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56
656화. 거대한 새
‘이렇게 강력한 요수가 있다고? 10급 요수가 나타날 때도 이런 경천동지할 현상은 일어나지 않는데……. 화신기급 요수에 관련된 이야기와도 일치하지 않고.’
기억이 틀리지 않다면 요수들도 10급을 넘어가면 희박한 인계의 천지원기의 제한을 받아 인간 화신기 수사와 마찬가지로 함부로 행동하기 어려웠다. 이런 대규모 난동을 부려봐야 제 수명을 깎아 먹는 일에 불과하다는 소리였다.
한립은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요수가 일단 10급을 넘어가면 인간 수사와 같은 방식으로 경지를 나눈다고 들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이건 너무 심했다. 산전수전을 다 겪은 원영 후기 수사인 한립조차 가슴이 떨릴 만큼 엄청난 기세였다.
그는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아래쪽에 무엇이 있든 서둘러 이곳을 떠나는 것이 상책이었다. 그가 막 몸을 돌려 날아가려는 찰나, 갑자기 날카로운 고음이 한립의 귀를 파고 들었는데 귀청이 찢어질 듯 엄청난 소리였다.
아무런 방비도 하지 못했던 그는 갑자기 머리가 핑 돌며 머리부터 거꾸로 떨어져 내렸다. 영력으로 이뤄진 푸른 보호막이 전혀 날카로운 소리를 막아내지 못한 것이다.
꽈광!
한립은 열댓 장 정도를 떨어져 내리다 전신에서 보라색 화염을 뿜어냈고 동시에 금빛 뇌전이 튀어 올랐다. 그제야 머리가 어지러운 증상이 멎고 겨우 허공에서 몸을 가눌 수 있게 되었다.
‘이런!’
한립은 난감한 얼굴로 하늘 위를 쳐다보았다. 날카로운 굉음은 분명 위쪽에서 들려온 것인데 잿빛 하늘은 언제부터인가 검은 그림자가 드리워 그 아래 바다와 모호하게 이어져 있었다.
한립은 구름을 올려다보며 얼굴을 굳혔다. 경계심 많은 그가 위쪽에서 무언가 나타난 것을 전혀 느끼지 못한 것이다.
고민할 것 없이 그는 위쪽을 향해서 의식을 풀어 조심스럽게 살피려 했지만 검은 그림자에 접근하지도 못하고 거대한 반탄력에 의해 튕겨나가고 말았다. 식겁한 한립이 푸른 빛줄기로 변해 해수면 저 끝을 향해 날아갔다.
도무지 이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더 머물다가는 큰일 날 것이 분명했다.
한립의 수행에 순식간에 십여 리 밖으로 날아갔는데 그때, 허공의 날카로운 울음소리가 그치며 그가 원래 있던 작은 섬 위로 공간이 왜곡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검은 그림자 속에서 하얀 빛이 번뜩이며 공간 균열이 나타났다. 이어 거대한 물체가 하얀 빛 속에서 천천히 빠져나왔다.
한립은 상황을 살피려 힐끔 뒤를 돌아봤다가 안색이 급변했다.
놀랍게도 거대한 물체는 조류의 청록색 발톱이었고 공간균열 속에서 드러난 부분만 수백 장에 가까웠던 것이다. 그러나 하얀 빛을 빠져나온 발톱은 동작이 극히 느려 안간힘을 쓰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런데 거대 발톱이 바다 속 무언가를 잡아채기 전, 엄청난 영기의 압력이 바다 속에서 미친 듯이 몰아쳐 소용돌이치며 솟구쳤다. 허공의 검은 그림자는 불가사의할 정도로 거대한 조류 요수였고 공간을 넘나들며 공격을 가하는 듯 했다.
일반적인 비율로 보았을 때 발톱이 저렇게 크면 조류 요수의 몸체는 적어도 수천 장은 된다는 소리였는데 상고 시대에나 있었을 법한 거대한 크기였다.
‘인계에 저런 요수가 남아 있을 리가 없어!’
한립은 화들짝 놀라 등 뒤로 풍뢰시를 번뜩였고 은색 뇌전을 남기며 사라졌다. 이어 뇌전이 열댓 번 번뜩이며 드디어 검은 그림자를 벗어난 한립은 겨우 한시름을 놓았다.
그러나 그가 고개를 돌리기도 전에 해저에서 요수의 괴성이 울려 퍼졌고 분노한 기색이 역력했다. 한립은 어두운 얼굴로 얼른 뒤를 살폈다.
쿠콰콰쾅!
엄청난 굉음이 들리고 그가 쉬고 있던 작은 섬이 바다 속으로 내려앉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동시에 주변 십여 리를 뒤덮은 초대형 소용돌이가 해수면에 나타나 가운데에서 칠흑 같은 안개를 분출했다.
몇 줄기에 불과하던 안개는 잠깐 사이 엄청나게 두꺼워져 거의 소용돌이 전체를 채울 정도가 되었다. 새까만 안개 속에서 희미하게 귀곡성이나 짐승들의 처량한 울부짖음이 들려왔고 기이한 검은 뇌전이 번뜩였다.
