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신공-642화 (399/2,000)

# 642

642화. 만요번과 차 요괴

한립의 푸른 빛줄기가 세 명이 싸우는 곳 밑으로 지나쳐 사라지려 했다.

“죽고 싶으냐!”

10급 요수 노인이 빛줄기 속의 한립이 원영 중기 수행이라는 것을 알고도 거침없이 소리쳤다. 그가 푸른 그물을 가리키자 푸른 구름이 몸을 떨며 수십 개의 뇌화(雷火)를 분출해 한립의 머리를 가르려했다.

주먹 만 한 뇌화들이 스무 장 정도를 난도질해 달아날 곳이 없었다.

그러나 한립은 슬쩍 미간을 좁힐 뿐 전혀 속도를 늦추지 않았고 돌연 등 뒤에서 인간형 꼭두각시가 나타나 새빨간 궁을 꺼내 활시위를 당겼다.

쿠릉!

수없이 많은 불화살들이 푸른 뇌화를 향해 쏘아져 나가 중간에서 터져나갔다. 푸른색과 붉은색 불똥들이 하늘에서 떨어져 내리는 모습이 더없이 아름다워 보였다.

불화살은 푸른 뇌화에 비해 위력이 조금 떨어졌지만 속도를 늦추기에는 충분했다. 그 사이 푸른 빛줄기가 재빨리 싸움터를 지나쳐 대전 입구 방향으로 날아들었다.

“헛!”

10급 요수의 수행에 둔광에 가려진 인간형 꼭두각시를 못 볼 리 없었다. 그가 의아한 눈빛으로 대전 방향으로 사라지는 한립을 보았지만 굳이 따라가지 않고 눈앞의 두 수사를 향한 공격에 더욱 힘을 실었다.

백요이도 속으로 놀라는 중이었다. 푸른 빛줄기가 극히 빨라 한립을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아주 익숙한 느낌에 그가 지나간 것을 알아차린 것이다.

‘대장로와 다른 장로들이 현옥동에서 나온 것인가!’

여인은 이런 생각을 하면서도 눈앞의 강적이 더욱 거세게 공격을 가해오자 서둘러 두 비검에 영력을 주입해 엽 노인을 도와 막아냈다.

엽 노인도 푸른 빛줄기 속의 수사가 누군지는 몰랐지만 요수가 막아서는 것을 보니 적은 아니라 생각해 크게 고민하지 않았다.

그가 손에 들고 있던 옥병에서 흘러나오는 흑백의 기운이 더욱 밝아졌다. 이 양기병(兩氣甁)은 통천령보의 모조품으로 이것이 없었다면 원영 중기 수사인 그와 백요이만으로 10급 요수를 상대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때 한립이 푸른빛을 거두고 대전 문 안쪽 십여 장 밖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그가 안의 상황을 훑어보려는데 나이든 사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또 누가 죽으러 왔구나! 좋다, 들어 오거라!”

한립이 멈칫하며 반응하기도 전에 사방에서 검은 빛이 몰려들며 주변 풍경이 달라졌다. 검은 요기가 요동치는 기이한 공간에 갇힌 것이다.

한립은 크게 놀랐다.

주변의 요기들이 맹렬히 요동치며 흉흉한 기세로 몰려드는데 이대로 있다가는 그대로 죽을 것 같았다. 깊게 숨을 내쉰 그가 소매 속에서 두 손을 쥐었다.

동시에 전신에서 천둥소리가 퍼지며 금색 뇌전이 그를 뒤덮었다. 이어 두 팔을 털어 내니 수십 개의 금빛 검들이 뿜어져 나와 그의 주위를 맴돌며 보호했다.

그 순간, 검은 요기들이 몰려들어 금빛에 충돌했다.

금빛으로 변한 청죽봉운검이 수레바퀴처럼 맹렬히 회전해 검은 요기를 흩어냈다.

검은 요기가 예상보다 상대하기 어렵지 않자 한립은 안심하며 주의 깊게 사방을 살폈다. 하지만 거무튀튀한 요기 말고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네 비검들이 쓸 만하구나! 본 존이 거두어야겠다.”

어디선가 노인의 것과 같은 목소리가 들려오더니 한립의 비검에 대한 탐욕을 드러냈다.

일순 멈칫했던 한립은 차갑게 웃으며 소맷자락을 털어내자 삼색 빛이 흘러나와 삼염선이 되어 그의 손에 들렸다.

상대의 자신만만한 어투로 보아 만만한 상대가 아닐 것이라 판단해서였다. 그의 머리 위에서 요기들이 맹렬히 뭉치더니 파도처럼 일어 소용돌이를 만들어냈다.

열댓 장 가까이 되는 높이의 검은 소용돌이는 극히 빠른 속도로 돌며 기괴한 소리를 냈고 소용돌이 중심에서 대량의 검은 기운이 흘러나와 아래쪽으로 쏟아져 내렸다.

‘……!’

한립은 상황이 묘하게 돌아간다는 생각이들어 서둘러 수결을 맺자 사방에서 금색 검빛들이 응축되더니 금색 연꽃 한 송이를 만들어냈다.

