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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654화 (411/2,000)
  • # 654

    654화. 옛 인연

    “영명결(靈暝決)을 익힌 당신의 직감은 틀린 적이 없지. 그렇다면 정말 그 자에게 무언가 있다는 것인데…….”

    사내의 목소리가 신중해졌다.

    “특별한 신통을 숨기고 있는 걸 수도 있죠. 그렇지 않고서야 막 후기에 든 수사가 우리 앞에서 그리 태평할 수 있을까요?”

    “어찌 되었든 제거하기 어렵다면 적극적으로 포섭하는 수밖에는 없소. 하지만 그런 자를 성궁에 끌어들인다고 해도 옥령이가 통제할 수 있을 지 걱정이오. 우리 둘이 세상을 떠나면 성궁이 외지인의 손에 떨어질 수도 있는 일 아니겠소!”

    사내의 서늘한 목소리에 희미하게 살기가 어렸다.

    “그럼 어렵더라도 그 자를 제거하자는 말이에요?  하지만 한 번에 죽이지 못하면 옥령이에게 괜한 원수를 만들어 주는 꼴이라고요.”

    “어차피 그 자가 난성해를 휩쓸고 돌아다니기 시작하면 난성해의 질서가 깨지는 것은 한 순간이오. 어차피 화신기에는 희망이 없더라도 성궁이 우리 대에서 끝장나게 둘 수는 없는 일 아니오?  만일 우리 편으로 끌어 들일 수 없다면 반드시 죽여 후환을 없애야 할 것이고 그에 따르는 위험은 감당할 자신이 있소.”

    사내가 콧방귀를 뀌며 주저 없이 말했다.

    “일리가 있지만 사안이 중대하니 계획을 잘 세워야 할 거예요.”

    “그렇게 그 자가 꺼려진단 말이오?  원자산 영향권 내에서 우리가 협공한다면 그 자가 어찌 살아 나가겠소?”

    “원자산을 이용해 우리가 같이 움직인다면 7, 8할의 확률로 상대를 죽일 수 있겠죠. 하지만 상대는 신중하기 그지없어서 아마 절대 제 발로 사지로 걸어 들어오지는 않을 거라고요. 상대를 궁지로 몰려면 외해에서 돌아오는 순간 원자산을 이용해 성공전 전체를 가두는 방법 밖에는 없을 거예요.”

    “그건 나도 아오. 듣자니 본 궁의 객경영패를 내주었다는데, 상대가 영패를 이용한다면 우리가 그 자의 행적을 쫓는 것이 용이할 거요. 그럼 돌아오는 때를 예측하기 쉬우니 포획 작전도 가능성이 없는 것도 아니오.”

    사내의 말에 온청이 미간을 좁히더니 어안이 벙벙하게 할 만한 제안을 했다.

    “역대 성궁의 주인들은 대부분 남녀 부부가 역임했어요. 옥령이는 이미 원영 초기임에도 아직 반려를 정하지 못했죠. 본 궁 고유의 쌍수(雙修) 비술을 수련하면 앞으로 원영 후기에 이를 가능성도 크게 늘어날 텐데요. 하지만 현재 궁중의 원영기 수사들은 옥령이와 나이차가 너무 크고 그 마저도 몇 되지 않죠!

    당연히 아이도 마음에 차는 이가 없는 것 같고요. 내 생각에는 한 가라는 녀석이 옥령이의 배필로 어떨까 하는데요?  부부의 연을 맺으면 바로 성궁을 그에게 넘겨주는 거예요. 그럼 옥령이가 성궁을 맡는 것과 아무런 차이가 없을 테니까요. 게다가 상대의 엄청난 수련 속도로 보아 화신기에 이를 가능성도 있을 텐데 평생 옥령이를 보호하고 끌어준다면 우리 아이도 언젠가 화신기에 이를 수 있을지 누가 알겠어요?”

    “그 자와 우리 옥령이를?  그렇게만 된다면 더 없이 좋겠으나 이미 후기에 이른 수사라면 벌써 반려가 있지 않겠소. 심지어 기다리고 있는 처첩들이 수없이 많을 수도 있고!”

    “반려가 있다고 해도 우리 옥령이와 비교할 수나 있겠어요?  성궁이라는 엄청난 가업을 혼수 삼아 보내준다는데 어느 사내가 거부할 수 있겠냐고요. 정 안되면 본 부인을 첩 삼고 새로 반려를 맞으면 되죠. 수도계에서는 드문 일도 아니잖아요?”

    “좋소, 그렇게 한 번 해보는 것으로 하지. 만에 하나 그가 거절한다면 그때는 우리가 나서서 제거합시다.”

    “거절한다 해도 굳이 그리 험악하게 해결할 필요는 없어요. 우리 성궁 일에는 신경 쓸 수도 없게끔 만들면 될 테니까요.”

    온청이 묘한 얼굴을 하며 냉소했다.

    “그런 방법이 있겠소?  허나 원영 후기 수사를 속이는 일이 쉽지 않을 것이오.”