더욱 괴이한 것은 주변의 물고기나 갑각류 등이 미친 듯이 빨려 들어가 안개 속으로 사라진 다는 점이었다.
“귀무(鬼霧)!”
한립은 단번에 새까만 안개를 알아보고 소리를 높였다.
거대 소용돌이 속에 나타난 것은 이전에 그를 집어 삼켰던 귀무였다. 당시 음명의 땅에서 법력을 전부 잃고 어떻게 겨우 살아남았는지 아직도 기억이 생생했다.
다행인 것은 귀무가 저번과 달리 퍼져 나가지 않고 소용돌이 중앙에서 위로 솟구치기만 한다는 점이었다. 이에 한립은 멀리 달아나려는 생각을 잠시 미뤄두었다.
사실 지금 그의 능력이면 귀무가 퍼져도 멀리 떨어진 그를 따라 잡을 수 없었다. 그는 멀리서 거대한 소용돌이를 말없이 응시했다.
“……!”
하얀빛 속에서 푸른 거대 발톱이 완전히 모습을 드러냈는데 그의 예상대로 조류의 발톱이었고 생각보다 배는 컸다. 이를 본 한립은 소름이 돋았다.
돌연 검은 그림자 속에서 날카로운 울음소리가 울리더니 푸른 거대 발톱이 다섯 줄기의 거대한 빛기둥을 발사해 귀무를 공격했다. 귀무가 요동치는 것이 엄청난 기세의 공격이 틀림없었다.
소용돌이 속 요수의 괴성이 뚝 끊기더니 더욱 광포한 기세가 흘러나왔다. 귀무가 꿈틀꿈틀 응결해 칠흑 같은 거대 입으로 변했는데 날카로운 이빨들이 가득했다.
이제 푸른색의 다섯 빛기둥은 거대 입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한립은 그저 눈을 부릅뜨고 지켜볼 뿐이었다. 이때 검은 입이 꽉 다물어지며 괴이하게도 다섯 빛기둥을 물어뜯었다.
파츠츠츳!
천둥소리와 같이 검은 뇌전이 놀랍게도 거대한 빛기둥 다섯 개를 괴멸시켰다. 뇌전은 어찌나 두꺼운 지 백여 장 길이의 검은 교룡처럼 보였다. 다음 순간 거대 뇌전 교룡들은 검은 그림자를 공격해 들어갔다.
경천동지할 굉음이 한참 울리더니 하얀 무언가가 검은 교룡에 강제로 뜯겨 나갔다. 균열 속의 검은 뇌전은 미친 듯이 번뜩였고 쿠콰쾅! 하는 천둥소리가 연달아 내리치며 무언가의 비명 소리가 울려 퍼졌다.
한 장 길이의 푸른 깃털이 하얀 빛 속에서 떨어져 내리고 공간 균열 밖으로 삐져나왔던 청록색 발톱이 되돌아갔다. 공간균열이 사라지며 하늘을 뒤덮은 검은 그림자도 별안간 종적을 감춘 것이다.
잿빛 하늘이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거의 동시에 거대한 소용돌이도 점점 기세를 거두더니 검은 안개를 빨아들여 사라져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바다는 다시 고요해졌고 한립이 가부좌를 하고 앉아 있던 섬이 사라진 것을 제외하면 괴수들 간의 전투는 애초에 없었던 일처럼 느껴졌다.
한립은 멀리서 기다리다가 한참 뒤에서야 천천히 의식을 방출해 주변 백 리를 살폈다. 허공에는 아무런 기운도 느껴지지 않았고 더더욱 거대 조류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더 고민하지 않고 이번에는 바다 속 깊은 곳을 탐색했다. 그런데 한립의 얼굴이 조금 의아한 표정으로 변했다. 그는 돌연 저물대를 스쳐 은빛을 번뜩이는 푸른 인영을 불러 들였다. 바로 그의 인간형 꼭두각시였다.
“가라.”
인간형 꼭두각시는 은색 빛줄기로 변해 극히 빠른 속도로 날아갔다. 잠시 후 은색 빛줄기는 귀무가 있던 곳에 도착해 주저 없이 바다 속으로 뛰어들었다. 허공에서 가부좌를 한 한립은 의식을 꼭두각시에게 집중해 분신처럼 조종하기 시작했다.
인간형 꼭두각시는 단숨에 4, 5천 장을 잠수해 내려갔다. 그러나 바닥은 너무 깨끗했고 산호는커녕 해조류도 찾아 볼 수 없었다.
인간형 꼭두각시가 바닥을 배회하다 어딘가로 쇄도했다. 몇 리 밖에 푸른 빛 덩이가 떠 있었던 것이다. 조류를 타고 유유히 떠다니는 모습이 영성이 가득해 보였다.
인간형 꼭두각시는 눈에서 보라색 빛을 번뜩이며 더욱 빨리 움직였고 푸른 물체와 열댓 장을 앞두게 되었다. 그러자 빛덩이 속에서 한 장 크기의 깃털이 똑똑히 눈에 들어왔다.
