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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640화 (397/2,000)

# 640

640화. 다시 나타난 요수

안개가 절반쯤 사라졌을 때 한립이 다시 나타났다. 그는 가부좌를 하고 앉아서 인상을 찡그리고 있었는데 병 안에는 이미 한려 상인의 원영은 사라지고 없었다.

“태양정화가 뜻밖에도 그런 곳에 있었다니……. 원영 후기에 이르지 않고서는 찾으러 가기 어렵겠어. 게다가 허령전 입구는 세 개라도 출구는 하나라니, 한려 상인이 우리를 살려 보낼 생각이 없었던 것이 확실하구나!”

드디어 한립이 표정을 풀며 중얼거렸다. 그가 몸을 일으켜 주변의 진법 법기들과 병을 전부 불러들였다. 이어 푸른 빛줄기로 변해 옆쪽 문을 향해 날아갔다.

영기의 빛이 가시고 아주 오래된 봉인 부적이 붙은 문을 보며 의식을 움직였다.

까악!

태음진화가 변한 영물인 불까마귀가 낮게 울부짖더니 돌연 두 날개를 떨쳐 각각의 불덩이들을 쏘아 보냈다.

훅! 훅!

부적은 화염이 닿자마자 활활 타오르며 번뜩였다. 금방 빛이 암담해지는 것이 아주 평범해 보였으나 별안간 부적 표면에 얼음층이 생겨나 스스로를 보호했다. 한립이 피식 웃으며 손끝을 튕겨 금빛들을 쏘아 보냈다.

퍼퍼펑!

표면의 얼음층이 갈라지고 부적들도 재가 되어 사라져버렸다. 한립이 턱을 긁적이다가 한 팔을 휘두르자 강한 바람이 석문을 서서히 열어젖혔다.

그는 주저하지 않고 안으로 들어갔고 인간형 꼭두각시가 그 뒤를 따랐다. 석문을 빠져나가자 백여 장 규모의 뜰이 나타났다.

구불구불한 오솔길을 따라가다 보니 양 옆으로 기괴한 모양의 조각상들이 세워져 있었는데 전부 현빙을 깎아 만든 것들이었다. 한립은 살아 있는 듯 생생한 얼음조각상을 훑으며 유유히 오솔길을 걸어 나갔다.

처음에는 모든 것이 정상이었지만 뜰 중간에 이르자 돌연 양옆의 조각상들이 눈에서 붉은 빛을 번뜩이며 살아났다. 그러나 그는 수십 마리의 얼음 조각 요수들이 덮칠 것을 예상했다는 듯 표정 변화 없이 새빨간 솥을 분출했다.

솥이 웅웅거리며 뚜껑을 날려버리고 그 안에서 열댓 장 길이의 불기둥이 솟아올랐다. 엄청난 열기에 얼음 요수들은 행동이 느려졌고 두려운 기색으로 앞으로 나서기를 꺼려했다.

그러나 한립은 더 재빨리 법결을 던져 불기둥을 흩어버렸다. 백여 개의 주먹만 한 불까마귀로 변한 불꽃들이 구름처럼 얼음 요수들을 공격한 것이다.

순식간에 주변의 온도가 확 치솟았고 뜰 전체가 불바다가 되어 활활 타올랐다. 얼음 요수들이 현빙으로 만들어졌다면 작은 불까마귀들은 오랜 세월 동안 불솥 안에서 제련된 화염의 정화였다.

요수들이 아무리 발버둥 처도 결국 하나 둘 불에 녹아 하나도 남지 않게 되었다.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인 한립이 허공의 불솥을 가리켰다.

텅!

불솥이 울리고 불까마귀들이 동시에 방향을 틀어 얌전히 그 안으로 돌아갔다. 뚜껑이 스스로 날아들어 닫히자 불솥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고요해졌다.

한립 어깨에 앉아 있던 커다란 불까마귀는 자신의 동료까마귀들이 무슨 일을 하던 관심이 없다는 듯 자기 몸단장에 여념이 없었다.

한립은 불솥을 거두고 뜰에서 사라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또 다른 커다란 대청에 도착했는데 초라해 보이는 그 곳에 소형 전송진이 마련되어 있었다. 한립이 당연하다는 듯 걸어가 살피려는데 갑자기 하얀 빛이 번지며 무언가가 전송되어 왔다.

‘뭐지? ’

의아한 기색이 스치기는 했지만 그의 신통에 소극궁 궁주가 나타난다 해도 두려울 것이 없었다. 그는 뒤로 잠시 물러나 조용히 전송진의 빛이 가시기를 기다렸다.

전송진의 규모로 볼 때 기껏해야 한 번에 세 명을 전송할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정말 호리호리한 세 인영이 다급히 전송진을 빠져나왔다.

소극궁 복장을 한 어린 여인들은 전부 축기기 정도의 수행을 지녔고 그 중 나이가 가장 많아 보이는 여인이 축기기 최고봉에 이른 정도였다.

