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36
636화. 꼭두각시
백몽형과 한려 상인 역시 한립이 다섯 백골들을 불러내는 것을 보고 안색이 급변했다. 그들은 한 번도 이것들을 직접 본적이 없었지만 중년인이 오자동심마라고 소리치는 소리를 듣고 바로 건 노마를 떠올렸다.
한려 상인의 신통에 그것들을 두려워할 이유는 없었지만 술법을 펼치기 위한 과정이 절정에 이르지 않은 상태에서 제대로 된 반격을 가하기 어려웠다.
백몽형의 경우에는 너무 놀라 펼치려던 술법을 멈추고 말았는데 이 정도 공격으로는 한립에게 전혀 타격을 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한립은 여인이 숨을 고를 새도 없이 수결을 맺었다. 그의 신형이 흐릿해지더니 네 개의 똑같은 푸른 그림자가 나와 양쪽으로 갈라졌고 동시에 둘씩 백몽형과 한려 상인에게 쇄도했다.
한립은 그 자리에 서서 그저 소매를 털어 허천정을 회수하고는 삼색의 깃털 부채를 손에 들었다. 그리고 즉시 등 뒤의 풍뢰시를 힘껏 펄럭이자 그가 은색 뇌전과 같이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이미 환술 속에서 풍뢰시의 순간이동 신통을 겪은 백몽형은 기겁했다. 그녀는 방금 사라진 한립은 물론이고, 화신이나 혹은 환술로 만들어낸 푸른 그림자들이 다가오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녀는 새하얀 손끝을 튕겨댔다.
푸푸푸푹!
네 줄기의 빛이 번뜩이며 푸른 그림자를 꿰뚫으며 날아갔다. 정체모를 삼각뿔 모양의 보물들이었다. 이후 여인도 신형이 흐릿해지더니 암석 위의 한려 상인과 나란히 섰다.
수결을 맺어 하얀 화염을 일으키더니 백옥처럼 새하얀 빙산을 만들어내 그녀와 한려 상인을 보호하려 한 것이다. 이후 그녀가 양 손을 교차로 뻗어 은색 실 뭉치들을 분출했다.
허공에 빼곡하게 나타난 실 뭉치들이 원형의 그물망을 형성해 그녀를 휘감았다. 중년인과 마찬 가지로 적을 공격하기 보다는 방어에 주력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그녀는 홀로 한립을 상대하기 보다는 한려 상인의 술법이 완성되면 현옥동의 힘을 빌려 그를 죽일 작정이었다.
네 개의 빛줄기는 속도가 매우 빨라서 순식간에 푸른 그림자 네 개를 공격했는데 그 중 세 개는 단번에 관통을 당했지만 하나는 기이한 궤적을 그리며 반짝이는 빛을 피해 한려 상인에게로 날아갔다.
모습을 드러낸 푸른 그림자는 뜻밖에도 푸른 장삼을 걸친 평범한 중년인이었다.
기운이 전혀 느껴지지 않고 움직임이 빠르고 종잡을 수 없어 삼각뿔의 공격을 빠져나갈 수 있었던 것이다. 바로 한립이 만들어낸 인간형 꼭두각시로 상대에게 마지막 일격을 날릴 참이었다.
비록 한려 상인이 펼치고 있는 비술이 무엇인 줄은 모르겠지만 허공에 응결되기 시작한 하얀 기린 환영은 심상치가 않았다.
지금 한립의 신통에 동굴 속의 수사 전부가 달려들어도 목숨을 잃을 걱정은 없었지만 어떤 예상치 못한 비술이 펼쳐질지 모르는데 그냥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
빙산 속에서 진짜 사람과 똑같이 생긴 인간형 꼭두각시를 발견한 백몽형은 화들짝 놀랐다. 낯선 수사가 도무지 언제 나타난 것인지 알 수 없어 서둘러 주위의 빛줄기 네 개를 움직였다.
동시에 반짝이는 빛줄기들이 방향을 틀어 전부 인간형 꼭두각시의 등 뒤를 노리고 달려들었다. 하지만 인간형 꼭두각시는 반짝이는 삼각뿔들을 개의치 않고 한 손을 뒤집어 붉은색의 궁을 꺼내들어 빙산을 향해 화살을 날렸다.
쿠르릉!
무수히 많은 불화살들이 빽빽하게 하늘을 수놓으니 뜨거운 열기에 주변이 자욱해졌다. 최상급 고보에 맞먹는 법보 뇌화궁이 그 위력을 드러낸 것이다.
빙산 속의 백몽형은 눈을 가늘게 뜨고 지금이 기회라고 생각했다. 등 뒤의 보물을 이용해 낯선 수사를 죽이면 그가 날린 공격도 자연히 사라질 것이 아닌가!
그녀는 방금 뇌둔술을 펼쳐 사라진 한립도 잊지 않고 주위에 의식을 퍼트려 서른 장 내를 감시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가 놀랄 일이 또 벌어졌다.
