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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633화 (390/2,000)
  • # 633

    633화. 갈등

    “……괜찮군! 천지원기의 반서를 당해 원기를 조금 상했을 뿐이니.”

    모두의 예상을 깨고 연꽃 속에서 몸을 떨던 한려 상인이 차분히 몸을 일으키며 다시 가부좌를 하고 앉았다.

    연꽃에 다가가 그 말을 들은 백몽형과 중년인이 한 시름을 놓으며 무어라 물어 보려는데, 한려 상인이 급히 한 마디를 남기고는 한 손을 뒤집었다. 은색 칼날들이 나타나 16개의 은빛으로 변해 날아간 것이다.

    은빛들은 그의 손을 떠나자마자 허공을 선회해 한려 상인을 향해 날아 들었다. 이어 한려 상인의 낮은 고함 소리와 함께 16개의 칼날들이 동시에 그의 몸속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머리를 제외한 몸 곳곳에 은색 칼날들이 손잡이만 남기고 깊숙이 박혔다.

    그 모습에 한립은 눈을 떼지 못했다. 그의 눈에 한려 상인 몸 주변으로 남색과 하얀색의 복잡한 화염들이 어린 것이 들어왔다.

    “수사들께서는 즉시 자신의 한염을 거두어 주시지요!”

    한려 상인이 눈을 감고 진중하게 소리쳤다.

    노승은 마치 기다렸다는 듯 한려 상인을 항해 손을 저었고 녹색 한염이 별안간 둥글게 뭉쳐 그를 향해 돌아왔다. 한립 등 다른 수사들도 기민하게 술법을 시전에 자신의 한염들을 회수하기 시작했다.

    잠시 후 한려 상인의 몸에는 남색 건람빙염만이 남게 되었다. 그래도 소극궁 대장로의 얼굴은 편해지지 않았고 곧 바로 수결을 맺으며 이상한 주술을 읊어대자 전신의 은색 칼날들이 몸을 떨었다.

    웅!

    하얀 한기가 칼을 타고 흘러나와 순식간에 칼이 수정처럼 투명하게 반짝였다. 그리고 한려 상인의 목소리도 잦아들었다.

    펑 퍼퍼펑!

    은백색 빛이 칼을 타고 튀어 나와 얼음 조각으로 산산이 흩어졌다. 이런 일이 반복되어 은백색 한기는 계속 칼을 타고 흘러나와 터져 나갔는데 그제야 한립은 무언가를 깨닫고 입 꼬리를 슬쩍 움직였다.

    소극궁 대장로는 법기의 힘을 빌려 흡수한 현옥한기를 강제로 밀어내는 중이었다.

    보아하니 화신기에 이르지 못한 것이 확실했다. 화신기 수행을 지녔다면 현옥한기는 원기를 보충하는데 최상의 처방이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극심한 고통일 수밖에 없다.

    길게 한숨을 내쉰 한려 상인이 드디어 두 눈을 떴다. 이제 그의 눈은 다시 원래대로 돌아와 있었지만 젊은 외양은 유지한 채였다.

    고개를 쳐든 한려 상인의 얼굴에 씁쓸함이 맴돌았다.

    “한려 사형! 괜찮으신 겁니까?”

    중년인이 허공에서 재빨리 물었다.

    “괜찮네. 잠시 쉬면 될 것이야.”

    한려 상인은 쓴웃음을 지우며 몸을 일으켰고 그가 앉아 있던 빛의 연꽃이 붕괴해 빛으로 사라졌다. 그가 천천히 아래쪽 암석으로 내려섰다.

    “정말 안타깝게 되었습니다. 한려 수사의 의식이 조금만 강했다면 성공할 수도 있었을 것을요. 그래도 어찌 되었든, 비술이 원영 후기 경지를 뚫고 화신기에 이르는데 도움이 된다는 것은 증명되었습니다.”

    노부인이 한려 상인의 비술을 칭찬했다.

    “용 부인의 말씀이 맞지만 오늘이 아니고서야 극한의 화염을 지닌 수사들을 이렇게 많이 모을 수 있을까요?”

    “그도 그러네요. 한염을 지닌 동급의 수사들을 모으는 것도 큰일이지만 현옥동처럼 한기가 가득한 곳을 찾기도 어렵겠지요. 하지만 한려 수사의 비술에 참고할 점이 많은 것은 사실입니다.”

    노승이 미소 지으며 말했다. 그 말에 한려 상인은 그저 입 꼬리를 꿈틀하고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이어 그가 자신의 손을 들어 탱탱하게 변한 피부를 살폈는데 소극궁 대장로의 눈빛이 흔들렸다.

    “한려 수사께서는 술법을 마치셨으면 이제 진법의 운용도 멈춰주시지요. 저희도 이제 건물로 돌아가 원기를 회복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한립이 아직도 주위를 가로막은 보호막을 둘러보며 미간을 좁혔다.

    “급할 것이 있나요?  한 가지 더 처리할 일이 남아 있습니다.”