그들은 크게 당황한 기색이었고 그 중 한 명은 어깨에 핏자국이 있는 것으로 보아 한바탕 전투를 치룬 모양새였다.

“누구냐?”

“하, 한 선배님!”

그들은 소극궁 복장을 하지 않은 사내의 등장에 깜짝 놀랐고 그 중 두 명이 바로 비검 형태의 법기를 발동했는데 귀엽게 생긴 여자 아이가 그를 알아보고는 반갑게 소리쳤다.

“……?”

한립은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눈을 가늘게 뜨고 쳐다보니 귀빈루에서 그를 시중들던 화 씨 성의 시녀였다.

“너로구나. 무슨 일이 난 것이냐?”

다른 두 여인은 한 선배가 누구인지는 몰라도 사매와 아는 사이라 한결 마음이 편해진 것 같았다. 물론 한립의 수행을 확인하고는 다시 한 번 크게 놀랐다.

두 여인이 예를 올리기 전에 전송진이 또 하얗게 빛났고 피비린내를 동반한 거대 요수가 나타났다. 말의 얼굴에 두 개의 뿔이 난 요수가 한 손에 녹색 삼지창을 들고 모습을 드러냈다.

“선배님 조심하십시오! 본 궁을 침입한 요수 중 하나인데 저희를 추격해 여기까지 따라온 것입니다.”

세 여인은 서둘러 물러나며 재빨리 설명했다. 요수는 전송진을 빠져나와 흉악한 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고 당장이라도 삼지창을 날릴 모양새였다. 그런데 돌연 요수의 뒤에서 붉은 빛이 번뜩이고 푸른 그림자가 스쳤다.

요수는 참혹한 비명을 질러대며 가슴에 커다란 구멍이 뚫렸고 커다란 몸이 휘청대자 결국 삼지창을 떨어뜨리며 쓰러졌다.

이미 한립이 본 궁 장로들의 중시를 받는 원영기 수사라는 것을 알고 있던 화 씨 여인은 그다지 놀라지 않았다. 본인이 나선 것은 아니었지만 한립이라면 겨우 6, 7급 요수를 죽이는 것은 간단한 일일 것이라 믿었다.

“도와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선배님! 요수들이 벌써 허령전 대전(大殿)으로 쳐들어왔으니 본 궁을 위해 나서 주시기를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수행이 가장 높은 여인이 그를 향해 깊게 예를 올리며 말했다.

“요수들이 대전을 침입했다고?  허령전 금제가 첩첩산중인데 어찌 그리 되었단 말이냐.”

한립이 한 손을 저어 요수의 사체를 전송진 밖으로 밀어내며 물었다.

“그것은 저희도 모르겠으나 순찰을 돌던 중 요수들이 대량으로 침입한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아무래도 바깥의 금제를 건드리지 않고 바로 대전의 대청으로 들어온 것 같습니다.”

“특수한 비술을 이용해 들어왔나 보구나.”

한립은 불가사의한 일에도 크게 놀라지 않았다. 이 세상에 이상한 비술이며 보물이 얼마나 많은데 금제를 거치지 않고 이곳을 침입할 방법이 없으리란 법도 없었다.

한립이 이런 생각을 하는데 전송진이 또 반짝였다.

이번에는 소극궁 여인들도 놀랐으나 한립이 함께 있기에 두 걸음 뒤로 물러나 누가 전송되어 오는지 조용히 지켜보았다.

하얀 빛이 가시고 평범한 얼굴의 삼십 대 여인이 나타났다. 그녀는 주위를 경계하며 고리 같은 것으로 몸을 보호하다 한립과 세 여인들을 보고 흠칫 놀랐다.

“요 사숙님을 뵙습니다.”

세 여인은 그녀를 보더니 희색이 만연해 다가갔다. 그녀는 대충 손을 저어 인사를 받고는 전송진을 빠져나와 한립에게 예를 올렸다.

“한 선배님을 뵙습니다.”

“나를 아느냐?”

“후배는 요만이라 하옵고 순찰 집사를 맡고 있습니다. 일전에 순찰을 돌다 멀리서 선배님을 뵌 일이 있습니다.”

“그랬구나!”

“혹여 본 궁의 다른 장로 분들은 어디계신지 알 수 있을까요?  요수들이 허령전 대전을 침입해 제가 명을 받고 한려 대장로님께 알리러 오는 길입니다.”

“한려 수사는 지금 나서기 어려울 것이다.”

“저도 들어 알고 있습니다. 선배님들과 본 궁의 장로님들이 중요한 일을 도모하고 계신다지요! 하지만 사안이 긴급하여 지금 대장로님과 다른 장로님들이 나서주지 않으신다면 소극궁은 큰 화를 면치 못할 것입니다.”

“요수들이 그리 대단하단 말이더냐?  귀 궁 궁주 역시 원영 후기의 대수사라 들었는데 어찌 그 분이 나서지 않고?”

