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44
644화. 빙봉의 위력
푸른빛이 가시고 허공에 나타난 한립은 엄청난 폭음에 귀가 떨어져 나갈 것 같았다. 그가 얼른 비검들을 이용해 전신을 보호하고는 주위를 살폈다.
그러나 너무 놀라 숨을 들이킬 수밖에 없었다.
소위 허령전 대전이라는 곳은 거대하기 짝이 없어서 2, 3천 장은 뒤는 것 같았고, 그와 수십 장 떨어진 곳에 2백 장 크기의 거대한 물체가 둥실 떠 있었는데 조금 전 요기로 뒤덮인 공간에서 보았던 회색 깃발과 똑같이 생겼기 때문이었다.
천 배 혹은 만 배는 커다란 회색 깃발 표면에서 요기가 출렁일 때마다 입구의 공간을 휘감고 있었다. 어쩐지 대전에 들어오자마자 부지불식간에 깃발의 금제에 걸려든 이유가 있었다.
‘이게 진짜 만요번의 본체로구나! 안에서 차 요괴가 들고 있던 것은 깃발의 일부 영성이 변한 것에 불과했어!’
한립은 황망하게 깃발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다시 눈을 돌려 대전 중심을 보자 격렬한 전투가 진행 중이었다. 대청 대부분이 이미 빙하로 뒤덮여 있었는데 커다란 기둥들도 새하얗게 변하고 높은 빙산들이 곳곳에 치솟아 있었다.
빙하 위로 몸이 열 장은 되는 새하얀 얼음 봉황이 전신에서 하얀 화염을 뿜어내며 위세를 드러냈다.
빙봉의 적수는 소극궁 고계 수사 세 명이었는데 미부인과 하얀 백발의 노인 둘이 각종 보물로 필사적으로 빙봉의 공격을 막고 있었다. 그들의 보물도 약하지는 않았지만 빙봉의 날카로운 발톱과 날갯짓에 밀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한립은 빙봉을 감싼 하얀 한염을 보며 흠칫 놀랐다. 아무래도 백몽형이라는 여인이 부리던 하얀 한염과 너무 비슷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봉리빙염(鳳離氷焰)이 저 정도의 위력을 낼 수는 없겠지만 말이다.
내심 봉리빙염과 빙봉의 관계가 의심스러웠지만 이상한 것은 그 뿐만 아니었다. 차 요괴는 만요번을 움직일 뿐 어째서 빙봉과 같이 저들을 공격하지 않는 것일까?
그리고 미부인은 한 눈에 보기에도 원영 후기 수사로 소극궁 궁주가 확실했다. 그녀의 신통은 한려 상인에 미치지 못했고 특수한 한염을 다루지 못하는 듯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두 명의 원영 중기 수사의 도움을 받아 10급 빙봉과 다투는데 이렇게 밀릴 수는 없었다.
빙봉의 하얀 한염이 너무 위력적이라 세 수사의 전신의 신통이 눈에 띄게 줄어드는 것이 보일 정도였다. 이에 한립은 자기도 모르게 넋 놓고 지켜보았다.
처음으로 극한의 한염이 내는 굉장한 위력을 보았기 때문이다. 마치 자연의 법칙을 무시한 역천의 신통처럼 보였다. 이대로 가면 굳이 차 요괴가 나서지 않아도 세 수사를 격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설마 빙봉이 차 요괴를 경계해 만요번 금제 안에서 싸우기를 꺼리는 것일까? ’
머리를 굴리며 납득할 만한 이유를 찾고 있을 때 놀랄 만한 일이 벌어졌다. 허공의 거대 깃발이 뿜어대던 요기 속에서 조각난 시체와 망가진 보물들이 떨어져 내린 것이다.
한립은 아무 생각 없이 있다가 화들짝 놀라 조각난 시체의 복색이 소극궁 장로의 것임을 알아보았다. 만요번 금제 속에 갇혀 싸우던 수사가 그 뿐만이 아니었던 것이다.
