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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647화 (404/2,000)
  • # 647

    647화. 연합

    한립이 눈을 가늘게 뜨고 여인을 바라보다가 생각 끝에 돌연 걸음을 옮겨 전송진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푸른 돌로 이뤄진 석실의 벽으로 걸어갔다.

    이곳은 꽤나 이상해서 사방을 둘러보아도 문이 없었다. 이런 괴이한 곳에서 빙봉과 목숨을 걸고 전투를 한다는 것은 법력만 낭비하는 어리석은 짓이었다. 어쨌든 상대는 높은 수행에 기이한 신통을 지닌 강적이었다.

    한립의 거동에 은색 장삼 여인이 눈썹을 끌어올렸지만 속으로는 나름 안심하고 있었다.

    ‘흠…….’

    한립은 의식으로 이곳을 샅샅이 훑고는 미간을 좁혔다. 의식으로 벽 안을 살피려 하면 강대한 힘이 튕겨냈는데 분명 강력한 금제가 걸려 있는 것이다.

    어두운 얼굴로 고민하던 그가 손가락을 뻗어 석벽을 찔러보았다. 그러자 푸른빛이 번뜩이며 반 척 길이의 날카로운 검기가 사라졌다.

    팅!

    검기도 겨우 절반 정도 들어가다 도로 튕겨 나왔다.

    그는 표정 변화 없이 손가락을 튕겨 푸른 검기를 다른 벽으로도 날려 보냈지만 전부 소용이 없었다. 결국에는 눈을 가늘게 뜨고 남색이 일렁이는 눈동자로 벽을 한참 살피고서야 그의 눈에 이채가 어렸다.

    지켜보던 은색 장삼 여인이 냉소를 흘리고는 갑자기 손을 뻗어 휘둘렀다.

    허공에 하얀 균열이 번뜩이더니 여인이 그 안으로 사라졌다. 공간 신통을 발휘해 석실을 빠져 나간 것이다. 그럼에도 한립은 모른 척하며 묵묵히 석벽을 살폈고 곧 인간형 꼭두각시가 움직였다.

    검은 칼날이 뻗어 나와 석벽 어딘가를 갈랐고 쿠릉! 하는 소리와 함께 벽이 갈라져 눈앞이 밝아졌다. 뜻밖에도 커다란 대청이 나타났는데 그곳에서도 은색 장삼 여인은 보이지 않았다.

    ‘여긴!’

    그곳을 자세히 둘러보던 한립이 갑자기 입 꼬리를 꿈틀하며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을 했다. 대청 정면에 기괴한 주술이 새겨진 네모난 석문과 하얀 빛이 너무 익숙했기 때문이었다.

    한 눈에 그것의 정체를 알아본 그는 충격으로 가슴이 떨릴 정도였다. 깊게 심호흡을 한 그는 평정을 되찾고 성큼성큼 석문으로 나아갔다. 두말 할 것 없이 장검을 꺼내 휘두르니 금빛 검기가 날아가 석문을 베었다.

    콰쾅!

    하얀빛이 번뜩이며 막아섰지만 결국에는 두 동강이 났고 눈앞에 푸른 돌로 만든 십자(十字) 대로가 나타났다.

    그가 대로 중심으로 걸어가 서둘러 주위를 살펴보았는데 동서남북으로 펼쳐진 길 양 옆으로 석조 건물들이 늘어서 있었다.

    “역시 이곳이었어!”

    얼마 지나지 않아 그가 길게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이곳은 그가 허천정을 얻었던 허천전(虛天殿) 내전에 위치한 5층 청석 탑 내부였다.

    놀랍게도 대진 북극 지방에서 갑자기 난성해에 있는 허천전에 떨어지다니! 그는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탑의 몇 층에 위치해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허천전과 허령전이 관계가 있을 줄은 알았지만 연결되어 있었다니…….”

    한립이 혼잣말을 하며 점차 감정을 가라앉혔다. 지금 그의 신통에 난성해로 돌아왔다고 해도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이곳을 나서기만 하면 자신이 부순 전송진을 복구해 다시 천남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하며 한립이 사방을 둘러보다 푸른 빛줄기로 변해 날아갔다.

    일다경 정도 날아갔음에도 탑을 돌아다니며 수비하던 꼭두각시 호위들이 보이지 않았다. 생각해보면 다음 번 허천전 개방이 아직 한참 남았으니 꼭두각시들도 금제에 의해 회수되었을 것이 분명했다.

    이렇게 한립은 꼭두각시도 금제나 기관도 없이 텅 빈 탑을 날아갔다.

    한립은 미궁과 같은 통로를 너무 얕잡아 보고 말았다. 꼭두각시 호위병과 기관들이 사라ㅤㅈㅕㅅ다고 해도 의식을 통제하는 금제는 여전해서 연달아 길을 잘못 들었다가 명청령안을 이용해 겨우 해당 층의 전송진을 찾아냈다.

    어쩐지 당시 수사 무리들이 얌전히 극음 사조 등을 따라 이동한 이유가 있었다. 그는 길을 찾는 동안 오자동심마와 꼭두각시들을 이용해 아직 개방되지 않은 석실을 부쉈다.