금빛 연꽃의 환영은 빙글빙글 돌며 검은 기운을 향해 날아갔고 그 둘이 부딪히는 순간 기이한 소리가 귀를 찔러댔다.

금빛 연꽃의 모습을 한 비검들이 강력한 흡인력에 통제를 잃고 빨려나가려 하자 한립은 흠칫 놀랐다. 그가 미미하게 안색이 변해 체내의 법력을 끌어올렸다.

보통의 원영 중기 수사가 이렇게 강력한 흡입력과 마주했다면 본명법보의 통제를 잃었겠지만 한립의 수행은 다른 이들보다 심후했다. 청죽봉운검들 역시 진귀한 재료들로 여러 차례 제련을 거쳐 보통 법보와 비할 바가 아니었다.

한립이 빠르게 청원검결을 운용하자 금색 연꽃이 몸을 떨며 흡인력을 이겨냈고 그를 중심으로 쉼 없이 돌며 소용돌이의 검은 빛을 막아냈다.

이때 그가 주저 없이 깃털 부채를 소용돌이를 향해 펄럭였다.

펄럭!

삼색의 불기둥이 깃털 부채에서 용솟음쳐 검은 기운을 공격했다.

쿠콰콰쾅!

폭음이 연달아 울리며 삼색 화염은 검은 기운에 닿자 기름에 얼음을 던진 듯 폭발해댔다. 삼색 화염이 검은 기운보다 훨씬 강했기에 주술이 번뜩이는 와중에 검은 기운을 뚫고 소용돌이 중심으로 사라졌다.

한립이 의식을 집중해 그것을 응시했다.

잠시 후 검은 소용돌이 중심에서 웅웅거리는 소리가 나며 검은 빛이 늘었다 줄었다하며 불안정하게 요동쳤다. 허공의 수십 장에 달하던 요기 속으로 검은 소용돌이가 흩어져 버린 것이다.

한립이 어두운 얼굴로 손을 저어 삼염선도 사라졌지만 성공한 얼굴은 아니었다. 삼염선을 이용해서 자신의 법력 중 2성을 소모했지만 상대에게는 전혀 타격을 주지 못한 것이다.

“령보의 모조품?  네가 혹시 한 가(家)더냐?”

늙은 목소리가 의아하다는 듯 물어왔다.

“나를 아십니까?”

“삼색의 불길을 내뿜는 깃털 부채 령보를 알아보지 못하는 것이 더 이상하지! 곤오산에서 본 존의 부곡주의 일을 망쳤다더니 이번에는 소극궁에서 무얼 하는 것이더냐?”

“부곡주라면, 당신이 만요곡의 차 수사십니까?”

한립은 속으로는 뜨끔했지만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다. 비록 만요곡에 대해 아는 바는 얼마 없었지만 상대가 만요곡 곡주라면 들은 바가 있었다.

다들 만요곡 차 요괴의 수행의 깊이를 알 수 없다 하지만 부곡주인 만년시웅이 원영 후기인데 곡주야 화신기급이 아니겠는가!

그렇지 않고는 고계 요수들이 득실거리는 만요곡이 대진에서 오늘 날까지 살아남지도 못했을 것이다. 벌써 정마 십종의 침략을 받아 없어져도 진작 없어졌을 거라는 뜻이었다.

“그래, 노부가 맞다. 웅 선생의 말을 들으니 너와 령롱 선자가 아는 사이이며 함께 진마탑 9층으로 돌아갔다고 하던데……. 9층의 진마기는 다시 봉인이 되었고 너는 무사히 이곳에 나타난 것으로 보아 선자께서는 이미 영계로 돌아갔겠구나.”

늙은 목소리는 영계라는 단어를 내뱉으며 기묘하게 흥분한 것 같기도 했고 두려워하는 것 같기도 했다.

“령롱 선자는 확실히 역성반을 이용해 영계로 돌아갔습니다. 아는 사이십니까?”

한립이 생각 끝에 차분히 답해 주었다. 하지만 소매 속으로 초록색 나무 자와 불솥을 소리 없이 꺼내 들었다.

“영계에서 하잘것없는 존재였던 내가 어찌 요왕의 왕비를 안다 말할 수 있겠느냐. 그런데 령롱 선자가 너를 내보낸 준 것으로 보아 지니고 있는 물건들도 넘겨주었겠지?  진마탑에서 고마를 제압하고 있던 팔령척 령보는 어디에 있느냐?”

그의 서늘한 음성에 한립이 눈썹을 끌어올리며 소매 속으로 나무 자를 더욱 힘껏 쥐었다.

“어찌 노부의 물음에 답하기 어려운가?”

노부의 목소리가 음산해지며 강력한 영기의 압력이 한립을 향해 쇄도했다. 그러나 한립도 원영 후기 수사에 맞먹는 의식을 지녔기에 몸을 미세하게 떨었을 뿐 그 자리에서 꿈쩍도 하지 않았다.

“허! 너는…….”

노부가 이상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한립은 강력한 영기의 압력이 지나간 후 오히려 눈을 번뜩였다.