    사내의 반응에 온청이 낮게 웃으며 입술을 달싹였다. 말없이 전음으로 보낸 것이다.

    “그런 일은, 동의할 수가…….”

    몇 마디를 듣던 사내가 안색이 변했다. 온청은 개의치 않고 자신의 계획을 계속 이야기해 나갔고 나중에는 사내의 얼굴에서도 노기가 가시며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

    그녀의 전음이 끝나고도 사내는 생각에 잠겨 입을 열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 그가 눈썹을 끌어올리며 결연히 말했다.

    “그렇게 합시다. 실패한다면 다른 방법을 쓰면 될 테니. 어쨌든 죽기 전에 육도와 만삼고를 해결해 옥령이가 통치할 난성해에 후환을 남겨 두지 않을 생각이었으니 말이오!”

    천성쌍성 부부가 성산 동굴에서 그를 향한 계획을 세우고 있을 때, 한립은 은사도의 조용한 목제 건물 안에서 빼빼 마른 소녀의 손목을 쥐고 있었다.

    소녀는 문사월의 딸인 ‘전금아’였다. 그녀는 나무 침상에 앉아 소매를 걷고 한립 곁에 앉아 있었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문사월과 사내가 손을 모으고 서 있었는데 소녀를 바라보는 눈빛은 간절했다. 그리고 나머지 네 명의 축기기 제자들은 방 밖을 지키고 서 있었다.

    “기이한 독이구나. 독이 살아 있는 것처럼 체내의 영력을 잡아먹으면서 아이의 경맥을 타고 돌아다니고 있다. 아마 너희가 대량의 단약으로 영기를 보충해 주지 않았다면 지금까지 버티지는 못했을 것이야.

    하지만 목이 마르다고 바닷물을 떠 마신 격이기도 하지! 독은 더 많은 영력을 삼키고 위력이 더욱 강해졌으니까. 3개월 내로 독을 해결하지 못하면 아이는 죽겠구나.”

    한립이 소녀의 손목을 놓아주며 말했다. 그 말에 문사월 부부의 안색이 급변해 고상한 사내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어왔다.

    “하, 한 선배님의 능력으로도 이 독을 어찌할 수 없다는 말씀이십니까!”

    “기이한 독이라고 했지 내가 언제 독을 해결할 방법이 없다했더냐?”

    한립은 사내를 힐끗 보며 서늘히 말했다.

    “제가 급한 마음에 무례를 범했습니다. 너그럽게 이해해 주십시오.”

    전 씨 사내가 한립의 서늘한 눈빛을 보며 등 뒤로 식은땀이 주룩 흘러내렸다. 한립은 무어라 대꾸하지 않고 고개를 돌려 소녀를 보다가 눈을 빛냈다.

    소녀는 그에게 손목이 잡혔을 때 얼굴이 붉어진 것을 제외하고는 너무 차분했다. 대부분의 수사들도 자신의 생사가 걸린 일에는 평범한 사람과 다름없었는데 이런 평정심은 평범한 것이 아니었다.

    거기다 더욱 그를 놀라게 한 것은 소녀가 낯설지 않다는 기묘한 느낌이었다. 이런 감각은 아주 새로웠는데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할 만큼 희미했다. 아마 원영 후기에 이르러 의식이 더 민감해지지 않았다면 알아차리지 못했을 것이다.

    다만 소녀가 중독된 독은 그에게는 그리 큰 문제가 아니었다. 한립은 이상한 마음에 소녀의 볼품없는 얼굴을 신중하게 바라보았다.

    갑작스런 상황에 문사월과 전 씨 사내는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지 못했지만 끼어들어 그를 방해하지는 않았다. 돌연 그가 몸을 떨며 무언가를 생각해내고는 더욱 이상한 얼굴로 전금아를 살폈다.

    “진법에 대해 공부한 적이 있느냐?”

    독과는 완전히 상관없는 질문이었다. 소녀도 놀랐는지 눈을 크게 뜨고 한립을 바라보았고 문사월 부부 역시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어찌 그것을 아셨습니까?”

    “아니다. 예전에 알던 벗 중에 진법에 정통한 이가 있었는데 이 아이와 닮은 듯하여 물은 것뿐이다.”

    한립은 재빨리 무표정하게 돌아와 머릿속으로 익숙한 여인의 자태를 떠올렸다. 그가 수행을 크게 쌓지 못했을 때 친분을 맺었던 신여음이라는 강직한 여인이었다.

    두 사람의 용모는 완전히 달랐지만 특유의 분위기와 느낌이 괴이하게도 닮아 있었다.

    ‘설마 우연이란 말인가? ’

    예감이었지만 한립은 우연은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눈을 빛내며 소녀의 또 다른 손을 잡아 손바닥을 살폈다. 콩알 크기의 붉은 반점이 선홍색으로 손바닥 가운데를 수놓고 있었다.

    “이럴 수가!”

    이번만은 한립도 안색이 달라져 소리를 높였다.