    그러나 보물은 하나도 없었고 무슨 금제를 건드렸는지 그만 석실 밖으로 튕겨 나올 뿐이었다.

    허천잔도(虛天殘圖)를 이용해 연 것이 아니라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아직 허천전 자체가 개방되지 않아서인지 보물들은 따로 보관되어 있는 듯했다.

    그는 모든 석실을 뒤져 보물들을 찾아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허천전을 설계한 진법사가 정말 대단하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보통 금제를 통제하는 곳은 건물의 가장 중심이 되는 공간에 두기 마련이었다.

    허천전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공간이라면 당연히 탑의 꼭대기인 5층일 텐데 극음 사조 등 다른 수사들은 그곳의 금제를 두려워하기도 했고 또 허천정을 차지할 생각에 그곳을 자세히 수색하지 못했다.

    그리고 지금 한립의 신통과 명청령안이면 아마 그곳에서 쓸 만한 보물을 발견을 할 수 있을 지도 몰랐다.

    다만 10급 빙봉이 어디 숨어 있는지 보이지 않았는데 그녀 홀로 허천전을 빠져 나갔을 거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거대한 탑을 자세히 살핀 결과 무려 열댓 개의 강력한 금제가 층층이 쌓여 있었고 대다수는 그조차 무엇인지 알 수 없었는데 몇 가지는 공간을 격리하는 금제였기 때문이었다.

    본래 설치되어 있는 특수한 전송진을 사용하지 않고서는 아무리 공간 이동을 할 수 있는 자라도 절대 탑을 빠져 나갈 수 없게 설계되었다.

    한립은 연달아 두 층의 전송진을 이용해 이동한 끝에 탑의 5층에 이를 수 있었다. 그리고 눈앞에 허천정을 취했던 한려대(寒驪臺)가 보였다.

    소극궁 역대 장로들이 한려 상인이라 불렸다는 것으로 보아 북야소극궁과 허천전이 긴밀하게 관계가 되어 있다는 또 하나의 증거라고 할 수 있었다.

    지금의 한려대는 허천정도 사라졌고 극음 사조와 만천명 등이 격전을 치룬 흔적으로 온전치 못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은색 장삼 여인이 바로 그 한려대 위에 서서 제단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겨 있었다.

    한립의 등장에 그녀는 놀란 듯했지만 냉랭히 몸을 돌려 투명한 빛줄기로 변해 청석 길을 따라 사라졌다. 한립은 그녀가 날아가는 것을 지켜보며 막지 않았다.

    그리고 그녀가 완전히 사라진 후에야 유유히 제단 위로 올라가 허천정을 꺼낸 구멍을 살피고는 주변에서 진법을 통제할 만한 실마리를 찾기 위해 돌아다녔다.

    그러나 그는 한려대 위에서 원하는 바를 찾지 못하고 수색 범위를 넓혔다. 통제 진법이 은밀히 숨겨져 있는 것인지 아니면 그가 잘못된 곳을 찾고 있는 것인지 줄곧 이렇다 할 수확이 없었다.

    하루하루 시간이 흘러갔다.

    벌써 보름이 훌쩍 지났지만 한립은 통제 진법의 흔적을 전혀 발견하지 못했다.

    ‘이곳이 아니라 4층을 찾아 봐야 하는 것인가? ’

    그가 얼굴을 굳히고 서 있는데 돌연 주변에서 하얀빛이 번뜩이며 공간이 벌어졌다. 은빛 여인의 등장에 한립은 눈을 가늘게 뜨고 입을 다물었다.

    상대가 아무 이유 없이 나타났을 리 없으니 이유나 들어보려는 것이었다.

    ‘줄곧 5층에서 보이지 않던데 설마 다른 층들을 모두 돌아보았는데도 빠져 나갈 방법을 찾지 못한 것은 아니겠지? ’

    “한 수사께서 이곳을 빠져 나갈 방법을 찾으셨나요?”

    은색 궁장 여인이 일전에 필사적으로 싸운 일은 잊은 듯 달라진 태도를 보였다.

    “찾아냈다면 아직까지 이곳에 있겠습니까?  그러나 수사의 말투로 보아 무언가 찾아내신 듯합니다.”

    “둘러보니 강제로 금제를 뚫고 나가려면 적어도 화신기 수사 두셋은 있어야겠더군요. 겨우 우리로는 불가능 하다는 소리입니다.”

    “그건 수사께서 말씀하지 않으셔도 이미 알고 있습니다.”

    한립은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지 궁금했지만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았다.

    “그래서 수사가 통제 진법을 찾고 있는 것 아닙니까?”

    그의 유유자적한 태도에 여인이 먼저 인내심을 잃고 냉랭히 쏘아 붙였다.

    “통제 진법에 관해 봉 선자께서 제게 하고 싶은 말이 있으신지요?”

    “흥! 통제 진법은 이미 내가 찾았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곳을 떠나기 쉬울 리 있을까요. 자세히 이야기하기 전에 두 가지 질문에 답해 주셔야겠습니다. 일단 빙백 선자와는 무슨 관계인가요?  그리고 지니고 있는 솥이 통천령보 허천정이 맞습니까?”

