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52
652화. 저지하다
한립은 그때 이미 천성성에 들어와 있었다.
난성해에서 가장 거대한 성으로 이름난 만큼 그는 시장을 돌며 부족한 재료를 모두 구입할 수 있었다.
그리고 불필요한 보물 몇 가지를 대량의 영석으로 교환하고는 객잔을 찾아 들어갔다. 릉옥령이 자신이 허천정을 지녔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니 천진난만하게 영패를 들고 성산으로 갈 마음은 전혀 없었다.
그는 밤이 되길 기다려 은밀히 성산의 성공전(星空殿)으로 잠입하기로 결정했다.
‘천성쌍성이 직접 전송진을 지키지만 않는다면 그까짓 수비병들이야!’
다른 이들의 주의를 끌지 않기 위해 그는 보통 규모의 객잔을 선택해 결단 중기의 수사인 척 들어갔다. 물론 원영기 수사인 객잔 주인은 여전히 그를 더없이 정중히 대하며 가장 좋은 방을 내주었다.
삼경(三更)이 되자 한립은 조용히 둔술을 펼쳐 쥐도 새도 모르게 객잔을 빠져나갔다. 성공전이 위치한 곳을 기억하고 있었기에 조용히 거대한 산을 날아오르기만 하면 되었다.
두세 명 씩 모여 순찰을 도는 이들은 대부분이 연기기나 축기기 수사여서 거의 코앞에서 지나가도 전혀 눈치 채지 못했다.
성산 50층이 순식간에 가까워졌고 한립은 거대한 궁전을 앞에 두었다. 세월의 흔적이 전혀 느껴지지 않을 만큼 이전 모습 그대로였다.
‘……? ’
그가 감탄하며 비술을 이용해 금제를 뚫고 들어가려다가 돌연 무언가를 감지하고는 연기처럼 사라졌다. 시간이 지나 어딘가에서 보일 듯 말 듯한 인영들이 소리 없이 저공비행을 하며 다가왔다.
‘설마 역성맹? ’
한립은 무리를 수상하다 생각하며 무엇을 하려는 것인지 지켜보았다.
축기기 수사가 넷, 결단기 수사가 둘이었는데 연기기 2, 3성에 불과한 저계 수사가 하나 끼어있다는 것이 특이했다. 그들은 얼굴에 회색 기운이 어려 있어 누군가 자신들의 정체를 알아보는 것을 방지하고 있었다.
결단기 수사는 남녀로 이뤄져 있었는데 어차피 원영기 수사들도 아니었기에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런데 결단기 수사가 갑자기 손바닥을 뒤집어 청록색 진법 원반을 꺼내들어 가볍게 법결을 던져 넣었다.
진법 원반에서 희미하게 하얀빛이 새어나오자 곁의 마른 결단기 여인이 노란 진법 깃발을 꺼내 흔들었다.
파앗.
노란 기운이 깃발을 빠져나와 그들을 안개로 휘감았다. 그런데 한립은 노란 진법 깃발을 보고는 눈빛이 달라졌다.
‘어디선가 본 것 같은데? 누구에게 줬더라? ’
아주 오래 전 비슷한 법기를 누군가에게 주었던 기억이 있었는데 솔직히 별 일은 아니었다. 저계 보물이란 제련법이 간단한 편이라 똑같은 법기도 흔하게 돌아다녔다.
한립의 얼굴이 즉시 무표정하게 돌아갔으나 결단기 여인에 대한 흥미는 가시지 않았다. 그의 눈동자에 남색빛이 일렁이고 그녀의 얼굴에 어린 회색 기운을 투시했다.
‘헛! 저 여인은…….’
한립의 얼굴이 묘해졌다. 이때 성공전에서 푸른빛과 노란빛이 반짝이며 금제가 풀리더니 걸음 소리가 들리고 하얀 장삼을 걸친 수사가 걸어 나왔다.
사십 대의 마르고 인상이 사나운 결단 초기 수사였다. 그는 분명 성공전을 지키는 성궁 수사일 텐데 주위를 둘러보고 아무도 찾을 수 없자 불쾌한 빛을 드러냈다.