어찌 되었든 소극궁 수사들을 깨끗이 해결하지 않고는 차 요괴가 당장 만요번을 움직여 자신을 쫓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한결 마음이 편해져 대청 안을 자세히 살폈다.
시선을 돌리니 옥으로 만든 평평한 건물의 옥 제단 위로 큰 것 하나와 작은 것 둘로 이뤄진 세 개의 전송진이 나란히 설치되어 있는 것이 보였다. 한립이 대단히 기뻐하며 바로 움직이려다가 갑자기 표정이 이상해졌다.
그 뒤에 서 있던 인간형 꼭두각시가 돌연 허공을 쥐었고 열댓 장 밖의 공간이 왜곡되어 검은 비도가 튀어 나왔다.
요기로 뒤덮인 공간에서 실종되었던 마수찬 비도가 스스로 금제에서 탈출해 돌아온 것이다. 꼭두각시가 소매를 펄럭여 비도를 회수했다.
한립은 눈썹을 꿈틀하더니 푸른 빛줄기로 변해 천 마리가 넘는 불까마귀들과 비검 보물들을 이끌고 높은 제단 위로 날아갔다. 허령전을 빠져나갈 수만 있다면 소극궁의 흥망은 관여할 바가 아니었다.
잠시 후, 푸른 빛줄기는 대전 중앙을 빙글 돌아 제단 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이미 주변이 빙봉의 한기로 가득 찼기에 어쩔 수 없이 보라색 화염으로 온 몸을 보호한 상태였다.
“건람빙염! 네 놈도 소극궁 수사였구나! 내 빙염의 색이 변했다고 속을 줄 아느냐!”
중앙에서 소극궁 궁주와 두 노인을 밀어붙이던 빙봉은 한립이 만요번을 빠져나왔을 때부터 주시하고 있었다.
그가 빛줄기로 변해 날아들 때까지만 해도 경계 했지만 격전지를 크게 피해 돌아가자 신경 쓰지 않으려다가 보라색 화염을 보고는 소리친 것이다.
상대가 불구대천의 원수라도 만난 것처럼 노려보자 흠칫 놀란 한립이 무어라 반응을 보이기 전에 빙봉이 괴성을 지르며 그를 향해 한 쪽 날개를 펄럭였다.
얼음 날개의 깃털들이 수없이 쏘아져 나갔는데 반 척 길이의 투명한 비검 오륙백 개가 허공을 뒤덮었다. 날아가던 한립은 가슴이 서늘해졌다.
이렇게 많은 양이라면 위력이 어떻든 간에 심장이 철렁할 만했고 거기다 10급 요수 빙봉의 깃털이 변한 무기라면 웬만한 법보는 저리가라 였다.
오래 고민할 것 없이 그는 더욱 속도를 높였고 뒤따르던 백여 개의 검빛과 새빨간 불까마귀들이 투명한 검으로 날아들었다.
콰콰쾅! 퍼펑!
금빛과 하얀빛이 번뜩이며 교전했고 붉은 화염이 하얀빛을 만나 폭발해 몇 장 높이의 불기둥으로 주변을 휩쓸었다. 청죽봉운검과 불까마귀들의 협공으로 일순 투명한 비검들을 막은 것이다.
그 틈에 푸른 빛줄기로 변한 한립이 높은 제단으로 쏘아져나갔다.
“헛!”
자신의 일격이 한립의 움직임을 조금도 늦추지 못하자 빙봉은 멈칫 놀랐다.
그러나 요수의 건람빙염에 대한 원한은 상상을 초월해서 한립을향해 살심을 드러냈다. 순간 빙봉의 방대한 몸이 모호하게 변하며 세 개의 똑같은 분신을 만들어냈다.
그 중 둘은 소극궁 궁주 무리로 몸을 던졌고 세 번째 빙봉이 날개를 펄럭이며 하얀 빛으로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
한립은 요수의 거동에 놀라 둔술을 거두고 그 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전송진까지 겨우 백여 장을 앞둔 참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무턱대고 전송진으로 달려 들다가는 사라진 빙봉에게 한입에 삼켜 질 수도 있었다. 안색을 굳힌 그가 두 손을 마주쳤다 양 옆으로 펼쳤다.