인간형 꼭두각시가 은빛을 더욱 키우며 단숨에 깃털 위에서 나타나 그것을 잡아채려했다. 그런데 예상 밖의 일이 벌어졌다.
인간형 꼭두각시의 손끝이 푸른 빛덩이에 닿자마자 깃털이 모호하게 변하며 그 자리에서 사라진 것이다. 결국 인간형 꼭두각시는 허공을 잡아채고 말았다.
그러나 잠시 후, 서른 장 밖의 어딘가에서 푸른빛이 번뜩이며 푸른 물체가 순간이동을 한 것처럼 다시 나타났다. 이번에는 꼭두각시도 성급히 움직이지 않고 거리를 두고 깃털을 응시했다.
몇 번 더 푸른빛이 번뜩였고 깃털은 이미 백여 장 밖으로 이동한 후였다. 꼭두각시의 몸에서 은빛이 크게 번지며 다시 깃털 위쪽으로 접근하더니 이번에는 허공을 쥐었다.
은빛 찬란한 거대 손이 나타나 아래쪽의 깃털을 잡아채려 했는데 이전과 마찬가지로 푸른빛이 흐릿해지며 순간이동으로 사라지려 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갑자기 천둥소리가 들리며 금색 뇌전 그물이 떨어져 물체를 뒤덮었다.
그 위로 누군가 나타났는데 바로 한립이었다. 그는 금빛 그물 속의 푸른 깃털을 보며 혀를 찼다.
‘보통 물건이 아니야!’
가까이에서 보니 비취색의 깃털이 푸른빛을 뿜고 있었고 표면에는 다양한 비술이 빼곡하게 새겨져 있었다. 그러나 깃털 끝부분이 살짝 그을려 있었고 하단에는 핏자국과 희미한 금빛이 보였다.
잠시 살펴보자 매우 귀한 물건인 듯 했다. 한립이 여러 부적들을 꺼내 그물 속으로 들어갔는데 푸른빛이 번뜩이고 마치 환영처럼 깃털을 통과했다.
한립은 흠칫 놀랐지만 곧 평정을 되찾았다. 그가 두 손으로 수결을 맺으며 주술을 읊기 시작했다. 금빛 뇌전 그물이 주술 소리 속에서 수축해 조여들었고 푸른 깃털은 꼼짝달싹 할 수 없었다.
이후 입을 벌려 부적에 피를 뿜은 그는 연달아 법결을 던져 넣었다. 이번에는 부적들이 날아가 푸른 깃털에 착 달라붙었다. 동시에 푸른빛이 약해지며 깃털도 투박하게 변해갔다.
그제야 안심한 한립은 벽사신뢰를 꺼내 한 손으로 푸른 깃털을 빨아들였다. 자세히 깃털을 살피던 그는 눈썹을 끌어올리며 손가락을 뻗었다.
그런데 기이한 일이 벌어졌다.
푸른 깃털이 반짝이며 급속도로 작아져 한 척 길이가 되었는데 달라붙은 부적들도 똑같이 크기가 줄어드는 것이 신기했다. 한립은 한 손으로 깃털을 쥐고 살짝 흔들어 보았다.
푸른 깃털에서 푸른빛이 층층이 나타나 강력한 영력을 발산했는데 그 정순한 기운에 기쁨을 감출 수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깃털에 대해 고민할 때가 아니었다. 그는 일단 깃털을 옥함에 넣어두고 인간형 꼭두각시로 하여금 수색을 계속하게 했다.
한참 후까지 아무런 수확이 없었으나 한립은 이미 충분히 만족했다. 그는 더 이상 이곳에 남지 않고 꼭두각시를 회수해 다시 날아올랐다.
벽령도로 날아가며 거대 조류와 귀무의 싸움에 대해 생각해보았지만 인계 수사들이 끼어들 일이 아니었다. 그것들은 영계 혹은 다른 세계의 강력한 요물들임에 틀림없었고 특히 귀무가 조류 요수보다 더 강했다.
음명의 땅에 갇혔을 때 어떤 이들은 귀무가 음명계나 마물 라후(羅睺)와 연관되어 있을 거라 추측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공간을 찢고 넘나들 수 있는 신통이 말이 되지 않았다.
아마 거대 새도 비슷한 능력을 지녔을 것이다. 한립은 음명의 땅을 겪고 난 후 수많은 관련 상고경전을 뒤져보았는데 그가 무엇을 추측하든 라후 등의 엄청난 존재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 수 없었다.
두 달 후, 한립은 해수면 위를 날아가다 돌연 방향을 틀었다. 그런데 머지 않은 곳에서 희미하게 폭음이 들려오며 세 명의 수사가 고계 요수 한 마리의 추격에 간신히 맞서고 있었다.
세 수사들 중 하나는 결단 초기였고 나머지 둘은 축기 후기였는데 6급 요수를 상대로 간신히 버티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