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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653화 (410/2,000)
  • # 653

    653화. 구원

    한립이 객경영패를 넣는 모습에 여인이 기뻐하며 미소 지었다.

    “수사께서 외해에서 돌아오시면 정식으로 저희 부부가 초대를 할까합니다. 저희가 수련하는 곳에서 함께 화신기에 이르기 위한 깨달음을 교류해보면 어떨까요?”

    “화신기에 이르기 위한 깨달음이라……. 말씀은 감사하지만 저는 막 후기에 이르러 경지를 온고하게 하는데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 같습니다. 나중에 여유가 생기는 대로 두 분을 찾아뵙지요.”

    침음하던 한립이 미안한 기색으로 그녀의 제안을 거절했다. 인계에 원영 후기 수사가 드물고 동급 수사와 깨달음을 교류할 기회가 많지 않은 것은 사실이지만 위험한 곳에 제 발로 걸어 들어갈 수는 없었다.

    그의 능력으로 후기 수사 몇 명과 싸우는 것도 불가능하지 않았지만, 그게 화신기 수사를 제외하고 아무도 그를 어찌 할 수 없다는 뜻은 아니었다.

    주의를 기울이지 않아 상대가 펼쳐 놓은 상고 금제 혹은 각종 대형 결계에 갇혀 동급 수사들의 협공을 받으면 그도 결과를 장담할 수 없었다.

    얼굴을 가린 여인이 한립의 말에 아쉬워했지만 속으로는 쓴웃음을 지었다.

    ‘후기에 이르렀는데도 신중하기 그지없구나!’

    그녀는 한립의 거절에 전혀 불쾌한 내색을 보이지 않고 살갑게 몇 마디를 더 나누었다. 그가 먼저 가봐야겠다고 하자 얼굴을 가린 여인은 말리지 않으며 전송진 옆으로 물러났다.

    자신은 관여하지 않겠으니 뜻대로 하라는 표시였다. 한립이 미소 지으며 여유롭게 걸어갔다. 물론 성궁 집사인 사나운 인상의 사내와 노인도 공손한 태도로 서둘러 한 쪽으로 물러났다.

    그의 눈에 그 뒤에 꼼짝 않고 서 있던 결단기 부부와 그 제자들이 시야에 들어왔다.

    고상한 사내도 당장 딸아이를 끌어 길을 열어주려다 깜짝 놀라고 말았다. 백여 년 넘게 자신과 부부의 연을 맺어온 여인이 앞으로 나서 한립을 향해 예를 취한 것이다.

    “문사월이 한 선배님을 뵙습니다. 선배님의 원영 대성을 경하 드립니다. 당시 선배님의 도움이 없었다면 지금의 저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녀는 바로 난성해에서 한립의 시첩이 될 뻔 했던 ‘문사월’이었다.

    “사월……. 당신이 저 선배님과 아는 사이란 말이오?”

    고상한 사내가 놀라 중얼거렸다.

    “못 본 사이에 너도 결단을 이루었구나! 당시 네 자질로 볼 때 결단을 하기 쉽지 않았을 텐데 그 만큼 열심히 수련을 해온 것이겠지.”

    “모두 선배님께서 남겨주신 단약 덕분입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제가 어찌 금단(金丹)을 응결할 수 있었을까요!”

    “나와 네 부친은 어찌 보면 오랜 벗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 단약은 별 것 아니었으니 신경 쓸 것 없다. 그런데 급한 용무가 있어 외해로 나가려는 것 같구나. 나와 함께 가면 되겠다. 이 여인과 제가 약간의 인연이 있어 함께 데려가려 하는데 괜찮으시겠지요?”

    한립이 마지막에 고개를 돌려 얼굴을 가린 여인에게 물었다.

    “한 수사께서 아는 이들이라면 그러시지요!”

    “감사합니다.”

    한립은 고개를 끄덕이고 더는 문사월을 보고는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순간 괴이하게 전송진 속에 나타난 그는 원영 후기 수사들만 쓸 수 있다는 축지술(縮地術)을 펼쳤다.

    “그러고 보니 수사를 어찌 불러야 할지도 아직 모르고 있습니다. 부인의 성함을 알 수 있을 지요?”

    “온청이라 합니다.”

    순간 멈칫 하던 여인이 미소를 머금고 대답했다. 그 순간 하얀빛 속으로 한립이 자취를 감추었기에 그녀의 이름을 들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너희는 이들을 보내주고 집법전으로 가 뇌편(雷鞭)으로 스무 대씩 맞는 형벌을 받거라! 다음번에도 이런 일이 있다면 이렇게 가볍게 끝나지는 않을 것이다.”

    온청이 서늘하게 명을 내렸다.

    “궁주님의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앞으로는 절대 이런 일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줄곧 목숨 줄을 걱정하던 사내와 노인이 도리어 안심하고는 큰 소리로 대답했다. 물론 생각했던 것보다 가벼운 처벌이라 기쁘기도 했지만 뇌전이 흐르는 채찍으로 스무 대나 맞을 생각을 하니 눈앞이 캄캄해졌다.