꽈과광!
수십 개의 금빛 뇌전이 손바닥에서 퍼져나가 그를 중심으로 2, 30장의 금빛 그물로 뒤덮였다. 거의 동시에 열댓 장 어딘가의 공간이 비틀리며 빙봉이 하얀빛으로 나타났다.
한립이 재빨리 수결을 맺자 금빛 뇌전들이 진동하더니 거침없이 요수의 몸을 감싸려 들었다. 빙봉은 의외의 상황에도 전혀 당황하지 않고 부리를 벌려 무언가를 뿜어냈다.
쏴하아.
하얀 소용돌이가 튀어나와 바람 소리가 울리더니 금빛 뇌전이 광풍에 갈가리 찢겨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한립이 얼굴빛이 변해 황급히 소매 속의 팔령척을 발동했을 때는 빙봉이 먼저 공격을 가한 후였다.
빙봉은 얼음 날개를 동시에 펄럭였다.
쿠르릉!
대량의 하얀 한염이 응결해 서른 장 높이의 거대한 파도로 변하더니 그를 향해 밀려들었고 빙봉 자신도 흐릿하게 사라져 하얀 기운 속으로 파고들었다.
거대한 요수의 몸이 한기 속으로 숨어 완전히 종적을 감춘 것이다. 한립이 입술을 꿈틀거리며 눈을 남색으로 빛내고는 한 손으로 보라색 한염 덩어리를 휘둘렀다.
촤륵!
보라색 한염이 활활 타오르며 그의 앞을 막아섰다. 한염의 파도가 가차 없이 자라극화의 장벽으로 돌진했는데 둘 다 분명 극한의 화염임에도 물과 불이 만난 것처럼 극렬하게 출렁였다.
하얀 한기의 위력이 자라극화 이상이었던지 잠시 후 보라색 장벽이 흔들리며 한립 쪽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소매 속의 팔령척이 번뜩이며 사라졌고 한립이 이를 악물고 두 손을 보라색 장벽에 대고 전신의 자라극화를 미친 듯이 불어 넣었다. 그러자 본래 서서히 기울어지던 보라색 장벽이 다시 곧게 일어섰다.
그러나 그 순간 거대한 파도 속에서 하얀 빛이 번뜩이며 한 척 길이의 날카로운 발톱이 튀어나와 자라극화의 장벽을 지탱하는 한립의 어깨를 잡아채려 했다. 아무리 명왕결을 익힌 그라지만 빙봉의 발톱에 당하면 의심할 여지없이 두 팔이 잘려나갈 것이다.
다행히 그는 미리 예상한 듯 한쪽 소매 속에서 두 줄기의 푸른 실 뭉치를 뻗어 날카로운 발톱을 막아냈다. 푸른빛이 번뜩이며 예리한 발톱을 칭칭 감아낸 것이다.
“흠?”
당황스러운 듯 누군가 한염 속에서 소리를 내더니 깜짝 놀랄 일이 벌어졌다.
한립의 몇 장 위 공간이 갑자기 찢겨 갈라지며 반 척 길이의 투명한 부리가 나타나 그의 정수리를 전광석화처럼 쪼려 한 것이다.
근거리에서 이뤄진 재빠른 공격에 한립은 뇌둔술을 펼칠 시간도 없었다. 게다가 앞쪽의 한염과 발톱을 막느라 아무런 대비를 하지 못한 것이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한립은 투명한 부리가 보라색 화염을 뚫고 들어오는 데도 고개조차 들지 않았다.
깡!
굉음이 울리고 은색 주먹이 허공에서 나타나 부리를 향해 주먹을 날렸다. 은색빛이 폭발하며 날카로운 부리가 그대로 몇 척 옆으로 밀려났다. 날카로운 부리 옆에 나타난 푸른 인영은 인간형 꼭두각시였다.