“후배는 바로 궁주님의 명을 받들어 도움을 청하러 온 것입니다. 제가 떠나 올 때만해도 궁주님께서는 강력한 요수와 싸우시느라 다른 곳을 신경 쓸 여력이 없었습니다.”

“한려 수사와 다른 이들은 현옥동에 들어갔으니 불러낼 방법이 있다면 알아서 하거라. 나는 일단 밖으로 나가 상황을 파악해야겠다.”

한립이 차분히 말하고는 표표히 전송진으로 날아들었다.

“선배님 조심하셔야 합니다. 침입한 요수들의 수가 워낙 많아 전송진 건너편도 안전하지 않습니다.”

감히 말릴 수 없었기에 여인이 조심스레 당부했다. 한립이 고개를 끄덕이고 푸른 법결을 진법에 던져 넣었다. 동시에 하얀 빛이 번지며 전송이 시작되었고 그의 뒤로 은빛이 번뜩이며 푸른 인영이 순식간에 함께 사라졌다.

“저 분은?”

나중에 전송되어 온 요만이 놀라 물었다.

“사질도 잘 모르겠으나, 방금 요수가 나타났을 때 저 선배님이 나서서 처리해 주셨습니다.”

축기기 최고봉의 제자가 머뭇거리다가 본 대로 고했다.

“듣자니 이번에 본 궁에 여러 선배님들을 모셨다고 하던데 그 중 한 분이었나 보구나. 너희 셋은 이곳을 지키다 적이 전송되어 오면 무조건 막거라! 나는 현옥동으로 가서 대장로님께 연락을 취해 보겠다.”

여인은 본 궁 장로 없이 한립이 돌아다니는 것이 조금 의아했지만 바로 자신의 임무를 떠올리고 분부했다.

“존명!”

제자들이 허리 숙여 답하자 그녀가 하얀 빛으로 변해 현옥동으로 사라졌다.

전송진의 반대편에서 한립은 인간형 꼭두각시와 함께 전송진을 빠져 나왔다. 전송의 여파로 인한 어지럼증이 가시기도 전에 꼭두각시가 홀연히 그 자리에서 사라졌고 두 명의 비명소리와 함께 쿵 하고 무언가 바닥에 쓰러졌다.

한립이 소리가 난 방향을 보니 요수의 사체가 피 웅덩이 속에 엎어져 있었고 그 옆에는 결단기 소극궁 제자들로 보이는 사내와 여인이 있었다.

그들은 눈을 부릅뜨고 막 요수의 가슴을 꿰뚫은 은빛 찬란한 팔을 털어내는 인간형 꼭두각시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곳은 전송되어 오기 전과 똑같이 생긴 대청이었다.

한립은 소극궁 제자들은 신경 쓰지 않고 따로 바깥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폭음과 법보가 부딪치는 소리가 울리는 것으로 보아 누군가 격렬한 전투를 벌이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사내와 여인이 한립의 수행을 알아보고 예를 다하기도 전에 그는 대청을 빠져나왔다. 대청 밖에는 또 다른 편전이 이어져 있었는데 열댓 명의 소극궁 제자들이 요수들과 한창 치열하게 싸우는 중이었다.

법보와 요기가 전각 안을 난무했고 무언가 터지고 울부짖는 소리에 귀가 터질 듯했다. 그래도 서로가 비슷비슷하게 맞서는 상황이라 한립은 대충 훑어보고 말았다.

이곳의 수사들과 요수들은 대부분이 축기기나 결단기 수준이었다. 그가 푸른빛으로 변해 인간형 꼭두각시와 같이 편전의 출구로 빠져나가려했다.

허령전을 빠져 나가기 위한 전송진을 이용하려면 어서 허령전 대전을 찾아가야 했다. 그의 속도에 거의 한 호흡 만에 수십 장을 지나 입구 코앞에 도착했다.

그런데 돌연 무언가가 괴성을 지르며 쇄도했다. 전신이 새까만 비늘로 뒤덮인 괴수였는데 입에서 내뿜는 검은 기운이 흉악했다.

한립은 그저 한숨만 나왔다.

요수의 수행은 낮지 않았지만 지능이 낮은지 다른 요수들은 한립의 둔술을 보고 피하기 바쁜데 멍청하게 홀로 달려든 것이다.

하지만 그가 화형기에도 이르지 못한 요수를 진지하게 상대해 줄 이유가 없었다. 그저 손끝을 튕기자 다섯 줄기의 푸른빛이 허공을 갈랐고 참혹한 비명소리와 함께 요수는 조각이 나서 떨어져 내렸다.

다른 요수들은 동급 요수가 단말마에 죽는 것을 보고 기겁해 급히 거리를 벌렸다. 이에 소극궁 제자들의 사기는 높아져갔다.

그러나 한립은 푸른빛을 번뜩이며 순식간에 편전을 빠져 나갔고 전혀 이곳의 전투에 끼어 들 생각이 없어 보였다. 남은 수사들과 요수들은 서로 눈치를 보다가 다시 고함과 폭음이 오가는 치열한 전투를 재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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