“다들 차 수사께서 만요곡 깊은 곳에서 폐관 수련을 하며 골짜기 밖으로는 나서지 않는다고들 하더니, 지금도 화신에 불과한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차 수사의 위명에 겨우 이 정도 기세 일리 없지요.”

“그렇다고 해도 네가 어쩔 것이냐?”

“저는 당신과 소극궁 간의 일에 관여할 마음이 없습니다. 그저 이곳의 전송진으로 허령전을 빠져나가려는 것이지요. 제가 소극궁 수사들에게 힘을 보태기를 원치 않으시다면 그냥 보내주십시오!”

한립이 거침없이 원하는 바를 전달했다. 화신기 수사 본인이 아니라면 두려울 것이 없었다.

“노부를 협박하는 소리를 얼마 만에 들은 것인지……. 웅 선생의 말을 들으니 벽사신뢰를 지닌 데다 신통이 적지 않다고?  허나 벽사신뢰는 마기에나 큰 쓸모가 있는데 만요번에 갇힌 네가 어쩔 수 있다는 것이냐. 형체도 없이 죽고 싶지 않다면 령롱 선자가 남긴 물건과 팔령척을 내놓거라. 그럼 내 기분이 좋아져 네 살 길을 열어 줄지도 모르지 않느냐!”

차 요괴가 웃음을 흘리며 위협적으로 말하자 한립은 그저 한숨을 내쉬었다. 보아하니 차 요괴는 그를 이대로 놓아줄 마음이 전혀 없는 듯했다.

한립은 이제 말로 좋게 해결할 수 없다고 생각해 쓸데없는 대화는 이쯤에서 그만두기로 마음먹었다. 그가 한손을 뻗어 붉은 빛을 뿜어내니 머리 위로 무언가 날아올랐다. 바로 이름 없는 불솥이었다.

그가 수결을 맺으며 주술을 읊었다. 그러자 불솥에서 불길이 치솟으며 거대해 지더니 뚜껑이 날아가고 안에서 작은 불까마귀들이 쏟아져 나왔다.

한립의 주위를 빼곡하게 채운 불까마귀들은 천 마리가 넘는 것 같았다. 만요번의 위력을 생각해 불솥의 위력을 전부 드러낸 것이다.

그 뿐만 아니라 원래 그의 어깨에 한가롭게 앉아 있던 태음진화가 변한 불까마귀, 태음화아(太陰火鴉)까지 작은 불까마귀 틈으로 섞여들어 사라졌다.

이때 한립의 주술이 뚝 끊겼고 그의 낮은 일갈에 불까마귀들이 붉은 화염을 내뿜으며 사방팔방으로 몰아쳤다. 요기와 불바다가 접촉하는 순간 굉음이 이어졌지만 놀랍게도 검은 요기들이 점차 뒤로 물러나고 있었다.

“잔재주를 부려 본 존의 만요번을 벗어나려 하느냐!”

차 요괴가 냉소하며 하늘을 뚫고 올라갈 듯 날카롭게 소리쳤다.

뒤로 밀리던 요기들이 고함 소리에 즉시 응결해 검은 기운 덩어리로 모습을 갖추었다. 새까만 요수와 괴조들이 분분히 요기 속에서 나타났다.

울음소리도 달랐고 종류도 달라 큰 것은 몸체가 2, 30장은 되었고 작은 것은 몇 촌 가량인 것도 있었다. 달려드는 검은 요수의 무리에 한립은 흠칫 놀랐다.

검은 요기가 응결해 만들어 내는 것이었기에 정말 무궁무진해 보였다. 한립이 눈살을 찌푸리더니 소리 없이 머리 위의 불솥으로 연달아 법결을 던져 넣었다.

솥이 몸을 떨며 빛을 크게 일으켜 거대한 불덩이로 변했다. 활활 불타오르는 화염들이 솥에서 수없이 뿜어져 나와 불바다에 가세하니 공간 전체의 기온이 올라갔고, 불바다 속에서도 머리통만한 불덩이가 응결되었다.

불덩이는 각각 몸집이 크게 불어난 불까마귀를 품고 도처에서 달려드는 요수 무리를 향해 쇄도했다.

크기가 제각각인 불덩이들이 요수 대군과 부딪쳐 폭음이 미친 듯이 터져 나왔고 천 마리가 넘는 불까마귀들이 날아다니며 요수들과 싸우기 시작했다.

화염과 요기가 섞여 일순 대치 상태를 이루었다.

요수들이 불까마귀에 관통당해 죽으면 요기 속에서 다시 응결해 원래대로 돌아왔고 불까마귀 역시 요수들에 죽어도 화염 속에서 다시 응결해 되돌아왔다.

차 노괴가 콧방귀를 뀌더니 요기가 진해졌고 사방에서 주술 외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한립은 눈을 번뜩이며 표정이 달라졌다. 검은 소용돌이가 있던 자리에서 요기가 맹렬히 요동치더니 커다란 요수의 발톱이 천천히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검게 번뜩이는 요수의 발톱은 서너 장 가량으로 거대했고 음산하게 번뜩이는 것이 더없이 날카로워보였다. 거대한 요수의 발톱이 내려치는 기세만으로 태산이 내리 누르는 듯한 압력이 전해져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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