한립이 빙봉과 싸우는 동안 주변을 지키라고 명해 놓았기에 위기의 순간에 한방 먹일 수 있었다.
공격을 당한 부리는 흐릿하게 사라졌고 정면의 하얀 화염이 돌연 뒤로 물러나며 그 안에서 봉황이 나타났다. 이제 요수는 두세 장 크기로 본래 모습 보다 훨씬 작아져 있었다.
빙봉이 푸른 실에 묶인 자신의 발톱을 내려다보며 코웃음 치더니 두 발톱이 돌연 몇 배로 불어나 벗어나려 했다. 하지만 푸른 실도 빛을 번뜩이며 늘었다 줄었다하며 발톱을 놓아주지 않았다.
이번에는 빙봉도 조금 놀랐는지 부리를 벌려 두 줄기의 날카로운 하얀 빛을 뿜어냈다.
사사샥!
하얀 빛들이 빙봉의 두 발톱을 돌자 푸른 실들이 마른 풀잎처럼 끊어져 나갔다. 하얀 빛이 가시고 원형을 드러낸 것은 우윳빛의 작은 검이었는데 체내에서 엄청난 한기를 풍기고 있었다.
“만년현옥!”
한립은 단번에 두 비검의 재료를 알아보고는 미간을 찌푸렸다.
푸른 실 뭉치들은 허천정 표면의 기운으로 만들어진 것이었는데 아무리 통천령보라도 겨우 통보결 1성으로 사용할 수 있는 얄팍한 신통으로는 10급 요수를 어찌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는 눈앞의 강적을 굳이 무찌를 마음은 없었다. 백여 장 거리에 있는 작은 전송진 중 어느 것 하나라도 이용해 이곳을 떠나면 그만이었다.
한립은 이런 생각을 하며 다시 날개를 펄럭여 공격할 준비를 하는 빙봉을 주시하다 얼굴을 굳혔다. 곧 보라색 화염을 거둔 그의 신형은 흐릿해졌고 세 명의 똑같은 환영이 나타나 푸른 기운 속에 모습을 감추었다.
빙봉이 어느 환영을 노려야 할지 멈칫 하는 와중에 세 개의 푸른 빛줄기가 다른 방향으로 날아갔다. 속도가 극히 빨라 모두 찰나의 순간 열댓 장 밖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다른 쪽에서는 수백 개의 투명한 비검과 싸우던 금색 비검들과 불까마귀들이 단번에 방향을 틀어 전송진 중 하나를 목표로 움직였다.
빙봉은 대노해 날카롭게 울부짖었고 전신에서 하얀 빛을 내뿜으며 젊은 여인으로 변했다. 여인은 사람의 모습을 갖추자 즉시 영수대를 스쳐 두 개의 하얀 빛을 방출했다.
빛덩이들은 허공을 선회해 한기를 방출하는 날개가 넷 달린 새하얀 지네의 모습으로 변신했는데, 날개의 수를 빼고는 흉악한 모습이 꼭 한립의 육익상공과 같았다. 그것은 놀랍게도 진화한 육익상공들이었다. 한립이 고개를 돌려 그것을 보고는 화들짝 놀랐다.
슉!
그가 미처 대책을 마련하기도 전에 육익상공 두 마리가 네 날개를 펄럭여 별안간 사라지더니 진짜 한립과 다른 곳으로 날아가던 그의 환영 하나의 앞을 막고 하얀 한기를 뿜어냈다.
당연히 한립은 한기를 가볍게 피했지만 환영은 원래 방향으로 날아가다 한기를 맞고 거품처럼 사라졌다. 은색 장삼 여인이 그것을 확인하고는 무표정하게 허공을 갈랐다.
스륵!
하얀 균열이 벌어지며 여인은 손쉽게 공간균열을 만들어냈다. 이어 그녀의 신형이 흐릿해지더니 그 틈으로 사라졌고 공간균열도 번뜩이며 종적을 감추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