    여인이 길게 숨을 들이 마시며 진지하게 물었다.

    “빙백 선자요?  도통 누굴 말하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솥은 수사의 말대로 라면 허천정일 지도 모르겠군요.”

    한립이 멈칫하다가 결국에는 애매하게 웃음을 흘리며 답했다. 여인이 한립을 노려보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빙백 선자는 건람빙염을 만들어낸 상고 수사로 북야소극궁을 창립한 조사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정말 모르는 것 같은데 허천정에 관해서는 이실직고하는 것이 서로에게 좋을 겁니다. 허천정을 지니고 있다면 통제 진법을 움직일 수 있을 테니 쓸모가 있겠지만, 만일 당신에게 허천정이 없다면 굳이 내가 알고 있는 바를 알려줄 필요가 없을 테니까요!”

    “수사께서 그리 말씀하시니 더는 숨기지 않겠습니다. 제가 허천정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런데 통제 진법은 도대체 어디 있는 것입니까?”

    “좋습니다. 기왕 솔직하게 답을 주시니 저도 안내하지요. 이번에 우리가 이곳을 떠나려면 아무래도 힘을 합쳐야겠습니다. 탈출 전에는 서로의 은원을 잠시 미뤄두시죠.”

    여인은 미리 답을 알고 있었다는 듯 무덤덤하게 말하고는 먼저 신형을 날려 날아갔다. 한립도 푸른 빛줄기로 변해 그 뒤를 따랐다. 하지만 곧 그는 의아한 얼굴을 감추지 않았다.

    그녀가 안내 한 곳은 그가 수없이 수색한 한려대 방향이었다. 잠시 후 투명한 빛이 한려대 위를 한 바퀴 돌아 제단에 떨어져 내렸다.

    “봉 수사, 잘못 아신 것은 아니겠지요?  정말 통제 진법이 이곳에 있다는 말입니까?”

    “잘못 알았다고요?  본 궁은 눈을 감고도 이곳의 통제 진법을 찾아 낼 수 있습니다.”

    “그게 무슨 뜻입니까?  이곳에 와본 적이 있는 것입니까?”

    “내가 여길 어떻게 와보았겠습니까! 다만 우리 빙봉 일족이 머무는 빙연도(氷淵島)에 이곳과 똑같은 제단이 있을 뿐입니다. 말하자면 당신이 들고 있는 보물 솥은 우리 빙봉 일족과도 깊은 인연이 있는 물건이라는 소리입니다.”

    은색 장삼 여인이 냉소했다.

    여인은 한립이 놀라든 말든 돌연 두 손을 뻗어 제단 상공의 몇몇 지점을 가리켰다.

    파앗!

    동시에 허공에서 도자기가 깨지는 소리가 들려오며 눈부신 하얀 빛이 터져 나왔다. 빛들이 진동하며 급격히 몸을 키우더니 하얀 태양들처럼 반짝이다가 서로 뭉쳐 거대한 빛구슬을 형성했다.

    한립은 입을 꾹 다물었지만 굳이 놀란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여인은 계속해서 술법을 펼쳤고 열손가락을 빠르게 튕겨 법결들을 빛구슬 속으로 계속 쏘아 보냈다.

    쿠르릉!

    결국 거대한 빛구슬이 허공에서 퍼지며 수십 개의 새하얀 진법 깃발로 변한 것이다. 각각이 대여섯 척은 되는 깃발 표면에 알 수 없는 고대 주술이 꽃처럼 피어났다. 진법 깃발들은 공중에서 빙글빙글 돌다가 열댓 개의 빛줄기로 변해 사방으로 사라졌다.

    그때 한립도 눈을 빛내며 무언가를 깨우친 듯했다.

    한려대 전체가 격렬히 흔들리며 큰 소리를 내더니 제단을 중심으로 거대한 진법이 오색찬란한 빛을 내며 모습을 드러냈다.

    진법이 나타난 순간 한립과 봉 여인은 높이 떠올라 전체를 내려다보았다.

    한립이 판단하기에 이것은 허천전 통제 진법이 맞았고 중심부에는 허천정과 똑같이 생긴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순간 허령전에서 현옥동을 개방할 때 벌어졌던 일들이 떠올랐다. 이것은 현옥동 봉인 금제와 비슷했지만 그보다 열 몇 배는 더 크고 진법이 훨씬 심오했다.

    “이전에 본 적이 있나요?”

    “소극궁에서 비슷한 진법을 본 적이 있습니다.”

    “그럼 어떻게든 진법을 조종해야 할 테니 다행이군요. 일단 허천정으로 통제 진법을 움직일 수 있는지 시험해 보시죠.”

    한립이 잠깐 주저 하다 고개를 끄덕이고는 입을 벌려 작은 솥을 품은 푸른빛을 방출했다. 물론 그는 그동안에도 여인에 대한 경계심을 늦추지 않았다. 상대가 조금이라도 이상한 행동을 하면 바로 솥을 회수할 작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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