    한립이 놀라자 문사월 부부는 거의 대경실색했다. 그들이 무슨 일인지 묻기 전에 한립은 손가락 끝을 번뜩이며 소녀의 붉은 점을 짚었다.

    동시에 푸른빛이 반짝이며 그녀의 손바닥 속으로 자취를 감추었다. 문사월과 고상한 사내는 무슨 일인지 몰랐지만 그의 술법을 방해하지 않았다.

    곧 불가사의한 일이 벌어졌다.

    푸른빛이 사라지고 붉은 점이 짙어지더니 점점 기다랗게 변해 핏빛 용 문양으로 피어오른 것이다. 손바닥 위의 붉은 용 문양은 살아 있는 것처럼 생생했다.

    “역시…….”

    한립이 중얼거리며 전금아를 보는 시선이 달라졌다.

    “한 선배님 저희 딸아이는…….”

    그 모습에 문사월이 걱정스런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아이의 체내에서 독성이 이리 기이하게 발작하는 원인을 찾아냈다. 너희 말대로라면 이름 모를 독충에게 물려 이렇게 된 것일 텐데 말이야.”

    “예, 독충에 물린 후 그렇게 되기는 했지만 제가 직접 물려 봐도 이런 증상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문사월도 이상하게 여기던 차라 서둘러 답했다.

    “그랬겠지. 독은 아이의 증상을 불러일으킨 근본 원인이 아니니까. 그녀가 이 지경이 된 이유는 타고난 용음지체(龍吟之體) 때문이다. 아마 독 때문에 미리 발작하지 않았어도 체내의 기운이 서서히 말라 마흔이 되기 전에 죽었겠지.”

    한립이 소녀의 용 문양 표식을 가리키며 덤덤히 설명했다.

    “용음지체라니 그럴 리가 없습니다. 딸이 태어나자마자 저희 부부가 체내의 기운을 살폈지만 아무런 이상이 없었는데 어찌.”

    “무척 드문 체질이기도 하고 잠재적인 증상이라 이번처럼 외부의 자극이 있거나 스스로 발작하기 전에는 일반적으로 알아보기 어렵다. 이런 체질을 지닌 자는 수련 속도가 빠르지만 체내의 음기와 양기가 점점 조화를 이루지 못하며 축기기에 이르기 전에 죽게 되지.”

    “그럼 독을 완전히 제거하더라도 계속 수행을 쌓을 수 없다는 말씀이십니까?”

    “그 이야기는 나중에 하고 일단 내가 독성은 제거해 주마. 너희는 방 밖으로 나갔다가 부르면 들어 오거라.”

    “예!”

    문사월 부부가 반문하지 않고 나가자 소녀가 처음으로 불안한 기색을 보였다. 한립은 그녀를 향해 고개도 돌리지 않고 소매를 펄럭였고 푸른 기운이 퍼져 전금아의 눈앞이 환해진 순간 그녀는 의식을 잃고 침상으로 쓰러졌다.

    그제야 몸을 돌려 찬찬히 소녀를 살피는 한립은 무언가를 찾는 사람 같았다.

    “비슷한 분위기에 똑같은 체질을 지닌 여인이 진법을 익히고 있다라……. 이게 전부 우연이라면 더 이상한 일이 아닌가! 말로만 듣던 혼백의 윤회란 말인가!”

    한참 후 낮게 중얼거린 그가 손을 뻗어 열댓 개의 가느다란 바늘을 꺼내들었다.

    푸푹!

    그가 손가락을 펼치자 소녀의 몸 곳곳에 은색 침이 꽂히는 소리가 연달아 울렸다. 은침들이 사라지자 한립은 급히 수결을 맺으며 열 손가락을 튕겨댔고 각양각색의 법결이 날아가 그물처럼 소녀를 뒤덮어갔다…….

    목제 건물 밖의 작은 정원에 문사월과 전 씨 사내가 서서 굳게 닫힌 문을 바라보고 있었다. 근심이 가득한 얼굴이 얼마나 딸아이를 아끼는지 보여주었다.

    시간이 갈수록 고상한 전 씨 사내는 조급해 졌지만 원영 후기 수사가 부르기 전까지는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전 씨 사내의 얼굴이 더없이 가라앉았을 때 갑자기 귓가에 한립의 차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됐으니 들어 오거라.”

    그 말에 사내가 주저 없이 건물 안으로 들어가고 문사월이 따라 들어갔다.

    한립은 의자에 앉아 주먹 크기의 푸른 화염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그 안에서 검은 실들이 구불구불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소녀는 침상 위에 누워 깊이 잠에 들어 있었고 방 안에서는 기이한 향기가 코를 찔렀다.

    “한 선배님, 딸 아이는…….”

    “환몽단(還夢丹)을 주어 재웠으니 직접 살펴 보거라.”

    한립이 문사월의 말을 끊으며 몸을 일으켜 침상을 떠났다. 그녀는 그의 말에 연달아 감사인사를 했고 전 씨 사내와 같이 전금아에게 다가가 상태를 확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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