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50
650화. 황사문(黃沙門)
한립이 빙봉과 헤어지고 섬으로 날아간 것은 그저 난성해의 상황을 파악해 괴성도(魁星島)로 돌아가 상고 전송진을 이용할 생각에서였다. 그런데 중년인이 먼저 나서서 열렬히 환영해 주니 굳이 거절하지 않은 것이다.
감 씨 중년인은 서둘러 제자들에게 전음부를 날려 그를 맞을 준비를 했다.
한립이 가는 곳은 고문도(苦門島)로 꽤 규모가 있는 대형 섬으로 범인들이 거주하는 성 만해도 몇 개는 되었고, 전부 황사문이 독점적으로 관리하고 있었다. 그리고 고문도 북쪽으로 백만 리 밖에는 바로 내성 12성도 중 하나인 계성도(癸星島)가 있었다.
잠시 후 중년인은 항구를 지나 섬 깊숙이 들어가 영기가 짙고 산세가 수려한 산 위에 도착했다. 산의 정상에는 화려하게 지어진 궁전들과 아름다운 탑들이 많았고 이름 모를 새들이 날아다니며 정말 선경(仙境)이 따로 없을 정도였다.
“감 수사, 귀 문이 참 번창해 보입니다.”
한립이 중년인을 향해 미소 지었다.
“아닙니다. 전부 어린아이들 장난에 불과하지요.”
감 씨 중년인은 오히려 쓴웃음을 지었다. 사실 그 모든 것은 환영으로 만들어낸 가짜 풍경이었던 것이다.
잠시 후 산 정상에서 악기 소리가 들리더니 궁장 차림의 어여쁜 여인들이 무리를 이뤄 마중을 나왔고, 무리를 세 명의 결단기 남녀가 이끌고 있었다.
한립은 빙그레 웃으며 차분히 허공에서 내려왔다. 안내를 받고 커다란 전각 안으로 들어갔는데 내부는 바깥의 화려함과 달리 나름 고즈넉했다.
감 씨 중년인과 한립이 각각 자리를 잡자 나머지 결단기 수사 셋이 그 곁에 서서 자리를 지켰다. 한립은 이야기가 시작되자마자 서슴없이 난성해의 근황에 대해 물었다.
감 씨 중년인은 잠시 의아해했으나 한립이 오랜 세월 은거하며 수련한 수사라고 생각해 깊이 묻지 않았다. 난성해의 정세가 혼란스럽다는 것을 들은 한립은 잠시 침음했다.
“한 형께서 방금 나오신 곳이 혹여 전설 속의 허천전이 아닌지요! 어찌하여 그런 곳에서 나오신 겁니까?”
한참이 흐른 후 감 씨 중년인은 한립이 포악한 성품이 아니라는 것을 눈치 채고 그제야 가장 궁금하던 것을 물어왔다.
그 말에 한립이 미묘하게 표정이 달라졌다가 순식간에 평정을 되찾았다.
“한 눈에 허천전을 알아보시고 감 수사의 견문이 넓으십니다. 별 다른 이유는 없고 그저 그 안에 잠시 갇혀 있다 방금 빠져나온 것입니다.”
“그러셨군요. 그럼 한 형과 함께 나오신 선자께서는…….”
“같이 갇혀 있던 수사인데, 일이 있다며 먼저 가더군요.”
“아, 그럼 그 분도 역시 한 형과 마찬가지로 후기 수사시겠습니다?”
“그 수사께서는 후기에 이른지 오래라 저보다 훨씬 고명한 수행을 지니고 있지요.”
힐끗 중년인을 본 한립이 의미심장한 웃음을 흘렸다.
감 씨 중년인이 흠칫 놀라 자신이 알고 있는 난성해의 고계 여수사들을 떠올렸지만 은색 장삼 차림의 여인과 일치하는 이는 한 명도 떠오르지 않았다.
하지만 크게 이상하다 생각지 않는 것은 수련에만 매진하는 고계 수사들은 종종 5, 6백 년 동안 세상에 나오지 않는 일도 허다했기 때문이다.
“제가 급히 중계 이상의 영석과 재료들이 필요한데 고계 영석이라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고요. 수중에 있는 보물 두 가지와 교환을 하면 어떻겠습니까?”
한립이 돌연 소매 속에서 푸른빛을 뿜어 탁자 위에 은색과 노란색 물건을 올려놓았다. 그러자 은색 고리와 노란색 창이 나왔는데 그것은 그가 소극궁 허령전에서 고계 요수들을 죽이고 찾아낸 것이었다.
한립에게는 버리기는 아깝고 사용할 데는 없는 계륵과 같았지만 본래 법기 재료와 보물이 희소한 난성해 수사들에겐 더 없이 좋은 물건들이었다. 두 보물이 발산하는 영기의 빛으로 보건데 고보 중에서도 희귀한 상급 보물이었다.
“그러십니까? 중계 영석과 재료는 본 문에서도 꽤 보유하고 있고 모자란 재료들은 시장으로 제자들을 보내면 됩니다. 다만 고계 영석은 저희 섬 전체를 통틀어도 7, 8개 밖에는 보유하고 있지 않습니다. 물론 원하신다면 필요하신 만큼 교환해 가셔도 됩니다.”