노란 빛이 번뜩이며 결단기 사내가 먼저 모습을 드러냈다. 얼굴의 회색 기운마저 거두고 문인 느낌의 반듯한 중년의 얼굴을 보인 것이다.
“장 형, 미리 약조한 대로 저희 부부가 전송진을 이용할 수 있겠습니까?”
“영석 수량만 맞춰오면 당연히 이용할 수 있지요. 본 궁에서 전송진을 지키는 집사들이라면 번을 설 때마다 종종 하는 일인데 괜히 약조를 어겨 앞으로 영석이 끊길 일이 있겠습니까.”
성궁 수사가 사내를 알아보고 표정을 풀며 말했다.
“그럼요. 장 형을 믿지 못해서가 아니라 여식이 중병에 걸려 한시 바삐 외해의 백로어(白鷺魚) 요단을 구해야 해서 그럽니다.”
고상한 사내가 예의 바른 미소를 머금고 등 뒤로 손을 저었다.
휙!
노란 안개가 걷히며 그 안의 수사들이 나타났는데 다들 얼굴을 들어냈음에도 결단기 여인과 깡마른 연기기 여인만은 회색 기운을 치우지 않았다.
“이 분이 부인이십니까? 월 선자의 명성은 익히 들어왔습니다.”
인상 사나운 수사는 결단기 여인을 훑고는 쓴웃음을 지었다.
“이번에 도와주신 은혜는 잊지 않겠습니다.”
“월 선자의 얼굴을 마주보고 대화하지 못함이 아쉽기는 합니다만. 다들 따라오시지요.”
인상 사나운 사내가 웃음을 흘리며 먼저 돌아 성공전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결단기 사내와 여인은 시선을 마주쳤고 연기기 여인을 가운데 세우고 뒤따라갔다. 나머지 네 명의 축기기 수사들은 그들의 제자들 같았다.
물론 그들은 전혀 몰랐지만 궁전이 다시 푸른빛과 노란빛의 안개로 뒤덮이기 전 희미한 그림자가 소리 없이 그들을 쫓아 안으로 들어갔다.
이리저리 회랑을 돌아 그들은 전송진이 있는 대청에 도착했는데 아이처럼 고운 피부를 지닌 노인이 기다리고 있었다. 걸어 들어오는 수사들을 보고 노인이 차갑게 눈을 빛냈지만 곧 그런 기색을 지웠다.
“이들입니까? 7명이니 한 번에 전송하면 되겠습니다.”
“맞습니다. 전 수사는 그래서 어느 섬으로 가려 하십니까?”
“은사도(銀鯊島)로 가려합니다. 고계 영석 광산이 있어 외해로 나가는 수사들은 대부분 그리로 가지 않습니까. 운이 좋으면 바로 백로어의 요단을 거래할 수 있을 지도 모르지요.”
사내는 잠시 주저하다 전송진을 살피며 말했다.
“황 형, 이제 전송진의 금제를 거둘까요? 전 수사께서는 영석을 지불하시면 됩니다.”
“그래야지요.”
노인이 법결을 던져 전송진 주위의 하얀 빛의 장막을 치우자 고상한 사내가 저물대 중 하나를 풀어 건네주었다. 인상 사나운 사내는 의식으로 영석의 수량을 두 번이나 확인하고는 만족한 웃음을 지었다.
“딱 맞군요! 전송부이니 각자 잘 챙기십시오.”
인상 사나운 사내는 일처리도 빨라서 저물대를 거두자마자 부적 7장을 꺼내 주었다. 전 씨 사내는 그것을 받아 무리의 수사들에게 한 장씩 나누어 주고 전송진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이미 전송진은 희미하게 하얀 빛을 머금고 있었고 모든 일이 순조롭게 흘러가는 것 같았다.
“담도 크구나! 감히 몰래 수사들을 외해로 빼돌리다니? 집법전에서 얼마나 채찍질을 당해야 정신을 차리겠느냐!”
수사들이 움직이고 있는데 갑자기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다지 크지는 않았지만 대청 내의 수사들은 마치 옆에서 천둥이 치는 것처럼 심장이 내려앉았다.