    온청은 처음 나타날 때처럼 고운 빛으로 반짝이며 사라졌다.

    온청이 성공전을 떠나자, 사나운 인상의 사내가 노인과 함께 두근거리는 마음을 진정시키며 몸을 일으켰다. 사내는 당장 문사월 무리를 쏘아보며 분노를 드러냈다.

    ‘저것들만 아니었으면 내가 왜 이 꼴을!’

    그가 당장이라도 거북한 소리를 하려는데 곁의 노인이 돌연 포권을 취하며 문사월에게 말했다.

    “부부가 정말 운이 좋으십니다. 한 선배님 같은 분과 알고 지낸다는 것은 천년에 한 번 만날까 말까한 기연이나 다름없지요. 앞으로 선배님의 지도를 받아 원영이 이르는 것도 어려운 일은 아니겠습니다.”

    줄곧 냉랭한 시선을 유지하던 노인이 한껏 예의를 차렸다.

    “……!”

    사나운 인상의 사내는 멍하니 굳었다가 노인의 말을 알아듣고 곧장 만면에 미소를 머금었다. 상대는 원영 후기의 대수사와 관련된 인물이었으니 겨우 결단기 수사인 그가 척을 질 수 없었다.

    “아, 황 형의 말씀이 맞습니다. 앞으로 저희가 부탁드릴 일이 있을 지도 모르니 이 영석은 도로 가져가십시오. 다 돕고 사는 세상인데 전송 비용은 저희가 부담하겠습니다.”

    사내가 영석이 가득 든 저물대를 허리에서 풀어냈다. 고상한 사내가 저물대를 보며 주저하고 있는데 곁의 문사월이 부드럽게 웃었다.

    “저희를 외해로 보내주시는 것만으로도 감사합니다. 영석은 두 분께서 받아 주세요. 그럼 저는 급히 한 선배님을 따라가 봐야 하니 바로 도와주실 수 있는 지요?”

    “그럼요! 바로 전송진의 영석을 교환하고 발동을 시켜드리겠습니다.”

    영석을 다시 돌려주자 인상 사나운 사내가 기분 좋게 답했다. 이어 그가 빠르게 움직여 영석을 새것으로 교체했고 황 노인은 문사월 부부와 대화를 나누며 한 선배에 대해 알아내려 했다.

    그러나 고상한 사내는 그를 모르니 말해 줄 것도 없고 문사월은 웃음으로 얼버무리며 말하지 않았다.

    잠시 후, 영석 교환이 끝나자 문사월은 한립을 쫓아갈 생각에 곧바로 전송부를 붙이고 전송진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리하여 일곱 수사들이 하얀 빛 속으로 사라졌다.

    * * *

    전송진 반대편.

    서른 장 크기의 커다란 석실에서 전송진이 하얀 빛으로 반짝이더니 일곱 수사들이 나타났다.

    그들은 잠시 전송 후유증에 시달렸는데, 문사월이 재빨리 석실을 훑고는 마음이 무거워졌다. 커다란 석실이 텅텅 비어 있었던 것이다.

    “이곳에서 잠시만 기다리세요. 제가 한 선배님이 주변에 계시는지 보고 오겠습니다.”

    문사월은 서둘러 고상한 사내에게 말하고는 곧바로 석문을 빠져 나갔다. 이에 고상한 사내가 무어라 하려다 입을 다물고는 그녀의 그림자를 보며 미간을 좁혔다.

    눈앞이 확 밝아지며 밖으로 나온 문사월은 광장을 발견했다. 어떤 산봉우리 위에 만들어진 광장은 사면이 절벽이라 범인들이 기어오르고 싶어도 올라 올 수 없을 만한 곳이었다.

    다급히 주위를 둘러보던 그녀가 광장 저쪽에서 성궁 복장을 한 사내와 이야기 중인 청년을 발견했다. 바로 한립이었다.

    흉악한 생김새의 결단 중기 거한은 마치 순한 양처럼 그 앞에서 머리를 숙이며 그의 질문에 정성껏 답하고 있었다.

    문사월은 그제야 마음을 놓으며 그 자리에 서서 이야기가 끝나기를 조용히 기다렸다. 잠시 후 한립이 손을 젓는 것을 보니 이야기를 마친 듯했다. 거한은 공손히 예를 올리고는 서둘러 뒤로 물러나 석실로 돌아갔다.

    문사월이 한립을 향해 가벼운 발걸음으로 다가섰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선배님이 아니셨다면 외해로 넘어 오지도 못하고 저희 부부가 큰 곤욕을 치렀을 것입니다.”

    “아니다, 너희도 어차피 내 일에 연루된 것이니까. 급히 외해로 나온 것은 무슨 일이 있는 것이더냐?”

    “……저도 제가 너무 욕심을 부린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일전에 저를 도와주신 일도 아직 은혜를 갚지 못했으니까요. 하지만 딸아이가 아파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니 한번만 더 도와주시기를 간청 드립니다.”