    한려 상인은 한립의 말에 고개도 들지 않고 덤덤히 답했다. 푸른 장삼의 중년인과 백몽요가 어느새 한려 상인의 뒤로 서더니 말없이 그의 의견을 지지했다.

    “사 수사, 그게 무슨 말입니까?”

    상황을 지켜보던 노승이 이상한 낌새에 안색을 굽혔다. 노부인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역시 경계심을 드러냈다.

    “제가 악의가 있어 그런 것은 아니니 다들 오해하지 마십시오. 그저 한 형에게 본 궁의 물건을 돌려받을 것이 있어 그럽니다.”

    한려 상인이 드디어 자신의 팔을 내려놓고 한립을 바라보았다.

    우웅!

    그의 몸에 박힌 16개의 은색 칼날이 동시에 공명하며 빠져 나왔다.

    “돌려받을 물건이요?”

    노승과 노부인이 동시에 한립 바라보며 의아해했다.

    “농담이 지나치십니다. 소극궁에 처음 방문한 제가 언제 이곳의 물건을 가져갔단 말입니까?”

    한립이 천천히 몸을 일으켜 무표정하게 반문했다. 그 말에 한려 상인의 표정이 묘해졌고 그가 아무 말 없이 소매 속에서 푸른 솥을 꺼냈다.

    “건람정!”

    노승이 솥을 알아보고 소리를 높였다. 그리고 서둘러 자신의 소매를 더듬어 똑같이 생긴 솥을 꺼내 들었다. 두 개의 솥을 번갈아 보던 그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마구 대사께서는 그리 놀라실 것 없습니다. 전부 건람정이 맞으니까요. 그저 본래 건람정은 한 쌍으로 이루어져 있을 뿐입니다. 이것들은 통천령보의 모조품인데 한립 수사께서 지니고 있는 허천정이라는 통천령보를 모방한 보물이지요. 한 수사 보물을 지니고 계신 것이 맞습니까?”

    “통천령보! 한 수사가 정말 통천령보를 갖고 있단 말입니까?”

    이번에는 노부인이 놀라 소리치더니 믿을 수 없다는 듯 한립을 바라보았다. 분명 탐욕이 가득 담긴 눈길이었다.

    그리고 회색 장포의 노승 역시 화들짝 놀라 한립을 다시 보았다. 이전에 들은 바로는 천남에서 온 수사라고 했는데 그런 시골구석의 수도자가 통천령보를 지니고 있다는 것은 기함할 만한 일이었다.

    “오, 허천정이라……. 제가 답을 드리기 전에 물을 것이 있습니다. 어째서 제게 허천정이 있을 거라 확신하십니까?  그리고 귀 궁의 허령전과 이 보물이 어떤 관계가 있는지 답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한립은 부정하지 않고 웃는 듯 마는 듯한 얼굴을 했다.

    “과연 허천정을 지니고 있었군요! 수사가 수련한 자라극화란 한염은 허천정이 지니고 있는 건람빙염으로 만들어낸 것이겠지요?  천하에 본 궁의 건람정을 제외하고 건람빙염을 지니고 있을 것이 허천정 밖에 더 있겠습니까?”

    이미 한립이 허천정을 지니고 있을 것이라 확신하던 그였지만 상대의 대답에 가슴이 뜨거워지는 것은 막을 수 없었다.

    “그 말씀은 저를 처음 만난 날 이미 알아 차리셨다는 뜻이군요.”

    “그렇습니다. 하지만 한 형이 이렇게 선뜻 인정할 줄은 몰랐습니다. 허천정은 본궁을 창립하신 조사 빙백 선자의 통천령보로 보물을 지니고 유람을 나가셨다 백여 년 만에 돌아오신 후로는 행적이 묘연하게 되었습니다. 그 후 허령전을 건립하게 되었지요. 당신이 어찌 그것을 얻었는지는 모르겠으나 본궁의 보물을 반드시 되찾아 와야겠습니다.”

    한려 상인의 말에 한립도 그간의 의문이 대강 풀렸는지 웃음을 흘리고는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그러나 한려 상인은 그가 태평하게 나오자 오히려 눈을 가늘게 뜨고 음산한 기색을 드러냈다.

    “요이에게 들으니 한 형의 신통이 대단하다고 하던데요. 거의 원영 후기 수사 맞먹으며 은시야차와 같은 요물도 어쩌지 못할 실력자라 알고 있습니다. 다른 곳에서 수사를 마주쳤다면 본 궁도 어찌할 방법이 없겠지만 이미 진법에 갇힌 채 또 폐쇄된 현옥동에 들어와 있다는 것을 잊은 것은 아니시겠지요?  게다가 한 형의 법력도 기껏해야 삼성 정도 남았을 텐데 수사의 승산이 얼마나 될 것 같습니까?”

    한려 상인이 눈을 번뜩였고 중년인과 백몽형 역시 한립을 주시하며 전투에 대비했다.

    “수사를 도와주려다가 이용만 당하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소극궁은 원래 이리 배은망덕한 곳입니까?”