인상 사나운 사내와 노인은 대번에 새하얗게 질려 온 몸이 굳었으나 결단기 사내와 여인은 여자 아이를 빛으로 감싸 빛줄기로 변해 전송진 쪽으로 쇄도했다.
잠시 후 누군가의 코웃음 소리가 들려왔다.
대청에 아름다운 빛깔의 기운이 번지더니 푸른 빛줄기와 붉은 빛줄기를 가볍게 공격했다. 빛줄기가 흩어지고 전 씨 사내와 결단기 여인이 강제로 모습을 드러났다.
그들의 얼굴은 더없이 창백했고 동시에 울컥 피까지 토해냈지만 연기기 여자 아이는 그들이 필사적으로 끼고 보호했기에 멀쩡해 보였다. 이때 두 여인의 얼굴에도 회색 기운이 흩어져 진짜 얼굴이 들어났다.
결단기 여수사는 스무 살 중반의 피부가 하얀 미인이었고 그 옆의 연기기 여자아이는 열대여섯 살 정도로 얼굴이 누렇게 뜨고 깡말랐지만 자세히 보면 결단기 여수사와 닮아 있었다.
여자아이는 다급한 상황 속에서도 눈이 맑고 투명해 차분하다는 인상을 주었다.
“궁주님을 뵙습니다.”
두 성궁 집사가 기운이 가시지 않았는데도 혼비백산해 얼른 무릎을 꿇고 대례를 올렸다. 그 말을 들은 결단기 남녀는 가슴이 철렁했다.
다행이 살아남았다고 안심하던 마음은 사라지고 그 자리에 서서 전혀 움직일 수 없게 되었다. 이때 부드러운 곡선을 지닌 여인이 나타나 대청 중간으로 천천히 떨어져 내렸다.
하얀 비단으로 얼굴을 가린 백의 여인이었다. 그녀는 전송진 앞에 이르러 대청 내의 수사들을 쳐다보지 않고 빈 허공을 향해 말했다.
“한 수사! 기왕 여기까지 오셨으니 후배들 면전에서 숨어 계시지 말고 저와 이야기를 나누시는 것이 어떠하십니까?”
얼굴을 가린 여인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인상 사나운 사내들은 화들짝 놀랐다. 그때 허공에서 가볍게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저도 이곳에서 위명이 자자한 쌍성 중 한 분을 뵙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수사께서 저를 만나기 위해 일부러 걸음 한 것은 아니겠지요?”
푸른빛이 번뜩이며 푸른 장삼을 입은 수사가 괴이하게 나타났다. 그는 뒷짐을 지고 여인을 보며 웃는 듯 마는 듯한 얼굴을 했다.
“원영 후기!”
얼굴을 가린 여인은 의식으로 상대를 훑고 돌연 안색이 달라져 믿을 수 없다는 소리를 높였다. 그녀는 몇 시진 전 성산의 지하 동굴에서 중년인과 이야기를 나누던 여인이었다.
대청에 ‘원영 후기’라는 말이 울리자 다들 어안이 벙벙해졌다.
그들 중 절반은 결단기 수사였지만 평소 원영기 수사를 만날 기회는 거의 없었다. 그런데 원영 후기 수사라니 이미 성궁의 주인 중 한 명이 나타난 것도 엄청난 일인데 마치 꿈을 꾸는 듯했다.
그러나 그 중 유독 ‘월 선자’라 불리던 결단기 여수사만은 한립의 얼굴을 보고 입을 다물지 못했다. 특히 그가 원영 후기의 대수사라는 소리에는 완전히 넋을 잃은 것 같았다.
다만 수행이 가장 낮은 연기기 소녀는 어차피 결단이고 원영이고 요원한 일이라 별 반응이 없다가, 결단기 여인의 표정을 알아차리고 한립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당신이 한 수사가 맞습니까?”
“수사께서 일부러 저를 기다리신 것 같은데, 설마 다른 수사로 착각할 일이 있겠습니까.”
얼굴을 가린 여인은 한립을 보며 시선을 물리지 않았지만 속으로는 마음이 복잡했다. 단번에 제압할 수 있을 줄 알았던 상대가 예상을 넘어 강적으로 밝혀졌으니 머뭇거릴 수밖에 없었다.