    문사월은 얼굴이 붉게 달아올라 눈물이 뚝뚝 떨어질 것만 같았다. 그녀가 얼마나 딸을 아끼는지 알 수 있었다.

    “이상한 독에 중독된 아이가 네 여식이로구나.”

    “맞습니다. 역시 선배님께서는 한눈에 어디가 문제인지 알아보셨군요.”

    한립이 한 눈에 딸의 상태를 맞추자 문사월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너희 대화는 들었다. 이미 해독 방법을 찾은 것 같은데 내게 사정하는 이유가 무엇이냐?”

    “그것 역시 알고 계셨군요. 예, 저희 부부는 어느 고인의 도움으로 백로어(白鷺魚)의 내단을 제련한 단약을 복용하면 독을 해독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아냈습니다. 하지만 그 단약은 독을 전부 사라지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잠시 수명을 연장해주는 것에 불과해 이후 체질에 문제가 생기면 수도자로서 더는 살아갈 수 없게 된다 합니다. 선배님께서는 원영 후기의 대수사시니 분명 묘책이 있으시겠지요. 자비를 베풀어 주세요.”

    “그랬구나.”

    한립은 바로 답을 하지 않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문사월은 가슴이 쿵쾅쿵쾅 뛰었지만 감히 재촉하지 못하고 그를 바라보았다. 한립은 고개를 들어 태양을 올려다보다가 다시 고개를 숙여 여인의 얼굴을 보곤 물었다.

    “문 형은 언제 돌아가셨느냐?  명이 다해서 돌아가신 것이냐 아니면 변고를 당한 것이더냐?”

    문사월이 예기치 못한 질문에 잠시 멈칫하다 어두운 얼굴로 답했다.

    “선배님께서 다시 내해로 돌아가시고 아버님께서는 실종되셨습니다. 수십 년 넘게 찾아 다녔지만 아무런 흔적도 찾을 수 없었지요. 금단을 응결하지 못하셨다면 아마 벌써 세상을 뜨셨을 것입니다.”

    “살얼음판 같은 수도계에서 누군들 어찌 한 걸음 뒤를 알겠느냐. 만일 다른 이가 이런 부탁을 했다면 나는 신경 쓰지 않았을 것이다. 허나 네가 누차 나를 만나게 되는 것을 보니 우리가 인연이 있기는 한가 보구나. 거기다 네 부친과의 연도 있으니 일단 딸아이를 살펴보자꾸나.”

    결국 한립이 고개를 끄덕였다.

    “감사합니다, 선배님!”

    문사월은 크게 기뻐하며 그의 앞에서 무릎을 꿇고 절을 올리려 했다.

    “이곳은 병자를 볼 곳이 못되니 산 아래의 객잔에서 기다리겠다.”

    말을 마친 그가 소매를 털자 무형의 압력이 그녀가 무릎을 꿇을 수 없게 막았고 푸른빛이 번뜩이며 한립은 빛줄기로 변해 사라졌다.

    멍하니 서있던 문사월이 정신을 차리고는 기쁜 마음으로 석실로 달려갔다. 잠시 후 일곱 수사들이 한립이 사라진 방향으로 날아올랐다.

    * * *

    내성해, 천성성 성산 동굴 안.

    “그 녀석이 벌써 원영 후기란 말이오?”

    믿을 수 없다는 듯 사내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말을 하는 자는 천성쌍성 중 하나인 사내였다.

    “나도 믿기 어려워 의식으로 수차례 살폈지만 확실했어요.”

    유유히 걸어 들어온 온청이 얼굴을 가리고 있던 천을 풀고는 조금 창백하진 얼굴을 드러냈다.

    “그렇다면 그 자의 자질이 우리 보다 낫다는 말이구려…….”

    사내의 목소리가 가라앉았다.

    “아마 그렇다고 봐야겠죠. 우리가 파악하기론 그 자가 실종된 시간이 채 이백 년도 되지 않았는데, 이렇게 빠른 수행 속도는 역대 성궁 궁주들 중에서도 찾을 수 없으니까요. 나도 오백년은 걸려서 원영 후기에 이른 거잖아요?”

    “아무리 방금 후기에 이렀다고 해도 허천정을 지녔으니 우리 중 누구와도 붙어볼 만하겠지. 그래 만나보니 인상은 어떻소?”

    “인상요?  아주 신중하면서도 대담하더군요. 아니, 대담하다기 보다는…….”

    온청은 진한 눈썹을 모으며 눈빛이 흔들렸다.

    “알기 어려운 자요?”

    “그런 건 아니지만, 뭐라고 딱 정의 내리기 꺼려지는 자인 것은 맞아요.”

    “어떤 부분이?”

    “일단 분명 내가 천성쌍성 중에 하나인 것을 알면서도 전혀 기죽지 않더군요. 아무리 허천정을 지녔다지만 자신감이 지나치더군요. 게다가 무의식중에 오히려 내가 두렵다는 느낌까지 받았어요. 마치 엄청난 상대를 앞에 둔 것처럼 요.”

    온청은 기억을 떠올리며 혼란스러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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