    “저는 이미 약속한 모든 것을 드렸습니다. 한염을 정련할 수 있는 법결을 알려드렸고, 노부가 수백 년 간 연구해낸 경지를 뛰어 넘을 비술 역시 넘겨 드렸지요. 게다가 한 수사께서 흔쾌히 이 일에 참여 하겠다 한 것은 직접 비술이 효과가 있는지 확인하기 위함이 아닌지요?  이미 은혜는 충분히 갚았다고 생각합니다만.”

    한려 상인 역시 냉소하며 맞받아쳤다.

    “그런가요?  또 그 말을 들으니 그런 것 같기도 합니다. 허나 지금 진법에 갇힌 수사가 저 혼자만은 아니란 것을 염두에 두고 계셔야 할 겁니다. 설마 통천령보와 같은 엄청난 비밀을 지키기 위해 전부 살인멸구 할 속셈은 아니시겠지요?”

    한립이 힐끗 노승과 노부인 쪽을 보았다. 그 말에 두 수사는 안색이 어두워졌고 특히 작은 솥을 든 노승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이간질이라, 저와 두 수사는 한두 해 알고 지낸 사이가 아닙니다.”

    “……확실히 이 일은 사 수사와 소극궁의 일이니 이 늙은이는 간섭할 마음이 없습니다. 알아서 하시지요.”

    노부인이 먼저 냉랭히 한립을 쏘아 보고는 진법의 구석으로 몸을 날렸다. 한립의 눈썹 끝이 미세하게 올라갔다.

    “한 수사께서는 한려 형을 도와주려 오신 것이니 좋게 해결하시지요. 이렇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한 수사께서는 그 허천정이라는 보물을 돌려주시고 귀 궁에서는 충분히 보상하는 겁니다. 우리 정도 수행에 이르렀으면 서로 사이좋게 지내는 것이 두루두루 좋다는 것을 아시지 않습니까?”

    뜻밖에도 노승은 잠시 고민하다 둘 사이를 조정하려 들었다.

    “지금 본 궁도 상황이 좋지 않아 노부도 한 형과 원한을 만들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솥만 내주신다면 대량의 영석으로 보상하지요! 앞으로 한 형께서 영석 걱정은 안할 만큼 드릴 자신이 있습니다.”

    한려 상인도 그 말에 안색을 풀고 제안했다. 그러나 한립은 그저 낮게 웃으며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명백한 무시에 한려 상인의 얼굴이 굳으며 어깨를 부르르 떨었는데 전신에 남색 화염이 치솟아 거대한 불덩이로 변했다. 푸른 장삼의 중년인과 백몽형도 수결을 맺어 각각 열댓 개의 반짝이는 비검과 거무튀튀한 창 두 자루를 발동했다.

    그 모습을 본 승려가 어쩔 수 없다는 듯 불호(佛號)를 외더니 노부인처럼 뒤로 물러나려했다. 그런데 물러나던 그가 갑자기 방향을 틀어 한립에게 날아오는 것이 아닌가!

    한립이 흠칫 놀라 상대의 의도를 짐작하지 못했는데 돌연 전음이 들려왔다.

    “한 형, 이 건람정을 쓰시지요! 빈승도 수사와 함께 하겠습니다.”

    노승이 돌연 손을 뻗어 한립에게 남색 빛을 날렸다. 바로 건람정이었다.

    “마구, 뭐하는 짓입니까?”

    한려 상인이 대노해 일갈했다. 그는 노승이 어째서 저리 나오는지 몰랐지만 한립 입장에서는 건람정을 준다는데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그가 소매를 털어 푸른 기운으로 솥을 끌어당겼다.

    한려 상인이 그것을 보고 급히 수결을 맺어 솥을 가리켰다.

    펑!

    법결을 맞은 작은 솥이 허공에 멈추더니 뚜껑 틈으로 건람빙염이 활활 타올랐고 한려 상인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과연 무슨 짓을 해놓았던 것이구려!”

    회색 장포 노승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허공을 쥐었고 동시에 초록색 거대 손이 나타나 솥을 잡아채려 했다.

    “터져라.”

    쿠콰쾅!

    노한 한려 상인이 입에서 무언가를 뱉어내자 녹색 거대 손이 왜곡되며 금빛 고대 주술이 줄줄 흐르더니 금빛이 폭발하며 거대 손과 함께 사라졌다.

    “호연장가결(浩然長歌決)! 유가의 공법을 다 익히고 있었다니!”

    노승이 놀라 중얼거렸지만 한려 상인은 신경 쓰지 않고 다시 손을 뻗어 솥을 끌어 들이려 했다. 그 순간 푸른 실 뭉치가 인근에서 나타나 솥을 휘감았고 반응할 틈도 주지 않고 끌어갔다.

    “터져라!”

    놀란 한려 상인이 다시 수결을 맺으며 입으로 아까와 똑같은 소리를 내뱉었다.

    쿠콰콰쾅!

    금빛 주술들이 푸른 실을 따라 폭발하며 굉음을 냈지만 푸른 실은 꿈쩍도 하지 않고 작은 솥을 한립의 수중으로 끌어당겼다.

    “허천정!”

    한려 상인이 허탈하게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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