네 개의 반짝이는 빛줄기가 낯선 수사의 등을 찔러 들어갔는데 돌연 다섯 가지 색깔의 보호막이 펼쳐지며 폭음이 들려온 것이다.
오색 보호막 속의 수사는 일순 멈칫했을 뿐 전혀 몸을 상하지 않았다. 삼각뿔 모양의 법보가 근본적으로 상대의 보호막을 전혀 뚫지 못했기 때문이다.
백몽형이 놀라고 있을 때 하늘을 뒤덮은 불화살들이 빙산에 떨어져 내렸다.
쿠콰콰쾅쾅!
무수히 많은 화염이 빙산과 충돌해 수증기가 요동을 쳤고 주변은 불바다가 되었다. 빙산을 보호막 삼아 숨어 있는 여인이 눈을 부릅떴다.
아무리 바깥이 불바다가 되더라도 그녀의 한염으로 만들어낸 보호막은 어쩌지 못할 거라는 자신이 있었다. 예상대로 불길이 활활 타오르며 밀어 붙이는데도 빙산의 표면에 하얀 빛이 일어 깨지지 않았다.
백몽형이 만족스런 표정을 지으려는 찰나 뒤쪽에서 천둥소리가 들리며 은색 뇌전이 번뜩였다. 전신을 보라색 화염으로 둘러싼 누군가가 거침없이 빙산으로 뛰어든 것이다.
여인의 뒤쪽에서 나타난 이는 뇌둔술을 사용한 한립이었다. 인간형 꼭두각시로 백몽형의 주의를 끈 다음 자신이 직접 움직인 것이다.
주변 경계를 철저히 하던 백몽형이 한립이 나타나자마자 뒤도 돌아보지 않고 허공을 쥐었다. 반짝이는 수정 같은 거대 손이 빙산 밖에 나타나 그를 낚아채려 했다.
그런데 한립이 거대 손을 본체만체하고 소매를 털어 금빛 검을 날려 보냈다. 금색 빛줄기가 번뜩이며 거대 손이 두 쪽으로 갈라졌다.
온몸의 보라색 불길을 몇 배로 뿜어낸 그가 빙산 속으로 스며들었다. 그리고 두세 번 빛이 번뜩이는가 싶더니 이미 빙산 방어막을 통과해 백몽형과 한려 상인 앞에 도착해 있었다.
그가 지난 자리에는 한 장 크기의 구멍이 크게 뚫려 있었다. 아직 정련도 하지 않은 자라극화의 위력이 백몽형의 한염보다 훨씬 위력이 뛰어났던 것이다.
이제 그의 눈앞에 원형의 은색 그물망이 나타났다.
“잡아라!”
고개를 돌려 상황을 파악한 백몽형이 화들짝 놀라 날카롭게 소리 질렀다. 그물망에서 은빛이 크게 번지며 날아드는 데도 한립은 피식 냉소했다.
손에 들고 있던 깃털 부채가 세 가지 빛을 터트리며 한 척 길이로 커지자 은색 빛덩이를 향해 살포시 부채질을 했다.
화륵!
삼염선에서 삼색의 화염이 뿜어져 나와 금색, 은색, 붉은색의 주술들이 은색 구슬과 충돌해 복잡하게 얽혀 들었다.
그러나 은색 구슬도 이보였던지 뜻밖에도 잠시 삼염선의 공격을 막아냈다. 한립이 살짝 미간을 좁혔다가 순식간에 원래대로 돌아왔다.
이번 일격은 법력을 아낀 탓에 삼염선의 1성 위력밖에 내지 못했으니 놀라운 결과는 아니었다. 그가 다시 한 손을 뒤집어 미리 준비해둔 옥병을 입에 넣고 기울였다.
만년영액 한 방울을 삼키자 더는 법력을 쓰는데 인색하게 굴 이유가 없었다. 대량의 법력이 흘러들자 삼염선이 몸을 떨더니 듣기 좋은 소리를 냈다.
이어서 세 가지 색의 불새가 불기둥을 따라 유유히 은색 빛구슬을 덮쳐다.
그리고 한립은 등 뒤의 풍뢰시를 발동해 삼색 불새가 폭발함과 동시에 천둥소리 속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서른 장 바깥에서 그가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고개를 들어 보니 빙산은 삼색의 빛에 빠르게 녹기 시작했고 그 안의 은색 구슬은 폭발하는 순간 벌써 사라진지 오래였다.
그 모습에도 한립은 희색을 드러내지 않고 상황을 주시했다.
은색 구슬이 사라지고 몇 장 길이의 남색 얼음 교룡이 그 자리에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날카로운 이빨과 발톱을 지닌 남색 교룡은 아직 꼬리가 작은 솥 안에 들어 있어 솥이 방출한 영물이라는 것을 알려 주었다.
한려 상인 앞에 표표히 떠있는 남색 솥은 건람정이었다.
얼음 교룡은 백몽형과 한려 상인을 휘감아 보호했다. 비록 삼색 기운에 남색 교룡의 몸도 태반이 녹아 내렸지만 삼색기운도 위력을 잃고 사라져갔다.