감 씨 중년인은 보물을 보고 눈을 빛내며 단번에 거래를 수락했다.
“고계 영석이 그렇게나 많이 있습니까?”
오히려 한립이 놀라 표정이 이상해졌다. 난성해는 대진과 천남보다 영석이 부족하다고 알고 있었는데 한 문파에서 이렇게나 많은 양을 보유하고 있다니!
감 씨 중년인이 한립의 표정에 순간 멈칫하더니 무언가를 깨달았다는 듯 입을 열었다.
“제가 깜빡 잊고 중요한 소식을 빼먹을 뻔 했습니다. 사실 백여 년 전에 외해(外海)의 어떤 무인도에서 엄청난 양의 영석 광산이 발견되었습니다. 그곳에서 생산되는 고계 영석의 양이 상당해서 아직도 귀하기는 하지만 예전에 비해서는 상황이 훨씬 좋아졌지요.”
“고계 영석 광산이 발견되었단 말입니까? 인계에서 아직 그런 광맥이 남아 있었다니 놀라운 일입니다.”
“그러게 말입니다. 처음에는 많은 수사들이 그냥 헛소문이라 생각했지만 나중에 성궁과 역성맹이 이 섬을 두고 대대적인 전투를 벌여 사실로 들어났지요! 거기다 외성해의 고계 요수들도 광맥 쟁탈전에 뛰어 들어 수사와 요수들이 꽤 많이 죽어 나갔습니다. 지금은 광맥을 세 곳의 세력이 나눠 갖고 있고요.”
한립은 고개를 끄덕이며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렇게 반가운 소식이!’
마침 여러 차례의 전투 때문에 인간형 꼭두각시를 위한 고계 영석이 바닥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이곳에서 천성성이 그리 멀지 않으니 지나는 길에 성궁의 전송진을 이용해 광맥이 있다는 곳을 다녀와도 오래 지체되지 않을 듯했다.
한립은 재빨리 결정을 내리고 허리춤에서 옥간 하나를 꺼내 필요한 재료를 복제해 주었다. 그리고 황사문 대장로의 분부를 받아 노란 장포의 거한이 옥간을 들고 즉시 시장으로 출발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한립과 감 씨 중년인의 한담이 시작되었다. 상대가 최선을 다해 대접하니 자연히 유쾌한 분위기가 되었고 어렵게 만난 후기의 대수사를 앞에 두었으니 중년인은 수련 상의 의문점이나 어려움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했다.
비록 한립이 원영 후기에 든지 얼마 안 되었지만 그간 수없이 많은 공법과 경전을 익혀왔고 정도와 마도를 넘나드는 괴이한 비술을 꽤나 알고 있어 간단한 답을 주는 것만으로도 깨달음을 얻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더불어 곁을 지키던 푸른 장삼의 노인과 요염한 인상의 여인도 둘의 대화를 들으며 수련 상의 기연을 얻어 갔다.
몇 시진 후, 거한이 돌아왔는데 허리춤에 불룩하게 부푼 저물대를 들고 있었다.
“선배님, 몇 가지를 제외하고는 말씀하신 재료들은 전부 모아왔습니다. 고계 영석들도 한 데 넣어 두었습니다.”
거한이 다가와 두 손으로 저물대를 받쳤다. 의식으로 대충 훑어본 한립은 무척 만족스러웠다.
“그럼 저는 일이 있어 오래 머물지 못하니 먼저 일어나 보겠습니다.”
한립이 저물대를 받자마자 중년인을 향해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한립은 바로 푸른 빛줄기로 변해 하늘 저편으로 사라졌다.
“드디어 가셨네요! 저는 저희 황사문이 이번에 큰일이 나는 줄 알고 얼마나 조마조마 했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한 선배님이라는 분이 생각보다 성격이 좋아 보이지 않습니까?”
한립의 둔광이 대전을 떠나자마자 요염한 여인이 긴장을 풀고 재잘거렸다.
그런데 감 씨 중년인이 그녀를 향해 눈을 부릅뜨고는 입을 달싹였다. 뜻밖에도 자리에 있던 세 결단기 수사들에게 전음을 보낸 것이다.
“지금은 아무 말이나 떠들어 댈 때가 아니다. 후기 수사의 의식이 얼마나 광범위하게 퍼질 수 있는지 너희가 상상이나 하겠느냐. 너희가 하는 말을 똑똑히 듣고 있을 것이다.”
요염한 여인이 화들짝 놀라 즉시 입을 다물었다. 거한과 푸른 장삼 노인도 서로 눈을 마주치며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감 씨 중년인의 회백색 눈동자에서 빛이 번뜩이더니 일다경이 지나서야 중년인의 눈동자에서 푸른빛이 사라졌다.
“상대가 이미 천리 밖으로 벗어났으니 이제 되었다만 그래도 조심하는 게 좋을 것이야.”
핑!
말을 마친 그가 손가락을 튕기자 초록빛이 빠르게 날아가 대전의 기둥에 흡수되면서 작은 보호막이 펼쳐졌다.
