성 중앙에 우뚝 솟은 여덟 개의 석탑에 눈길이 갔다. 반원형의 석탑들은 각각이 대여섯 장 높이로 오묘한 진법이 새겨져 다채로운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8개의 석탑들은 성을 지키는 수호 진법으로 난성해에서 유명한 진법 대사가 설계한 것입니다. 일단 발동이 되면 큰 종파의 대형 진법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다고 합니다. 각 탑들은 하루 12시진 내내 축기기 수사들이 지키고 있는데 이 진법 덕분에 성이 몇 번이나 위기에서 살아났다고 볼 수 있습니다.”
“어찌 요수들이 섬을 공격하기라도 한 것이냐?”
“그것은 아니니 안심하셔도 됩니다. 제가 말씀 드린 것은 아주 오래 전 일이고 벽령도를 인간과 요수가 분할 점령한 후에는 더는 소란이 없었습니다. 그럼 아래쪽으로 내려가실까요? 마침 제가 아는 가게가 있는데 고계 영석을 전문으로 판매하는 곳이니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진경이 웃음을 흘리며 성의 남쪽을 가리켰다.
진경이 가리킨 방향을 보니 성의 다른 곳과는 달리 건물들이 높고 화려했다. 어떤 것은 대여섯 층은 되었고 각 누각을 수사들이 바삐 드나드는 중이었다.
흡족하게 고개를 끄덕인 한립은 예상 밖의 말을 했다.
“소개는 필요 없으니 이제 가서 할 일들 하거라.”
“예, 알겠습니다.”
“내가 이곳에 있다는 것을 다른 이들이 알게 되면, 너희가 어찌 될지는 알겠지?”
“걱정 마십시오! 절대 함부로 입을 놀리지 않겠습니다.”
한립이 돌연 서늘한 어조로 세 수사를 훑자 진경이 화들짝 놀라 공손히 답했다.
“말과 행동이 일치하기를 바라마!”
한립은 웃음을 흘리더니 푸른 빛 속에서 괴이하게 사라졌다. 진경 등 세 수사가 놀라 사방을 쳐다보았지만 그의 모습을 찾을 수 없었다.
“진 사숙님, 저희는 그럼…….”
“조용히 하거라! 돌아간다.”
묘령의 여인이 바로 입을 열려하자 진경이 바로 말을 끊고 성 밖으로 날아갔다. 축기기 여인과 노인은 의아해 하면서도 그 뒤를 바짝 쫓아갔다.
백여 리를 날아간 이들이 작은 산 중턱에 내려서서 눈에 잘 띄지 않는 동굴 속으로 들어갔다. 진경은 소규모 동부로 들어가 펼쳐져 있는 금제를 발동하고 한 마디도 없이 대청에 앉아 눈을 감았다.
묘령의 소녀와 백발노인은 서로 시선을 교환할 뿐 단 한 마디도 하지 못했다. 장장 한식경이 지나고서야 진경이 한결 편해진 얼굴로 눈을 떴다.
“이제야 그 자가 의식으로 감시하지 않겠구나. 거처의 금제를 건드리지 않고는 이곳 상황을 엿볼 수 없을 테니까. 언 사질은 아까 하려던 말을 해보거라.”
진경은 묘령의 여인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별 다른 것은 아니고 한 선배님의 정체가 의심스러워서요. 저희가 들어 본 적도 없는 원영기 선배님이 흔치는 않으니까요. 사조님께 여쭤보고 조사를 해야 하지 않을까요?”
묘령의 여인이 머뭇거리다 답했고 백발노인도 곁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 자의 정체를 알아 무엇 하려고? 사조께서는 후기의 경지에 이르기 위해 폐관 수련 중이신데 이것이 그 분을 방해할 만한 일이더냐? 게다가 어차피 사조께서 나서기 어려운 상황에 괜히 일을 만들 것 없다.
난성해에 대해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오랜 세월 폐관 수련한 수사겠지. 상대가 이미 입조심 하라고 경고했는데 괜한 소식이 세어나간다면 청양문 제자라고 우리가 무사할 성 싶더냐? 우리 전부가 이 자리에서 몰살당해도 문 내에서는 어쩔 수 없이 모른 척 할 것이다.”
진경이 콧방귀를 뀌며 꾸짖었다. 그 말에 여인도 가슴이 서늘해져 고개를 끄덕였다.
“게다가 괜히 원영기 수사들의 은원에 휘말렸다가는 괜히 화를 입을…….”
진경이 사질들을 훈계하는데 그의 발밑으로 금빛이 희미하게 떨어져 나와 대청 바닥 속으로 소리 없이 사라졌다. 금빛은 잠시 후 희미한 푸른 장막을 만나 금빛 딱정벌레의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은 바로 한립의 서금충이었다.
서금충은 당장 달려들어 동부의 금제를 한입 베어 물고는 순식간에 빠져나갔는데 그러는 동안에도 금제가 촉발되지 않아 안의 세 수사는 전혀 눈치 채지 못했다.
한 식경 후, 작은 성 남부의 거리를 걷던 빼빼 마른 노인이 돌연 눈을 빛내며 바닥에서 솟구친 금빛을 회수했다. 입 꼬리를 끌어올린 노인은 외모를 바꾼 한립이었다.
원영 후기에 이른 후 그의 의식은 화신기 수사와 비교할 수 있을 정도로 동급 수사의 경지를 크게 넘어섰다. 영구적이지는 않지만 잠시 미량의 의식을 어떤 살아있는 물체에 깃들게 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물론 서금충처럼 그의 의식에 교감하는 영수라면 더할 나위 없이 부리기 좋았다. 한립은 진경 등과 헤어지며 의식 한 줄기가 깃든 서금충을 쫓아 보냈다.
만일 세 수사가 분별 있게 군다면 상관없지만 몰래 무슨 수작을 부리려 했다면 단숨에 의식을 움직여 서금충으로 그들을 죽일 작정이었다.
아직 성체가 되지 못한 서금충이지만 부지불식간에 결단 초기 수사와 축기기 수사 둘을 처리하는 것은 간단한 일이었다. 한립은 서금충이 돌아오자 의식을 회수해 진경과 두 수사의 이야기를 전해 듣고는 더는 신경 쓰지 않기로 결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