놀랍게도 삼염선의 위력에도 다치지 않고 살아남은 것이다.
“이게 바로 그 불 속성의 깃털부채입니까? 통천령보의 모조품다운 위력입니다. 사실 공격력으로 따지만 건람정 이상의 보물이라 할 만 하겠군요!”
줄곧 수결을 맺느라 여념이 없던 한려 상인이 담담히 중얼거리더니 남색 교룡을 향해 입에서 남색 화염을 뿜어냈다.
남색 화염이 교룡의 몸을 타고 흐르니 사라졌던 육체가 즉시 원래대로 회복되어 청록색 눈을 흉악하게 번뜩였다. 한립이 얼음 교룡을 보며 입 꼬리를 올렸는데 냉소 같기도 했고 비웃음 같기도 했다.
한려 상인이 불길한 예감에 흠칫 놀라 대비하기도 전에 홀연히 허공에서 푸른 그림자가 달려들었다. 은빛으로 번뜩이는 한 손은 날카로운 칼날처럼 한려 상인의 등을 파고들었고 다른 손은 은색 방패를 방출해 백몽형을 은색 장막으로 휘감았다.
인간형 꼭두각시가 하늘을 뒤덮은 불화살과 한립의 공격을 방패막이 삼아 조용히 접근한 것이다.
백몽형은 그저 눈앞이 은빛으로 반짝인다고 느낀 후 은빛 장막에 갇혀 버렸다. 대경실색한 그녀가 재빨리 수결을 맺자 몸에서 하얀 한염이 흘러나와 무수히 많은 주먹 크기의 구슬로 변해 은색 장막을 공격해댔다.
쿠쾅! 콰콰쾅!
은색 장막 안이 시끄러워졌다. 하지만 은색 장막은 굉장히 두꺼웠고 표면이 유리처럼 반지르르해 하얀 불구슬의 공격을 튕겨버렸다.
화신기의 경지에 이른 한려 상인은 백몽형보다 반응이 훨씬 빨랐다. 인간형 꼭두각시가 나타난 순간 이상을 감지하고 금색 갑옷을 방출한 것이다.
금색 갑옷을 두르자마자 인간형 꼭두각시의 전광석화 같은 일격이 날아들었다. 하지만 인간형 꼭두각시도 이미 전력을 끌어올린 후였기 때문에 한려 상인이 갑옷을 불러내고 기운을 북돋는 법결을 펼치기에는 늦은 감이 있었다.
그 결과 퍽! 하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은빛 찬란한 손바닥이 한려 상인의 어깨를 내려쳤다.
은빛과 금빛이 미친 듯이 번뜩였다.
꼭두각시는 강은과 같은 진귀한 재료들로 만들어져 위력은 일반 비검 법보와 비교해도 떨어지지 않았으나 금색 갑옷 표면에 잔잔한 물결이 일더니 손바닥을 튕겨냈다.
이에 한려 상인은 한 시름 놓았다. 술법을 완성하지 못했지만 이미 현옥동의 현옥한기 절반가량을 움직여 상대를 죽일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려 상인이 수결을 맺으려 손을 움직인 순간, 인간형 꼭두각시가 다시 움직이더니 두 팔이 예리한 은색 갈고리로 변해 두 어깨를 잡아챘다.
금색 갑옷은 여전히 뚫리지 않았지만 한려 상인은 꼼짝할 수 없게 되었다. 동시에 그의 머리 위에서 검은 칼날이 번뜩이며 나타나 매우 빠른 속도로 정수리를 향해 떨어져 내렸다.
인간형 꼭두각시에 붙들려 있는 한려 상인으로서는 기겁할 일이었다. 그는 체내의 법력을 운용해 술법을 시전하는 것도 내팽겨 치고 서둘러 입에서 핏빛을 토해냈다.
한려 상인의 정혈로 만들어낸 핏빛은 어마어마한 영력을 품고 있었기에 마수찬 비도조차 잠시 그것과 부딪쳐 멈추었다. 바로 그때 한려 상인은 보호하던 갑옷을 빛으로 흩어버려 자유롭게 풀려났다.
이제 남색 얼음 교룡이 그의 조종에 따라 한립을 향해 남색 빛기둥을 뿜어냈다. 한려 상인은 그가 한립의 공격을 잠시만 막아낼 수 있다면 현옥패를 이용해 동굴 속의 한기를 모아 전세를 역전할 수 있다고 믿고 있었다.
그런데 그때, 한 척 크기의 은색 연꽃이 한려 상인 발밑에서 나타나 은빛을 분출했고 염불 소리가 유유히 울려 퍼졌다.
“……!”
한려 상인은 마치 천만 근의 압력이 쏟아지듯 몸을 움직일 수 없었고 체내의 법력도 대부분 통제를 잃었다. 당연히 새까만 칼날을 막고 있던 핏빛의 기세도 크게 꺾였다.
이에 마수찬 비도가 번뜩이더니 핏빛을 내뿜던 화살을 잘라내고 거침없이 내리 꽂혔다.
잠시 후, 한려 상인의 비명이 터져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