쿠르릉.
“이제 이야기 해 보거라!”
“사숙님께서는 정말 신중하십니다.”
“저렇게 무서운 수행을 지닌 상대라면 아무리 조심하더라도 과하지 않음이야.”
“맞습니다. 높은 수행을 지닌 수사들 중에 괴이한 성정을 지닌 이가 어디 한 둘 이겠습니까! 괜히 심기를 건드렸다가 본 문 전체를 위기에 빠트릴 수도 있지요. 그런데 난성해에서 유명한 원영기 선배님들 중에 오늘 나타난 남녀와 비슷한 인상착의를 한 분은 없는데. 말투로 보아 난성해에 익숙한 것 같으니 오랫동안 폐관 수련을 하다 나온 수사가 아니겠습니까?”
노란 장포 거한이 주저 하다 자신의 의견을 밝혔다. 그런데 푸른 장삼의 노인이 미간을 좁히고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석선, 왜 그러느냐?”
“곰곰이 생각해보니 저 자의 얼굴이 낯이 익어 그러합니다.”
“만난 적이 있는 자라고?”
“저렇게 평범한데 사형께서 다른 자와 혼동하는 것은 아닐까요?”
“흔한 얼굴이지만 제가 이전에 만났던 자가 확실합니다. 아주 오래 전 일인데……. 한 가(家)! 생각났습니다. 예전에 역성맹에서 추살령을 내리고 쫓던 수사 말입니다.”
“추살령? 감히 어떤 세력이 원영기 수사에게 추살령을 내리고 공공연히 쫓는단 말이더냐.”
감 씨 중년인은 흠칫 놀라며 얼굴이 어두워졌다.
“그건 오해십니다. 추살령이 내려졌을 때 저 자는 결단기 수행으로 아직 원영을 응결하지 못한 상태였지요. 그때는 권 사제와 경 사매가 아직 결단을 이루지 못해 마 사형과 제가 문내의 사무를 맡던 시기였습니다.
저희 둘이 몇 명을 파견해 처리하고는 사숙님께는 따로 보고 드리지 않았던 일이지요. 이백 년이나 지난 일이지만 아직 명령이 내려왔던 옥간을 보관하고 있습니다.”
노인이 땀을 송골송골 흘리며 설명하더니 저물대를 뒤져 악귀의 얼굴이 새겨진 옥간 하나를 꺼내 중년인에게 건넸다.
“말도 안 되는 소리! 그렇게 짧은 시간에 결단기 수사가 원영 후기에 이를 수 있다더냐.”
감 씨 중년인은 이렇게 말하면서도 안색이 더욱 어두워져 옥간을 살폈다. 그러자 중년인의 표정이 급속도로 변해 나중에는 불가사의하다는 표정이 되었다.
옥간 속의 환영은 푸른 장포를 입은 한립의 모습을 생생히 보여 주고 있었는데 방금 떠난 대수사와 완전히 똑같았다. 감 씨 중년인은 파도처럼 밀려오는 의문과 놀라움에 옥간 속에서 의식을 거두고도 한 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이를 지켜보던 노인과 거한 그리고 여인은 그저 입을 다물고 그가 다시 입을 열 때까지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보아하니 역성맹이 추살하려던 자가 아까 그 자가 맞다. 허나 너희는 내 말을 새겨 듣거라! 이 일은 절대 밖으로 새어 나가서는 안 된다. 역성맹의 세력은 커질 대로 커졌고 방금 떠난 상대는 원영 후기의 대수사이니 어느 쪽에도 원한 살 짓을 해서는 안 될 것이야.”
감 씨 중년인이 결연히 명령을 내렸다.
“예!”
노인 등 세 수사가 서둘러 이구동성으로 답했다.
“또한 너희 셋은 향후 10년 동안 본 문을 떠나지 말고 거처로 돌아가 수련에 매진하거라. 갑자기 낯선 대수사가 둘이나 나타났고 그 중 하나는 역성맹과 원한이 있다니, 난성해에 다시 피바람이 불 지도 모르겠구나. 나머지 제자들도 엄히 단속하여 불필요한 일로 섬을 떠나지 말고 조용히 산문을 폐쇄하라 이르거라!”
연달아 내려지는 엄청난 분부에 세 수사들은 가슴이 서늘해졌다. 곧 결단기 수사들은 명을 수행하러 나갔고 중년인만이 홀로 남았다. 수시로 달라지는 표정이 무언가 곤혹스러워보였다.
“……욕심을 버려야 한다. 그 자가 허천정을 가져갔던 자라면 거대 솥이 바로 그 보물이라는 소리지만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세상에 대수사의 수중에서 보물을 강탈할 자가 있더라도 절대 나는 아니지 않은가! 괜히 이 소식이 퍼져나갔다가는 내 명만 재촉할 뿐이겠지.”
얼마 지나지 않아 길게 한숨을 내쉰 그가 중얼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그러나 허천천이 나타났다는 소식은 빠르게 인근 해역으로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하필 그곳을 지나가던 결단기 수사 두 명이 경전에서 보았던 허천전을 떠올리곤 알아보았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