아직도 원자신광을 이용해 원자산의 영향권 내에서 싸움이 벌어지면 승산이 7할 이상이었지만 이전처럼 상대를 손쉽게 포획하거나 격살할 가능성은 없어졌다.
싸움이 벌어진 후에 상대가 무사히 빠져 나가면 성궁은 그 날로 엄청난 실력자를 원수로 두게 되는 것이니 그녀도 함부로 행동할 수 없었다. 한립이 얼굴을 가린 여인과 한 마디도 하지 않자 대청 안이 일순 고요해지며 긴장감이 고조되었다.
그때 한립이 얼굴을 굳히며 허공을 가볍게 쥐었다. 동시에 푸른빛의 거대 손이 생겨나 번개처럼 불덩이를 잡아채 가뒀다. 그것을 본 여인은 눈썹을 꿈틀하며 얼굴에 놀란 기색이 스쳤다.
“전음부를 보내실 생각은 안 하시는 것이 좋습니다. 두 명의 동급 수사들에게 위협을 당하고 싶은 마음은 없어서요. 제가 성궁과 척을 질만한 일을 한 적이 없는 것 같은데, 어찌 궁주께서는 저를 이리 적대하십니까?”
한립은 냉랭히 말하며 푸른 거대 손으로 전음부를 재로 만들어 버렸다.
“오해를 하신 것 같습니다. 제가 어찌 수사를 위협할까요. 그저 딸아이를 구해주셨다기에 직접 감사를 표하려 찾아온 것에 불과합니다.”
잠시 침묵하던 여인은 갑자기 화사하게 웃었다. 그녀의 어투가 살갑게 변하자 대청 안의 긴장감도 사라졌다.
“딸아이라면, 설마 릉 수사의…….”
한립은 멍하니 있다가 갑자기 떠오르는 바가 있어 같이 안색을 풀었다. 물론 조금 전 그녀의 기세로 보아 절대 무슨 감사를 표하러 온 것은 아니었지만 그 역시 문제를 만들지 않고 좋게 넘어가고 싶었다.
“맞습니다. 옥령이는 저희 부부의 혈육이지요. 당시 저희가 부주의하여 수사가 도와주시지 않았다면 큰일이 날 뻔했습니다. 그때부터 줄곧 수사에게 고마운 마음을 품고 있었지요.”
“릉 소저의 자질이 대단하다 하였더니 쌍성의 영애였습니다.”
“한 형 앞에서 이야기하기에는 부끄러운 수준이지요. 자질로 따지자면 이백 년도 되지 않아 결단에서 원영 후기로 이른 수사만 하겠습니까? 아마 상고 시대에도 이렇게 빨리 수행을 쌓은 수사는 몇 명 되지 않았을 겁니다.”
그녀는 한립이 쾌속으로 원영 후기에 이른 것을 이상하다 여기며 슬쩍 떠보았다. 한립이 그것을 모를 리 없었기에 그저 빙그레 웃고는 화제를 돌렸다.
“그간 천성쌍성 분들의 혁혁한 공적을 들어왔습니다. 평소라면 조금 더 이야기를 나누겠으나 제가 급한 일이 있어서요. 귀 궁의 전송진을 이용해야 할 것 같은데 개의치 않으시겠지요?”
말을 마친 그가 금제를 거둔 전송진 쪽을 살폈다.
“그런 사소한 일이야 당연히 도움을 드려야지요! 이건 본 궁의 객경 장로임을 증명하는 객경영패(客卿令牌)입니다. 부담스럽지 않으시다면 가져가 쓰시지요. 수사의 신분에 정말 객경 장로를 맡으실 생각은 없으실 테니 저희 부부가 잠시 빌려드리겠습니다. 영패가 있으면 외해의 성궁 자원을 마음껏 이용하실 수 있을 터이니 저희 부부의 성의라고 생각해 주세요.”
여인은 바로 고개를 끄덕이며 손바닥을 뒤집어 금빛으로 반짝이는 영패를 그를 향해 던져주었다.
“그럼 호의라 생각하여 거절하지 않겠습니다.”
잠시 주저하던 그가 거절하지 않고 영패를 저물대 속에 넣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